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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5일 서울역앞 시위군중
(김천길, 서울발 외신 종합, 눈빛, 1993, 214)
1980년 5월 15일 학생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가 서울역 앞에서 '유신철폐'와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에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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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민중항쟁 1 - 5.18 공수부대의 만행
(전민조, 이 한장의 사진, 행림출판, 1994, 113) 전남일보 신복진 촬영
1980년 5월 18일(일요일) 오후 3시경 광주 금남로 3가를 지나가는 행인을 무조건 방망이로 내려치고 바닥에 나뒹군 시민을 재차 강타하고 있는 공수부대 병사의 모습이다.
그 잔인한 병사는 그것도 모자라 두 발을 모아 붕 공중으로 떠서 시체나 다름없는 시민의 목덜미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그날 오후부터 여기저기서 불시에 나타난 공수부대는 닥치는 대로 눈에 띄는 사람이면 사정없이 차고 때리고 박살을 내었다. 19일 금남로에서 데모군중이 소나기 처럼 돌멩이를 퍼붇는데도 그들은 그 돌을 온몸으로 맞으며 한 치의 대열로 이탈하지 않은채 유령의 집단처럼 저벅저벅 다가가는 공포의 병사들이었다.
광주를 얘기하는 사람이 유언비어와 허위사실 유포 등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붙들려 가는 세상이어서 신기자도 자신이 찍은 광주의 기록들을 한동안 가족한테까지도 일체 얘기를 안하고 찍은 필름 모두를 비닐에 싸서 조그만 항아리에 담아 화단에 파묻어 놓았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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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민중항쟁 2
(황종건.김녕만, 광주 그날, 사진예술사, 199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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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민중항쟁 3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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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민중항쟁 4
(한길사,한국사-19, 1994, 39)
무장한 시민들, 1980년 5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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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민중항쟁 5
(황종건.김녕만, 광주 그날, 사진예술사, 1994,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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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민중항쟁 6
(황종건.김녕만, 광주 그날, 사진예술사, 1994,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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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1980.5.31)
(4.7언론인회, 기자 25시, 1985, 257)
1980년 5월 31일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 발족. 전두환 상임위원장과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가 6월 5일 현판식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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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출범(1982)
(김천길, 서울발 외신 종합, 눈빛, 1993, 54)
전두환 대통령이 프로 야구 개막식에서 시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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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문화원 점거 농성(1985.5.23)
(박용수, 민중의 길, 분도출판사, 1988, 12)
1985년 5월 23일 12시 73명의 학생들이 미 문화원 도서실 계단을 뛰어 올라, 미국을 우방이 아니라 광주 학살의 책임자로 규정하면서 72시간 농성. 이 농성을 통하여 전두환 정권에서 금기시되었던 '광주'가 공개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학생들은 <우리는 왜 미문화원에 들어갔는가>라는 성명서를 통해 "우리 민주 학우는 전 한국 민중을 대표하여 미국측의 광주 민중학살 공범 여부를 묻고 군부 독재 지지 철회를 요구하고자 주한 미문화원에 들어가야만 했던 것이다."고 목적을 밝히고, 농성을 풀면서
" 1)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2) 광주 학살 지원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 사과하라,
3) 미국은 군부 독재에 대한 지원을 즉각 중단하라,
4) 신민당은 국정 조사권을 발휘하라, 5) 모든 민주운동 단체들은 광주 학살 진상 규명 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노력합시다."라는 요구사항을 제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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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노동자 연대투쟁(1985.6)
(서울노동운동연합, 선봉에서서, 돌베개, 1985)
"이 땅의 양심은 절규한다." - 연대투쟁을 지지하는 22개 민주.민권운동단체 대표들이 농성중인 청계 피복 노조 사무실(85.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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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학투결성과 건대농성(1986.10)
(김천길, 서울발 외신 종합, 눈빛, 1993, 225)
10월 29일 건국대학교 사회과학관 옥상에서 농성중인 학생들. 1986년 10월 28일 건국대학교에서는 전국 27개대 대학생 1천 5백여 명이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을 발족하였다. 경찰이 퇴로를 차단한채 강제 진압을 감행하자 학생들은 자연 건물로 피하여 농성으로 이어졌다. 10월 30일 '금강산댐'을 발표한 정부는 31일 경찰 8천여명을 투입하여 1525명을 연행하고 그 가운데 1295명을 구속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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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댐 평화의 댐(1986.10-11)
(조선, 서울, 동아, 중앙, 한겨레 신문스크랩)
1986년 10월 30일 이규효 건설부장관은 '북괴'가 쌓으려는 "2백억톤의 물을 담은 거대한 금강산 댐이 무너질 경우... 한반도의 허리 부분을 완전히 황폐화하는,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재해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고 격앙된 목소리로 기자회견을 벌였다. 이를 받은 언론은 그림까지 그려가며 '수공(물침략)'과 '물폭탄'에 대한 불안과 공포분위기를 확대하였다. 댐이 터지면 중부권일대가 물바다가 되어 서울의 63빌딩 허리까지 찰락찰락하게 되고 국회의사당 머리까지 꼴깍꼴깍 차게 된다는 것이다.
11월들어 교장선생이 학생들을 앞에놓고 손을 들어 구호를 외치고 선동을 해도 잡아가지 않고 오히려 보호해주는 데모, 통반별로 동원되어 금강산댐 추진하는 '북괴'를 규탄하는 관제데모가 수없이 열렸다. 대응댐으로 평화의 댐을 쌓자는 성금걷기 운동이 이어졌다. 봉급에서 본인들의 의사도 확인하지 않고 성금을 원천징수 하였으며, TV 카메라가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코흘리개 어린아이의 고사리 손으로 벙어리 저금통장까지 깨게했다.
그렇게 모금한 6백61억원의 성금은 어디에 쓰여졌을까, 그렇게 시작한 평화의 댐은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토록 떠들석하던 분위기가 곧 잊혀져 갔다. 그러다가 다시 88년 여름들어 평화의 댐 문제가 언론과 국회를 통하여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소 부설 시스템공학센터는 200억톤이 아니라 150억톤의 물을 담을 수 있는 금강산댐을 쌓으려해도 20톤짜리 트럭 1천대가 13년 동안 흙을 퍼 날라야 하며, 그렇게 쌓은 댐에 물이 다차는 기간은 14년이 걸린다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모두 27년이 걸린다는 계산이다. 이 기간은 올림픽이 4년에 한번씩 치뤄지니까 6번 치르고도 3년이 남는 기간이다. 그런데 5공화국정권은 마치 2년뒤의 88올림픽을 치르지 못할 것처럼 요란법석을 떨었던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정부가 1986년 10월 30일 훨씬 이전인 봄부터 북한이 금강산 댐 건설을 추진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10월 30일에 발표를 했을까. 그 해 봄부터 직선제 개헌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화 운동이 고양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0월 28일에는 전국 26개대학의 학생들이 건국대학교에 모여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 투쟁연합](애학투) 결성식을 가졌다. 5공화국정권으로서는 대학생들이 대립되는 가장 거추장스런 세력이었다. 경찰이 투입되어 빠져 나갈 구멍을 남기지 않고 밀어부치자 학생들은 모두 건물로 밀려들어갔다. 10월 29일 검찰은 학생들을 전원 연행 구속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한겨레신문} 조차 없던 그 시절 보수언론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건대사태'를 과장 왜곡하여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TV에서는 검붉고 푸르죽죽한 화면에 '광광광'하는 음산한 배경음악을 깔고 건대옥상에서 구호를 외치는 학생들의 모습을 비춰댔다. 다음날, 금강산 댐 사건을 발표하였다. 많은 국민들이 불안속에서 '북괴는 물침략까지 준비하는데 철딱서니 없는 학생놈들이 무얼 안다고, 다 잡아들여!'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다시 다음날 10월 31일, 헬기까지 동원한 상태에서 경찰 8500여명이 건대에 들어가 학생들 1500여명을 굴비엮듯이 연행하였다. 왜 금강산댐에 대해 발표한 10월 30일이 29일과 31일 사이였던가.
관제데모가 곳곳에서 벌어지던 11월에는 당시 재야 민주화운동의 구심체였던 '민통련'에 대한 해산명령이 떨어졌고, 민주화운동하던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 둘 주위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박종철군도 잡혀들어가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고문치사를 당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금강산댐과 평화의 댐 사건은 그동안 숱하게 있었던 반공이데올로기의 선전.탄압과 같은 맥락의 사건이며, 민주화운동과 '애학투', '물침략'과 '물고문'은 무관하지 않으며, 다음해 급박하게 치달은 '4.13호헌 조치'와 6월항쟁도 내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금강산댐 평화의 댐 사건을 1986년 10월이나 11월의 시점에서 정부가 발표한 내용만을 가지고 판단한다면 연관되는 다른 사건이나 전체의 시대상을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평가하고 판단할 때는 시간의 긴 흐름 선상에서 어느 때인가, 전후 사정은 어떠한가, 다른 사건이나 인물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사회의 모순 그리고 사회의 모순구조에서 형성되는 대립되는 양대세력과는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 역사적 과제 해결 방향에 합치하는가 역류하는가 등을 종합적.총체적으로 고려하여야 한다. 그러한 평가를 우리는 역사적 평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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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고문치사 사건(1987.1)
(김천길, 서울발 외신 종합, 눈빛, 1993, 228)
1987년 2월 3일 박종철 군 추도 및 고문규탄시위 장면.
1987년 1월 14일 새벽,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 군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수배를 받고 있던 친구의 소재를 추궁당하다가 수사실에 딸린 욕조에서 물고문을 당해 11시 20분경 숨졌다. 그러나 1월 15일 저녁 경찰의 공식 발표는 조사 결찰관이 '탁'하고 책상을 쳤더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물고문 혐의가 밝혀져 고문경관 두 명이 구속되고 내무장관, 치안본부장이 경질되었다. 세인의 기억이 희미해지던 5월 천주교 사제단의 폭로로 범인 축소 조작 사실이 밝혀져 경찰 간부 세명이 추가 구속되고 국무총리와 안기부장, 내무.법무장관이 포함된 개각이 단행되었다. 검찰총장도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이 사건은 전국민적인 저항을 불러일으키며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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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우여! - 이한열
(전민조, 이 한장의 사진, 행림출판, 1994, 표지) 정태원 찍음
1987년 6월 9일 오후 5시 경, 전두환.노태우 화형식을 끝내고 정문 앞에서 1천여명의 학생들과 경찰이 동시에 화염병, 돌멩이, 최루탄이 오가는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한열(연세대 경영학과 2년) 군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코와 입에 피를 흘리며 의식을 잃어버린 이한열군과 마스크를 쓴 채 그를 붙잡고 분노의 눈길로 진압경찰을 바라보는 학생. 이 한 장의 사진은 6.10항쟁의 기폭제가 된 상징적인 사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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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1- 명동성당 농성
(박용수, 민중의 길, 분도출판사, 1988, 411)
1987년 6월 10일 오전 10시. 서울 잠실 체육관에서는 민정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여기서는 간선제를 통해 5공화국 정권을 승계할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노태우 대표를 선출하였다. 이날 전국 22개 도시에서는 박종철군 고문 살인 규탄 및 호헌 철폐 시민대회가 열렸다. 서울의 시위대 가운데 일부는 명동성당에 집결 농성에 돌입하였다.
6월 18일 전국에서 최루탄 추방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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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2
(마리오 암브로지우스, 분단한국, 열화당, 1989) 김경수 찍음
여학생들도 화염병을 들고 시위에 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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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3 - 최루탄을 쏘지 마라
(전민조, 이 한장의 사진, 행림출판, 1994, 115) 한국일보 고명진 기자 촬영
1987년 6월 26일 부산 문현동 4거리에서 8천여 시위군중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경찰이 다탄두 최루탄을 일제히 발사하자 군중 속에서 갑자기 대평 태극기가 펼쳐지고 그 태극기 앞에 위통을 벗어 던진 청년이 '더 이상 최루탄을 쏘지 마라'며 아스팔트를 달렸다. 그 청년의 절규는 정당성과 도덕성이 결여된 국가 공권력, 그리고 이 사회의 모든 오류와 이 세상을 향해 외치는 양심의 상징같았으며, 이 사회의 폭력, 탐욕, 무지, 저속, 잔인, 부정에 대해서 몸부림치는 청년의 모습이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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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4 - 6.29 선언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329)
1987년 오전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직선제 수용 선언을 보도한 신문 호외를 읽고 있는 시민. 1987년 6월 29일 오전 9시5분, 서울 관훈동 집권 민정당사에서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씨의 사면.복권, 지자제 실시, 언룬자유 보장 ... 등 6.29 민주화 선언 8개항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김영삼 민주당 총재와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은 "내 소원이 이루어진 것 같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느낀다"고 하였다. 노태우는 6.29 선언이 자신의 '고독한 결단'에 의해 나온 것이라 하였으나, 노태우.전두환의 사전협의에 의한 것이었다. 6.29선언은 6월항쟁의 획득물이라는 측면과 지배블록의 '예방혁명' 조처라는 측면이 포함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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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9 노동자투쟁 1 - 길을 메운 현대 노동자들
(사회사진연구소, 답하라 전세계노동자, 새길, 1991,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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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9 노동자투쟁 2 - 이석규 장례 행렬
(한길사,한국사-20, 1994, 31)
최루탄에 의해 사망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장례행렬, 1987년 8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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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9 노동자투쟁 3 - 왜곡광고
(한국일보, 1987.8.18, 하단광고)
1987년 7.8.9 노동자 투쟁이 한창이던 8월 18일 한국일보에 실린 광고. '당파성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당파싸움을 끌어들이고, 고용주는 부모, 근로자는 자식같는 존재이므로 고용주는 종업원을 자식으로 대하고 종업원은 고용주를 부모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전형적인 가부장제적인 봉건주의 논리를 펴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왜곡하는 선전이다.
'노사분규?'
지금 이시간에도 외화획득의 귀중한 시간이 소비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나친 노사간의 마찰은 온 국민의 바램을 역행하는 처사입니다.
당파싸움 속에 온백성이 꿂주렸던 이조말기- 가난했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을 받아 36년간이란 긴세월을 나라잃은 설움에 울어야 했던 눈물겹고 슬픈 현실을 우리는 가슴속깊이 되새기면서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먹을 것 못먹고, 입을 것 못입고, 놀것 못놀고 얼마나 열심히 일을 하였던가요.
고용주는 가정으로 치면 부모가 아닙니까? 부모는 자기가 먹고 싶은것을 참고 때로는 굶주려가면서도 자식에게 만큼은 잘 먹이려고하는 숭고한 마음을 갖고 있읍니다. 부모가 사치하고 허영에 들떠있다면 어느 자식이 부모를 순종하고 존경하겠읍니까?
또, 근로자는 가정으로 치면 자식이 아닙니까? 자식된 도리로 부모에게 대들면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괴롭겠읍니까? 우리 모두 어디 불평불만이 없겠읍니까? 국제경쟁이 높아진 지금 대의신용을 지키지 못하면 우린 또다시 경제대국들에 의해 식민지가 될수밖에 없읍니다. 우선 일을 하면서 노사간에 대화로서 해결토록 합시다.
지나친 노사간의 마찰은 온국민의 바램을 역행하는 처사입니다. 고용주는 종업원을 자식으로 대하고 종업원은 고용주를 부모처럼 생각하면서 대화한다면 5천년 역사와 전통을 가진 문화민족의 멋진 모습을 또한번 세계에 과시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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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벽보
(마리오 암브로지우스, 분단한국, 열화당, 1989,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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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계보도
(한겨레신문, 1994.4.15)
1980년대 재야운동이 전국규모의 공개조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83년 김근태씨가 청년운동단체로 결성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었다.
이후 이부영씨 등이 1984년 조직한 민중민주협의회가 나타났다가 1985년 모든 재야세력을 망라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결성되었다. 1987년 직선제 개헌을 내세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재야와 시민단체를 포괄하는 범국민적인 조직으로 결성돼 직선제 헌법을 쟁취하였다.
그러나 이후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재야는 후보단일화파와 비판적 지지파, 독자후보추대파로 나뉘었다.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내세웠던 임채정 이길재 이해찬 등은 평민연을 거쳐 88년 평민단에 입당하여 13대 총선에서 제도정치권으로 편입하였고, 후보단일화파 가운데 일부는 한겨레당(공동대표 제정구)으로 제도정치의 문을 두드렸고, 독자후보파의 소장세력을 중심으로 일부 그룹이 민중의당(대표 정태윤)을 결성해 총선에 출마했다.
1988년에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이 결성돼 민통련의 법통을 이었다. 같은해 정당추진을 준비하는 인사들이 잇따라 탈퇴해 11월 장기표 등이 중심이돼 진보정당준비모임을 결성했다가 1990년 3월에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위한 민주연합추진위원회'로 이부영 장기표 제정구 등이 모여 정당화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이 또한 제도야당과 어떻게 관계를 정립할 것인가 순서를 둘러싸고 '선통합'과 '선창당'으로 나뉘었다. 이부영 제정구 유인태 등 선통합파는 야권통합을 주장하며 '범민주통합수권정당추진회의'(통추회의)를 추진하나 실패한 뒤 이부영 유인태는 민주연합을 거쳐 이기택 총재의 옛 민주당과 합당하고 제정구는 민-민주당 통합 이후 민주당에 입당하였다. 장기표 이재오 조춘구 등 선창당파는 민중당을 창당해 민중노선을 내세우며 14대 총선에 나섰으나 다시 패배를 겪었다. 1992년에는 전노협 전교조 등 부문운동단체들이 전민련과 함께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을 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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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통일운동
(한길사,한국사-20, 1994, 25)
서로 팔짱을 낀 채 구호를 외치는 학생들. 1988년 6월 홍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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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노동법개정투쟁 (1988.11.13)
(사회사진연구소, 노동자-강철과 눈물의 빛, 동광출판사, 1989, 22)
1988년 11월 13일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및 노동악법 개정 전국노동자대회. 1987년 7.8.9 치열했던 노동자파업투쟁을 집중시켜 5만여명의 전국 노동자대중이 결집, 6.25전쟁 이후 최대의 노동자대회가 이루어졌다. 여의도까지 행진하여 국회의사당 앞에서 [망국 민정당 규탄 및 노동악법개폐촉구대회]를, 전경련 앞에서 [노동악법 옹호하는 독점재벌 규탄대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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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농민투쟁(88.11.17)
(박용수, 민중의 길, 분도출판사, 1988, 271)
1988년 10월 31일 한국 가톨릭 농민회, 한국 기독교 농민회 총연합 등 13단체, 농업 부분별 생산자 단체가 연합, '전국 농민단체 협의회'를 결성하고 '전농협' 주최로 11월 17일 여의도 광장에서 '농축산물 수입저지 및 제값받기 전국농민대회'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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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백담사 은둔(1988.11.23)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1993, 341)
1989년 백담사 은둔 1주년을 맞아 부처님 진신사리 친견 및 봉헌법회에서 불경을 외우고 있는 모습.
전두환은 1988년 11월 23일 오후 3시 20분, 안현태 전 경호실장 등 수행원과 백담사에 도착. 그후 25개월 동안 전두환은 백담사에 머물었다. 백담사 생활을 한지 1년후 전두환은 찾아온 신도들과 대화하면서 " 몇 사람 손봐주고 싶었던 마음을 극복했다"고 신앙고백을 했다고 한다. 또 주지에게 "모든 일이 내게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니 남을 탓하거나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백담사에 와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됐으니 나는 복있는 사람이죠"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1996년 구속되기전 연희동 골목에서 그의 '똘마니'들을 거느리고 기자회견을 할 때 그 살벌한 표정을 보면 절 생활 25개월은 별무효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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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결성(1989.5.28)
(사회사진연구소, 노동자-강철과 눈물의 빛, 동광출판사, 1989, 280)
1989년 5월 28일 연세대에서 전국교원노동조합 발대식.
1986년 5월부터 시작한 교육민주화선언은 7월까지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교육문제를 국민 앞에 전면적으로 부각시켰고, 87년 6월항쟁 이후 교육민주화운동역량은 9월 27일 [전국교사협의회]로 결집되었다. 전교협은 창립이후 {전국교사신문}을 비롯해 지역별 교사신문을 발행하여 선전활동을 강화하였고, 87년 하반기부터 교육악법개정운동을 벌여 서명운동, 집회 등을 통하여 교육관계법상의 독소조항을 부각시켰다. 1988년 9월 정기국회를 앞두고 전교협은 3만8천6백43명이 서명한 교육법개정안을 국회에 청원하였다. 이러한 열기는 11월 20일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참교육 실천을 위한 전국교사대회'로 모아졌다. 전교협은 12월 전국임원연수에서 교직원노조를 건설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후 전국대의원대회 결의와 시도별 결의대회, 89년 5월 14일 1만 5천 명이 참석한 가운데 준비위를 결성하고 전국교직원노조발기인대회를 거쳐 5월 28일 결성하였다. 갖은 탄압을 뚫고 연세대에 모인 1천 5백여 명의 교사들은 '전교조 깃발 아래 참교육 쟁취하자'는 함성속에 연세대에서 전교조 발대식을 열었따다. 결성선언문에서 전교조는 '민족.민주.인간화교육 실천을 위한 참교육운동을 더둑 뜨겁게 전개해 나가겠다'고 선언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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