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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솔회 나라사랑 원고]
공병우 박사님, 천 년 은행나무가 되소서
이 봉 원 (본회 이사, 작가)
(1)
한글 문화의 독립꾼이자 영원한 스승인 공병우 박사님께서 우리들 곁을 떠나신 지 어느덧 열한 해하고도 몇 달이 더 지났다. 지금도 박사님을 생각하면 소년처럼 순진하게 웃으시는 모습이 그리움 속에 맨 먼저 떠오른다.
내가 두 해 전에 펴낸 장편동화에서 우리 겨레 위인 100명을 선정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박사님을 현대사의 한 인물로 소개한 적이 있다. 그것은 박사님께서 평생을 통해 온몸으로 보여 주신 많은 교훈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 유언에 담긴 후손에 대한 가없는 사랑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기도 했다.
박사님을 처음 뵌 때는 내가 대학 2학년생이 된 1967년 3월 초순이다. 그 몇 달 전에, 문교 당국은 과학용어통일안을 마련했다고 발표했는데, 그에 따르면, 우리가 초등학교 때부터 배우고 익혀 온 ‘흰피톨’을 “백혈구”로, ‘잎파랑이’를 “엽록소”로 바꾼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 이것을 매우 잘못된 일이란 생각을 했고, 그 해 연말 한글학회도 찾아가고, 한글학자로 이름을 내고 계신 한갑수 선생님, 모교 교수이신 허웅 선생님 들을 찾아 뵈면서, 대학생들이 앞장 서서 우리말글 사랑 운동을 펴야겠다는 뜻을 말씀 드리고 격려를 받았다. 그리고 겨울방학을 시골 집에서 보내고 해가 바뀌어 다시 상경한 나는 (1967년) 3월 16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한 강의실에서 ‘국어운동 횃불 점화식’을 여는 것으로 대학생들이 중심이 된 국어운동학생회를 창립하고 전국적인 대내외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뒤 우리가 만든 국어운동 학생 선언문 전문을 서울대학교 학생 신문인 ‘대학신문’에 싣고자 했는데, 광고비 3,000원이 없어, 박사님께 도움을 청하려고 처음으로 찾아 뵈었다. 그때 박사님을 나한테 소개해 주신 분은 아마도 한글학회에서 뵌 문제안 선생님(현재 한말글문화협회 회장)이었던 걸로 기억이 난다.
서울 종로 1가에 있던 박사님의 집무실은 길 건너 서린동에 있는 공안과병원 건물과는 따로 있었다. 박사님은 온갖 메모지와 자료 따위가 넘치는 방 안에 혼자 계셨다. 일인용 간이침대와 의자가 하나씩 놓여 있는 방엔 내가 앉을 빈 자리가 없었다. 침대에 누워서도 연구를 하시기 위해 천장에까지 메모지 같은 것 들을 붙여 놓으셨으니, 첫눈에 나는 기가 꺾이고 고개가 숙여질 수밖에 없었다.
박사님은 내 아버지와 나이가 같으신 분이고, 모습에서도 비슷한 데가 있어서, 첫 인상이 크게 낯설지가 않았다. 박사님은 내가 앉을 자리를 대충 만드시고는, 내가 가져간 선언문 원고를 찬찬히 읽어 보시고, 선언문이 참 잘 됐다고 칭찬하시며, 누가 썼느냐고 물으셨다. 그래서 제가 썼다고 말씀 드리고 이어서 요즘 대학생들이 한글전용의 참뜻에 대한 이해도 적고 관심도 없는 것 같다고 말씀 드리자, 박사님께선 뜻밖이라고 하시며 크게 개탄을 하셨다. 그리고 박사님께선 쾌히 5,000원 짜리 자기앞수표를 한 장 끊어 주시면서, 앞으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격려해 주셨다. 그리고 이때부터 나는 수시로 박사님의 도움을 받았고, 특히 인쇄물 제작 지원을 많이 받았다. 국어운동학생회가 창립할 때 그리고 그 뒤 활동을 펼쳐 나가는 데서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가장 많이 해 주신 분이 공 박사님이었단 사실을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밝힌다.
박사님은 한글타자기를 만드시고 그것을 보급하는 일 밖에도, 일상생활에서 한글전용을 해야 하는 까닭에 대한 글들을 수없이 발표하고 유인물로 만들어 배포하셨는데, 그때 박사님께서 가장 강조하고 주장하셨던 문장 몇 가지를 옮겨 본다.
“한국사람은 위대한 활자와 한글을 발명하였지만, 이 민족이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문화가 뒤쳐지고 정치로 문화로 외국의 침략을 받아 왔다. 서양사람들은 활자를 기계화해서 타자기와 라이노타이프를 만들어 글자생활에 고도의 속도를 나타냈다. 즉 활자를 다시 또 기계화했다.”
“한국사람들은 옛날부터 글자를 예쁘게 쓰는 연습을 했지만, 서양사람들은 글자를 빨리 쓰는 연습을 해 왔다.”
“한국사람들은 어려운 한문자를 좋은 글자로 알고, 편지 한 장을 써도 어렵게 쓰고, 책도 어렵게 쓰고, 남이 모르는 글자를 많이 써야 유식한 사람으로 대우받았지만, 서양사람들은 배우기 쉽고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자로 편지와 책을 쉽게 썼고, 어려운 글자를 공부하는 대신에 어려운 과학을 더 공부했다.”
“붓으로 글을 쓰는 것은 말을 타고 가는 것이고, 타자기로 글을 쓰는 것은 자동차를 타고 가는 것이다.”
박사님의 실용주의 생활 습관에 대해서도 생전에 박사님을 뵌 분들은 물론이고 소문으로도 많은 분들이 전해 들었을 줄 안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 한두 가지를 소개하면, 첫째로 10분 이상 이발소 의자에 앉아 계시는 법이 없고, 방과 방 사이 또는 마루와 연결된 곳에 있는 문지방들을 모두 없애 청소하기에 편하게 하셨다. 큰돈을 수표로 지불하실 때도, 서명을 아주 간단히 ‘BW’라고만 적으시는 걸 곁에서 보고, 내가 “서명이 너무 간단해 남이 위조라도 하면 어떡해요?” 하고 여쭙자, 박사님께선 “난 다 아는 수가 있네.” 하시곤 껄껄 웃으셨다.
선생님의 인간성을 엿볼 수 있는 얘기가 하나 있다. 내가 학생이었을 때 어느 날 박사님께서 날 부르시더니, 한글타자기 한 대를 내놓으시며, 심부름을 해 달라고 하셨다. ‘한글전용은 지상명령이다.’라는 제목으로 곧잘 강연을 하시고, 한자 간판을 내건 식당에선 절대로 식사를 하지 않으시는 것으로 유명했던 영문학자 정인섭 박사한테 전해 주라는 것. 그러시면서 보내는 이가 누구란 걸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그렇게 심부름을 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80년대 초, 대한성공회 구내를 지나가던 중 우연히 하얀 모시옷에 중절모를 쓰신 깨끗한 노신사를 만났는데, 바로 정인섭 박사님이셨다. 그분께서 날 알아보시곤 다짜고짜로 물으셨다. “이군, 그때 그 타자기, 누가 보낸건가?” 그래서 실은 공 박사님께서 보내신 거라고 말씀 드렸더니, “그런 줄 알았네.” 하시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정인섭 박사님은 그 이듬해인가 돌아가셨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온 뒤로는 박사님을 자주 뵙지 못했다. 그러다가 박사님을 다시 간접으로 뵈온 건, 1980년 서울 프레스센터 전시실에서였다. 그 무렵 박사님은 미국에 망명(?) 중이셨는데, 거기서 사진에 취미를 붙이시고 사진찍기를 해 오시다가 잘 된 작품들을 가지고 일시 귀국하셔서 공병우사진전을 여셨다. 과학자가 예술가로 변신하신 것이다.
그리고 몇 해 뒤에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아주 귀국하셔서, 서울 비원 근처에 세운 한글문화원에 상주하셨다. 그러고는 다시 한말글운동에 예전처럼 진력하셨다. 그때 박사님을 찾아 뵈었더니 나를 얼른 알아보질 못하셨다. 서운함도 있었지만, 아흔이 가까운 노인이신 데다가 천재는 기억력이 좋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과거는 내 가슴에 묻고, 새로이 지도를 받는 마음으로 세상을 떠나시기 전까지 한동안 이따금 뵐 수가 있었다.
그때 한 말씀 여쭌 게 생각난다. “박사님께선 특별히 건강 관리를 하시나요?” 그러자, 박사님께선, “난 내 열 손가락으로 지금도 날마다 타자기 자판을 두드리기 때문에 지압 효과를 톡톡히 본다네. 그게 내 건강 비결이지.” 하고 말씀하셨다.
1995년 3월 7일, 박사님께서는 ‘내 육신을 위한 무덤을 만들지 말고, 내 육신에서 쓸 만한 장기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나머지는 의학도들이 공부하도록 병원에 보내라.’ 하는 유언을 남기시고 영면하셨을 때, 나는 추모글을 통해서 고인의 뜻을 다음과 같이 기린 적이 있다. ‘공병우 박사님은 이 시대 마지막 문화 독립운동가요, 귀여운 고집쟁이, 거인’이셨다.’고.
(2)
<아래 글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사라진 개구리소년들’을 글감으로 해서 필자가 지은 장편동화 “우암산 아이들 (도리출판사)”의 마지막 장인 “장하늘 은행나무 동산”에서 일부분 옮긴 것이다. 글 속에 공병우 박사님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그 분이 이 땅에 남긴 정신을 동화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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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셋째 일요일, 십 년 동안 준비하고 가꾼 장하늘 은행나무 공원이 마침내 문을 열고 일반에 처음 공개되는 날이다.
(중략)
은행나무 동산에는, 널찍널찍 자리를 잡은 이십 년생 은행나무 백 그루가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무성한 잎사귀들은 이미 노랗게 단풍이 들기 시작했고, 아랫줄기가 아이들 팔로 한 아름이 될 만큼 크게 자란 나무에는, 열매들이 가득 달려 있었다.
각각의 나무 앞엔 팻말이 하나씩 서 있는데, 거기에는 자랑스런 겨레 위인의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고, 이름 밑엔 그 어른이 태어난 해와 죽은 해 그리고 생전에 한 일들이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관리소에서 나눠 준 공원 안내 책자를 보면, 100그루의 은행나무 가운데서 60그루가 겨레 위인의 나무로 지정됐다. 그 이름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단군, 광개토대왕, 세종대왕 / 을지문덕, 계백, 강감찬, 최 영, 이순신, 전봉준, 홍범도, 김좌진 / 왕인, 고선지, 장보고, 안용복 / 원효, 일연, 유정, 김대건, 용성, 문익환 / 황 희, 박문수, 최익현, 민영환 / 손병희, 이상설, 김 구, 안창호, 박용만, 신채호,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유관순 / 최치원, 이 색, 이 황, 이 이, 정약용, 주시경, 안 확, 최현배 / 왕산악, 김대성, 박 연, 신사임당, 윤선도, 김홍도, 김정희, 방정환, 임방울 / 장영실, 김정호, 허 준, 공병우 외 ···
(초판 인쇄 탓인지, 군데군데 알아볼 수 없는 이름 몇 개가 더 있다.)
그리고 28그루의 은행나무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우리 나라 문화재 12건(훈민정음, 직지심체요절, 조선왕조실록, 고인돌 유적, 석굴암과 불국사, 경주 역사유적지구, 해인사 장경판전, 화성, 창덕궁, 백제금동대향로, 고려와 조선의 도자기, 판소리)과 겨레와 나라의 상징물 10건(우리말과 한글, 백두산, 태극기, 애국가, 아리랑, 김치, 인삼, 한복, 태권도, 진도개), 자랑스런 한국 현대사 6건(기미년3·1독립운동, 4·19혁명, 광주항쟁, 88서울올림픽, 월드컵 4강달성과 거리응원, 조국통일)을 기리는 나무로 지정됐다.
그러나 어떤 것으로도 지정되지 않아, 팻말이 없는 나무 또한 12그루나 됐다. 그 나무에도 앞으로 백 년 안에는 팻말이 모두 세워질 것이라고, 안내 책자에는 적혀 있었다.
(중략)
공병우 은행나무 앞에서는, 아리따 자매가 엄마 보란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엄마, 공병우란 이는 뭐하신 분이에요?”
아리따가 묻자, 보란이 대답했다.
“그래, 아리따야. 저 분은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도 살아 계셨던 분이란다. 그러니까 이 동산에 계신 분들 가운데서는 가장 늦게 돌아가신 어른이지. 공 박사님은 대학을 다니지 않고도 안과의사가 되셨고, 한글타자기를 맨 먼저 만든 발명가시기도 하단다.”
“아, 그랬구나!”
“그러나 이 분이 정말 훌륭하신 점은, 돌아가실 때 남다른 유언을 하셨기 때문이야. ‘내가 죽거든 내 주검에서 쓸 만한 장기는 모두 필요한 이들에게 주고, 뼈는 의과대학에 기증해서 학생들이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라.’ 하고 말이지.”
“그럼 박사님은 무덤이 없는 거예요?”
“공 박사님은 무덤을 만들 땅이 있으면 거기다가 나무나 채소를 심으라고 하셨단다. 자연을 훼손하고, 보기에도 좋지 않은 무덤일랑 더 만들지 말고, 부디 자연이 살아 있는 아름다운 국토를 후손들에게 물려주라는 뜻이었지.”
“난 무덤이 무서워, 엄마.”
예소라가 엄마 치마를 잡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 우리 예소라를 생각해서라도 엄마하고 아빤 나중에 무덤 같은 거 만들지 않을 거야.”
“엄마, 그런 말 하면 싫어!”
아리따가 울상을 지며 엄마를 쳐다봤다.
보란이 두 아이를 품에 꼭 안으며 달랬다.
“걱정 마. 아빠와 엄마는 저 은행나무들처럼 아주 오래오래 살 거니까···, 알았지?”
금방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아이들의 큰 눈에서 비로소 안도의 웃음이 피어났다.
“응, 엄마··· 꼭 그래야 돼.”
공원 식당에서 밤새 준비한 도시락이 모든 사람에게 한 개씩 나눠졌다. 나무동산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 앉아 점심 식사를 했다. 다희네 세 식구는 김창인, 오왕돈, 채우리 가족들과 함께 자리를 했고, 보란네 세 식구는 고 변호사 부자와 동요나라 모람 몇 사람과 함께 도시락을 먹었다. 모든 이들이 은행나무 동산에 가을소풍 온 것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식사를 끝내고 자료관 구경까지 다 마친 사람들은 제각기 공원을 떠났다. 단체로 온 사람들은 타고 온 버스로 돌아갔고,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은 자신의 승용차를 타고 갔다. 그러나 행사와 관계없이 느지막이 공원을 찾아온 이들은, 오후 늦게까지 남아 공원 구석구석을 모두 구경하고, 맑고 깨끗한 가을 날씨도 마음껏 즐겼다.
다희와 보란 두 가족은 함께 사진도 찍고, 간식도 나눠 먹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더 보냈다. 서둘러 서울로 돌아갈 일도 없었지만, 실은 꼭 참석해야 할 오후 행사가 하나 더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여름 노제우 한의사가 아흔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노인은 죽기 전에 가족에게 당부하기를, 자신의 주검을 화장해서 이 곳 공원에 뿌려 달라고 했다.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으니 빈손으로 돌아가는 게 당연한 노릇인데, 무덤이나 비석은 남겨 무엇 하느냐. 자신의 몸은 은행나무의 거름이 되면 족하다고, 노인은 공병우 박사와 비슷한 말을 남겼다.
젊은 한의사로 노인의 후계자가 된 서종달한테서 이런 사연을 전해 들은 공원 재단의 이사들은, 한나절 논의 끝에, 무덤 없는 공동묘지를 공원 안에 만들기로 결의했다. 그래서 생긴 것이 ‘하늘의 집’. 공병우 은행나무 뒤쪽에 있는, 백 제곱미터쯤 되는 둥근 모양의 조약밭이 바로 그것이었다.
오후 3시가 되자, 상복을 입은 노제우 노인의 유족들이 하늘의 집 쪽으로 올라왔다. 양아들인 서종달이 고인의 영정을 들고 앞장을 섰고, 친아들은 유골 상자를 들고 그 뒤를 따랐다.
두 상주가 곱게 가루를 낸 유골을 한 줌씩 집어 조약돌들 위에다 뿌렸다. 다른 조문객들은 조약밭 가장자리를 따라 빙 둘러쳐 있는 야트막한 나무 울타리 밖에서 조용히 지켜봤다.
물론 다희와 보란도, 다른 임원 가족들과 함께, 고인의 거룩한 뜻을 가슴에 새기며 명복을 빌었다.
뼈 뿌리기가 끝나자, 유족은 간단한 젯상을 차리고 모두 엎드려 큰절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국화 한 송이씩을 나무 울타리 틈에다 꽂고, 정중히 고개 숙여 절을 했다.
그 때까지 가만히 어른들이 하는 일들을 지켜보고 있던 소슬이가 소담이에게 물었다.
“언니, 하늘의 집이라면서 왜 마당만 있고 집은 없어?”
“쉿! 조용히 해.”
소담이가 소슬이의 말을 가로막자, 곁에 있던 예소라가 소슬이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재빨리 말했다.
“여긴 죽은 사람들만 사는 집야. 그러니까 우리 눈에는 보이질 않는 거라구.”
장례를 마친 유족들이 하늘의 집을 떠나자, 관리인이 물뿌리개로 조약돌 윗등에 묻어 있는 뼛가루를 씻어냈다. 뼛가루는 깨끗한 물에 섞여 모두 돌 틈으로 사라졌다.
시간이 지나면, 이제 한 줌의 주검은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고인이 생전에 이룬 아름다운 생애와 후손을 위한 지극한 사랑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오래 간직될 것이다. 천국이란 바로 이와 같은 기억의 세계가 아닐는지!
아이들도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 장례식이었다. 어른들 역시 슬픔에 잠기면서도, 무언가 모를 뿌듯한 감동으로 고인과 작별할 수 있었다.
(이하 생략)
첫댓글 언제였던가 종로 무교동에 가서 뵌 것이? 무상하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