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추태후(千秋太后-헌애왕후,헌애황후)
태조의 아들인 추존왕 대종(戴宗)의 딸로, 경종(景宗)의 제3비이자, 목종(穆宗)의 어머니이며, 성종(成宗)의 누이동생이고, 현종의 모후 헌정왕후(獻貞王后)의 언니이다. 오빠인 성종과는 달리 헌애왕후와 헌정왕후는 부모의 성인 왕씨(王氏)나 유씨(柳氏)가 아니라, 왕실의 풍습규율에 따라 할머니인 고려 태조 제4비 신정왕태후 황보씨(神靜王太后 皇甫氏)의 성을 따른다. 경종과는 사촌지간이 된다.
981년 남편인 경종(景宗)이 죽자 아직 2살이던 헌애왕태후의 아들 왕송(王訟) 대신 왕후의 오빠인 개령군 왕치(王治, 성종)가 즉위하게 되고, 헌애왕후는 궁주로서 숭덕궁(崇德宮)에 머물렀다. 성종이 죽은 후 아들 왕송(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고 천추궁(千秋宮)에 머물렀으며, 스스로 천추궁에서 사는 자신을 가리켜 천추태후(千秋太后)로 부르게 하였다.
한편 그녀는 경종이 죽은 후 숭덕궁주(崇德宮主) 시절 외가의 친척인 김치양(金致陽)을 만나 통정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공공연히 알려져 궁궐에 분란을 일으키자 왕후의 오빠 성종은 김치양을 귀양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숭덕궁주(崇德宮主)는 천추태후가 되어 섭정을 시작하자, 김치양을 다시 불러 우복야 겸 삼사사(당시 재정권과 인사권을 동시에 담당하던 직책)에 임명시키고 막대한 권력을 수여하었다. 김치양의 출신지인 서흥(瑞興)에 성수사(星宿寺)를 세우는 등 곳곳에 도관과 사원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천추태후의 본거지인 서경(西京)을 호경 (鎬京)으로 승격하고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떠오르는 태양 요나라와 송나라 사이에서 중립정책을 고수했다. 성종 시대에 흔들린 황제국 체제를 바로 세웠는데 고려사 선거지에 목종의 명이 조서로 기록되고 유방헌(柳邦憲)의 묘지명에서 천추태후가 목종 7년에 유방헌에게 칙을 내려 헌화대왕 경종의 비문을 찬술하게 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북방정책도 실시하여 덕주와 등주 등에 성을 쌓고 군사력을 길렀다.
그로부터 얼마 후, 1003년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정을 통하던 끝에 둘 사이에서 아이가 출생하자, 이 아들로 하여금 병이 든 목종의 후사를 잇고자 했다. 이를 위해 즉위에 걸림돌이 되던 대량원군 왕순(大良院君 王詢, 후일 현종)을 죽이고자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결국, 강조의 변이 일어나 김치양은 목숨을 잃었고, 천추태후는 유배를 갔으며, 목종은 폐위되어 유폐지로 향하는 도중 강조의 부하들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로써 1009년 천추태후는 고려 정계에서 완전히 실각하였다.
한편, 강조 등은 대량원군 왕순을 왕위에 추대하였는데 바로 고려 현종이다. 천추태후는 유배에서 풀려났고 황주에서 살다가, 현종 20년 정월(1029년 1월경)에 왕궁으로 돌아와 66세를 일기로 개경 숭덕궁(崇德宮)에서 일생을 마감했다. 묘는 유릉(幽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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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추태후의 진실(드라마와 관련하여...)

드라마 속 천추태후에 대해 버젓이 고려사에 나와있는 역사들을 작가의 마음데로 너무 집필한거 같아서 우리나라 역사를 드라마로 배울 학생 또는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고증된 자료와 드라마의 허구 내용에 대해 집필 하려 한다.
첫번째 드라마 천추태후 에서는 천추태후(숭덕공주)를 너무 신격화 또는 우상화 하여 그려 놓았다 그러기에 아이들과 방송을 보는데에도 천추태후를 보며 나도 저런 강한 여자가 될꺼야 라는 말을 들었을때 방송이 무섭구나 라는것을 느꼈다 우리가 드라마에서 보는 천추태후의 모습은 역사속 천추태후와 얼마나 일치할까? 답은 전혀 일치 하지 않는다 이다. 사유를 열거 하자면
1. 천추태후의 출생 : 천추태후가 964년에 태어난것은 드라마와 역사가 일치하며 실제 황주 출생이 맞다. 하지만
어린시절 발해유목민 출신인 강조를 만나 은을 베풀고 강조가 천추태후를 평생 흠모하였다고 드라마에서는 말하지만 이건 완전 틀린 가설이다. 왜냐하면 천추태후가 964년생인데 반해 강조는 974년 생으로 실제로 강조가 천추태후보다 10살이 어리다. 즉 천추태후가 20살 이라 하여도 10살 꼬마 강조가 천추태후를 구해주었다는것은 실제로 말이 안되는 가설이다.
2. 천추태후의 거란 참전설: 천추태후가 거란전에 참전했을꺼라는 드라마상 가설은 신빙성이 전혀 없다. 사유는 다음과 같다. 드라마에서 천추태후가 참전했다고 하는 거란 1차 침입은 993년 성종12년 때 일이다. 이때 천추태후 나이가 29세이며 당시 고려 평균 수명이 40세 인것은 감안 한다면 상당히 완숙한 나이 이다. 또한 드라마에서는 강감찬과 큰공을 세운것으로 기록 되지만 고려사에는 숭덕공주의 활동에 대해 일말의 열거한 진술이 없다.
아니라면 여장군이 전쟁에 참여 했다는 기록도 있어야 하지만 전혀 기록이 안되어 있다. 물론 거란의 포로로 끌려가 소태후를 만나 소태후와 일전을 벌인 이야기 또한 드라마상 가장큰 허구 이다.
3. 천추태후의 통칭 : 드라마 천추태후를 보면 거란 에서도 고려안에서도 '천추태후'라 부르는 모습을 자주 본다. 그녀가 섭정을 할때에 천추태후가 맞으나 실제로는 숭덕공주라 불리었고 그 누구도 천추태후라 부르진 않았다.
당시 고려조정은 섭정하는 천추태후보다는 목종이 통치를 더욱 잘 하였고 천추태후보다는 김치양의 이름이 고려사에 더욱 많이 등장한다.
4. 천추태후의 통치: 천추태후가 드라마처럼 목종 재위 초기에는 섭정을 한것은 맞다. 허나 천추태후가 군을 통솔하고 군비를 정비하며 군을 인솔한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드라마와는 다르게 그것을 실행한 사람들은 고려시대 무신일파였던 서희,강감찬,강조,양규,김숙홍 등이다. 무신들이 대두되는 이유는 드라마에서 처럼 서희가 소손녕과의 담판에서 큰 승리를 하고 강감찬이 귀주에서 큰공을 세워 문신에 눌려살던 무신이 한발짝 앞으로 나서게 된다.
5. 천추태후의 말로 : 드라마 천추태후도 막바지를 보이는것 같다. 하지만 말로까지 꼭 명통치자 이며 아들을 간절히 생각하는 의로운 어머니로 그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추태후의 말로는 드라마완 다르게 그리 순탄치 않았다.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사통을 하여 아이를 낳게 되고 자신의 아들(목종)을 폐위하고 자신과 김치양 간의 아들을 왕위에 등극 시키려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운다. 아마 성공 했다면 고려는 김씨의 고려가 瑛뻐� 하다. 허나 이를 먼저 알아챈 목종이 채총순을 급히 불러 북방의 강조에게 도움을 청한다. 허나 평소 술과 향락을 즐기던 목종을 탐탁치 않게 여긴 강조는 오히려 목종을 폐위 시키고 현종(대량원군)을 제위에 올린다. 그러면서 김치양의 3족과 그 족속들을 모두 참형하여 효시 하고 천추태후는 귀양을 보낸다. 그러면서 천추태후는 귀양지 에서 1029년 사망하게 된다. 허나 지금 드라마 대로 가면 천추태후는 정말 의녀로 기록이 될듯 한데 이건 아니구나 싶다.
그밖의 기타 점들에서도 너무 많은 허구가 발생된다.
1. 김치양의 과거 : 드라마에서는 김치양이 마의태자의 후손인 김행으로 묘사 된다. 신라왕실 마지막 태자의 후손중 김행이란 인물이 있는 것은 맞으나 김치양은 아니다. 이유는 김치양은 숭덕공주의 집안인 황보씨의 8촌정도
되는 친척 이기 때문이다. 김치양이 궁에 들어올수 있었던 계기는 숭덕공주가 섭정을 하면서 부터 이다. 하지만 드라마 처럼 건장한 모습이 아닌 사리사욕에 눈이 먼 승려로 역사는 기록 되어 있다. 고려사에는 음탕하며 욕심이 많은 이상한 중 이라고 기록 되어 있다. 역사속 가장 추악한 인물중 하나를 억지로 마의태자의 후손으로 끼워넣기는 KBS에서 한 가장 큰 실수라고 생각 된다.
2. 강조 : 강조는 본디 출신은 정확치는 않으나 974년에 태어나 고려 목종때 임관하였다고 한다. 강조 역시 발해의 진골 귀족 출신으로 부모가 배신을 당하여 유랑하는 발해 유목민으로 나오나 이것 역시 틀린 말이다. 강조의 출생이 발해 인 일지는 모르나 강조의 어린시절은 절대 부랑하지 않았다. 이유는 바로 그 아비가 고려의 중신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강조가 정변을 일으킨 이유도 개경에 머무르든 부친이 부추겨서 라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아비가 고려의 중신인데 어찌 유랑하는 발해인 일수가 있겠는가? 또한 드라마에서 처럼 숭덕공주를 따라 거란의 1차 침입에 참가 했다는 것 자체도 말이 되지 않는다. 993년 거란의 1차침입당시 강조의 나이는 19세 약관의 나이인데 이에게 군사를 주어 통솔 하게 했다면 고려시대에 인물이 없거나 강조가 신적인 인물이였어야 하나 강조 또한 자만심이 강하고 남을 자신의 아래로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는것으로 보아 또한 그런 성격이 되질 않는다.
또한 강조가 정말로 숭덕공주를 흠모 하였을까? 답은 아니다에 가깝다 강조와 숭덕공주의 나이는 무려 10살 차이
또한 궁에서는 쳐다보지도 못할 계급 차이이다. 또한 강조가 가장 싫어 하는것이 주색이였다. 그러기에 강조는 평소 주색에 빠져 사는 목종을 탐탁치 않게 여겨 스스로 자원하여 북방의 경계를 맏았던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고려 역사상 가장 음란하게 그려 있는 천추태후를 흠모 하였을까? 지금처럼 드라마를 그려 진다면 고려사에 악이던 선이던 큰획을 그었던 이 한사내에 대해 어찌 그려질까 궁금하다.
3. 거란과 고려의 관계 : 드라마에선 거란과 고려가 서로 평등한 조건에서 이를 가는 장면이 가끔 눈에 뜨인다.
허나 당시 고려는 거란을 북방의 이민족으로 거란은 고려를 하찮은 조그만 나라 정도로만 여기었다. 그랬기에 거란이 3번이나 쳐들어왔지만 고려가 능히 막아내여 결국은 생각치도 못했던 금나라에게 후미를 찔려 멸망의 길로 걷는 나라이다. 거란의 1차 침입은 송과의 외교 절단이 목표 였으며 2차 침입은 강조정변 이후 강조의 목(아마 정벌하기 위하여 아유를 억지로 만들었을듯 하다.) 3차 침입은 약속을 이행치 않은 고려의 정벌 이였다. 세가지 이유만 보아도 거란이 고려를 어떤 나라로 생각 했는지 알수 있을 것이다. 또한 숭덕공주가 거란과의 화친에 힘을 썼다? 과연 사실일까? 아마 답은 아니다 일것 이다. 천추태후와 소태후가 만났을리가 전무 하기 때문이 첫번째 이유이며 거란의 성종이 천추태후의 존재에 대해서도 전혀 몰랐을 것이다. 만약 숭덕공주를 만났었고 뼈속깊이 원한을 새겨 넣었다면 2번째 침략 사유 처럼 고려를 우습게 본 성종이 가만히 있었을지가 의문이다.
그밖에도 너무 많은 부분을 각색 하여 역사가 아닌 그저 재미로 드라마를 그렸으나 참으로 안타까운점은 그런 각색본 드라마를 보는 어린아이 학생들이 역사상 가장 꼬인 부분을 아름답게만 이해 한다면 이것 또한 교훈을 주는 TV매체 로서의 결격 사유라 보인다.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할 사실 이라면 차라리 미화한 드라마로 꾸미는게 어떨까 한번 생각해 보며 이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