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 판 <삼국지> “폐하 또한 올바른 길을 자주 의논하시어 스스로 그 길로 드시기를 꾀하소서. 아름다운 말은 살펴 받아들이시고 선제께서 남기신 가르치심을 마음 깊이 새겨 좇으시옵소서. 신은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이제 먼 길을 떠나거니와, 떠남에 즈음하여 표문(表文)을 올리려 하니 눈물이 솟아 더 말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이 글은 “선제(先帝, 유비)께서는 창업의 뜻을 반도 이루시지 못하고 붕어하시고”로 시작하는 제갈공명의 유명한 <출사표>의 마지막 구절이다. <삼국지>에는 공명이 유선에게 <출사표>를 바치는 장면 못지 않게 우국충정과 명천지략이 불꽃 튀기는 장면이 곳곳에 나온다.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의 ‘도원결의’, 유비가 공명을 세 번이나 찾아 나서는 ‘삼고초려’, 촉나라 공명의 지략과 오나라 손권의 병사가 어울려 위나라 조조 군사를 대패시키는 ‘적벽대전’, 공명이 남만의 맹획을 일곱 번 사로잡고 일곱 번 놓아주는 ‘칠종칠금’ 등이 대표적이며 그밖에도 관운장의 결기와 충의, 장판교 대전의 상산 조자룡, 공명에 필적할 만한 오나라 육손의 지략, 죽은 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희롱하는 일, 공명이 아끼던 부하 마속을 일벌백계로 베어버리는 ‘읍참마속’ 등은 동양 문화권에서는 윤리적 규범으로 통한다.
오늘 3월 15일은, 221년에 유비가 한나라의 적통자임을 주장하며 스스로 촉한의 황제에 즉위한 날이다. 이를 계기 삼아 <삼국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아마도 국내 독서 환경으로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가 될 것이다.
박종화 판 <삼국지> 나관중은 원나라 통치에 환멸을 느낀 '촉한정통론'의 지식인이었다. 그는 한족이야말로 천하의 주인이며 촉나라 유비가 그 대통을 이어야 한다는 명분론을 지지했다. 이 촉한정통론은 당의 유지기가 쓴 <사통>, 송의 구양수가 쓴 <정통론>, 소동파가 쓴 <정통변론>, 주희)의 <통감강목> 등을 거치면서 중화주의의 핵심이 된다.
나관중은 촉한정통론에 입각하여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없는 사실을 덧붙여 <삼국지연의>를 집필하였다. 유비의 인덕을 드높이고 공명의 지략을 신의 경지에 이르게 하고, 조조의 품성을 교활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나관중은 허구를 적절히 사용하였다. 적벽대전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공명의 지략에 따라 손권의 병사가 주축이 되어 조조의 군사를 대패시키는 적벽대전은 삼국지에 나오는 모든 전투 가운데 가장 길고 흥미진진한 대목이다.
그런데 많은 부분이 나관중의 상상에 의해 꾸며진 것들이다. 나관중은 조조의 군사를 100만 이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에 비해 유비와 손권의 군사는 약 5만 내외. 5만의 군사로 100만 대군을 무찔렀다면 굉장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조조의 군사를 대략 25만 내외로 계산한다. 게다가 그 25만 중 원소와 유표에게 항복하거나 병에 걸린 병사를 빼면 정예랄 수 있는 병사는 얼마 되지 않는다.
조조에게 화살을 얻어온 일, 동남풍을 비는 제사 등 제갈공명의 지략이 돋보이는 대목도 허구이다. 동남풍을 일으키고(적벽대전) 신장(神將, 귀신 가운데 무력을 맡은 장수신)을 부르고(맹획과의 칠종칠금) 구름을 부르는(사마중달과의 싸움) 등은 제갈공명이 자연의 이치를 살펴서 미리 바람이 불거나 가뭄이 들 것을 예상한 것인데 나관중은 이를 하늘의 뜻에 통탈한 것처럼 묘사하였다. 물론 뽕나무 800주에 만족하며 검소하게 지낸 제갈공명은 높이 평가받을 만한 인물이다. 그는 나라를 일으키고 천자를 돕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승상이 된 후에도 권력에는 초탈하였다.
김구용 판 <삼국지> 이같은 제갈공명 이미지에 대해 가장 독한 비판을 퍼부은 사람은 20세기 초엽의 중국 사상가 곽말약이다. 그는 공명을 ‘반동집단에 논리를 제공한 몽상가이며 입신양명을 위해 인재난에 허덕이는 촉을 택한 인물’이라고 혹평하였다. 또 유비와 그 집단을 현실감각이 결여된 전통주의자로 단정하고 수탈체제로 전락한 한을 계승하려는 반동적 집단이라고 말하였다. 오히려 조조를 새롭게 일어나는 혁명적 영웅이라고 부각시켰다.
곽말약의 이러한 표현은 아무래도 현대 사회주의 사상의 관점에서 삼국 시대를 살핀 것이기 때문에 무리한 대목도 있으나 그 관점은 유효한 측면이 있다.
나관중은 과거의 삼국 시대가 아니라 자신이 살던 시기에 이민족 왕조인 원을 축출하기 위한 사상적 방책으로 촉한정통론을 택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한족의 정통성을 살리기 위해 유비를 극대화하고 그에 맞선 조조를 저평가하였다. 이는 나관중 개인의 회고적인 감상만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상은 명나라 초기의 전반적인 중화주의였으며 당시 어느 경극배우는 조조 역을 하다가 성난 관중에게 맞아 죽었다고도 한다. 나관중은 과거의 역사적인 소재를 당대의 시대의식에 따라 재해석하여 썼을 뿐이다.
국내에 많은 판본들이 있다. 월탄 박종화, 정비석, 김구용, 김홍신, 이문열, 조성기, 황석영, 장정일 등의 소설가들이 썼고 고우영의 만화를 비롯하여 수많은 버전들이 있다.
이문열 판 <삼국지> 내 개인의 독서 체험으로는 박종화, 김구용, 이문열, 황석영 등 네 개의 <삼국지>에서 박종화 판본이 오래 기억에 남아 있다. 김구용은 그 의고의 문투와 시가 이문열의 장식성을 아래로 내친다. 그래서 조금은 둔중해 보이는 감도 있다. 이문열은 '평역'이라는 전제에 의한 때문인지 '개입'과 '해석'이 빈번하다. 황석영은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한 생생함이 있다. 그중 박종화 판이 기억에 남는다고 한 것은 학문적인 고증이나 비평이 아니라 순전히 어릴 적 '독서' 체험이라는 뜻이다.
어릴 적 박종화의 <삼국지>를 여러번 읽었다. 방학 때마다 강원도 정선군 함백에 있는 고모네 집에 형과 함께 기차 타고 내려갔다. 그때 <삼국지>를 들고 갔었다. 초등학교 6학 년 쯤 되었을 무렵인데, 세로 판형에 4단 편집에 되는 거무스름한 양장본이었다. 수많은 인물과 전투와 음모가 뒤엉켜 있어서 뭔지도 모른 채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들 그런 기억이 있을 것이다. 형, 누나, 언니, 조카 등과 함께 둘이 한 권의 책을 동시에 읽던 체험. 고학년의 속도를 저학년이 따라가지 못하여 '잠깐만...... 아직 넘기지 마. 잠깐만' 하면서 보폭을 맞춰 읽던 기억......
그때 강원도 정선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면서 그렇게 읽었던 책이 <삼국지>였다. 아니,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때 그것이 박종화 판본인지도 확실치 않다. 70년대 말이었으므로 이문열, 황석영, 장정일 본은 확실히 아니었고, 5권으로 된 것이었는데, 분명치 않다.
아무튼, 이 박종화 판본에 대하여 문학평론가 진정석은 "풍부한 낭만성과 대중성, 한학적 교양을 배경으로 한 유장한 고어투의 문체 등으로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위상을 확보, 번역문학의 새로운 수준을 보여주었다"고 평한 적 있다.
황석영 판 <삼국지> <삼국지> 번역의 역사와 현황에 대해 깊이 연구한 사람은 인하대 한국학연구소의 윤진현 박사다. 그에 따르면 오늘의 '소설 문화'는 물론이고 조선시대에도 기대승, 허균, 김만중 등의 문적에 삼국지에 대한 언급이 많다고 한다. 사실 <삼국지>는 흥미로운 이야기일 뿐 성리학의 엄격한 틀에 속하는 전범은 아니었다.
윤진현 박사에 따르면, 국내 판본은 주로 모종강 본을 저본으로 한 정역류와 일본 요시카와 에이지 본을 바탕으로 하는 일본 재번역류, 그리고 국내 작가들이 임의로 번역한 번안류로 나뉠 수 있다. 요시카와 에이지 역본은 1939년 9월 20일부터 1943년 9월 14일까지 <경성일보>에 일본어로 연재된 바 있고 이후 김광주, 방기환, 이원섭 등이 판본으로 활용하였다. 정역류는 김구용, 황석영, 정원기, 정소문 등의 것이다. 이문열, 정비석, 김홍신 그리고 가장 최근의 기록이 되는 장정일은 번안류에 속할 수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이 팔린 것은 아무래도 이문열의 민음사 판 <삼국지>다. 출판사 측에 따르면 1988년 처음 출간된 이후 현재까지 1700만 부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비판이 있었다. 간행 초기부터 장안의 고수들이 숱한 오류를 지적하였고 그래서 2002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여기서도 오류가 발견되었다. 중국의 동포 작가 리동혁은 2002년 개정판의 오류를 점검하여 <삼국지가 울고 있네>(도서출판 금토)를 펴내기도 했다. 그래서 저자와 출판사는 2004년에 재개정판을 또 냈다.
장정일 판 <삼국지> 그런데 그 내용의 부실이나 오류와 무관하게 그리고 흡입력이 강한 이문열 특유의 의고체적 문투와 무관하게, 나는 출판사 측의 대대적인 광고 공세를 기억하고 또한 이를 지적하고 싶다. 이문열 삼국지는 한때 논술고사를 준비하는 필독서로 광고된 적 있다. 서울대생 운운하는 광고 문구를 앞세운 광고가 상당히 오랫동안 전개된 적 있다.
나는 그 진위 여부(서울대생 운운)를 떠나서, 이 나라를 대표적인 출판사와 작가에게 정말로 <삼국지>가 '논술고사 필독서'인지 물어보고 싶다. 이는 지난 십여 년의 논술 고사에서 삼국지의 어느 대목이 몇 번이나 기출 문제의 제시문으로 출제되었던가 하는 점을 떠나서라도, 과연 '논술 고사 필독서'로 <삼국지>를, 입시철에 몇 차례가 아니라) 그토록 몇 해에 걸쳐 지속적으로 광고를 할 만한 것인지, 되물어보기를 바란다.
이것은 이문열이 '보수 작가'라서 딴지를 거는 것도 아니다. 상당히 귀하고 좋은 책을 많이 낸 대표적인 출판사의 편집자들, 그리고 어쨌거나 한국 문학계의 뚜렷한 자취를 남기고 있는 작가에게 질문을 해보는 것이다.
고우영 판 만화 <삼국지> 범위를 아주 좁혀서 말한다면, '논술고사 필독서'로는 이문열 자신의 '필론의 돼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금시조' 같은 소설이 <삼국지> 보다는 훨씬 더 복합적인 문제를 제공하지 않는가. 어느 방송사의 <불만제로> 같은 프로그램에서 다룰 만한, 그런 '과대포장 광고'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삼국지>를 세 번 읽으면 인생을 안다'는 식의 문투가 심한 과장이지만 소박한 면은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좀더 범위를 확장하여 말한다면, 이문열이나 황석영이나 그 아래 연배는 장정일이나 왜 <삼국지>를 꽤 오랜 시간을 들여 번역을 하는지 의아스럽다. 아무리 '이야기'라 하더라도 한문을 깊이 연마한 다음에 가능한 것이 번역일텐데, 그 작업을 제대로 해내자면 한문 공부와 역사 공부와 번역 공부가 전제로 되고 또한 대체로 10권 분량이므로 2년 안팎의 시간을 바쳐야 하는데, 진실로 한국 문학사에서 도저히 생략할 수 없는 뚜렷한 족적의 작가들이 왜 그런 작업을 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농반진반의 어투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황석영은 어느 인터뷰에서 '노후대책'이었다고 했는데, 퇴직금 없는 자유직업 종사자이므로 생각해 볼만한 기획이지만, 4번 타자 황석영이 설마 그럴리야. 혹시 이문열이나 황석영이나 장정일이나 다들 대형 출판사와의 수십만 수백만의 판매부수를 고려하는 '기획 사업'에 동참 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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