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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권 - 7. 종남산 규봉 종밀선사
조계에서 따로 나온 제5세
앞의 수주 도원선사의 법손
果州西充人也 姓何氏 家本豪盛髫齔通儒書 冠歲探釋典 唐元和二年將赴貢擧 遇造圓和尙法席欣然契會遂求披削 當年進具
그는 과주 서충 사람으로서 성은 하씨이다. 집안이 본래 크고 번성하였으므로 어릴 적부터 유서에 정통하였고, 20세쯤부터는 불교의 경전을 탐구하였다. 당나라 원화 2년에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조원화상의 법석에 잠시 들렀는데, 흔연히 뜻이 맞아서 머리를 깎아 달라 하였고 그 해에 구족계를 받았다.
一日隨衆僧齋于府吏任灌家居下位 以次受經 得圓覺十二章 覽未終軸感悟流涕 歸以所悟之旨告于圓 圓撫之曰 汝當大弘圓頓之敎 此諸佛授汝耳 行矣無自滯於一隅也
어느 날 승가대중을 따라 고을 아전인 임관의 집에 재를 올리러 갔다가 맨 아랫자리에서 차례에 따라 경을 받을 때에 『원각경』 12장을 얻었는데, 그 경을 다 보기 전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고는 돌아와서 깨달은 취지를 조원에게 고했다. 이에 조원이 그를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그대는 장차 원돈의 교법을 크게 펴리라. 이는 모든 부처님들이 그대에게 주신 것이다. 떠나라. 이 한 구석에 막혀 있지 말라.”
師涕泣奉命禮辭而去 因謁荊南張禪師(南印)張曰 傳敎人也 當宣導於帝都
대사가 눈물을 흘리면서 명을 받들어 하직하고 떠났다. 그리하여 형남의 장선사를 뵈었는데, 장선사가 말했다. “교법을 전할 사람이니 마땅히 수도에 가서 불교를 펴라.”
復見洛陽照禪師(奉國神照)照曰 菩薩人也誰能識之
대사는 다시 낙양에 가서 조선사[봉국신조]를 뵈었는데, 신조가 말했다. “보살인 줄을 누가 알차채겠는가?”
尋抵襄漢 因病僧付華嚴疏 卽上都澄觀大師之所撰也 師未嘗聽習一覽而講 自欣所遇曰 向者諸師述作罕窮厥旨 未若此疏辭源流暢幽賾煥然 吾禪遇南宗敎逢圓覺 一言之下心地開通 一軸之中義天朗耀 今復偶茲絶筆罄竭于懷
이윽고 양한으로 가니, 어떤 병든 스님이 『화엄소』 한 질을 주었는데, 바로 수도에 있는 징관대사가 저술한 것이었다. 대사는 일찍이 이것을 익힌 바가 없었지만 한 번 보고서도 강의를 하였다. 그는 스스로 『화엄소』를 만난 것을 기뻐하면서 말했다. “예전에 여르 스님들이 서술한 것은 그 종지를 궁구한 것이 드물어서 이 소의 언사의 연원이 유창하고 그윽하며 심오한 진리를 밝힌 것만 못하다. 나는 선법은 남종을 만났고, 교법은 『원각경』을 만나서 한마디에 마음 바탕이 트이고 한 권 안에서 의리의 하늘이 밝아졌는데, 이제 또 이렇게 절세의 소를 얻어서 내 정성을 모두 쏟게 되었도다.”
曁講終思見疏主 時屬門人太恭斷臂酬恩 師先齎書上疏主 遙敘師資往復慶慰 尋太恭痊損 方隨侍至上都執弟子之禮 觀曰 毘盧華藏能隨我遊者其汝乎
강을 마치고 나서 소를 쓴 사람을 한 번 보고자 하였지만, 때마침 문인인 태공이 팔을 끊어서 은혜를 보답하였으므로 우선 글로써 소를 쓴 사람에게 보내어 멀리서 제자의 예를 올리면서 몇 차례 서신을 주고 받았다. 이윽고 태공의 상처가 나으니, 그때서야 비로소 수도로 가서 제자의 예로 뵈었다. 징관이 그에게 말했다. “비로자나의 화장세계에서 나를 따라 거닐 이는 오직 그대뿐이다.”
師預觀之室雖日新其德 而認筌執象之患永亡矣 北遊淸涼山迴住鄠縣草堂寺 未幾復入寺南圭峰蘭若 大和中微入內賜紫衣 帝累問法要 朝士歸慕 惟相國裴公休深入堂奧 受敎爲外護 師以禪敎學者互相非毁 遂著禪源諸詮 寫錄諸家所述 詮表禪門根源道理 文字句偈集爲一藏(或云 一百卷)以貽後代
대사는 징관에게 입실한 뒤에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하여서, 방편을 인정하고 형상에 집착하는 허물을 영원히 여의었다. 북쪽에 있는 청량산을 갔다가 다시 악현의 초당사로 돌아와서 살았고, 오래지 않아 다시 절 남쪽에 있는 규봉난야로 들어가서 살았다. 대화 때에 어명을 받고서 대궐에 들어가자 자색가사를 하사받았으니, 황제가 자주 법의 요체를 물었고 조정의 선비가 모두 그를 흠모하였다. 특히 상국인 배휴는 진리의 전당에 깊숙이 들어와 교법을 전해 받고 훌륭한 외호자가 되었다. 대사는 선학자와 교학자가 서로 헐뜯고 다투는 것을 보고 마침내 『선원제전』을 저술하였다. 즉 여러 사람이 서술한 것을 필사로 채록해서 선문의 근원이 되는 도리를 드러냈으니, 문자와 게송들로 1장[혹은 100권]을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
其都序略曰 禪是天竺之語 具云禪那 翻云思惟修 亦云靜慮 皆是定慧之通稱也 源者 是一切衆生本覺眞性 亦名佛性 亦名心地 悟之名慧 修之名定 定慧通名爲禪 此性是禪之本源 故云禪源 亦名禪那理行者 此之本源是禪理 忘情契之是禪行 故云理行 然今所集諸家述作 多譚禪理少說禪行 故且以禪源題之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선은 인도의 말로서, 갖추어 말하면 선나이다. 한역하면 사유수, 또는 정려라 하니, 모두가 선정과 지혜를 통틀어 부른 말이다. 源이라 함은 모든 중생들의 본각인 참 성품으로서, 불성이라고도 하고 심지라고도 한다. 깨달으면 지혜라 하고 닦으면 선정이라 하는데 선정과 지혜를 통틀어 선이라 하니, 이 성품이 선의 근원이므로 선원이라 말한 것이다. 또는 선나이행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의 본원은 선의 이치이고 정념을 잊고 계합하는 것은 선의 행이기 때문에 理行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수집한 여러 사람의 저술은 선의 이치를 담론한 것이 많으나 선의 행을 말한 것은 적기 때문에 선원으로 제목을 붙인 것이다.
今時有但目眞性爲禪者 是不達理行之旨 又不辨華竺之音也 然非離眞性別有禪體 但衆生迷眞合塵卽名散亂 背塵合眞名爲禪定 若直論本性 卽非眞非妄無背無合無定無亂 誰言禪乎 況此眞性非唯是禪門之源 亦是萬法之源 故名法性 亦是衆生迷悟之源 故名如來藏藏識(出楞伽經)亦是諸佛萬德之源 故名佛性(涅槃等經)亦是菩薩萬行之源 故名心地(梵網經心地法門品云 是諸佛之本源 行菩薩道之根本 是大衆諸佛子之根本也)
요즘 참 성품만을 지목하여 선이라 하는 이가 있는데, 이는 理行의 지취를 요달하지 못한 것이고, 또 중국과 인도의 말을 분별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참 성품을 여의고 따로 선의 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중생들이 참을 미혹해서 티끌에 계합하는 것을 이름하여 산란이라 하고, 티끌을 등지고 참에 계합하는 것을 선정이라 할 뿐이다. 만일 본래의 성품을 곧바로 논한다면 진도 아니고 망도 아니며, 등짐도 아니고 합하는 것도 아니며, 선정도 아니고 산란도 아니거늘 무엇을 선이라 말하겠는가? 하물며 이 참 성품은 선문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만법의 근원이기 때문에 여래장식[능가경에서 나온다]이라 이름하고, 모든 부처님들의 만 공덕의 근원이기 때문에 불성[열반경 등에 나온다]이라 하고, 보살들의 만행의 근원이므로 심지라고도 하는 것이다.
[『범망경』 「심지법문」에서 말하기를 “이것이 여러 부처님의 본원이요, 행해야 할 보살도의 근본이며, 이는 대중의 여러 불자들의 근본이다”라고 하였다.]
萬行不出六波羅蜜 禪門但是六中之一 當其第五 豈可都目眞性爲一禪行哉 然禪定一行最爲神妙 能發起性上無漏智慧 一切妙用萬行萬德 乃至神通光明皆從定發故 三乘學人欲求聖道必須修禪 離此無門離此無路 至於念佛求生淨土 亦修十六觀禪及念佛三昧般舟三昧
만행이 6바라밀을 벗어나지 않나니, 선문은 다만 그 여섯 바라밀 가운데 하나로서 다섯째에 해당하거늘, 어찌 참 성품을 모두 지목해서 선행이라 하겠는가? 그러나 선정의 한 가지 행이 가장 뛰어나고 묘해서 능히 성품 위의 무루지혜를 일으킬 수 있나니, 온갖 묘한 작용과 만행과 만덕과 나아가 신통과 광명이 모두 선정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3승의 학인이 거룩한 도를 구하고자 하면 반드시 선을 닦아야 하니, 이것을 여의고서 문이 없고 이것을 여의고서는 길이 없다. 심지어는 염불을 하여 정토에 태어나기를 구하는 것도 16관의 선법이나 염불삼매나 반주삼주를 닦아야 한다.
又眞性卽不垢不淨凡聖無差 禪則有淺有深階級殊等 謂帶異計欣上厭下而修者 是外道禪 正信因果亦以欣厭而修者是凡夫禪 悟我空偏眞之理而修者 是小乘禪 悟我法二空所顯眞理而修者 是大乘禪(上四類皆有四色四空之異也)
또 참 성품은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은 것이라서 범부와 성인의 차이가 없지만 선에는 깊기도 하고 얕기도 한 계급의 차이가 있다. 이른바 다른 계교를 품은 채 위를 좋아하고 아래를 싫어하면서 닦는 것은 외도선이요, 인과를 올바로 믿고는 있지만 역시 좋아하고 싫어함으로써 닦는 것은 범부선이요, 나의 공함이란 치우친 진리만을 깨닫고서 닦는 것은 소승선이요, 나와 법이 둘 다 공하여 참 이치를 나타낸 바를 깨닫고서 닦는 것은 대승선이다.
[앞의 네 가지에는 모두 4색계와 4무색계의 차이가 있다.]
若頓悟自心 本來淸淨元無煩惱 無漏智性本自具足 此心卽佛畢竟無異 依此而修者 是最上乘禪 亦名如來淸淨禪 亦名一行三昧 亦名眞如三昧 此是一切三昧根本 若能念念修習 自然漸得百千三昧 達磨門下展轉相傳者 是此禪也
만일 스스로의 마음이 본래 청정하여 원래 번뇌가 없고 무루 지혜의 성품이 본래 구족함을 단박에 깨달아서 이 마음이 궁극적으로 부처와 차이가 없다는 데 의지해 닦는 것은 최상승선이며, 또한 여래청정선이라고도 하고, 일행삼매라고도 하고, 진여삼매라고도 한다. 이는 온갖 삼매의 근본이니, 만약 생각 생각마다 닦아 익히면 자연히 점차적으로 백천 삼매를 얻게 된다. 달마의 문하에서 차례차례 전하는 것이 이 선법이다.
達磨未到 古來諸家所解 皆是前四禪八定 諸高僧修之皆得功用 南嶽天台令依三諦之理修三止三觀 敎義雖最圓妙 然其趣入門戶次第 亦只是前之諸禪行相 唯達磨所傳者 頓同佛體逈異諸門 故宗習者難得其旨 得卽成聖疾證菩提 失則成邪速入塗炭
달마가 오기 전에 옛날 여러 사람들이 이해한 것은 모두가 예전의 4선ㆍ8정이니, 여러 고승들이 그것을 닦아서 모두 공용을 얻었다. 남악과 천태는 3제의 이치에 의지해서 3止와 3관을 닦게 하였으니, 교의가 가장 원만하고 묘하기는 하나 들어가는 문호와 차례는 역시 앞의 여러 선법의 행상과 같았다. 오직 달마가 전한 것만이 단박에 불체와 동등해서 여러 다른 종문과 크게 다르니, 이 때문에 종을 익힌 자는 그 취지를 얻기가 어렵다. 얻으면 속히 성스러움을 이루어서 조속히 보리를 증득하지만, 잃으면 삿됨을 이루어서 신속히 도탄에 빠진다.
先祖革昧防失故 且人傳一人 後代已有所憑故 任千燈千照 洎乎法久成弊 錯謬者多故 經論學人疑謗亦衆 原夫佛說頓敎漸敎 禪開頓門漸門 二敎二門各相符契 今講者偏彰漸義 禪者偏播頓宗 禪講相逢胡越之隔
선조들은 우매함을 고치고 잃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한 사람이 한 사람씩에게 전했지만 후대에 와서는 이미 의지할 것이 생겼으므로 천 등불에 맡겨 천 곳을 비추게 하였다. 그러나 법이 오래되어 폐단을 이루면서 잘못 아는 이가 많아져, 경론을 배우는 학인들의 의혹이나 비방도 많아졌다. 원래 부처님께서는 돈교와 점교를 말씀하셨고, 선법에는 돈문과 점문을 열었는데, 두 교법과 선법은 각기 서로가 부합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요즘 강의하는 자는 점문의 뜻만을 치우치게 드러내고, 선하는 이는 돈문의 종지만을 치우치게 전파하니, 선사와 강사가 서로 호월의 거리만큼 벌어지게 되었다.
宗密不知宿生何作薰得此心 自未解脫欲解他縛 爲法亡於軀命 愍人切於神情(亦如淨名云 若自有縛能解他縛無有是處 然欲罷不能 驗是宿習難改故)
나는 전생에 어떤 업을 지어서 이 마음을 익혔는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도 해탈지 못하고서 남의 속박을 풀어주려고 하는가? 법을 위해서는 몸과 목숨을 잊었고 남을 연민하는 것은 감정과 정신에 사무쳤기 때문이다.
[『정명경』에서 말하기를 “자기에게 속박이 있으면서 남의 속박을 풀어준다고 함은 옳지 못하다. 그러나 그만두려 해도 그칠 수 없으니 이는 전생의 습기를 고치기 어렵기 때문임을 알겠다”라고 하였다.]
每歎人與法差法爲人病 故別撰經律論疏 大開戒定慧門 顯頓悟資於漸修 證師說符於佛意 意旣本末而委示 文乃浩博而難尋 汎學雖多乘志者少 況跡涉名相誰辨金鋀 徒自疲勞未見機感
매번 법과 사람이 어긋나서 법이 사람의 병이 됨을 한탄하였으므로 따로 경과 율과 논과 소를 지어서 계와 정과 혜의 문을 크게 열었다. 돈오를 드러내어 점수에 자량을 주어서 조사의 말이 부처님의 뜻에 부합됨을 증명하였다. 뜻은 이미 본말을 자세히 보였지만, 글이 많고 방대하여서 찾기 어려운 탓에 배우는 이는 많으나 뜻을 얻은 이는 적었다. 하물며 자취가 이름과 모습에 걸렸으니, 어찌 금과 놋쇠를 구별하리오! 헛되이 수고할 뿐 근기의 감응은 보지 못했다.
雖佛說悲增是行 而自慮愛見難防 遂捨衆入山習定均慧 前後息慮相繼十年(云前後者 中間被敕追入內住城二年 方卻表請歸山也)
비록 부처님께서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더욱 늘리는 것도 하나의 수행이라고 설하셨으나, 스스로 애견을 막기 어려울 것이 염려되었기 때문에 마침내 대중을 버리고 산에 들어가 선정과 지혜를 균등히 익혀서 앞과 뒤로 생각을 쉰 것이 무릇 10년이었다.
[앞뒤라 함은 중간에 조칙을 받고 대궐에 들어가서 성안에 2년을 살다가 청을 올리고서야 다시 산으로 돌아온 것을 이른다.]
微細習情起滅彰於靜慧 差別法義羅列現於空心 虛隙日光纖埃擾擾 淸潭水底影像昭昭 豈比夫空守黙之癡禪 但尋文之狂慧者也
미세한 습기와 감정의 일고 꺼짐이 고요한 지혜에 밝게 드러나고 차별법의 뜻이 벌려져서 공심에 나타나서 마치 빈틈으로 비추는 햇빛에 가는 티끌이 아물거리고 맑은 못 밑의 그림자가 분명한 것과 같아졌으니, 어찌 공연히 침묵을 지키는 어리석은 선법이나 글줄만을 찾는 미친 지혜에다 견주겠는가?
然本因了自心而辨諸敎故 懇情於心宗 又因辨諸敎而解修心故 虔誠於敎義 敎也者諸佛菩薩所留經論也 禪也者諸善知識所述句偈也 但佛經開張羅大千八部之衆 禪偈撮略就此方一類之機 羅衆則莽蕩難依 就機則指的易用 今之纂集意在斯焉
그러나 본래부터 스스로의 마음을 요달해서 모든 교법을 분별했기 때문에 심종에 마음이 간절했고, 또 모든 교법을 분별해서 마음 닦는 법을 이해했기 때문에 교의에 더욱 정성을 다하였다. 교리라 함은 부처님과 보살들이 남기신 경론이요, 선이라 함은 여러 선지식들이 서술하신 어구나 게송이니라. 다만 불경은 펼쳐서 대천세계와 팔부대중을 망라하였고, 선의 게송은 간략하여서 이곳의 한 종류 근기에만 나아갔으니, 대중을 망라하면 드넓어서 의지하기 어렵고, 한 근기에 나아가면 핵심을 가리켜서 쓰기가 쉬우니 이제 찬술하여 모으는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裴休爲之序曰 諸宗門下皆有達人 然各安所習通少局多 數十年中師法益壞 以承稟爲戶牖各自開張 以經論爲干戈互相攻擊 情隨函(音含)矢而遷變(周禮曰 函人爲甲 孟子曰 矢人豈不仁於函人哉 函人唯恐傷人 矢人唯恐不傷人 蓋所習之術使然也 今學者但隨宗徒彼此相非耳)
배휴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 종파의 문하에는 모두 통달한 사람이 있다. 그러나 제각기 익힌 바에 안주해서, 통달한 이는 적고 국집하는 이는 많게 되었다. 수십 년 이래로 조사의 법이 더욱 파괴되어서 이어받은 것으로 문호를 삼아 제각기 벌여 놓은 채 경과 논을 무기로 삼아서 서로 서로가 공격을 일삼는다. 감정이 갑옷을 만드는 사람과 화살을 만드는 사람에 따라 변천하고,
[『주례』에 말하기를 “함인은 갑옷을 만드는 사람이다”라고 하였고, 『맹자』에 말하기를 “화살 만드는 사람이 갑옷 만드는 사람보다 어찌 어질지 못하겠는가? 하지만 화살 만드는 사람은 사람이 상하지 않을 것을 걱정하고, 갑옷을 만드는 사람은 사람이 상할까 걱정한다”라고 하였으니, 모두가 익히는 술법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의 학자들은 다만 종도를 따라 피차 서로 비난할 뿐이다.]
法逐人我以高低 是非紛拏莫能辨析 則向者世尊菩薩諸方敎宗 適足以起諍 後人增煩惱病 何利益之有哉
법은 나와 너를 따라서 높고 낮아지니, 시비가 분분히 일어나서 판가름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지난날 세존과 보살과 제방의 종파의 교종이 충분히 뒷사람들로 하여금 논쟁을 일으키게 하여 번뇌의 병만 더하게 할 뿐이니, 무슨 이익이 있으랴?
圭山大師久而歎曰 吾丁此時不可以黙矣 於是以如來三種敎義 印禪宗三種法門 融甁盤釵釧爲一金 攪酥酪醍醐爲一味 振綱領而擧者皆順(荀子云 如振裘領屈五指 而頓之順者不可勝數)
이에 규산대사가 오래 탄식하다가 말하기를 ‘내가 이때를 당하여 침묵하고만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여래의 세 가지 교의로써 선종의 세 가지 법문을 인증하니, 병ㆍ소락ㆍ비녀ㆍ팔찌를 녹여 하나의 금으로 만들고, 소락과 제호를 섞어서 한 맛이 되게 하는 것과 같고, 벼리와 옷깃을 잡으면 들리는 것이 모두가 순조롭고,
[『순자』가 말하기를 “마치 갑옷의 옷깃을 들 때에 다섯 손가락을 구부리기만 하여도 끌려오는 것처럼 순조롭게 되는 것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하였다.]
據會要而來者同趣(周易略例云 處會要以觀方來 則六合輻輳未足多也 都序據圓敎以印諸宗 雖百家亦無所不統)
도회지를 의거하여 오는 자가 모두 같은 곳에 이르게 되는 것과 같다.
[『주역약례』에서 말하기를 “ 도회지를 의거해서 사방에서 오는 이를 보면 천지사방으로부터 아무리 많이 와도 많은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도서』가 원교에 의하여 모든 종취를 감정하면 아무리 백가의 학설이라도 총괄하지 못할 것 없으리라.]
尙恐學者之難明也 又復直示宗源之本末 眞妄之和合 空性之隱顯 法義之差殊 頓漸之異同 遮表之迴互 權實之深淺 通同之是非
오히려 배우는 자들이 밝히기 어려울까 걱정해서 다시 근본과 근원의 본말과 진망의 화합과 돈점의 같고 다름과 차전과 표전의 엇바뀜과 권교와 실교의 깊고 얕음과 통달함과 국집함의 시비를 곧바로 보셨다.
若吾師者 捧佛日而委曲迴照疑噎盡除 順佛心而橫[一/旦]大悲窮劫蒙益 則世尊爲闡敎之主 吾師爲會敎之人 本末相符道近相照 可謂畢一代時敎之能事矣(自世尊演敎至今日會而通之 能事方畢)
우리 스승 같은 분은 부처를 받들어서 간곡히 돌이켜 비추어서 의혹에 가린 마음을 모두 제거하고, 부처의 마음에 순응하여 큰 자비를 널리 펴서 겁이 다하도록 이익을 받게 하였으니, 그렇다면 세존께서는 교리를 펴신 주인이요, 우리 스승은 교리를 회통시킨 사람이니, 본말이 서로 부합하고 멀고 가까움이 서로 비추어서 일대시교의 장한 일을 마쳤다고 할 수 있으리라.
[세존께서 가르침을 펴신 이래로 오늘날까지 그것을 회통하니 “가히 장한 일을 마쳤다”라고 한 것이다.]
或曰 自如來未嘗大都而通之 今一旦違宗趣而不守 廢關防而不據 無乃乖袐藏密契之道乎 答曰 如來初雖別說三乘 後乃通爲一道(三十年前或說小乘 或說空敎 或說相敎 或說性敎 聞者各隨機證悟不相通知也 四十年後坐靈鷲而會三乘 詣拘尸而顯一性 前後之軌則也)
혹 어떤 이가 묻기를 ‘여래로부터 아직까지 통틀어서 회통한 적이 없었는데, 이제 하루아침에 종취를 어겨서 지키지 않나니, 관방을 폐지하여 의거하지 않은 것과 같으니, 이는 비밀히 갈무리하고 은밀히 계합하는 도를 어기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니, 이에 대답하되 ‘여래께서 처음에 3승을 따로따로 말씀하셨지만 나중에는 하나의 도로 회통하였느니라’라 하였다.
[30년 전에는 소승을 말씀하시기도 하고 공교를 말씀하시기도 하고, 상교를 말씀하시기도 하고, 성교를 말씀하시기도 해서 듣는 이가 제각기 성품에 따라 깨달았으나 서로 통하여 알지 않았다. 하지만 40년 뒤에는 영취산에 앉아서 3승을 회통하고 구시에 가서 한 성품을 드러내셨으니, 이것이 전후의 일정한 궤칙이었다.]
故涅槃經 迦葉菩薩曰 諸佛有密語無密藏 世尊讚之曰 如來之言開發顯露淸淨無翳 愚人不解謂之袐藏 智者達了則不名藏 此其證也 故王道興則外戶不閉 而守在戎夷 佛道備則諸法總持 而防在魔外(涅槃圓敎和會諸法 唯簡別魔說及外道邪宗耳)
그러므로 『열반경』에서 가섭보살이 찬탄하기를 ‘모든 부처님은 비밀스런 말씀은 있어도 비밀스런 창고는 없습니다’라고 하니, 세존께서 칭찬하시기를 ‘여래의 말을 열려 있고 드러나고 청정하고 가림이 없거늘,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서 비밀스런 창고라고 하지만 지혜로운 이는 요달하여서 창고라고 이름하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이것이 그 증거이다. 그러므로 왕도가 흥왕하면 밖의 문을 닫지 않아도 도적이 지켜지고 불도가 갖추어지면 모든 법을 총체적으로 지니면서도 마군과 외도는 막아진다.
[열반의 원교에서 모든 법을 화합하여 회통하되, 악마의 교설과 외도 논사의 삿된 교설만은 분명히 가려내었다.]
不當復執情攘臂於其間也(師又著圓覺大小二疏鈔 法界觀門 原人等論 皆裴休爲之序引 盛行於世)
그러니 다시는 망정에 집착해서 팔을 그 사이에 흔들지 말라.“
[대사는 또 『원각경』의 대소 두 소초를 지었고, 『법계관문』과 『원인론』을 지었는데 모두 배휴가 서문을 지었으니, 세상에 성행하였다.]
師會昌元年正月六日於興福塔院坐滅二十二日道俗等奉全身于圭峰 二月十二日荼毘得舍利明白潤大 後門人泣而求之 皆得於煨燼乃藏之石室 壽六十有二 臘三十四
대사는 회창 원년 정월 6일에 흥복사 탑원에 앉아서 입멸하니 그 달 22일에 도속들이 시신을 규봉에다 모셨다가 2월 12일에 화장을 하여 밝고 크고 윤택한 사리를 얻었다. 나중에 문인들이 울면서 구하니 모두가 타고남은 재 속에 얻었는데 다 석실 속에 봉안하였다. 그의 수명은 62세이고, 법랍은 34세였다.
遺誡令舁屍施鳥獸焚其骨而散之 勿得悲慕以亂禪觀 每淸明上山必講道七日 其餘住持儀則當合律科 違者非吾弟子 持服四衆數千百人哀泣喧野 曁宣宗再闢眞敎 追諡定慧禪師 塔曰靑蓮
대사가 유언하기를 “시체를 메다가 새와 짐승에게 보시하고 뼈는 태워서 흩뿌려라. 슬퍼하고 사모하다가 선관을 어지럽히지 말 것이며, 매년 청명 때에는 산에 올라가서 7일 동안 살림을 하라. 그 밖의 주지하는 법은 계율에 맞출 것이며, 어기는 자는 나의 제자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상복을 입은 사부대중 수천 수백 명이 슬피 울면서 들판을 뒤덮었는데 선종이 다시 불교를 세우게 되면서 정혜선사라는 시호를 추가로 하사하고, 탑호는 청련이라 하였다.
蕭俛相公呈己見解請禪師注釋曰 荷澤云 見淸淨體於諸三昧八萬四千諸波羅蜜門 皆於見上一時起用 名爲慧眼 右當眞如相應之時(善惡不思 空有不念)萬化寂滅
상공인 소면이 자기의 견해를 바치고, 선사에게 주석하여 주기를 다음과 같이 청하였다. “하택선사가 말하기를 ‘모든 삼매에서 청정한 본체를 보면, 8만 4천의 온갖 바라밀문도 모두가 소견을 통해 한 때 일어난 작용하는 것일 뿐이니, 이를 이름하여 혜안이라 한다. 만약 진여와 상응할 때를 당한다면[선악을 생각하지 않고, 공유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만 가지 변화가 적멸하니
[만법이 모두 생각과 반연에서 생겨 모두가 허공인 까닭에 변화라 한다. 이미 한 생각도 나지 않는다면, 만법이 전혀 일어나지 않겠기에 없애지 않아도 자연히 적멸하게 된다.]
(萬法俱從思想緣念而生 皆是虛空 故云化也 旣一念不生則萬法不起 故不待泯之自然寂滅也)
此時更無所見(照體獨立夢智亡階)三昧諸波羅蜜門亦一時空寂 更無所得(散亂與三昧 此岸與彼岸 是相待對治之說 若知心無念見性無生 則定亂眞妄一時空寂 故無所得也)不審此是見上一時起用否(然見性圓明理絶相累 卽絶相爲妙用 住相爲執情 於八萬法門一一皆爾 一法有爲一塵 一法空爲一用 故云 見淸淨體則一時起用矣)望於此後示及俛狀答
이때에는 다시 보는 바가 없고[비추는 본체가 홀로 섰고 꿈과 지혜에는 계급이 없어진다], 삼매의 온갖 바라밀문도 일시에 공적해서 다시 얻을 바가 없다[산란과 삼매, 이 언덕과 저 언덕은 마주 대하여 물리치는 말인데, 마음에 망념이 없고 성품에 생멸이 없음을 알면 선정과 어지러움, 참과 허망이 일시에 적멸해지니, 따라서 얻은 바가 없다].’고 하니, 이것이 소견에 의해 일시에 일어나 작용하는 것입니까[그러나 소견의 성품이 원명하고 이치는 형상을 여의었으니, 형상을 끊으면 묘한 작용이 되고, 형상에 머무르면 집착하는 정이 된다. 8만 법문이 모두가 그러하여서 한 법이 있으면 하나의 티끌이요, 한 법이 공하면 하나의 작용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소견의 청정한 본체는 일시적으로 일어난 작용이다”라고 하였다.]? 바라건대 이후에 저에게 대답을 보내 주십시오.”
史山人十問(問答各是一本 今參而寫之)
사산인은 열 가지 물음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一問 云何是道 何以修之 爲復必須修成 爲復不假功用 答無礙是道 覺妄是修 道雖本圓妄起爲累 妄念都盡卽是修成
첫 번째 물음 : 어떤 것이 도이며, 어떻게 닦습니까? 반드시 닦아서 이루어야 합니까?, 아니면 공용을 빌리지 않는 것입니까?
답변 : 걸림 없음이 도이고 허망을 깨닫는 것이 수행이다. 도는 본래부터 원만하나 허망하게 일어남이 허물이니 허망한 생각이 몽땅 다하면 그것이 바로 닦아 이루는 것이다.
二問 道若因修而成卽是造作 便同世間法虛僞不實 成而復壞何名出世 答造作是結業名虛僞世間 無作是修行卽眞實出世
두 번째 물음 : 만일 도가 닦아서 이루어진다면 이는 조작하는 것이라서, 세간법이 허망해서 실답지 않으므로 이루어졌다가 다시 무너지는 것과 똑같으리니, 어찌 세간을 벗어난 법이라 이름하겠습니까?
답변 : 조작이란 업을 짓는 것이니, 이름하여 거짓된 세간이다. 조작 없음이 바로 수행이니, 곧 진실인 출세간이다.
三問 其所修者爲頓爲漸 漸則忘前失後 何以集合而成 頓則萬行多方 豈得一時圓滿 答眞理卽悟而頓圓 妄情息之而漸盡 頓圓如初生孩子 一日而肢體已全 漸修如長養成人 多年而志氣方立
세 번째 물음 : 그 닦는 바라는 것은 돈수입니까, 점수입니까? 점수라면 앞의 것을 잊고 뒤의 것을 잃으리니, 어떻게 모아서 이루겠습니까? 돈수라면 만행의 길이 많거늘 어찌 일시에 원만하겠습니까?
답변 : 참 이치는 즉각 깨달음으로써 단박에 원만해지고, 망령된 정은 그 정은 그 정을 쉼으로써 점차적으로 다한다. 단박에 원만함은 마치 갓 태어난 아기가 일시에 팔다리가 이미 온전한 것과 같고, 점차적으로 닦음은 마치 오래 길러서 어른이 되어서야 의지와 기상이 서는 것과 같다.
四問 凡修心地之法 爲當悟心卽了 爲當別有行門 若別有行門何名南宗頓旨 若悟卽同諸佛何不發神通光明 答識冰池而全水 籍陽氣而鎔消 悟凡夫而卽眞 資法力而修習 冰消則水流潤 方呈漑滌之功 妄盡則心靈通 始發通光之應 修心之外無別行門
네 번째 물음 : 무릇 심지를 닦는 법은 마음을 깨달으면 곧 요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따로 행문이 있습니까? 만약 따로 행문이 있다면 무엇을 남종의 돈오의 종지라 이름하며, 만약 깨닫는 즉시 모든 부처님과 같다면 어찌 신통 광명을 발하지 않습니까?
답변 : 얼음이 언 연못이 전부 물인 줄 알지만 햇볕을 빌어야 녹고, 범부인 채로 참이라는 것을 깨달아도 법력을 빌어야 닦아 익힌다. 얼음이 녹으면 물의 흐름이 원활해져서 바야흐로 관개의 공을 드러내고, 허망이 다하면 심령이 통하여 비로소 신통 광명의 감응을 발휘한다. 그러니 마음을 닦는 이외에 다른 행문은 없다.
五問 若但修心而得佛者 何故諸經復說 必須莊嚴佛土敎化衆生方名成道 答鏡明而影像千差 心淨而神通萬應 影像類莊嚴佛國 神通則敎化衆生 莊嚴而卽非莊嚴 影像而亦色非色
다섯 번째 물음 : 만일 마음을 닦기만 하여도 부처를 이룬다면 무슨 까닭에 모든 경전에서는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교화하여야 비로소 도를 이루었다고 한다”고 설하였습니까?
답변 : 거울이 밝으니 그림자에 천 가지 차별이 있고, 마음이 맑으니 신통이 만 가지로 감응한다. 그림자는 불국토를 장엄하는 것을 비유하고 신통은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비유했다. 그러나 장엄이면서도 곧 장엄이 아니고, 그림자이지만 또한 색이면서 색이 아니다.
六問 諸經皆說度脫衆生 衆生且卽非衆生 何故更勞度脫 答衆生若是實度之則爲勞 旣自云 卽非衆生 何不例度而無度
여섯 번째 물음 : 여러 경에서 말하기를 “중생을 제도하라”고 하였으나, 중생은 곧 중생이 아니거늘 무엇 때문에 다시 수고롭게 제도하여 해탈케 해야 합니까?
답변 : 만일 중생이 실답다면 제도하기가 수고롭겠지만, 이미 스스로 말하기를 “곧 중생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제도하되 제도함이 없음을 예시한 것이 아니겠는가?
七問 諸經說佛常住 或卽說佛滅度 常卽不滅 滅卽非常 豈不相違 答離一切相卽名諸佛 何有出世入滅之實乎 見出沒者在乎機緣 機緣應則菩提樹下而出現 機緣盡則娑羅林間而涅槃 其猶淨水無心無像 不現像非我有 蓋外質之去來相非佛身 豈如來之出沒
일곱 번째 물음 : 여러 경에서 말하기를 “부처님께서는 상주하신다”고 하고, 혹은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신다”고 하였는데, 상주하시면 열반에 들지 않을 것이요, 열반에 들면 상주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 어찌 서로 어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답변 : 온갖 모습을 여읜 것을 이름하여 모든 부처라 하니, 어찌 세상에 나오거나 열반에 드는 실체가 있으랴! 태어나고 소멸하는 것은 기연에 달려 있는 것이니, 기연이 감응하면 보리수 밑에 나타나시고, 기연이 다하면 사라 숲 사이에서 열반에 드신다. 마치 맑은 물이 무심해서 나타내지 못하는 영상이 없는 것과 같나니, 영상은 나의 것이 아니라 외적인 껍데기가 가고 오는 것일 뿐이다. 모습은 부처의 몸이 아니거늘 어찌 여래께서 출몰함이 있으랴!
八問 云何佛化所生吾如彼生 佛旣無生生是何義 若言心生法生心滅法滅 何以得無生法忍耶 答旣云 如化化卽是空 空卽無生 何詰生義 生滅滅已寂滅爲眞 忍可此法無生 名曰無生法忍
여덟 번째 물음 : 부처님께서는 변화로 해서 태어나셨는데 나도 그렇게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미 생겨남이 없으니 그렇다면 생겨남이란 무슨 뜻입니까? 만일 마음이 생기면 법도 생겨나고 마음이 멸하면 법도 멸한다고 한다면, 어떻게 무생법인을 얻겠습니까?
답변 : 이미 변화한 것과 같다고 했으니, 변화함은 곧 공이다. 공은 바로 무생이거늘 어찌 생겨남의 뜻을 따지는가? 생멸이 멸하고 나면 적멸이 참이 되니, 이 법의 무생을 인가한 것을 이름하여 무생법인이라고 한다.
九問 諸佛成道說法秖爲度脫衆生 衆生旣有六道 佛何但住在人中現化 又佛滅後付法於迦葉以心傳心 乃至此方七祖每代秖傳一人 旣云於一切衆生皆得一子之地 何以傳授不普 答日月麗天六合俱照 而盲者不見 盆下不知 非日月不普 是障隔之咎也 度與不度義類如斯 非局人天揀於鬼畜 但人道能結集傳授不絶故 秖知佛現人中也 滅度後委付迦葉 展轉相承一人者 此亦蓋論當代爲宗敎主 如土無二王 非得度者唯爾數也
아홉 번째 물음 : 모든 부처님들께서 도를 이루시고 설법을 한 것은 다만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함이라고 했는데, 중생은 이미 여섯 갈래 길에 모두 있는데 부처님께서는 어째서 인간 세계에서만 나타나서 머무르십니까? 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 가섭에게 법을 부촉해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시고 나아가 중국에 이르러서 7조도 매양 한 사람에게만 전하였으니. 이미 “온갖 중생에게 모두 외아들의의 지위를 얻게 한다”고 하고서 어찌하여 두루 전해 주지 않았습니까?
답변 : 해와 달이 하늘에 떠서 6합을 함께 비춰도 소경은 보지 못하고, 엎어진 등이 밑은 밝히지 못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것은 해가 두루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장애물의 탓이다. 제도하는 것과 제도하지 않은 것은 그 뜻이 이처럼 유사하니, 인간과 천상에만 국집해서 귀신과 축생을 가려내지 말아야 한다. 다만 인도에서만 경전을 능히 결집해서 끊임없이 전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인간에만 나타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 가섭에게 부촉해서 차례차례 한 사람씩만 이어받은 것은 그 당시의 교주를 말한 것이어서, 마치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니, 실제로 제도를 받은 이가 그것뿐인 것은 아니다.
十問 和尙因何發心 慕何法而出家 今如何修行得何法味 所行得至何處地位 令住心耶修心耶 若住心妨修心 若修心則動念不安 云何名爲學道 若安心一定 則何異定性之徒 伏願大德 運大慈悲如理如如次第爲說 答覺四大如坏幻 達六塵如空華 悟自心爲佛心 見本性爲法性 是發心也 知心無住卽是修行 無住而知卽爲法味 住著於法斯爲動念 故如人入闇則無所見 今無所住 不染不著 故如人有目及日光明見種種法 豈爲定性之徒 旣無所住著何論處所
열 번째 물음 : 화상은 무엇을 인하여 발심했으며, 어떤 법을 사모해서 출가했으며, 지금은 어떻게 수행하며 어떤 법의 맛을 얻었으며, 수행한 바가 어떤 지위에 이르렀습니까? 지금은 마음을 머물고 있습니까, 아니면 마음을 닦으십니까? 마음을 머물게 한다면 마음 닦는 일에 방해가 될 것이요, 마음을 닦는다면 생각이 움직여서 편안치 못할 것이거늘, 어찌 도를 배운다고 하겠습니까? 또 마음을 편안히 해서 하나로 정해지면 어찌 성품이 결정된 무리와 다르겠습니까? 바라건대 대덕께서 대자대비를 베푸시어 이치대로 여여하게 차례차례 대답해 주십시오.
답변 : 4대가 허깨비 같음을 자각하고 6진이 허공의 꽃 같음을 통달하며, 자기의 마음이 부처의 마음임을 깨닫고 본 성품이 법성임을 보면 이것이 발심이요, 마음이 머무를 바 없음을 알면 그것이 바로 수행이요, 머무를 바 없는데도 알면 그것이 바로 법의 맛이다. 법에 머물러 집착하면 그것이 생각이 움직이기 때문이니, 마치 어떤 사람이 어두운 곳에 들어가면 보이지 않는 것과 같고, 이제 머무는 바가 없으면 물들지 않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니, 마치 어떤 사람이 눈이 있고 태양의 광명이 있으면 갖가지 법을 보는 것과 같다. 어찌 까닭 없이 결정된 성품의 무리라 하겠는가? 이미 머물러 집착하는 바가 없다면 어찌 장소를 논하겠는가?
又山南溫造尙書問 悟理息妄之人不結業 一期壽終之後靈性何依者
또 산남의 온조 상서가 물었다. “이를 깨닫고 망상을 쉰 사람은 업을 짓지 않는데 한 번 받은 수명이 다한 뒤에는 영성은 어디에 의지합니까?”
答一切衆生無不具有覺性 靈明空寂與佛無殊 但以無始劫來未曾了悟 妄執身爲我相 故生愛惡等情 隨情造業 隨業報 生老病死長劫輪迴 然身中覺性未曾生死 如夢被驅役而身本安閑 如水作冰而濕性不易
“온갖 중생은 깨달음의 성품을 갖추지 않은 이가 없으니, 신령스럽게 밝고 공적함이 부처와 다름이 없다. 다만 비롯함이 없는 겁 이래로 아직까지 깨닫지를 못하고 허망하게 몸을 집착하여 나의 모습이라 여긴다. 그러므로 사랑과 미움 따위의 정을 일으키고, 그 정에 따라 업을 짓고, 업에 따라 생노병사의 과보를 받아서 오랜 겁 동안 윤회한다. 그러나 몸 안에 있는 깨달음의 성품은 일찍이 태어나거나 죽은 적이 없으니, 마치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남에게 이끌려 수고를 했지만 본래의 몸은 한가하고, 물이 얼음이 되었지만 습기의 성품은 바뀌지 않는 것과 같다.
若能悟此性卽是法身 本自無生何有依託 靈靈不昧了了常知 無所從來亦無所去 然多生妄執習以性成喜怒哀樂微細流注 眞理雖然頓達 此情難以卒除 須長覺察損之又損 如風頓止波浪漸停 豈可一生所修便同諸佛力用
만일 이 성품이 곧 법신임을 깨달으면 본래 스스로 무생이니, 어디에 의탁할 것이 있으랴! 신령스럽고 신령스러워서 어둡지 않고 명료하고 명료해서 항상 알고 있으니, 좇아서 온 곳도 없고 또한 간 곳도 없다. 그러나 많은 이가 허망한 집착을 내고 습기로 성품을 이루어서 기쁨ㆍ성냄ㆍ슬픔ㆍ즐거움이 미세하게 흘러든다. 참된 이치는 비록 단박에 깨달았으나 이 망령된 정은 갑자기 제거하기 어려우므로 모름지기 오래오래 각찰해서 덜고 또 덜어야 한다. 마치 바람이 단박에 그쳐도 물결은 차츰차츰 멈추는 것과 같나니, 어찌 일생 동안 닦은 것이 모든 부처님들의 역욕과 같을 수 있으랴!
但可以空寂爲自體 勿認色身 以靈知爲自心 勿認妄念 妄念若起都不隨之 卽臨命終時自然業不能繫 雖有中陰所向自由 天上人間隨意寄託 若愛惡之念已泯 卽不受分段之身 自能易短爲長易麤爲妙 若微細流注一切寂滅 唯圓覺大智朗然獨存 卽隨機應現千百億身度有緣衆生 名之爲佛
다만 공적으로써 스스로의 체를 삼을지언정 색신을 인정하지 말 것이며, 신령스런 앎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삼을지언정 허망한 생각을 인정하지 말라. 허망한 생각이 일어나도 전혀 따르지 않으면 목숨이 다할 때에는 자연히 업이 속박하지 못할 것이니, 비록 중음신이 있다 하여도 향하는 바가 자유로워서 천상이든 인간이든 뜻대로 의탁하리라.
만일 사랑하고 미워하는 생각이 이미 없어지면 분단신을 받지 않아서 스스로 짧은 것을 길게 바꿀 수 있고, 거친 것을 묘한 것으로 바꿀 수 있다. 만일 미세한 흐름이 모두 적멸해지면 오직 원각의 큰 지혜만이 환해져서 홀로 존재하리니, 이것이 곧 기연의 감응에 따라 천백 억의 몸을 나타내어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으로서 이름하여 부처라 한다.
謹對釋曰 馬鳴菩薩撮略百本大乘經宗旨 以造大乘起信論 論中立宗 說一切衆生心有覺義不覺義 覺中復有本覺義始覺義 上所述者 雖但約照理觀心處言之 而法義亦同彼論
삼가 대조하여 해석하건대 마명보살이 백 가지 대승경의 종지를 모아서 『대승기신론』을 짓고, 그 논서 안에서 종지를 세우되 “온갖 중생의 마음에는 깨달음의 뜻과 깨닫지 못함의 뜻이 있는데, 깨달음에 다시 본각의 뜻과 시각의 뜻이 있다‘고 하였는데, 위에서 서술한 바는 비록 이치를 비추고 마음을 관찰하는 곳에서만 말했으나 법의 뜻은 도리어 저 『기신론』과 같다.
謂從初至與佛無殊 是本覺也 從但以無始下 是不覺也 從若能悟此下 是始覺也 始覺中復有頓悟漸修 從此次至亦無所去 是頓悟也 從然多生妄執下 是漸修也
이른바 처음에서부터 ‘부처님과 다름이 없다’고 한 곳까지는 본각이요. ‘다만 비롯함이 없는’ 이하는 불각이요, ‘만일 이 일을 능히 깨달으면’부터는 시각이다. 시각 중에도 돈오와 점수가 있으니, 이로부터 다음에 ‘가는 곳도 없다’는 데까지는 돈오요, ‘그러나 많은 이가 허망한 집착을 낸다’ 이하부터는 점수이다.
漸修中從初發心乃至成佛有三位自在 從此至隨意寄託者 是受生自在也 從若愛惡之念下 是變易自在 從若微細流注下至末 是究竟自在也 又從但可以空寂爲自體至自然業不能繫 正是悟理之人朝暮行心 修習止觀之要節也
점수 중에서도 처음 발심에서부터 부처를 이루기까지 세 지위의 자재함이 있으니, 이로부터 ‘뜻대로 의탁한다’는 곳까지는 생을 받는 자재함이요, ‘만약 사랑하고 미워하는 생각’ 이하는 변역의 자재함이요, ‘만약 미세한 흐름’ 이하는 구경의 자재함이다. 또 ‘다만 공적을 스스로의 체로 삼을 수 있다’에서부터 ‘자연히 속박하지 못하리라’에 이르기까지는 理를 깨달은 사람이 조석으로 마음을 행하고 지관을 닦아 익히는 요긴한 대목이다.
宗密先有八句之偈顯云此意 曾於尙書處誦之 奉命解釋 今謹注釋 如後偈曰
내가 먼저 여덟 구절의 게송으로 이 뜻을 드러내어 일찍이 상서의 처소에서 읊고서 명을 받들어 해석하였다. 이제 여기에 다음과 같이 주석을 하니, 게송의 주석과 같다.
作有義事是惺悟心(義謂義理非謂仁義恩義意明 凡所作爲先詳利害 須有所以當於道理然後行之 方免同惛醉顚狂之人也 就佛法中有三種義 卽可爲之 一資益色身之事 謂衣食醫藥房舍等世間義也 二資益法身 謂戒定慧六波羅蜜等第一義也 三弘正法利濟群生也 乃至爲法諸餘緣事通世出世也)
뜻 있는 일을 하면 깨달음이요.
[뜻이라 함은 의리를 말함이지, 인의나 은의를 말한 것이 아니다. 뜻인즉 대체로 작위한 바를 밝힌 것으로서 먼저 이해를 상세히 하였는데 이로써 도리에 맞는 바가 있은 뒤에 행해야만 바야흐로 똑같이 취하고 미친 사람을 면하게 된다. 불법에 나아가는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이는 곧 행할 만한 것이다. 첫째는 색을 자량하는 일로서 옷ㆍ음식ㆍ의약품ㆍ방사 등 세간의 뜻이요, 둘째는 법신을 자량하는 일로서 이른바 계ㆍ정ㆍ혜ㆍ6바라밀다 등의 제1의요, 셋째는 바른 법을 널리 펴서 뭇 중생을 이롭게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나아가 법을 위하는 온갖 반연의 일은 세간과 출세간에 다 통한다.]
作無義事是狂亂心(謂凡所作爲若不緣上三般事 卽名無義也 是狂亂者 且如世間醉人狂人 所往不揀處所 所作不量是非 今旣不擇有何義利 但縱情妄念要爲卽爲 故如狂也 上四句述業因也 下四句述受果報云)
뜻이 없는 일을 하면 미친 마음이니
[이른바 대체로 작위하는 바가 위의 세 가지 일을 반연치 않으면 곧 뜻 없다고 한다. 미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가령 세간의 취하고 미친 사람이 어디를 가든 처소를 분간하지 못하고, 하는 일마다 시비를 가리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은 이미 어떤 뜻과 이로움이 있는지 분간하지를 못한 채 다만 정과 망념을 따라 하고자 하면 그대로 하기 때문에 미친 것 같다고 한 것이다. 위의 4구는 업인을 서술한 것이며, 아래의 4구는 과보를 받음을 말한 것이다.]
狂亂隨情念臨終被業牽(旣隨妄念欲作卽作 不以悟理之智揀擇是非 猶如狂人 故臨終時於業道 被業所引受當來報 故涅槃經云 無明郎主貪愛魔王 役使身心策如僮僕)
광란으로 정념을 따르면 임종할 때에 업에 이끌리고
[이미 망념에 따라서 하고 싶으면 곧 할 뿐이지, 理를 깨달은 지혜로 시비를 가리지 못하니, 마치 미친 사람과 같다. 이 때문에 임종할 때에 업의 길에서 업에 이끌리게 되어서 미래의 과보를 받는다. 그러므로 『열반경』에 말하기를 “무명의 서방님과 탐애의 마왕이 몸과 마음을 부리기를 종을 구박하듯 한다”고 한 것이다.]
惺悟不由情臨終能轉業(情中欲作而察理不應卽須便止 情中不欲作而照理相應卽須便作 但由是非之理 不由愛惡之情 卽臨命終時業不能繫 隨意自在 天上人間也 通而言之 但朝暮之間所作 被情塵所牽 卽臨終被業所牽而受生 若所作所爲由於覺智 不由情塵 卽臨終由我自在而受生 不由業也 當知欲驗臨終受生自在不自在 但驗尋常行心於塵境自由不自由)
또렷하게 깨달아서 정을 말미암지 않으면 임종할 때에 업을 바꿀 수 있다.
[정 속에 작위하고 싶어도 理를 살펴서 감응하지 않거든 즉시 멈추어야 하고, 정속에 작위하고 싶지 않아도 이치에 비추어서 상응하면 즉시 해야 한다. 다만 시비의 이를 말미암아야지 사랑과 미움의 감정을 말미암지 않는다면, 임종할 때에 업이 능히 속박할 수 없고 하늘과 인간을 뜻대로 자재하게 된다. 결론지어 말하건대, 아침저녁에 하는 일이 망정의 티끌에 이끌리면 임종할 때에 업에 이끌려서 태어남을 받게 되고, 만약 작위하는 바가 자각의 지혜를 말미암고 망정의 티끌을 말미암지 않으면 임종할 때에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태어남을 받아서 업을 말미암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험 삼아 임종할 때 태어남을 받는 것이 자재로운가, 자재롭지 못한가를 알고 싶다면, 다만 티끌 경계에 대한 평소의 행심이 자유로운가 자유롭지 못한가를 시험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래 부분은 풍혈 연소선사에 나오는 내용으로 신수대장경의 주에 의하면, 이 부분은 명본과 원본의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부기해 놓은 것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師上堂曰 祖師心印此日全提 去卽印住住卽印破 只如不去不住 印卽是不印卽是 衆中還有道得者麽
선사가 상당하여 말했다. “조사의 심인을 오늘 온전히 제시하겠다. 가면 심인이 머물겠지만, 머물면 심인이 파괴되리라. 다만 가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는다면 인을 쳐야 옳은가, 치지 말아야 옳은가? 대중 속에서 말할 수 잇는 자가 있는가?”
時有盧陂長老問曰 學人有鐵牛之機 請師不搭印 師曰 慣釣鯨鯢澄巨浸 卻嗟蝸步[馬*展]泥沙
그때 노피장로가 물었다. “학인에게는 무쇠 소의 기용이 있으니, 바라건대 스님께서는 도장을 그냥 두지 마십시오.”
대사가 말했다.
“원래 고래를 잡기 위해서 맑고 큰물에 들어가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달팽이 걸음을 하며 진흙 모래 위를 헤매는구나.”
盧陂擬進語 師以拂子驀口打乃曰 記得前語麽 盧陂曰 記得
노피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대사가 불자로 입을 때리면서 말했다. “앞서 한 말을 기억하는가?”
노피가 말했다. “기억합니다.”
師曰 試擧看 盧陂欲開口 師又打一拂
대사가 말했다. “말하여 보라.”
노피가 입을 열려고 하자, 대사가 또 한 번 불자로 때렸다.
上堂謂衆曰 夫參學眼目臨機直須大用見前 莫自拘於小節 設使言前薦得 猶是滯殼迷封 縱然句下精通 未免觸途狂見 觀汝諸人 從前依他學解迷昧兩蹊 而今與汝一齊掃卻 箇箇作大師子兒 吒呀地哮吼一聲壁立千仞 誰敢正眼著 若著卽瞎卻渠眼
대사가 상당하여 대중에게 말하였다. “대개 참학하는 안목이라면 모름지기 기용에 임해서 곧바로 대용이 현전해야지 소소한 예절에 스스로 구애받지 말아야 한다. 설사 말 이전에 얻었다 해도 오히려 껍질에 막히고 미혹된 것이며, 비록 언구 아래 정밀히 통했다 해도 길에 이르러서는 미친 견해를 면하지 못한다. 여러분들을 살펴보건대 예전에 남에 의지하여 배우고 이해한 것으로 양 갈래 길에서 헤매고 있으니, 이제 여러분과 함께 일제히 쓸어버리리라. 그리하여 저마다 큰 사자가 되어 땅에 버티고 선 채 외마디 포효하고서 천 길 벼랑에 서면, 누가 감히 정안으로 엿보겠는가? 만약 엿본다면 당장 그의 눈을 멀게 하리라.”
問師唱誰家曲 宗風嗣阿誰 師曰 超然逈出威音外 翹足徒勞讚底沙
어떤 스님이 물었다. “스님께서는 어느 집안의 곡조를 노래하시며, 종풍은 누구를 이으셨습니까?”
스님이 말했다. “위음왕불 밖으로 아득히 초연하게 벗어났거늘 공연히 발돋움하고 서서 수고롭게 저사를 찬탄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