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에스프리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
마경덕
1. 손
손은 입이다. 입이 막히면 손이 먼저 나선다. 며칠 전 지하철에서 만난 여인들의 수다가 내 눈속으로 뛰어들었다. 여자 셋 모두 손으로 이야길 나누고 있었다. 손은 입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엄지 검지 중지와 약지도 모두 동원되었다. 알 굵은 보석 반지가 불빛에 반짝였다. 끝없이 말을 토해내는 빠른 손끝을 따라가는 내 눈이 잠시 멀미를 느꼈다. 달리는 전동차안에서 중년 여인들이 쏟아내는 손말에 힘이 철철 넘치고 있었다.
옆좌석에 앉은 반백의 노인은 말이 없었다. 힘줄이 불거진 두 손은 무릎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그 흔한 가락지 하나 없는 손이 두어 번 손마디를 주무르다가 다시 무릎에 놓였다. 나는 신도림에 닿을 때까지 그 조용한 손을 바라보았다. 관절염을 앓는 초라한 손이었다. 말없는 그 손이 나에게 조곤조곤 말을 하고 있었다. 내 손을 꼭 쥐어주던 외할머니의 따뜻한 손이 떠올랐다. 소란하던 마음이 곧 가라앉았다. 내 손은 어떤 손일까? 살며시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일찍이 죄 많은 손이었다. 소금자루처럼 무거운 등에 업힌 막내, 엄마 몰래 동생을 꼬집던 죄와 함께 자란 손, 개를 키워 개장수에게 팔고 목줄 끊고 도망쳐온 개를 쇠줄로 묶어 돌려보냈다. 저를 팔아 넘긴 주인에게 돌아와 꼬리 치며 얼굴을 핥던 똥개. 끌려가며 찔끔찔끔 오줌도 지렸다."내 다시 개를 키우면 개새끼다" 다짐한 개만도 못한 손 다시 개를 먹이고 배 떨어진 강아지를 내다 팔았다.
-- 중략 --
지하철 손잡이가 꺼림칙하다. 별의별 손이 스쳐갔을 손고리에 선뜻 맘이 닿지 않는다. 먹지처럼 까만, 죄 지은 손이 두려워하는 게 고작 지하철 손잡이라니!
-「손」전문
손은 정직하다. 말없는 손에 많은 말이 담겨있다. 나는 사람을 만나면 얼굴보다 먼저 손에 눈이 간다. 손에는 그가 걸어온 길이 그대로 적혀 있다. 긴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른 손, 짧은 손톱에 아무 것도 치장하지 않은 손, 마디가 굵은 손, 힘줄이 불거진 손, 뭉툭한 손가락, 긴 손가락, 나이에 비해 손이 거칠거나 고운 사람도 있다.
손이 곱다고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손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 손이 담당하는 몫은 대부분 육체적 노동이다. 일하라는 것이다. 손이 없다면 그 어떤 창조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도 손을 가지고 있다. 일하지 않은 게으른 손은 아름다운 손이 아니다. 손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손은 가족이나 이웃을 위해 헌신한 손이다. 기저귀를 빨고 코를 닦아주고 안아주고 업어준 어머니의 주름진 손과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랑을 실천한 성실한 손이다.
지하철에서 만난 노인의 불거진 손마디가 그러했고 아홉 자식을 길러낸 어머니의 손이 그러했다. 부축하는 손, 사랑하는 손, 어루만지는 손, 남을 위해 사용된 손은 대부분 거칠고 볼품이 없다. 궂은 일도 마다 않는 부지런한 손은 제 손을 치장할 겨를이 없다. 희생을 실천하는 손이 가장 아름다운 손이다.
2. 발
발이 큰 남자를 보면 듬직하다. 키 크고 어깨가 넓은 남자도 왠지 미덥다. 오래 전, 발 크고 손 크고 어깨 넓은 남자와 북한산으로 등산을 갔었다. 가을 가뭄이 심해 산이 바짝 말라있었다. 계곡의 바위들도 허옇게 배를 드러내고 있었다. 불기운만 스쳐도 산 하나가 통째로 탈 태세였다. 곳곳에 산불조심이라는 푯말이 서있었다.
그때는 산에서 밥을 지어먹을 수 있었다. 석유버너에 불을 붙이다가 석유가 넘쳐 불길이 치솟고 마른 낙엽에 옮겨 붙었다. 버너가 폭발해 대형사고가 날 판이었다. 순간 발 크고 손 큰 남자를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발이 큰 남자는 어느 틈에 달아나고 동행한 친구와 나는 윗옷을 벗어 간신히 불길을 잡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뒤늦게 나타난 발 빠른 그 남자, 비굴한 웃음이 잊히지 않는다. 나는 발 큰 남자를 미련 없이 걷어 차버렸다. 발은 걷어차기에 참 좋았다. 누군가에게 차이고 걷어찰 수 있는 그 시절, 난초잎처럼 새파란 나이지만 상처도 쉽게 받았다. 아무 것도 걷어찰 것이 없는 때에 다다르니 종아치가 무너져 내려 발이 커졌다. 발이 커지니 몸도 무거워진다.
235 ……240 245
내 발 245
사이즈 235에 10을 보태니 발이 편하다
치수 10의 의미는 내 몸이 무겁다는 증거,
발목 아치형의 뼈가 가라앉아, 이미
나를 받쳐 든 기둥에 금이 가고 있다는 것
하이힐로 치켜도 흘러내리는 숫자 10
10은 10톤의 무게
처진 몸을 구두 뒤축에 매달아 보지만
금세 발이 내게 보내는 문자메시지, 위험! 위험,!
멀리 가지 마세요. 당신의 반경은 6센티. 안전지대에서 벗어나지 마세요
그 소리, 마치 "하산, 하산하세요" 로 들리고.
키 짧은 어느 개그맨 15센티가 넘는 뒤축에 올라
목을 반 자나 늘리고 아래를 내려다본다는데
바닥에서 멀어질수록
몸이 먼저 안다. 삐끗, 발목이 위험하다
235 ……240 245
멀리도 왔다. 지상에 닿을 날이 멀지 않았다
-「245」전문
지혜로운 발은 가고 싶은 곳만 찾아가지 않는다. 편한 길만 걷지 않는다. 걷기를 두려워한다면, 높은 산을 넘기 싫어한다면 발은 점점 퇴화될 것이다. 정작 가야할 길을 만나면 주저앉을 것이다.
이제 중년의 나이, 높은 구두를 신기가 두려워진다. 발목을 삐거나 금세 피곤이 몰려온다. 멋진 것보다는 편한 것을 찾게 된다. 사람도 아름다운 사람보다는 수더분하고 편한 사람이 좋아진다.
3. 얼굴
바야흐로 성형시대, 외모가 판을 치는 시대, 사람들의 시선은 대부분 겉모습에 쏠려있다. 이제 성형을 했다고 감추던 시절은 갔다. 당신은 누구를 닮고 싶은가? 주문만 하시라. 한때 내과 의사들이 전성기를 누렸지만 이젠 병원도 문을 닫는다. 돈을 벌려면 성형외과 의사가 되어야한다. 멀쩡한 얼굴을 찢고 꿰매고 늘리고 깎고, 원하는 대로 변신하는 시대, 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면 왠지 불이익을 당할 것만 같다. 그러나 불안해하지 말자. 보이는 아름다움은 수명이 짧다. 겉치장에 쓰는 시간을 줄이면 우리는 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얼굴만이 전부는 아니다. 겉치레보다 더 소중한 일들이 얼마든 있다. 오직 나만을 위해 사는 삶은 어리석은 삶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얼굴이 아닌 마음에서 나온다.
심벌이 불거진 근육질 남자, 브래지어 팬티 한 장 걸친 미끈한 여자,
버젓이 대로변에 서있는 목 잘린 속옷가게 마네킹들
죄짓고 싶었네 뻔뻔하고 싶었네 많은 사람에게 면목 없고 싶었네
저런, 쳐죽일, 배터지게 욕먹고 싶었네
목 위에 얼굴만 달리지 않았다면
기왕이면 여러 개의 목을 갖고 싶었네 꽁꽁 머리통 숨겨두고
일회용 목으로 바꿔 달고 싶었네 재빠른 자라목이 되고 싶었네
왜 목은 하나일까
건드리면 부러지는 한심한
목 위엔 얼굴이 있고 얼굴에는 마경덕이라는 이름이 있네
툭하면 짐승 발톱이 돋네. 제발 나이값 좀 하라고 엄마는 말하네
나 아직, 사람이 되지 못했네
-「얼굴」전문
얼굴은 시선이 먼저 닿는 곳이다. 첫인상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인상이 좋다고 해서 사람도 그러하리라 속단하면 안된다. 보기와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 천사를 가장한 사람은 정말 천사처럼 보인다. 이와 달리 대수롭게 여겼던 사람이 천사인 경우도 있다. 우리의 눈은 단순하다. 보이는 것만 본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외모에 초점을 맞춘 시선을 거두고 시야를 넓혀야한다. 내면의 아름다움도 바라보아야 한다.
4. 입
수저가 말을 한다. 몸을 읽은 은수저가 까맣게 변했다. 하루에 40개비 담배를 태우는 지독한 아궁이, 그 숨막히는 니코틴에 까무러쳤다. 한 달 전 사은품으로 받은 은수저 한 벌, 내 수저는 은은하고 보얗다. 수없이 금연을 선언한 남편이 슬금슬금 눈치를 본다. 이거 도금이지? 남편은 겉물만 입힌 가짜라고 애먼 개업식당을 향해 눈을 흘긴다.
당신 숟가락 어디 갔어? 설거지를 하다보니 숟가락이 보이지 않는다. 흐흐흐 남편이 웃는다. 이게 웬일? 은수저는 간 곳 없고 스테인리스 숟가락이 위풍당당 놓여있다. 자다말고 일어나 수십 년 그을린 속을 수세미로 빡빡 지웠단다. 임금님 목숨을 지켰다는 은숟가락도 철수세미를 당해내지 못했다. 덧옷을 벗고 유난히 반짝이는 스텐 숟가락, 숟가락의 마음을 지우고 남편은 편안하게 밥을 먹는다. 여전히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은수저가 사라졌다」전문
남편은 애연가다. 하루에 두 갑 가까이 피우는 담배, 담배연기는 남편에게 맛있는 음식이다. 입은 오래 전에 아궁이로 변했다. 밥은 굶을 수 있어도 담배는 굶지 못한다. 몇 번이나 금연을 선포해 놓고 한 달도 못 가 백기를 든다. 금연침도 맞고 금연보조제를 먹어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입이 하는 일은 먹고 마시고 말하는 것인데 그 중 가장 큰 기쁨은 먹는 일, 그 맵고 독한 연기, 발암물질이 숨겨진 마약이라는 그 담배가 남편에겐 가장 맛있는 음식이 되어버렸다.
중독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사람은 좋은 일에 중독이 되어야한다. 남을 비방하는 입은 칭찬에 인색하고 남을 칭찬하는 입은 남의 약점도 감싸준다. 좋은 말은 귀로 먹는 보약이라 하지 않던가? 그렇다고 듣기 좋은 말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달콤해도 마음이 담기지 않은 거짓말은 좋은 말이 아니다. 입에 쓴 말이 좋다고 하는 것은 그 말에 진실한 마음이 담겼기 때문이다. 입은 마음의 출구이니 만큼 여닫을 때에 조심해야 한다.
물건에도 입이 있다. 물건의 뚜껑을 따는 것은 그 물건의 입을 연다는 것이다. 처음 개봉되는 영화, 첫날밤, 첫사랑도 상대에게 첫 마음을 여는 일, 입은 마음이 오가는 통로이기도 하다.
공동변소 똥통에 몇 달 째 떠있는 유리병, 닫힌 솔잎 마개 틈으로 멀건 물이 스몄는데 , 똥물을 받아 마신 소리꾼도 목이 트였는데,
장마가 닥치면 넘치는 공동변소, 병 하나 둥둥, 캄캄한 몸을 휘돌아 나온 것들 시나브로 걸러내는
술병 화병火病에 골병든 사내들이 빠끔담배 피우며 줄을 서던 곳. 타들어가는 똥끝에, 더디 오는 차례에 안절부절, 걸쳐놓은 널빤지가 후들후들 떨리던 푸세식 변소에 노름쟁이 천섭이 아재 약병이 있었다.
구멍난 뼈에 살이 차듯 병에 물이 차고 있었다.
-「병」전문
솔잎으로 꼭 닫힌 입, 공중변소에 떠있던 병은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똥물이 시나브로 스며들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병은 죽음과 같은 것, 맷독 오른 노름쟁이 천섭이 아재에겐 그 똥물이 약이었다. 그 병의 마개가 열리면 약이 될 수 없었다. 입은 다물어야 할 때 꼭 다물어야 한다. 차고 넘치는 때가 올 것이다. 입을 열어 외쳐야 할 때 외쳐야 한다. 그 유리병은 한 사람의 병(病)을 치료하기 위해 악취와 오물을 견디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성급한 내 입은 미리 발설하여 화를 불러온 적도 있었다. 가끔 억울한 일을 만나 입을 열고 싶을 때 그 변소에 떠있던 병을 생각하며 마음을 닫는다. 참아야 한다. 때가 되면 절로 열리리라.
-월간 <문학세계 >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