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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의 샘터 / 박재란, 안다성 ◈
심심산골 외로이 피어있는 꽃인가
소박한 너에 모습 내 가슴을 태웠네
그리움에 날게돋쳐 산 넘고 물 건너
꿈을 따라 사랑 찾아 나 여기 왔노라
외딴 곳에 피어난 이름없는 꽃인데
찾아주는 그대는 정녕 나의 님인가
어린 가슴에 그리던 그 사랑이라면
반겨맞아 받드오리 따르오리다
세상이 넓다 해도 그대만이 내 사랑
소녀의 순정에도 그대만이 나의 님
무지개빛 그 하늘밑 행복의 샘터를
둘이 서로 손을 잡고 찾아갑시다.
▒ [행복의 샘터] 박재란에 대하여..
박재란씨는 가창력, 좋은 노래, 외모까지 3박자를 모두 갖춘
[만능가수]이자 여러 리듬에 따라 다양한 창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실력파 가수이다.
그는 [항상 웃음을 띤 얼굴]로 기억되는 가수 박재란은 건강한
보이스 컬러에 경쾌한 노래들로 특히 어려웠던 시절, 삶에 지친
많은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안겨 주었다.
마치 남쪽에서 불어 오는 남풍처럼
화사하고 따뜻한 이미지로 남겨져 있는 가수 박재란.
그 역시도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수시로 잔병치레를 할 정도로 몸이 허약해 전염병이라면 누구
보다도 먼저 앓았고, 특히 일곱 살 나던 해에 걸린 [뇌염]으로
인해 가망이 없다며 장례 치를 준비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의사를 불렀을 때 다행히도 살아났다.
아울러 초등학교 시절,6·25전쟁 중이던 그의 나이 열 살 때
철도국에 근무하던 부친마저 여읜다.
그러나 대중 앞에서는 누구보다도 밝은 모습으로 나섰다.
[럭키 모닝],[푸른 날개],[해피 세레나데]등 초기 히트곡을
시작으로 희망의 메시지를 방방곡곡 전파하며 사회 분위기를
밝게 리드해 나갔다.
[저는 트로트풍의 노래를 거의 부르지 않았어요. 대신 대부분
노래들이 폴카나 트위스트, 부기우기, 룸바, 탱고, 삼바, 차차차
등 신나는 멜로디였죠. 때문에 무대에 서면 관객들이 매우 즐거
워했어요. 물론 한꺼번에 여러 멜로디를 동시에 불러야 하는
어려움도 따랐지만 정말 보람을 느끼던 시절이었죠.]
그의 회고처럼 최초 히트곡 [럭키모닝]을 시작으로 [푸른 날개],
민요풍의 [맹꽁이 타령], 그리고 [님],[둘이서 트위스트를],[산
너머 남촌에],[소쩍새 우는 마을],[아나 농부],[밀짚모자 목장
아가씨],[행복의 샘터],[진주조개 잡이],[강화도령]등 SP시대
에서 출발해 LP시대를 수놓았던 그의 히트곡들은 얼추 손꼽아
봐도 템포가 사뭇 제각각이다.
이처럼 다양한 리듬을 자유자재로 소화했던 가수는 우리 가요계
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다. 바이브레이션을 별로 사용하지 않는
깨끗한 창법으로 장르에 따라 발성을 달리하는 뛰어난 가창력은
작곡가 입장에서 보면 탐이 날 수밖에 없다.
가수 박재란은 불과 열여섯 살 때, 처음 무대에 발을 디딘다.
본명은 이영숙. 교회에서 오르간 반주를 하던 부친 이수천씨와
성가대원이었던 모친 유순남씨 사이의 1남5녀 중 4녀로 서울에서
출생했다.
네 살 때 철도국에 근무하던 부친이 전근함에 따라 가족 모두
천안으로 이사했다. 천안 제일국민학교(지금의 천안초등학교),
천안여중을 거치는 동안 그는 음악적 재능이 남달랐다.
학교에서건 집에서건 당시 인기 있던 유행가를 전파시킨 메신저
역할은 늘 그의 몫이었다. 특히 백난아씨가 부른 [망향초 사랑]
을 즐겨 불렀다고 기억한다.
이러한 그의 음악적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보고 무대 활동을 적극
권유한 인물이 당시 인천경찰악대장 박태준씨. 그의 추천을 통해
육군본부 산하 군예대(KAS) 3기생으로 발탁되면서 대구에서 첫
무대 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수양아버지까지 되어 주는 박태준씨
로부터 받은 예명이 박재란.
일선 장병들의 사기진작을 위한 위문공연이 주 임무였던 군예대
에서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말 그대로 [일인다역]. 노래는 물론
무용, 악극 등 쇼에 관한 한 모든 걸 소화해야 했던 어린 재란은
대구에서 2년, 서울에서 2년간의 군예대 생활을 거치는 동안
무대에 빠르게 적응해 갔다.
군예대 시절, 대구에서 첫 취입해 발표한 노래는 나화랑 작곡의
[뜰아래 귀뚜라미]와 김학송 작곡의 [코스모스 사랑]
그러나 큰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이후 악극단으로 자리를 옮겨
첫 히트곡 [럭키모닝]이 발표될 때까지 무명인 채로 [희망악극단]
과 [무궁화악극단] 그리고 [반도악극단]등을 옮겨가며 무대 활동
을 계속한다. 그러는 사이 그의 가창력과 미모는 입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퍼지면서 뭇 남성들의 [흠모의 대상]이 된다.
[피그말리온 효과] 몸소 실천하다.
[삼천만의 연인]이었던 [꾀꼬리가수] 박재란씨는 빼어난 외모
만큼이나 당시 옴니버스 음반들의 커버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데뷔 때부터 전성기였던 196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음반 재킷을 장식했던 가수가 바로 박재란씨로 확인한 것
만도 무려 100여종--
아울러 스크린에도 진출, 1959년 박종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손석우씨가 주제가를 맡은 영화 [비오는 날의 오후 세시]에서는
미남, 미성의 가수 손시향씨와 함께 특별 출연해 주제가와 함께
연기를 선보였고 이어 1961년, 영화 [천생연분(박성호 감독)]
에서는 타이틀 롤을 맡아 열연했다.
또한 1962년 발표된 히트곡 [님]은 가사 중 [창살 없는 감옥]
이라는 단어를 타이틀로 이듬해 영화로까지 제작되었다.
아울러 이 노래 [님]은 2001년, 작사가 차경철씨 출생지인
울산의 대운산 입구에 노래비까지 건립됐다.
방송과 영화, 취입과 공연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시절,
전국을 누비던 [박재란 쇼]는 언제나 몰려드는 관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무리한 일정으로 인해 폐가 나빠져 약으로 버티면서도 하루에
무려 30곡이나 되는 노래 연습과 취입을 해야 했어요. 젊었을
때니까 가능했던 일이었겠지만 무엇보다 대중들의 환호가 가장
큰 힘이었지요.]
무대에서 생긴 병은 다음 무대에서 치유되었을 정도로 그에게서
노래는 어려움을 이겨낸 치료제이자 면역력을 키워준 힘이었다.
대중들 앞에서의 삶이 전부였던 그에게도 비로소 [자신만의 인생]
이 펼쳐진다.
1959년, 영화주제가 [장마루촌의 이발사]를 연습하기 위해
작곡가 김광수씨 집에 갔다가 운명처럼 남편 박운양씨를 만난 것.
동갑내기이자 당시 성균관대생이었던 박운양씨는 작곡가 겸 연주
인 김광수씨가 출연하는 [무학성 카바레]의 단골로 서로 의형제를
맺은 사이,그와의 사랑이 시작되면서 행복과 불행이 동시에
찾아왔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바로 1989년 [한번만 더]로 사랑 받았던 가수 박성신씨다.
아울러 남편이 영화제작에 손을 댔다가 결국 사기를 당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이 시작된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함께 쇼단체를 만들어 전국공연에 나서기도
했지만 세상일을 모르고 살았던 이들에게 결코 만만치 않았다.
결국 100평 남짓하던 서울 후암동 2층집에서 용산 단층집으로,
또 갈현동 전셋집으로 전락하며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갔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부간의 불화로 인해 결국 이혼을 택한 뒤
1973년 혼자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LA에 도착한 그는 나이트클럽 [타이거]에서 노래 부르는 것을
시작으로 재기에 안간힘을 썼다. 동시에 한국을 오가며 음반을
발표하며 방송에도 종종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 무렵 미국 시민권을 가진 연예인들이 이따금씩 귀국해
활동하는 것에 대해 [국고를 해외로 빼돌린다.]는 투서사건이
발생, 국내 활동이 일체 중단되자 그 역시도 점차 대중들로부터
잊혀져 갔다.
더구나 1979년, 아파트 화재로 모든 걸 잃는다.
밑바닥까지 내려간 그의 생활은 재기에 집착할수록 오히려
그 집념이 병이 되어 심장과 신장에 이상이 오는가 싶더니 급기
야는 악성 위궤양으로 발전, 음식물을 삼킬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유년시절 숱한 잔병치레를 통해 강한 면역력을 키운 동시에
어려웠던 시대를 향해 희망의 메시지를 던졌던 가수 박재란.
이제 그는 스스로 [긍정적으로 대할수록 긍정적으로 되는],
이른바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를 몸으로 실천
하고 있는 듯 여겨졌다.
너나없이 어려운 시절이었기에 오히려 밝은 모습으로 대중들
앞에 나섰던 그는, 스스로의 [피그말리온 효과]로 지금에 와서
새삼 그를 지탱해주는 에너지이다. 그리고 현재는 선교활동을
통해 [노래하는 전도사]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다함돠~!큼큼~
☞ 박재란의 산 넘어 남촌
☞ 조미수의 산 넘어 남촌
☞ 60년대초 가요제 시상식에서.. 권혜경.이미자.현미.한명숙.박재란.
성재희.(좌로부터) 남자가수는 최희준.남일해.김용만.김상국등임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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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렸을때 많이 뵙던 분들이네~~~ 지금은 어떻게들 지내는지? 돌아가신분들도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