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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평양까지...."
홍 근 수(이사장)
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요금 이만 원
소련도 가고 달나라도 가고 못 가는 곳 없는데
광주보다 더 가까운 평양은 왜 못 가
우리 민족 우리네 땅 평양만 왜 못 가
경적을 울리며 서울에서 평양까지
꿈속에라도 신명나게 달려 볼란다
분단 세력 몰아내고 통일만 된다면
돈 못 받아도 나는 좋아 이산가족 태우고 갈래
돌아올 때 빈차걸랑 울다 죽은 내 형제들
묵은 편지 원혼이나 거두어 오지
- 조재형 글, 윤민석 곡
멀고도 가까운 '서울에서 평양까지'
'친북 인사'로 널리 알려져 온 나 같은 사람들, 그것도 적은 숫자가 아닌 42명이 한꺼번에 10월 9일 월요일부터 5박 6일간 북을 다녀왔다. 이것은 일종의 사건이다. 소위 '국가보안법'이라는 실정법을 정부 당국과 공모하여 그 법이 금지하고 있는 거의 모든 조항을 위반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것이 실정법 위반사항이면서도 다녀와서 어떠
한 처벌도 받지 않은 것도 그렇다. 그동안 방북이나 이북 동포의 만남이 허용되지 않았었던 것에 비교해, 이번에는 방북이 당국의 '축복'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과거와 전적으로 달랐다. 과거에 방북 신청도 해 보았고 이북 동포 접촉신청도 여러 차례 해 보았으나 그때마다 불허 통지로 못 갔었는데, 이번에는 초특급으로 수속을 하고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은 당국이 6·15 이후 대북관계에서 전적으로 다른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것을 실증하는 것이었다.
이번 평양행은 중대한 역사적 성격의 여행이었다. 지난 6월 달 김대중 대통령 일행이 이북의 수도 평양에 갔던 때와 마찬가지로 국가보안법이 전혀 무력했던 것이다. 토요일에 신청서를 내고 일요일 오후에 통일연수원의 교육을 받게 하고 월요일 아침에 방북 하도록 정부 당국에서 편법을 쓴 것이다. 모든 것을 당국이 직접 솔선 나서서 추진하여 그 어려운 일들을 모두 가능하게 했었기 때문에 이번 평양행 여행이 가능했다. 이것은 관료적인 한국 정부를 생각할 때 불가사의한 일이다.
비록 북에 가서 어떤 정치활동도 하지 않고 다만 '참관'만 한다는 조건이었지만 이북의 최대 정치적 명절인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55돌 행사에 가게 하였다는 것, 비록 판문점 통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3국을 경유한 것이 아니고 직항로를 이용하게 하였다는 것, 북에서 특별기를 보내서 초청한 사람들을 태워가고 또 남으로 보내주는 방식을 허락했다는 것, 특히 남한 당국이 거절해 왔던 남한의 정당·사회 단체장들과 재야 대표들을 북의 조선노동당 창건 55?1)을 축하하도록 북으로 보냈다는 것, 등은 확실히 근본적인 정책의 전환이고 통큰 결단이었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 초청장이 와서 방북한 제 정당·사회 단체는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한국노총, 전농, 전국연합, 민화협, 여성단체연합, 민예총, 민가협, 등은 물론 개신교, 천주교, 불교, 천도교, 등 사회·종교단체까지 각기 이북의 상대 단체들이나 민화협이 주로 초청장을 보냈었다. 그러나 모두 같은 일행으로 같이 갔고 이북에서도 모두 같은 일행으로 영접하였으며 일제히 이북에서의 5박 6일의 일정을 마치고 모두 같이 서울로 귀환하게 했었다.
이것은 모두 6·15 이후 한반도의 변화된 상황을 말해 주는 것이다. 세상이 참으로 많이 변했음을 우리는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떠나는 날 아침 택시를 타고 공항을 가면서 기사와 나눈 대화 가운데서도 이번 여행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놀라는 반응을 감지할 수 있었다. "어디 중요한 곳에 가는 모양입니다."라는 택시 기사의 말에 "예, 평양을 갑니다"고 했더니 그 기사가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며 "예?!"라고 큰 소리로 반문한 것을 보면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 아니 차라리 혼란에 빠져 있는 표정이었다. 여태까지 그런 손님이 없었고 그런 여행의 행선지에 관해 들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사실은 마음만 먹으면 내 나라 내 땅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도 지난 반세기가 넘도록 그 당연함이 금지, 불법시 되었고 이북은 금단의 땅이었다. 내가 이번에 바쁜 스케줄을 취소하고 이북을 가게 된 중요한 동기 중 하나는 앞으로 남북 교류의 길을 보다 더 넓히는 일에 보탬이 되었으면 해서였다.
다른 사람들이 가는 것은 미리 알았지만, 김포공항에서 예의 그 한복을 입고 나온 백기완 선생을 만났을 때 이는 정말 뜻밖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뜻밖의 일은 어제까지만 해도 가는 것으로 알았던 여러 사람들이 방북 차림을 하고 김포공항에 나왔으나 불허 통고를 받게 되어 못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어서 여행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여 한동안 방북 여부마저 불투명하였다.
'운동판'의 의리대로 하면 이런 경우 의리상으로라도 안 가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또 모처럼 정부에서 통크게 마음먹고 이북으로 보내려 하는데 정부 내의 강온 양 입장의 차이 때문에 못 간다면 이도 또한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방북 자체가 불투명한 채로 논의에 논의를 거듭하면서 공항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지막에 민주노총과 전국연합 등이 이번 여행의 중요성 등을 감안 크게 양보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이번 방북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김포공항에 내려앉은 채로 무작정 기다리고 있던 이북 특별기를 간신히 탑승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방북이 그만큼 어려웠고 큰 진통 끝에 가능하게 된 것은 그것이 마치도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통일의 아기를 분만하는' 역사적인 여행임을 알려 주는 것이라고 할지?
10월 9일 1시 경 우리는 북의 특별기에 올라 드디어 이륙하여 하늘 높이 올라갔다. 6·15 남북 정상회담 때 개설되었다는 직항로로 우리는 평양을 향해 날아갔다. 직항로의 거리는 약 530 여 킬로미터이고 비행시간은 1 시간 남짓이었다. 제주도에 가는 거리와 시간과 비슷한 것 같았다. 그러나 김포에서 평양으로 직선 거리로 가면 그보다 훨씬 가까울 것이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강한 이북 액센트를 가진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짐에 따라 우리는 북한 비행기를 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되었다. 비행기 창 밖으로 눈길을 돌리면서 이남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지고 그 대신 이북으로 점점 더 가까이 날아가고 있는 것을 보고 깊은 감회에 젖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리라. 북에서 마련한 푸짐하고 큰 도시락을 먹고 과일과 음료수 등을 마시고 나니 이내 평양공항에 착륙할 예정이라는 기내 방송이 나왔다. 김포공항을 이륙한지 얼마되지 않은 것 같은 데 벌써 목적지인 평양의 순안 비행장에 도착하였다. 서울과 평양은 정말 이렇게 가까운데 그렇게 멀게 여겨졌던 것이다.
북에서 정한 순서에 따라 비행기를 내리게 되었는데 민주노동당이 제일 먼저 내리게 되었다. 이남에서는 푸대접을 받는 존재가 이북에 오니 아주 대우가 달라졌다고 우습다는 농담들을 하기도 했다. 나는 민주노동당 인사들에게 북의 조선 노동당과 '노동당'이란 돌림자가 같아서 대우를 받는다고 농담을 하였다. 우리가 처음으로 평양 공항에 발을 디뎠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가히 역사적이었다. 비행장에는 약 5백여명으로 보이는 환영객들이 붉은 가화를 흔들고 '조국통일' 등의 구호를 연호하면서 우리를 환영해주었다. 그들은 우리가 본래 도착 예정시간이었던 오전 11시부터 무려 3시간 이상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를 환영하는 이북의 시민들 옆을 한 줄로 서서 지나면서 일일이 답례하였다. 대개 여성들이 주를 이룬 그 환영객들의 얼굴은 깡마르고 영양이 그리 좋지 않은 혈색들이었으며 화장품도 얼굴에 바르지 않은 모양으로 내 마음 한 곳에서 뭉클함을 느꼈다. 이는 이남에서 간 다른 분들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남에서는 이적단체 요원, 이북에서는 영웅인 '귀빈'
간단히 단체별로 사진을 찍은 후 아무런 공식 행사 없이 우리는 숙소로 향했다. 우리에 대한 이북의 대접은 특별하였다. 42명 전부를 벤츠 승용차로 모셨다는 것, 한 차에 두 사람씩만 태웠으니 모두 스물 한 대인 셈이었다. 나는 30 여년 전에 미국에서 한번 타 본 이래로 벤츠를 타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우리를 외국 국빈이 머무는 초대소에 머물게 하고 이북에 체류하는 동안 그야말로 극진히 대접해 주었다. 나는 속으로 너무나 다른 곳에 와 있음과 함께 '죄송'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북의 내 동포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남 당국으로부터는 '문제' 많은 '말썽꾸러기'들이고 기껏해야 '이적단체의 요원'으로 '대접'받았던 우리들이 분단의 다른 한쪽인 이북에 와서는 '국빈' 대접을 받다니...... 또 한편 이북 동포들이 어려운 경제 때문에 고생을 한다는 데 우리까지 이렇게 폐를 끼친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았다.
사진과 TV에서만 보았던 평양 거리를 이렇게 자동차를 타고 달리면서 두 눈으로 보게 되었다니 그 감개는 말할 수 없었다. 처음 보는 평양시는 질서정연하고 맑고 깨끗하였다. 좌우에 지나가는 광경들은 우리 눈에는 신기하기만 하였다. 평양에서 36 킬로미터를 달리자 강동 8 킬로미터라는 이정표가 나오는 곳이 나왔고 그 지점에서 우리가 탄 자동차들은 큰 길에서 꺾어 돌아 양쪽에 가로수가 우거진 도로로 들어갔다. 다 온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들어가자 넒은 주차장이 나왔고 거기에 2층으로 된 큰 빌딩이 나왔다. 그 서쪽 옆에는 대동강 상류라 하였는데 대야 같이 넓은 물이 호수처럼 보였고 집은 여기 저기 아름다운 서양식 집 스타일의 별장 같은 것들이 있었다. 우리는 짐을 방에다 놓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저녁 밥 먹기 전에 우리는 초대소 내 강을 따라 산책을 하였다. 이북 출신인 백기완 선생은 감개가 무량한 듯 대동강변에 쭈그리고 앉아서 자꾸 눈물을 지었다. 왠지 눈물이 자꾸 난다면서......
대단한 대접을 받으면서 우리가 그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인가 하는 질문을 속으로부터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남에서 간 42명 대표들 대부분은 그 동안 민족화해와 통일을 위해서 투쟁했고 그 '덕분'에 고문과 감옥 신세 등을 감수했으며 사회적으로 온갖 불이익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왜 우리는 분단의 한쪽인 이남 당국으로부터는 '박해'를 당하고 분단의 다른 한쪽인 이북 당국으로부터는 이렇게 칙사대접을 받는 존재인가?
초대소는 강동군의 봉화 초대소라 하였다. 각기 숙소 건물로 갔다. 대게 2 층으로 된 큰집으로 서양식의 별장 스타일이었다. 아래층에는 라운지와 회의실, 등을 갖추고 있었으며 2층에는 큰 침실 세 개가 있었다. 한 사람이 한 방씩이었다. 나는 백기완 선생과 김영대 민주노총 부위원장과 같이 핑크 색의 17동에 배치되었다. 방 가운데 큰 침대가 있고 냉장고도 있었으며 응접실까지 있는 넓은 방이었다. 화장실과 목욕실도 넓고 깨끗하였다. 침실은 더할 데 없이 크고 훌륭하였다. 나는 이북 땅에서의 첫 날 밤을 편히 곤하게 깊이 잤다.
비 맞으며 참관한 조선 노동당 창건 55 돌 축하행사
평양에서의 둘째 날인 10월 10일이었다. 이북의 최대 명절이라는 이날은 날씨가 잔뜩 흐리고 비가 뿌렸다. 인구가 3백만명도 못되고, 녹색지대의 비율이 40% 가량이라고 하는 평양시는 온통 노동당 55? 경축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공기 맑고 물 맑고 거리도 깨끗하고 서울 같이 조밀하지 않고 넉넉하게 보였다. 6·25 후에 독일인의 설계로 새로 건설하였다는 평양은 아름다웠고 여유가 있어 보였다. 사람이 사람다운 생을 살려면 적어도 이 정도의 환경은 갖추어져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무력부와 조선로동당평양시위원회가 공동 초대하는 조선로동당 창건 55? 경축열병식 및 군중시위라는 이름의 행사에 참관을 위해 8시 10분까지 김일성 광장에 입장을 완료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아침 7시 경 일직부터 서둘러 초대소를 떠나야 했다. 들어가는 데 보안 검사 절차가 있었다. 우리는 외국 손님들과 최고 초대객들의 좌석이라는 주석단 바로 우측 아래쪽에 위치한 곳에 안내되었다. 그곳은 가운데 넓은 운동장이 있어 서양의 스타디움 같이 생겼으나 그런 시설을 갖추지는 않았다.
식은 정시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가 우리 식과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갑자기 그때까지 기계처럼 마당에 서 있던 그 수많은 군인들과 관중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펄쩍 펄쩍 뛰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치 열광상태에 빠진 '광신도들' 같이 행동하는 것이었다. 군인들과 인민들이 그런 행동을 보인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선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대회사 비슷한 것을 하였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 기억할 수 없지만, 남쪽의 공안당국의 척도에 의하면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 '고무·찬양'하는 발언이었던 것 같았다. 정작 이 프로그램의 '백미'라 할 수 있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연설은 없었다. 이어 총참모장 격인 군인 지휘관이 자동차를 타고 한바퀴 돈 다음에 김정일 국방위원장 앞에 와서 경례를 하고 무어라고 보고한 후 열병식이 시작되었다.
수십만 명의 군인들, 비록 무장은 하지 않았으나 무리를 이루어 열병식을 하는 광경을 보는 우리는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면 끝에 대동강 강둑 같은 것이 있었는데 수많은 군인들이 그 언덕을 계속 넘어왔고 나중에는 꽃을 든 수많은 인민들의 떼가 끝이 없이 계속 넘어 왔다. 그 많은 숫자의 군인들과 인민들의 일사불란한 행진에 우리의 벌어진 입이 닫혀 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 열병식은 훌륭하였고 화려하였다. 일찍이 그런 광경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신기하게 보였던 것이 사실이었으리라. 경축식이 끝난 것은 두어 시간이 훨씬 넘어서였다. 우리는 내내 비를 맞으면서 서서 참관하여야 하였다.
나는 무장하지 않은 이북의 수많은 군인들의 일사불란한 열병식을 보면서, 또 오면서 본 "위대한 선군정치2) 만세! 총진격" 등의 구호를 보면서 이북이 과연 어떤 인사가 평하는 대로 '풀을 뜯는 사자'인가? 아니면 자신을 뜯어먹으려는 '사자를 먹는 풀'인가? 하고 속으로 '논쟁'하였다.
마치고 나와서 버스 타러 가는 데 갑자기 뜻밖의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몇 년 전에 느닷없이 북으로 갔다는 윤성식 선생이 아닌가! 나는 너무나 반가워 어쩔 줄을 몰라 한참 말을 잃을 정도였다. 그는 아주 건강하고 젊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이북의 의술이 서양의학이 지배하고 있는 이남보다 확실히 우수하다고 판단하였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그는 이남에서 '희망이 없는' 상태라는 진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이북에 와서 건강이 회복되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 만남이 전적으로 의외였기에 그 기쁨 또한 더 컸다. '죽지 않고 살아있으면 이렇게 만나게도 되는구나!' 하고 새삼 느꼈다. 서울로 떠나기 전에 우리 둘이 꼭 좀 만나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것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평양에서 돌아와서 오후에 우리는 초대소 근방에 있는 단군릉을 보러 갔다. 같은 강동군이어서 숙소에서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때 이집트의 어떤 신전이나 박물관 모양의 돌릉으로 보였다. 날씨는 여전히 비가 뿌렸지만, 단군릉을 보자는 우리의 열심은 그 정도의 비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은 듯 했다.
안내 책임자 같이 보이는 여성이 비전향 장기수 김린서 선생의 둘째 딸이라고 하여 더욱 반가웠다. 그가 아주 어릴 때 아버지를 보고는 이번에 처음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동안 그를 돌봐준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다.
안내자의 설명을 듣고 돌 무덤 속으로 들어가니 어두운 곳에 박달나무로 된 두 개의 큰 관이 있었다. 햇빛을 보거나 사진을 찍으면 상한다고 하여 씌워 놓았는데 300불을 내면 관을 열어 보일 수 있다고 하였으나 우리 일행 중 아무도 300불을 내 놓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 박달나무 관속에 돌무더기가 들었는지 인간 뼈가 들었는지 볼 수 없었다. 백기완 선생은 그곳에 단군 묘가 있다는 이야기를 어릴 때 듣고 배웠노라고 하면서 그것이 새롭거나 조작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 오른 쪽 잔디밭에 꽂혀 있는 큰칼을 보고서 그것은 비파무늬 고대 한국의 칼이었다고 말해 주었다. 릉 앞에서 내려다보니 장관이었다. 풍수적으로 보면 좌청룡우백호인데 그 자리는 김일성 주석이 정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돌계단 양쪽에는 단군의 아들들과 신하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고시래'라는 신하도 있었는데 그가 농사를 관장하였다고 하였고 농부들이 술이나 음식을 먹을 때 '고시래'라고 말하면서 술이나 음식을 뿌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했다. 208개라는 계단을 다 내려오니 단군릉 개건기념비라는 것이 있었고 그 맞은 편에는 단군릉 발굴 때 나왔다는 본래의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우리는 저녁에 다시 평양으로 나갔다. 이날은 6시 30분에 인민궁전에서 노동당 창건 55주년 기념 만찬에 초대되었기 때문이었다. 초대장을 가지고 거대한 건물로 들어갔다. 수 백명의 사람들이 참석했는데 아마도 북의 '고위층'과 유명 인사들이 모두 참석한 모양이었다. 한 쪽에는 군복을 입은 장군들이 앉았고 훈장을 주렁주렁 단 사람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김영남 위원장이 들어서자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고 그가 인사말을 하고 건배를 요청하자 만찬이 시작되었다.
한 참 시간이 흐르니 사람들이 여기 저기 다니면서 서로 인사를 하고 사진을 찍곤 하였다. 북의 세계 마라톤 선수로 작년에 이름을 떨쳤다는 가냘픈 여성, 또 북의 TV 방송의 앵커우먼 등이 인기였다. 이번에 평양 취재를 위해서 남의 SBS 방송사에서 중계차 한 대와 기자 29명을 파견하였다고 했고 그들은 매일 생방송으로 평양 소식을 전했다고 했다. 이 연회에서 또 반갑게 만난 사람들은 이남에서 온 한겨례 신문 기자들이었다. 북경특파원과 서울에서 직접 왔다는 기자 등 세 분이었다.
옆 테이블에 가슴에 빨간 바탕의 천에 '조선로동당 창건 55? 경축'이라고 흰 글씨로 쓰고 또 '재일동포'라는 글도 쓰여진 턱받이 같은 것을 두르고 청색 옷을 입은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내게 와서 인사하였는데 일본에서 온 조총련계 젊은이들의 회장이라고 하였다. 그는 언제가 내 강연을 들었다면서 그 이야기의 줄거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늘 기억하고 한번 만나서 감사의 인사를 하려던 참이었다며 사진을 함께 찍자고 요청하기도 했다. 9시나 되어 김영남 위원장이 자리를 뜨니 그제야 만찬이 끝나고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왔다.
경쟁적 거짓 광고가 아니라 생과 역사의 '복음'(?)인 구호들
다음날인 10월 11일 아침 8시에 우리는 다시 평양시로 향해 떠났다. 다들 차를 타고 기다리고 있는데 일행 가운데 나타나지 않은 한 사람 때문에 우리 모두는 차를 탄 채 기다려야 했다. 차로 숙소에 다녀 온 안내원 동무가 오늘 아침에 출발시각이 그에게 "침투되지 않았다"는 말을 하여 우리가 모두 어리둥절해 하고 웃었다. 알고 보니 그 말의 뜻은 '알고 있지 못하다,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았다'는 뜻이라 했다. 이것은 이북 인민들의 일상적인 생활정서는 '투쟁적'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닐까?
오늘 날씨는 어제에 이어 여전히 흐리고 비가 뿌리며 음산하였다. 우리는 평양의 명물인 주체탑을 가 보았다. 과연 높고 웅장하였다. 150층 가량 된다는 높은 탑 위에 올라가서 평양시를 동서남북을 보는 데 날씨가 흐리고 안개가 끼어 시야가 어두워 그리 멀리는 볼 수 없었다. 횃불 높이가 약 10미터라는데 밤에는 이글이글 타는 것 같이 된다고 하였다.
우리가 평양 시내에 들어 갈 때마다 지나가는 길에 높은 탑이 있고 높은 문이 있었다. 전자는 김일성 수령의 '영생탑'이라고 하였다. 그 탑에는 위에서 아래로 "김일성 수령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글이 씌어져 있었다. 후자는 개선문이라 했다. 우리는 그 곳을 모두 가 보았다. 김일성 장군이 1945년에 귀국하여 연설한 것을 기념하여 그 자리에 세웠다는 이 개선문은 프랑스의 개선문보다 더 높다고 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과연 웅장하였다. 거기 '장백산 줄기줄기...' 라는 김일성의 노래를 한쪽에 한 절씩, 두 절을 써 놓은 것을 올려다 볼 수 있었다. 2절은 정말 완벽한 시라고 우리와 동행한 한 시인이 말하였다.
평양 거리는 전형적인 자본주의적 소비도시인 서울과 달리 일체의 광고가 없었다. 그 대신 중요한 광고가 붙어있을 자리에는 구호들이 여기 저기 붙어 있었다. 그것이 아마 이 사람들에게는 '복음'인 것 같이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순서 없이 몇 가지를 소개해 본다.
"위대한 김일성 주석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신다; 우리 운명의 영원한 수호자 김정일 장군 위원장; 위대한 장군님만 계시면 우리는 이긴다; 우리 당의 영원한 사상인 주체사상; 우리의 집은 당의 품, 위대한 어머니 당; 위대한 어머니 당에 영광 있으라; 모든 것을 우리 식대로; 내 나라가 제일로 좋아; 자력갱생; 인덕정치 광폭정치3); 결사옹위; 당의 사상중시, 총대중시, 과학중시 로선을 철저히 지키자;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 세상에 부럼 없이 자라난 우리; 혁명적인 정신; 은혜로운 우리 당; 우리 당이신 김정일 장군 만세; 모두가 속도전 모두가 앞으로;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상 유격대식으로; 오늘을 위한 오늘을 살지 말고 내일을 위한 오늘을 살자 ...."
이남은 소비사회여서 요소마다 경쟁적 거짓 광고요 전광판이 우리의 눈을 현란하게 하고 영혼을 병들게 한다. 그러나 이북에는 소비사회에서 광고가 붙어 있을 곳이면 구호를 대신 써 놓았다. 이 구호가 이북 사회의 가치관을 말하고 또 생과 역사의 목표를 말하는 '복음'인가?
우리는 또 그 유명하다는 지하철을 타 보러 갔다. 그 깊은 곳, 핵전쟁이 난다고 해도 지하로 대피하면 살아 남는다는 곳을 지하철 역 벽 위에 그려놓은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감상하며 실제로 타보기 위해 내려갔던 것이다. 과연 깊었다. 지상에서 지하철까지의 높이는 약 150미터나 된다고 하였다. 우리는 경험 삼아 실제로 지하철역을 내려가 보고 지하철을 타보기로 하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에스컬레이터 속도는 매우 빨랐다. 지하 깊숙이 있는 지하철역의 벽 그림들은 비록 대부분이 사회주의 체제에 관련 된 것이기는 하지만, 아름답고 훌륭하였다. 작은 타일 같은 것으로 벽을 단장을 하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만일 먼지나 때가 끼면 물 청소를 하여 다시 깨끗한 새 작품 같이 보이게 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고 하였다. 우리가 간 역은 부흥역이었는데 거기서 영광역까지 한 정거장을 실제로 타보았다. 지하철은 붐비지 않았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일을 한다면 출퇴근 시간외에는 서울 사람들이 겪고 있는 교통체증이나 붐빌 이유는 전혀 없을 것이다. 평양의 지하철은 서울의 지하철과는 달리 전혀 붐비지 않았다. 우리가 지하철역에서 나왔을 때 그렇게 많이 들어 익히 알고 있는 고려호텔이 바로 눈앞에 보였다. 그 호텔을 쳐다보면서 그곳에서 머물렀다는 수많은 평양 방문객들, 아직도 그 호텔에 머물고 있다는 이곳에서 최근에 돌아간 비전향 장기수 노인들을 생각하였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만수대의 예술창작사로 갔다. 오늘도 '휴식'4)이어서 예술가들은 만날 수 없었지만, 그들의 작품은 만날 수 있었다. 돌가루로 그림을 그렸다는 것, 유리의 양쪽에 선녀 그림을 그렸는데 모두가 바른 모양이었다는 것, 등이 눈에 띄었다. 일행 중에는 더러 작품을 사는 사람도 있었다. 지은희 여성단체연합 대표는 큰 그림을 사기도 했다.
평양에 있는 애국열사릉에 가 본 경험 역시 북을 다시 보게 하였다. 입구에 들어서니 검은 색의 큰 바위가 나왔고 그 위에 구리 빛 글씨로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져 있었다.
"조국의 해방과 사회주의 건설, 나라의 통일 위업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희생된 애국열사들의 위훈은 '조국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1986년 9월 17일"
김일성 수령이 친필로 쓴 것이라 했다. 김구 선생이 48년엔가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차 북을 갔다가 일제시대에 민족해방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의 후손들이 잘 살도록 해 주었던 것을 직접 목격하고서는 "우리 남이 졌다"고 탄식했다는 말을 다시 생각하였다. 우리는 급히 지나가며 여러 묘를 보았다. 묘비에다 돌 사진을 새겨 놓은 것이 아주 특이했다. 김창준이란 이름이 눈에 띄어 나와 박순경 교수는 그 비석 옆에서 사진을 촬영했다. 그는 감리교 목사였지만, 사회주의자로 이북에 올라간 분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분이다.
우리는 평양의 세 개의 섬 중의 하나라는 쑥섬으로 갔다. 이곳이 1948년에 김구 선생이 참석하였다는 남북 연석회의 장소였다. 말하자면 그때 이래로 두번째 평양에 온 남의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인 셈이어서 그런지 모두 깊은 관심을 보였다. 99년 8월 10일에 세웠다는 이 탑은 이름하여 통일전선탑, 당시 북에서 15명, 남에서 41명이 참석하였다고 하여 화강석 56개를 써서 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높이 13미터, 돌 무게가 550톤이라는 그 엄청난 돌 탑 뒤쪽에는 특별히 중요한 대표자 12분의 이름을 새겨놓았는데 김일성, 김책, 김구, 김규식, 홍명희, 백남운, 조소앙, 엄항섭, 조완구, 최동오, 김종항, 정진석 등이었다. 134년이 되었다는 큰 버드나무, 돗자리, 원두막, 목선 등이 보존되어 있었다. 그 옛날 김구 선생이 남북 연석회의에 왔을 때에 이 원두막에 올라가서 쉬었고 돗자리를 사용하였으며 대동강에서 목선을 타기도 했다고 하였다.
저녁에 우리는 다시 김일성 광장으로 갔다. 이날 밤에 횃불5)행진에 초대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날 날씨는 여전히 흐리고 비가 뿌렸으며 기온은 싸늘하였다. 처음에는 1시간 가량 집단 춤을 추었다. 춤추는 사람들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내내 앉아서 그것을 관람해야 하는 우리는 좀 지루하였다. 그러던 차에 화려한 불꽃놀이와 함께 횃불행진이 시작되었다. 조명을 다 끄니 광경이 아주 일신되었다. 춤추던 사람들은 삽시간에 물러가고 두 손에 모두 횃불을 든 사람들이 광장을 메웠다. 그것으로 온갖 춤을 추고 온갖 모양을 만들어 냈다. 불의 파도... 정말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들 뒤로는 주체탑이 우리 정면으로 보였는데 그 꼭대기의 봉화가 마치 실제로 불이 이글이글 타는 듯한 모양으로 평양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남북 통일이 되었을 때 이남은 내놓을 것이 하나도 없지만, 북은 내놓을 만한 명물이 아주 많다는 평에 대하여 이것만큼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우리가 '참관'했던 엄청난 행사들이나 우리가 가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것들은 차치하더라도 주체탑, 개선문, 지하철, 묘향산 선물전시관 등만 해도 민족의 유산으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구경을 다 마치고 집으로 왔을 때, 모두가 감정이 고조되어 있었다. 그러나 백기완 선생은 달랐다. 그는 첫 2~3일 동안 화가 잔뜩 나서 술을 많이 마시며 거침없이 욕설과 쌍 소리를 해대고 북에 대하여 소리소리 지르며 욕설을 퍼부어 댔다. 그는 "내가 일생을 고생하면서 통일운동을 하였는데 그래 나 백기완을 몰라준단 말인가? 이 노인을 조사를 하느니 초대장을 내놓으라니 말이 되느냐? 이제 이 놈의 북에는 절대로 안 온다. 사람을 볼라봐도 분수가 있지..." 그리고 또 그는 "이번에 내 어머니와 누님을 만나게 해 주지 않으면 절대로 가만 두지 않는다. 이 놈의 집을 떼려 뿌시든가 불을 질러 버릴 것이다." 등의 항의성 경고를 많이 했던 그였다. 그 덕분이겠지만 백 선생은 55년만에 처음으로 황해도에 산다는 누님과의 만남이 실현되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듣자 그가 말한 대로 술을 일체 입에 대지 않고 말이 없었다. 그의 모습은 우수에 젖은 키에르케고르의 얼굴 같이 되어 있었다. 그는 나이가 늙어 가는 데 대하여, 또 민족의 분단 상황 등에 대하여 우울한 기분에 잠기는 듯 했다. 그가 원한 것은 직접 고향에 가보는 것이었고, 또 어머님과 누님을 꼭 만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애처롭게도 그의 어머님은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의 쓰라린 마음은 우리 모두의 슬픈 마음일 것이다. 그는 고향인 황해도로 직접 가서 누님을 만나서 하루 밤이라도 같이 지냈으면 희망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누님이 평양으로 와서 옥류관에서 따로 만나 하루 오전을 보낸다는 정도로 남북 지도자들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남에서 간 사람들이 선물과 돈 등을 주어 '백수'로 왔던 백 선생은 누님에게 몇 푼이라도 선물을 전할 수 있었다. 우리 모두의 이산 가족을 만나는 심정으로 그가 누님을 만나는 것을 함께 기뻐하였다.
'묘향산 국제친선전시관'이란?
평양에서의 나흘째 되는 10월 12일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날씨가 깨끗하게 개어 있었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활짝 개인 아침 하늘을 볼 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오늘은 초대소에서 약 200 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는 묘향산을 가기로 한 날이다. 아침 8시경에 출발하였다.
오래간만에 날씨도 쾌청했지만, 북의 시골 풍경을 보자 분단에서 오는 답답함에서 해방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마음이 아팠다. 길은 잘 닦여 있었는데 길에 자동차가 거의 보이지 않은 것을 보았다. 도로가 마치 자동차 주차장이 된 듯한 서울과는 아주 대조적이었고 장거리 버스 같은 것은 물론 트럭도 볼 수 없었다. 이점이 마음 아팠고 답답하였다.
조림한 것으로 보이는 나무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낮은 산이 없지는 않았지만, 대개의 야산은 왠지 알 수 없으나 나무가 거의 없고 붉은 야산 그대로인 것이 머리카락이 다 빠진 대머리 같이 보였고 길가에는 백해무익한 아카시아 나무들만 눈에 띄었을 때 우리의 마음은 역시 답답하였다. 작은 동네들이 여기 저기 보였으나 동구능이나 그 마을을 상징하는 큰 고목들이 보이지 않은 것을 보고 백기완 선생은 "거주지만 있지 마을은 없다"고 한탄하였다. 이것이 반공적이고 반북한적인 시각일까?
한참 갔더니 오른 쪽으로 강이 나오는 데 그 강 이름이 바로 유서 깊은 청천강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단순히 자연, 문화관광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관광도 하는 셈이라고 느꼈다.
드디서 묘향산에 도착하였다. 정말 물 맑고 공기 맑고 길 맑고... 등산할 차비를 하고 왔던 박순경 교수는 좀 허탈한 모양이었다. 왜냐하면 그 날 스케줄에는 묘향산 등반이 아니고 묘향산 밑자리에 있는 국제친선전람관 관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묘향산을 쳐다보고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했다. 묘향산에서 제일 높은 주봉이 1,300미터의 비로봉이라고 하여 다시 쳐다보았다. 한옥식으로 지은 이 국제친선전람관은 웅장한 건물이다. 구리로 된 이 문 한 짝의 무게가 4톤이 나간다는 것 만 보아도 이 건물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무엇인가 북의 힘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6층 건물 내에 모두 150 여개의 방이 있다는 이 집은 한옥으로써는 세계에서 제일 크다고 안내원은 예의 자랑을 또 하였다. 이 집은 창문이 하나도 없지만, 통풍이 잘 되고 또 선물전시관은 모두 아래층 지하에 있었지만, 습기가 전혀 없게 지어져 있다고 하였다. 정말 자랑할 만 하다고 여겼다. 우리는 모두 물건을 사무실에 맡기고 신발을 벗고 대신 덧신을 신고 들어갔다. 옛날 예루살렘에 있는 모스크에 들어갔던 경험을 회상케 했다. 마호메트가 그 바위 위에서 명상하다가 승천하였다는 그 돌을 보존해 놓았다는 그 황금 돔에 들어 갈 때는 아예 카메라, 녹음기, 시계 등 어떤 문명의 기계도 가지고 가는 것을 금했음은 물론이었지만, 신발을 벗고 맨 발로 가게 했었다. 이곳에 전시된 선물은 모두 211,688점인데 이는 1945년부터 그가 서거할 때까지 김일성 수령이 각 국의 정상들과 사절들에게서 선물 받은 것을 모두 전시해 놓았다고 하였다. 신기하고 아주 값비싼 것들이라 하였다. 그런데 너무나도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5억년 전의 것이라는 골뱅이 화석, 나비날개공예벽걸이, 600년 전의 고려청자, 620 자, 또 1,150 자가 쓰여있다는 만년필이나 옥돌 ― 이것들은 중국의 주은례와 등소평이 준 것이라고 했다 ― 등 공예품과 예술품은 물론 스탈린이 선물했다는 '지스'란 특수 방탄 자동차(유리 두께가 무려 8 센치미터라고 했다), 소련의 통치자들이 보냈다는 승용차, 역도산이 올렸다는 벤츠 등도 있었다. 새 자동차 그대로인 것을 보면 한번도 타 보지 않은 것 같았다. 선물은 일본과 중국이 제일 많다고 하여 따로 전시관이 있었다. 미국의 빌리 그래함 목사의 선물도 있었다. 안내양은 미국의 유력 인사들이 이렇게 선물을 많이 했는데 왜 미국의 공화당이 우리를 어렵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모두가 다 인상적이었지만, 특히 96년 7월 18일에 중국의 당과 인민이 모두 만들어 증정했다는 김일성 주석의 밀납관은 참으로 훌륭하고 인상적이었다. 안내선생은 만일 이 선물 전시관에 비치되어 있는 작품 한 개를 2분씩 본다면 전부를 보는 데 1년 6개월이 요한다는 말, 만일 김일성 주석이 이렇게 많은 선물들을 자기 소유로 했다면 세계적인 갑부가 되었을 것이라는 말 등을 해 주었다. 정말 수 없이 많은 아주 희귀하고 귀중한 물품들이 그 넓고 넓은 선물전시관에 모두 진열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역사 박물관을 가 봤어도 이런 전시관 같은 것은 보지 못하였다.
나는 전시관을 돌면서 모든 선물을 사용(私用)화하고 자기 이삿짐과 함께 싸 가지고 간 이남의 대통령들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대통령으로서 받은 선물이 개인의 것이냐 국민이 모두가 공유해야 하는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모두가 인민의 것이다' 라는 전제에서 이렇게 선물들을 모두 전시해 놓은 이북으로부터 이남은 배워야 하지 않을까?
또 내가 정말 마음 한 구석에 이는 의문은 왜 스탈린 같은 독재자들로부터 받은 선물들을 전시해 놓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이북이 인민을 위하는 정권이라면 이들을 억압하고 학살했던 독재자들로부터 받은 선물들은 여기서 제외하여야 하지 않을까? 결국 가재는 게편인가?
이어서 우리는 또 걸어서 그 맞은 편에 있는 김정일 위원장의 선물 전시관으로 갔다. 1996년부터 개관했다는 그 집은 모두 55개의 방이 있다고 하였고 작년까지 156개 나라에서 45,855점이 전시되어 있다고 하였다. 물론 그의 아버지만큼 선물이 많지 않았고 집도 조금 작았지만, 그래도 많은 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는 데에 놀랐다. 마지막에 남한관도 있어 가 보았다. 과거 통혁당, 민주노총 등의 깃발이 벽에 걸려 있었고, 정주영 회장, 에이스 침대 회장, 김대중 대통령, 등이 한 선물들이 있었다. 그러한 것들은 다른 나라와 크게 대조가 될 만큼 빈약하였다.
관람을 다 마치고 우리는 아래쪽에 있던 호텔에 가서 고급 점심식사를 대접받았다. 점심 후에 우리는 그 옆에 있는 보현사(普賢寺)를 가 보았다. 이곳은 무엇보다도 8만 대장경 원본이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유명하였다. 김일성 주석이 평소에 특별히 관심을 보였던 절이라고 했고, 그가 죽은 곳이 바로 이 보현사 옆에 있는 어떤 곳이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날씨 관계로 일정을 변경하여 오늘 저녁에 10만 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백전백승 조선로동당' 행사가 열리기로 되어있는 5월 1일 경기장으로 갔다. 우리는 역시 그 행사에도 초대되었었다. 우리는 전날과 달리 의자와 앞 탁자가 놓인 특별석에 앉도록 되었으나 야외는 야외였다. 우리 자리 아래로 몇 줄 옆자리에 김정일 위원장의 자리가 있어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날씨는 매우 차가웠다. 우선 우리 초대석 맞은 편에는 1만 5천명이라는 학생들이 앉았는데 이들은 카드 섹션을 담당한 학생들이라 하였다. 카드색션은 천하 일품. 온갖 카드색션을 통해서 온갖 메세지가 전해졌다. 마당에는 온갖 춤 패, 노래 패 등이 등장하여 각기 주제에 따라 춤과 노래를 추고 불렀다. 집단적으로 하는 춤, 노래, 공연 등 매우 다양한 것들이 연출되었고 그 수준은 최고급이라고 생각되었다. 서장으로 "세기에 빛나는 불패의 당"이었고 종장은 "영원히 번영하라 조선로동당"이었다. 6·15 남북 공동선언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공연도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과 북미 공동코뮤니케 소식
이 날 우리는 집으로 늦게 돌아왔다. 그런데 이 날 두 가지 큰 소식이 전해 졌다. 하나는 남에서 온 기자들로부터 전해들은 것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단독 수상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큰 소식이었다. 그러나 그 소식에 기뻐하였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이는 의문은 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공동수상이 아니고 김대중 대통령의 단독 수상이냐는 것이었다. 만일 남북 두 정상이 노벨 평화상을 공동수상 했더라면 한반도 전체, 우리 민족 전체의 더 할 수 없는 경사요 기쁨이며 자랑이었을 것임은 물론이고, 그랬다면 한반도 평화에 결정적으로, 그리고 국제적으로 보장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정말 아쉬운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다음으로 북의 특사로 미국을 갔던 북의 국방위원회 제 1부위원장이고 총정치국장인 조명록 차수와 강석주 외무성 제1 부상의 외교의 결실로 오늘 북과 미국이 공동콤뮤니케를 발표하였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통쾌한 것이냐! 이남의 일부 보수적, 극우적 인사들이 이러한 북한의 외교 방식과 성과를 두고 '벼랑' 외교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은 한갓 질투심에서 나온 말에 불과할 것이다. 이곳에서 북미 공동코뮤니케는 남의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는 사건에 버금가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 했다. 그 공동콤뮤니케는 매우 길었으나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 매우 중요한 문서였다. 북미 관계를 총체적으로, 근본적으로 개선한다는 것, 정전협정 대신 평화보장체제를 구축한다는 것,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할 것이라는 것, 등 새로운 합의사항이 들어 있었다. 그 공동콤뮤니케가 한반도의 새로운 정세,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은 틀림없는 사건이지만, 과연 북이 남과 달리 미국에 예속되지 않고 민족자주를 지킬 수 있을 만큼 북미 관계를 조절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나의 관심이었다. 아마도 그러한 뜻에서 백 선생은 북미 공동콤뮤니케가 좋은 것이 될 수 없다고 보고 있는 것인가?
'심장에 남는 사람'
평양에서의 다섯째 날, 10월 13일은 우리가 떠나기 전날이었다. 나는 아침 먹는 대신에 산책을 하였다. 날씨는 어제처럼 좀 쌀쌀했으나 매우 쾌청하여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밝았다.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각 단체마다 출발시간이 달랐다. 처음으로 행선지와 만나는 사람들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박순경 교수와 나는 9시에 리춘구 목사와 함께 조선 그리스도교 연맹 사무실로 향했다. 박용길 장로와 한완상 총장도 거기 합세하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평양시에 들어가서 대동강을 보았다. 매일 다녀서 이제는 익숙한 풍경과 거리들이었다. 대동강에서 약간 꼬부라져 들어가니 곧 봉수교회가 나타났다.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늘 사진이나 비디오에서만 보던 그 신화적인 교회, 그 교회가 눈앞에 와락 나타났던 것이다!
우리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강영섭 목사 ― 그는 김일성 주석의 외삼촌이었던 고 강양욱 목사의 아들인데 금년에 69세라 하였다 ― 와 연맹의 목사들과 직원을 소개받았고 2층 사무실로 안내되어 인사와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곧 이어서 봉수교회 마당에 늘어선 이북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났다. 담임목사였다가 이제는 나이가 많아 은퇴했다는 이성봉 목사, 그는 아직도 정정하였다.
주일이 아니었지만, 우리가 온다고 하여 연락이 되는 교인들을 오게 했다는 교인 30여명이 나와 있었다. 교회당 안으로 안내되어 우리는 예배 아닌 예배를 보았다. 이성봉 목사가 사회를 보고, 기도와 성가대의 합창, 독창 등 모두 훌륭하고 감동적이었다. 나와 박순경 교수는 설교 아닌 설교를 즉흥 연설로 하기도 하였다. 다음 일정 관계로 시간이 없어 약식 모임을 하고 나의 축도로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모두 늘어서서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라는 찬송가를 부르지 않는가? 우리는 그들 앞을 지나면서 서로 열렬히 인사하고 악수하면서 교회당을 나왔다. 섭섭하지만 그들과 헤어진 우리는 또 거기서 아주 가깝다는 칠골교회를 향해 떠나야 했다.
칠골교회는 아주 가까웠다. 이곳 지명들은 칠골, 팔골 등이라고 하였고 옛날 그곳 마을 이름을 그대로 따서 칠골교회라는 이름이라고 하였다. 칠골교회라고 쓴 건물 앞에 가니 그곳에도 사람들이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사진에서 보았고 봉수교회에서 경험했기 때문에 낯설지 않았다. 그 교회 담임목사라는 박화춘 목사와 장로들 등 여러 분이 있었다. 박 목사는 키가 훤칠하게 컸고 성격이 서글서글하였다. 그는 아무리 바쁘지만,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자고 하였다. 나는 칠골교회당 안으로 들어가서 잠시 기도드리고 예배당 안을 둘러보았다. 이곳에도 성가대원들이 성가복을 입고 있었으나 정말 시간 관계로 선 채로 헌금을 전하고 그냥 발길을 돌려야 했다. 우리는 너무 미안했지만, 안내받는 몸이라 어쩔 수 없이 그냥 떠나야 했다. 지나놓고 나니 지금도 그것이 아쉽다. 쉽게 할 수 없는 걸음인데 시간에 쫓겨 그만 선 채로 이별을 하다니...
점심식사를 위해 모두가 모이기로 한 평양 단고기점으로 갔다. 안으로 들어 와 보니 어마어마한 저택이었고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들은 모두가 대리석으로 되어 있었다. 2층 식당은 널직하고 넉넉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고 노래방 같이 비디오 등이 갖추어져 있는 것도 보였다. 백기완 선생의 누님도 함께 앉았다. 모든 일행들이 모여서 식탁에 자리하고 앉았을 때 백 선생은 예정에도 없는 일장 연설을 하였다. 그의 집안은 절반은 남쪽, 절반은 북쪽, 그래서 6·25 전쟁은 서로 가족끼리 살상을 했다는 취지의 매우 심각한 내용의 연설이었다.
식사후 유흥이 벌어졌다. 몇 사람들이 나와서 노래를 부르며 온갖 시름을 잊고 즐기는 즐거운 한 때를 가졌다. 북측 대표인 김영성 선생의 노래 솜씨는 수준급이었다. 그는 김용태 선생과 함께, 또 지은희 선생과 함께 합창을 하기도 했는데 '심장에 남는 사람'이란 노래는 '가슴'에 오래 오래 남았다.
점심을 끝내고 우리는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평양학생소년궁전으로 갔다. 소년궁전이 왼쪽에 있는 것을 보고 한 참 달렸다. 아주 넓은 새 길이었다. 그 길이 바로 그저께 완공되었다는 평양-남포 고속도로라고 하였다. 내친 김에 서울까지 자동차로 달리면 그것이 통일이 아닐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해보았다.
학생소년궁전의 소장 등 직원들이 나와서 우리를 맞아 환영하면서 이 소년궁전에 관해 연혁 등 여러 가지를 소개, 설명하였다. 이 건물 모양은 반타원형을 양쪽에 붙인 것 같은 모양을 하였는데, 이것을 설명하는 안내원의 말로는 마치 팔을 벌려 어린이를 안으려는 것 같은 모양이라고 하였다. 이 건물 밖에는 구호 같은 것은 붙어있지 않았다. 오늘은 휴식이지만, 우리 같이 귀한 손님이 온다고 하여 일부러 이 건물의 문을 열었고 어린이들도 나와서 일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우리 때문에 이 아이들과 직원들이 고생을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 간절하였다. 건물 안에 들어가니 큰 정면 벽에 구리로 김일성 수령의 글귀가 붓글씨로 쓰여져 있었는데 꼭 어린이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 같았다. "어린이들은 우리 나라의 보배입니다. 앞날의 조선은 우리 어린이들의 것입니다. 1989년 4월 15일, 김일성." 그러니까 이북 동포들에게는 비록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김일성'이란 존재는 석가나 예수와 다름없이 '영생불사'하는 지위에 있고 또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건물을 건축하는 데 1억불이 들었다는데 대하여 우리 일행 중 한 분은 이남의 방식대로 하면 수십억 원이 드는 그런 건물이라고 하였다. 나를 감동시킨 것은 이 건물의 건축비용, 건축학적인 미나 웅장함, 700여명이나 된다는 직원의 숫자 등이 아니고, 원하는 모든 어린이들에게 무료로 습자, 무용, 악기연주, 노래, 등을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정말 사람 사는 사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남에서도 과외 수업 비용들을 다 합치면 우리 어린이들에게 이런 교육을 할 수 있으련만, 입시 지옥만 만들어 냈지 교육다운 교육을 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이남의 어린이들에게 미안한 감을 어쩔 수 없었다.
맨 먼저 안내된 곳이 서예소조였다. 모두가 붓글씨를 쓰고 있는데 입구의 어떤 어린이는 '조국은 하나' 라고 굵은 붓글씨로 쓰고 있었다. 하도 잘 쓰고 기특하여 그 글을 내게 줄 수 없느냐고 했더니 선뜻 써 주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북의 어린이로부터 그 중요한 말을 쓴 글을 얻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다. 그 소녀는 13살의 김향이라 하였고 갈림길 고등중학교 3학년 5반이라고 하였다. 우리 교회의 청년 김향과 동명이인이어서 그가 더욱 귀엽고 친근하게 여겨졌다.
마지막 날 저녁이었다. 평양 시내 옥류관에서 "평양을 방문한 남측 정당, 단체, 개별인사들을 환송하는 연회에 초대합니다"라는 초대장을 가지고 거기로 갔다. 우리를 위해 환송만찬을 열어준 분은 민족화해협의회 김영대 회장(사회민주당 대표)이었다. 남에서 간 민주노총 부위원장 김영대 선생과 동명이인이었다. 이렇게 동명이인이 많은 것도 남북이 하나라는 증거일 것이다.
냉면집이라지만 단순히 냉면 한 그릇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13개 코스였고 냉면은 '국수'라 하여 아주 뒤에 나왔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디저트로 으레 수박이 나왔다. 그 집에는 '크림'이라고 쓴 것도 있었는데 아이스크림이었다. 이 주체의 나라라는 이북에서도 영어를 그대로 쓴다고 백기완 선생은 이북에 또 한방 먹였다.
생각해 보니 북의 안내원들과 환담할 수 있는 기회도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나와 같은 상에 앉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와 같이 다닌 안내원들과 여러 테이블을 다니면서 서로 술잔을 교환하였다. 나는 그들의 소속과 직책보다도 그 사람들과 얘기하는 것이 더 중하게 여겨 그들과 어울렸다. 서로 실세라고 놀리는 젊은이들, 남의 사람들에게 초청장을 보내는 책임자라는 사람 등등 대부분이 40대의 젊은 사람들로 보였는데 이남에 있는 젊은이들과 다름없다고 느꼈다. 어떤 분은 서울에 있는 내 친구의 남북교역 관계를 말했더니 민족경제협력련합회 서기실 참사로 일한다는 인상 좋고 마음씨 좋은 젊은이가 민경련 베이징 대표부의 윤원철 대표를 소개해 주면서 그의 전화번호까지 써 주었다. 그 외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내게 술을 권했다. 자칭 무신론자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모두가 상냥하고 서로 웃기고 웃는 농담과 '장난'기가 있는 젊은이들이고 나와 똑 같은 사람들이었다.
언제 또 만나리....
드디어 평양에서의 마지막 날인 10월 14일이 되었다. 어제에 이어 날씨는 매우 쾌청하였고 쌀쌀하였다. 아침 식사 대신 고요한 적막 강산 같은 초대소 주위를 산책하였다. 대동강 물은 유리판을 깔아 놓은 것 같이 고요하기만 하였다. 그런데 멀리 어디에서인지 군사훈련을 하는 군가 같은 소리가 아침의 고요를 깨고 있었다.
그렇게 친절하고 정들었던 북의 안내원들과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서운하였다. 나와 같은 혈연인 이들을 언제 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리춘구 목사를 만나 다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정리하고 인사하였다. 우리는 올 때처럼 모두가 벤츠를 타고 공항을 향해 떠났다. 오전 10시였다. 떠나오면서 길가 여기 저기 논에서 벼를 거둬들이는 일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이 휴식이 다 끝나고 정상적으로 일하는 날의 풍경인가?
공항에 도착하니 올 때처럼 환송객들이 많이 나와서 붉은 가화를 흔들면서 조국통일, 민족대단결 등을 연호하면서 우리와 석별의 정을 나눴다. 마지막에 가서는 어린이들이 서서 모두에게 꽃을 한 개씩 주며 인사하였다. 오전 11시경에 비행기는 평양을 이륙하였다.
이렇게하여 역사적인 이북 여행을 마친 셈이다. 비행기가 이륙하여 멀리 공중으로 올라갈 때까지 김영성 선생을 비롯하여 안내원들, 환송객들은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우리를 태운 비행기는 이내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1시경이었다. 공항에 내리니 반가운 얼굴들이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범민련, 장기수들, 전국연합, 자통협 등 동지들이 공항에 나와서 환영식을 하였다. 나는 자통협의 여러 동지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간단히 평양 다녀온 보고를 하였다.
이로써 떠나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5박 6일의 이북 여행을 모두 마감하였다. 이북의 안내원들이 말하였듯이 정말 나는 좋은 때에 이북을 다녀왔다는 생각이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이북에서 만났던 우리의 많은 동포들, 이북에서 보았던 산하와 역사를 다시 한번 회상하고 있다. 그곳에는 분명 우리의 고유한 풍속과 문화가 덜 오염된 상태로 보존되고 있었다. 또 거기에는 새롭게 변화된 세계상황에서 민족자주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 유지해 나가기 위해 온갖 투쟁을 다 하고 있는 위대한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었다.
첫댓글 아침부터 귀한 글 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하게 읽으셨다니 고맙습니다..글고 맨 위에 윤님석의 노래 가사를 올린 이유는 "서울에서 평양까지 택시요금 이만 원..."이라는 부분이 제일 마음에 들었고, 가사 전체가 여러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겠더라고요...^^
우리 아이들이 산행 직후 가장 많이 부르는 노래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