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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희지 王羲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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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희지(왕시즈) | |
출생 | 303년 진나라 저장 성 사오싱 |
사망 | 361년 (58세) 진나라 |
별칭 | 자(字)는 일소(逸少) 아호(雅號)는 담재(澹斋) 별칭은 왕우군(王右軍), 서성(書聖) |
직업 | 서예가 |
자녀 | 왕헌지(아들) |
왕희지(王羲之, 왕시즈, 303년 ~ 361년)는 동진의 정치가이자 시인, 서예가이다. 자는 일소, 호는 담재이며 저장 성 사오싱 시 출신이다. 조상은 산둥 성 린이 시에 거주했다. 서예가 탁월해 서성이라고 일컬어진다. 일찍이 우군장군을 역임했기에 왕우군이라고도 한다. 손꼽히는 문벌귀족인 낭야 왕씨이다.
처음에는 서진의 서예가인 위부인에게 배웠고 후에 한나라나 위의 비문을 연구하여 초서, 행서, 해서의 서체를 완성하였다. 아들 왕헌지도 서예가이다. 작품으로 〈난정서〉, 〈상란첩〉, 〈황정경〉, 〈악의론〉 등이 있다.
王羲之
307년 ~ 365년
중국 동진 시대의 서예가. 자는 일소(逸少)로 우군장군(右軍將軍)의 벼슬을 하였다 해서 왕우군으로도 불린다.
사람 많은 중국 역사 중에서도 글씨 잘 쓰는 것으로는 고금 으뜸으로 꼽힌 사람이며, 후대에도 엄청난 존경을 받았다. 서성(書聖)이라고 불리우며, 대략 시쪽의 굴원, 이태백. 두보같은 위치라고 보면 될듯.[1]
산둥성 린이현(臨沂縣)인 낭야(琅琊) 사람으로, 동진을 만드는데 공을 세운 왕도의 조카이고, 아버지는 왕광이라는 사람이었다. 처음 글씨를 배운 계기가 특이한데, 위부인이라는 유부녀 여류 문인에게 글씨를 배웠다. 그 후에는 특별히 스승을 두지 않고 한나라나 위나라의 비문을 보고 스스로 배우면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나중에는 벼슬 길에도 나아가 비서랑(秘書郞)으로부터 출발하여 유량의 장사(長史)가 되고, 351년에는 우군장군 및 회계의 내사에 이르렀다. 세상을 살펴보는 눈도 있어서 북벌을 요청하기도 했고 재상 사안에게 민간의 정치를 논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대 남조 지식인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 놈의 속세를 내가 떠나야지' 하고 마음을 먹고 있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회계 땅으로 가서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잡고 사안 ·손작(孫綽) ·이충(李充) ·허순(許詢) ·지둔(支遁) 등과 청담을 나누고, 도가 쪽에도 관심이 있었는지 도사 허매(許邁)를 따라 채약에 몰두하는등 유유자적하면서도 나름대로 분주하게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왕희지의 업적은 해서 ·행서 ·초서의 각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서예를 단순히 글씨를 쓰는것이 아니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오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왕희지는 예서(隸書)를 잘 썼는데 아직 성숙되지 못했던 해서 ·행서 ·초서를 예술로 만들었다. 왕희지의 남은 필적들도 다 이 세가지로 되어있다. 그의 서풍(書風)은 전아(典雅)하고 힘차며, 귀족적인 기품이 높다.
미켈란젤로가 조각의 완성이자 끝판왕 격이라면, 왕희지는 서예[2]의 완성이자 끝이라고 평가 받는다. '왕희지 체'의 특징은 유려하며, 기교적 측면에서 독보적이다. 현대에서도, 서예가가 자신의 서체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왕희지의 서체를 기반으로 만들어가기 시작 할 정도로, 표준적인 모델이다. 물론, 예술의 범위에서 '왕희지 체'보다 '아무개 체'가 더 예술적, 심미적으로 좋다고 할 수도 있으나, '왕희지 체'는 이미 왈가왈부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격이 정립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왕희지(王羲之, 321~379)의 자는 일소(逸少)이고 낭야
임기(산동성) 태생이었는데 강남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는 선인들이 이룩한 성과를 바탕으로 독특한 서법을 연구·창조함으로써 서예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켜 ‘서성(書聖)’이라 불리고 있다.</P>
글씨를 처음 배울 때 그의 글씨는 또래와 비교하여 다소 뒤떨어지는 편이었다. 그러나 글씨에 열중하는
각고면려(刻苦勉勵)의 태도는 누구도 따를 수가 없었다.</P>
왕희지는 글씨에 열중할 때는 그야말로 삼매경에 흠뻑 빠져들어갔다. 다른 학문을 공부할 때, 식사할 때,
길을 거닐 때, 하루 24시간 내내 글씨체의 대소, 구조, 운필(運筆)에 대하여 머리 속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손으로 옷이나 방바닥에 쓰는
시늉을 하는 바람에 옷이란 옷은 모두 달아서 너덜너덜해졌다.</P>
어느 날 식사하는 것마저 잊고 글씨에 몰두하고 있어 가족이 밥상을 차려들고 서재로 가 보았다. 그런데
서재에서는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왕희지는 글씨에 정신이 팔렸음인지 자신의 옷자락을 먹에 묻혀 먹으면서 “맛있다, 맛있다.”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기뻐하는 것이었다. 이 모양을 바라보던 가족도 한동안 멍하니 정신을 잃고 있다가 밥상을 가지고 왔음을 의식했을 무렵에는 왕희지의
입안은 온통 먹투성이가 되어 있었건만 왕희지는 전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P>
왕희지는 곧잘 연못 가에서 글씨를 쓰고 연못의 물로 벼루를 씻었는데 얼마 후에는 그 연못의 물이 온통
검게 흐려져 그 연못을 ‘묵지(墨池)’라 부르게 되었다.</P>
왕희지는 이러한 끈질기고 꾸준한 정신으로 수십 년 간의 노고 끝에 마침내 서예의 오묘한 도를 터득하여
서예계의 정상에 올랐다.</P>
>조야의 모든 사람들은 왕희지의 글씨를 ‘묵보(墨寶)’라 하여 소중히 여겼다.</P>
alt="왕희지의 〈상란첩〉"
왕희지는 어느 날 회계 산음서 부채를 파는 노파를 만났다. 대나무로 만든 부채가 너무 허술하였기 때문에
부채를 사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왕희지는 그 부채에 각각 6자씩 써넣었다. 그러자 노파는 부채를 망쳐놓았다고 투덜거리는 것이었다.</P>
왕희지는 그 노파에게 말하였다.</P>
부채에는 왕희지의 친필이 씌어졌기 때문에 1백 전(錢) 이하로는 절대 팔지 않겠노라고
말씀하십시오.”</P>
1백 전이라면 당시 시가의 몇 갑절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으나 왕희지의 친필이 담겨진 부채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순식간에 다 팔려버렸다.</P>
며칠 후 노파는 또 왕희지에게 글씨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왕희지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왕희지는 이미 장강 이남에서는 명사로 알려졌을 뿐 아니라 그의 글씨 또한 당대에서조차 구하기가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었다.</P>
<P class=desc_section>산음 땅의 어떤 도사는 왕희지의 글씨를 좋아하는 열렬한 애호가였으나 그 글씨를 손에 넣기가 어떻게나
어려웠던지 우선 한 쌍의 흰 거위를 기르기 시작하였다. 왕희지가 흰 거위를 몹시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P>
<P class=desc_section>일찍이 회계 땅에 의지할 곳 없는 어느 노파가 흰 거위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 거위의 울음 소리가 얼마나
좋았던지 소문이 자자하였다. 왕희지가 제자로 하여금 그 거위를 사려 하였으나 노파는 팔지 않겠다며 거절하였다. 왕희지는 그 거위를 가지지는
못할망정 한번 구경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다. 그는 친척과 벗들을 데리고 부랴부랴 노파의 집을 찾아갔다.</P>
<P class=desc_section>노파는 왕희지가 친히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크게 당황하였다. 자기 집을 찾아온 명사를 어떻게 대접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었다. 집안을 샅샅이 뒤졌으나 아무것도 대접할 것이 없었으므로 할 수 없이 거위를 잡아 대접하기로 하였다. 왕희지는 한번
구경삼아 찾아왔을 뿐인데 문제의 거위가 냄비 속에서 요리로 둔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크게 실망하여 며칠을 두고 애석해했다고 한다.</P>
<P class=desc_section>산음 땅의 어느 도사가 기르는 거위는 그 색깔이 희고 살집도 좋았다. 이 소문을 들은 왕희지는 배를 타고
도사의 집을 찾아가 그 거위를 흥정하였다.</P>
<P class=desc_section>도사가 말하였다.</P>
<P class=desc_section>“이렇게 훌륭한 거위를 팔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그 대신 《도덕경(道德經)》을
베껴 주셨으면 합니다만.”</P>
<P class=desc_section>거위를 몹시 좋아했던 왕희지는 대뜸 승낙하고 흔연히 붓을 들어 즉석에서 도덕경을 베껴 주고 거위를
얻어가지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있다.</P>
<P class=desc_section>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왕희지의 글씨를 ‘거위와 바꾼 글씨다.’라는 이야기가 생겼다.</P>
alt=〈평안하여봉귤삼첩〉
width=659 height=387> <SPAN style="WIDTH: 657px; HEIGHT: 385px"
class=thumb_frame></SPAN><!-- //2014-09-17 프레임 수정. 이미지 height값보다 2px 작게 넣어주세요 ~ --></A></DIV><!-- //figure_thumb -->
<DIV style="WIDTH: 657px" class=info_thumb><STRONG>〈평안하여봉귤삼첩〉</STRONG>
<P class=desc_thumb>평안첩, 하여첩, 봉귤첩의 세 첩이 같은 종이에 쓰여 있는 왕희지의 서</P></DIV><!-- //info_thumb --></DIV><!-- //thumb_section --></DIV>
<P class=desc_section>왕희지의 글씨는 수없이 남아 후세에 전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난정서(蘭亭序)》이다.
난정은 회계 산음에 있는 유서 깊은 명소로 산수가 아름답고 대나무 숲이 유명하였다. 특히 난정 부근에는 거울 같은 시냇물이 흘러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P>
<P class=desc_section>구력 3월 3일은 이 지방 고유의 명절이었다. 353년 3월 3일 왕희지는 사안(謝安)<SUP><SPAN
class=screen_out>각주</SPAN><A class=" link_footnote" href="xxxxjavascript:;"
name=footnote jQuery111105353788526554459="38" txt="그 뒤 비수의 대전에서 동진의 군사(軍師)가 됨"
layer_id="36265005" order="1">1)</A></SUP> 등 41명의 명사들을 난정에 초대하여 술잔을 주고 받으며 시를 짓는
향연을 벌였다.</P>
<P class=desc_section>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 시냇물 상류에서 술잔을 띄워 내려 보내면 각기 냇가의 돌 위에 걸터앉아 술잔이
흘러내려오기를 기다리다가 술잔이 자기 앞에 닿으면 즉흥시 한 수를 짓고 만약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로 세 잔의 술을 연거푸 마시기로
하였다.</P>
<P class=desc_section>그날 따라 시냇물은 더욱 맑아 보였다. 술잔이 하나 둘 띄워져 시냇물을 따라 내려왔다. 술잔이 와 닿기를
기다리던 명사들은 술잔이 자기 앞에 이르자 그 술을 단숨에 들이키곤 이내 시 한 수를 지어 일필휘지(一筆揮之)하였다. 모두가 당세의 명사들이었기
때문에 벌주를 마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40여 편의 시가 한꺼번에 완성되었다.</P>
<P class=desc_section>이 40여 편의 시를 한 책에 모으고 왕희지가 서문을 썼기 때문에 이것을 《난정서》 또는
《난정집서(蘭亭集序)》, 《임하서(臨河序)》, 《계서(禊序)》라고도 한다. 이 서문은 28행 324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산뜻하고 매끈한 흘림체로
되어 있고 자체가 유려하여 중국 행서(行書)의 절품(絶品)으로 꼽히고 있다.</P>
<P class=desc_section>후세에 이르러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이 왕희지의 글씨에 매료되어 왕희지의 후손으로부터 《난정서》의
필첩(筆帖)을 얻고는 크게 기뻐하여 소중히 간직하였다. 또 서예가 조모(趙模), 풍승소(馮承素) 등으로 하여금 난정서를 여러 책 베끼게 하여
친족과 측근들에게 하사하였다.</P>
<P class=desc_section>태종은 일생동안 《난정서》를 매우 소중히 여겨 여러 차례 제사(題詞)<SUP><SPAN
class=screen_out>각주</SPAN><A class=" link_footnote" href="xxxxjavascript:;"
name=footnote jQuery111105353788526554459="40" txt="책머리에 그 책에 관련되는 일을 적은 글"
layer_id="36265010" order="2">2)</A></SUP> 를 쓰고, 또 사후에는 부장품으로 하였다. 애석하게도 그 후 태종의
능이 도굴되는 바람에 《난정서》 진필은 유실되고 말았다.</P>
<P class=desc_section mouseX="259" mouseY="4268">왕희지의 행서의 대표적 작품은 이렇게 유실되었지만,
태종의 생존시 왕희지의 글씨를 베끼는 일이 활발히 추진되었다. 그 결과 장강 이남에서 이름을 떨치던 왕희지의 글씨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그
후 1천여 년에 걸쳐 왕희지의 글씨는 서체(書體)의 정통(正統)으로서 중국 서예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P>
<P class=desc_section>고대의 글씨는 주로 종이와 비단에 씌어졌기 때문에 천 수백 년 동안 보존하기가 어려웠으나 청나라
건륭(乾隆, 1662~ 1795) 시대에 이르러 동진 때의 왕희지, 그의 아들 왕헌지(王獻之), 왕순(王恂)의 필첩이 발견되었다.</P>
<P class=desc_section>왕희지의 필첩은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왕헌지의 필첩은 〈중추접(中秋帖)〉, 왕순의 필첩은
〈백원첩(伯遠帖)〉이라 불렸다. 이 세 필첩은 희대의 진품으로 지정되어 내부(內府)에 특별 전시실을 설치하고 보존하였으며, 그 전시실을
‘삼희당(三希堂)’이라 명명하였다.</P>
<P class=desc_section>현재 절강성 소흥현에 있는 난정은 관광의 명소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난정 곁을 흐르는
시냇물과 묵지 연못의 물에는 지금도 그 옛날의 서성 왕희지의 체취가 담겨 있는 듯 관광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다.</P>
<DIV class="wrap_thumb thumb_mid">
<DIV class="thumb_section other_thumb">
<DIV style="WIDTH: 659px" class=figure_thumb><A class=link_figure
href="/multimedia/63_59000037_i4.jpg" target=_blank><IMG class=img_thumb
alt="왕희지 묘"
src="http://t1.daumcdn.net/thumb/R659x0/?fname=http%3A%2F%2Ft1.daumcdn.net%2Fencyclop%2Fm63%2F70tadgILCEeJ6rPkR4Jvp6oQgkGzBEm8shwv2rL0%3Ft%3D1473226273000"
width=659 height=463> <SPAN style="WIDTH: 657px; HEIGHT: 461px"
class=thumb_frame></SPAN><!-- //2014-09-17 프레임 수정. 이미지 height값보다 2px 작게 넣어주세요 ~ --></A></DIV><!-- //figure_thumb -->
<DIV style="WIDTH: 657px" class=info_thumb><STRONG>왕희지 묘</STRONG> </DIV><!-- //info_thumb --></DIV><!-- //thumb_section --></DIV>[Daum백과] 왕희지 – 이야기 중국사2, 김희영, 청아출판사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