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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
최영(崔瑩)은 평장사(平章事) 최유청(崔惟淸)의 5세손이다. 아버지 최원직(崔元直)은 벼슬이 사헌규정(司憲糾正)에 이르렀다. 최영은 용모가 건장하였고 완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다. 처음에는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 휘하에 있으면서 여러 번 왜적을 사로잡아 무용(武勇)으로 알려지자 우달적(于達赤, 우다치)에 보임되었다.
공민왕(恭愍王) 원년(1352)에 조일신(趙日新)이 난을 일으키니 최영이 안우(安祐)·최원(崔源) 등과 함께 협력하여 〈일당을〉 모두 죽이고 호군(護軍)에 제수되었으며, 〈공민왕〉 3년(1354)에는 대호군(大護軍)에 임명되었다. 유탁(柳濯)과 함께 원(元) 승상(丞相) 탈탈(脫脫, 톡토) 등을 좇아 고우(高郵)를 정벌하였다. 전후 27번의 전투에서 성이 장차 함락되려는데 탈탈이 참소를 당해 군사를 파하게 되었다. 다음해에 회안로(淮安路)에서 적을 방어하면서 팔리장(八里庄)에서 여러 번 싸웠다. 또 사주(泗州)와 화주(和州) 등에서 적선 8,000여 척이 회안성(淮安城)을 포위하니 밤낮으로 힘써 싸워 그들을 물리쳤다. 적이 다시 쳐들어오자 최영이 몸에 여러 번 창에 찔리고도 분전하여 싸우니 적을 거의 다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귀국하고 나서 인당(印璫)과 함께 압록강 서쪽의 8참(站)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공민왕〉 6년(1357)에는 서해(西海)·평양(平壤)·니성(泥城)·강계(江界)의 체복사(體覆使)가 되어 나갔다.
다음해에 왜선 400여 척이 오차포(吾叉浦)를 침략하니 최영이 매복하였다가 싸워서 이겼다. 또 다음해에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는데, 홍건적(紅巾賊)이 서경(西京)을 침략하자 최영이 여러 장수들과 함께 생양(生陽)·철화(鐵和)·서경·함종(咸從) 일대에서 싸웠고 자못 공로가 있었다. 또 다음해에 평양윤 겸 서북면순사(平壤尹 兼 西北面巡使)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전쟁의〉 상처가 아직 복구되지 않아 굶어 죽는 사람이 계속 이어지자 최영이 진제장(賑濟場)을 널리 설치하여 양식과 종자를 주면서 농사를 권장하고 전사자의 유골을 묻어주었다. 〈이후〉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 전임되었다
> 고전번역서 > 옥오재집 > 옥오재집 제2권 > 시 > 최종정보
옥오재집 제2권 / 시(詩)
유관에서〔楡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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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은 예로부터 중국에 속했는데 / 楡塞從來屬漢封
거란족이 침범하여 원나라 멸망했지 / 契丹渝後渥溫終
명나라도 이 땅을 여전히 차지했는데 / 明朝此地還通甸
백년 뒤 이천에서 오랑캐 일어난 것과 같네 / 百歲伊川又作戎
구름 사이 많은 봉우리는 나는 새 너머에 있고 / 雲際亂峰飛鳥外
물가의 초라한 객점은 석양 가운데 있구나 / 水邊殘店夕陽中
아득한 지난 일 물을 곳 없으니 / 茫茫往事尋無處
한 곡조 슬픈 노래로 먼 바람 맞으며 간다 / 一唱悲歌溯遠風
[주-D001] 유관(楡關) :
원래 만리장성의 동쪽 끝 관문이 있던 곳인데, 명나라 초기에 여기 있던 성돌을 모두 옮겨 산해관을 새로 쌓았다. 지금은 무령현 소속으로 ‘유관’이라는 마을만 남아있고 옛 관문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주-D002] 원나라 :
‘악온(渥溫)’은 원나라 황실의 성씨 기악온(奇渥溫)을 줄인 것이다.
[주-D003] 명나라도 …… 차지했는데 :
유관은 명나라의 서달(徐達)이 1381년 원나라의 잔존 세력 및 만주족들을 효율적으로 방비하기 위해 구축하여 1년여 만에 완공하였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渝關
本文
一作楡關。即山海關。
> 조선왕조실록 > 세종실록 > 세종 29년 정묘 > 7월 27일 > 최종정보
세종 29년 정묘(1447) 7월 27일(정사)29-07-27[01] 사졸 훈련과 징병에 대하여 대신들과 의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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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에는 사적(沙賊)이 망한 원(元) 나라의 남은 졸병들로써 갑자기 서쪽 지방을 침범할 제, 변방이 막아내지 못하매, 드디어 거침없이 사뭇 밀어 무인지경을 들어오듯 하였으니, 이런 것이 곧 은감(殷鑑)이 되옵니다. 其在前朝, 沙賊以亡元之餘燼, 卒犯西鄙, 邊方失馭, 遂長驅不止, 如入無人之境, 是謂殷鑑
목은문고 제6권 / 기(記)보법사기(報法寺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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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해 겨울에 사적(沙賊 사유(沙劉) 등이 이끈 홍건적(紅巾賊))의 유린을 당한 나머지 전각과 기명(器皿)을 비롯해서 불서(佛書)와 불상(佛像) 등이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해동역사 제15권 / 세기(世紀) 15
고려(高麗) 4
......
○ 이에 앞서 기해년(1359, 공민왕8)에 요양(遼陽)과 심양(瀋陽) 지방에서 군사들이 일어났을 적에 백성들이 난을 피하여 고려로 흘러 들어갔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중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 고전번역서 > 연행록선집 > 동환봉사 > 동환봉사 > 올리려던 16조의 상소[擬上十六條疏] > 최종정보
아! 이 수십 만이라는 것이 모두 정병(精兵)이라 하더라도, 가령 전조(前朝)의 말에 왜선(倭船)이 하삼도(下三道)와 경기ㆍ황해에 운집(雲集)하고, 몽고의 홍건적(紅巾賊)이 양계(兩界)에서 봉기(蜂起)하듯 한다면 이 20만으로는 능히 분담하여 방어하지 못할 것이 명백합니다.設如前朝之季。倭船雲集於下三道。畿,黃之境。蒙古紅巾。蜂午於兩界之地。
태종실록 26권, 태종 13년 7월 19일 병신 1번째기사 1413년 명 영락(永樂) 11년
최이ㆍ연사종ㆍ김승주ㆍ이종무ㆍ조비형ㆍ윤곤ㆍ마천목 등을 외방의 군 책임자로 보내다
내가 들으니 옛날 거란(契丹)의 홍군(紅軍)이 있었을 때 본래 우리 나라를 지목하지는 않았으나, 마침내 그 화를 입었다.
註 248]
홍군(紅軍) : 홍건적(紅巾賊).
조선왕조실록 > 숙종실록 > 숙종 10년 갑자 > 1월 19일 > 최종정보
숙종 10년 갑자(1684) 1월 19일(을유)
10-01-19[01]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여 재이에 대하여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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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예전에 동방의 땅을 다스린 자는 거의 다 다른 땅에서 왔는데 기자(箕子)ㆍ위만(衛滿)이 이것이며, 유복통(劉福通)은 중국에서 크게 일어나 곧바로 송경(松京)을 쳤고, 납합출(納哈出)은북방에서 반란하여 자주 변방의 우환이 되었으니, 이것으로 보면 왜서(倭書)가 참된 것이 아닌지 어찌 알겠습니까?”
劉福通大創於中原, 而直擣松京;
송경은 중국고금명대사전에 안나옵니다. 송나라 수도 변경.개봉도 아닙니다.宋江은 검색가능합니다.
宋江
本文
即四川閬中縣之東河。見東河條。⦿源出雲南鎭雄縣北。北流至四川高縣會定川溪。又東北經慶符縣北爲來復渡。至南廣西注於江。即南廣水。⦿源出雲南威信縣東北。曲屈東北流。至四川古宋縣治東南合於永寧河。故宋州以此名。
사료 고종시대사 17 > 1893년(고종 30년) 11월 27일 > 황해도 유생 이원하, 해주에 전을 지어 성조의 영령을 봉안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림
기사제목 | 황해도 유생 이원하, 해주에 전을 지어 성조의 영령을 봉안하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림 |
연월일 | 고종 30년(1893년, 淸 德宗 光緖 19年, 日本 明治 26年) 11월 27일 |
황해도 유생 이원하(李源夏) 등이 상소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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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는 본래 한 도(道)의 으뜸 고을로서 비록 기전(畿甸)의 밖에 있으나 결코 다른 보통의 고을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대명(大明) 홍무(洪武) 연간에 우리 태조 대왕께서는 하늘이 낸 지략과 용맹으로 해주의 동정(東亭) 아래에서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여 평정하시고 나라의 기틀을 열어 창업을 하셨습니다.
고려사절요 제32권 > 신우 3 > 최종정보
병인신우 12년(1386), 대명 홍무 19년
황제가 지휘첨사 고가노(高家奴)와 서질(徐質)을 보내와서, "기해년에 도적을 피하여 동쪽으로 온 심양의 군사와 백성 4만여 호를 조사하여 찾아간다." 하였으니, 이것은 전원의 심양로 다루하치(達魯花赤) 교주(咬住)의 무고 때문이다. 또 말 3천 필을 살 것을 요청하고, 말 한 필에 무명 8필과 비단 2필을 주는데, 말을 요양(遼陽)까지 보내와서 값을 받아가게 하였다.
주-D002] 기해년 :
고려 공민왕 8년, 원나라 순제(順帝) 지정(至正) 19년인데, 이때에 중국에서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우리나라에까지 그들이 침입하였다.
동사강목 제16하
병인년 전폐왕 우 12년(명 태조 홍무 19, 1386)
동12월 번개가 치고 지진이 있었으며, 어두운 안개로 사방이 막혔다.
○ 명에서 사신을 보내어 말을 사고, 요동과 심양(瀋陽)의 유민(流民)을 찾아 돌아갔다.
황제가 지휘첨사(指揮僉事) 고가노(高家奴)와 서질(徐質)을 보내어 말 5천 필을 사고, 또 기해년 이후의 요동과 심양의 유민 4만여 호를 추쇄(推刷)하려 하였는데, 그것은 전 원(元)의 심양로(瀋陽路) 달로화적(達魯花赤)인 교주(咬住) 등의 무고에 의한 것이었다
도조가 죽자 어린 교주 대신 임시로 환조 이자춘이 관직을 계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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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至正) 2년(1342) 임오 7월 24일에 도조가 훙(薨)하였다. 함흥부(咸興府)의 예안부(禮安部) 운천동(雲天洞)에 장사지내니, 곧 의릉(義陵)이다. 탑사불화(塔思不花)가 사유를 갖추어 개원로(開元路)에 사람을 보내어 알리니, 개원로에서 조감(照勘)해 보매, 탑사불화는 정실(正室)의 아들이므로, 탑사불화로 하여금 관직을 이어받게 하였다. 9월에 탑사불화가 돌아가[卒]니, 아들 교주(咬住)가 어리[幼]었다. 나해(那海)가, 그 어머니 조씨(趙氏)가 고려의 왕족(王族)임으로써 그의 형 완자불화(完者不花)와 함께 모두 원윤(元尹)과 정윤(正尹)이 되고, 또 조총관(趙摠管)의 세력을 믿고 드디어 분수에 넘치는 마음을 내어, 그 애고(哀苦) 중을 틈타 선명(宣命)과 인신(印信)을 훔쳐 가니, 관내(管內)의 군민(軍民)들이 모두 노하기를,
“조씨는 적실(嫡室)이 아닌데, 나해(那海)가 어찌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을 수가 있느냐?”
하였다. 환조(桓祖)가 탑사불화(塔思不花)의 아내 박씨(朴氏)에게 이르기를,
“형수께서 스스로 개원로(開元路)에 가서 변명하십시오.”
하였다. 박씨는 안변(安邊) 사람 득현(得賢)의 딸이다. 환조는 교주(咬住)와 함께 박씨를 따라 개원로(開元路)에 나아가서 진소(陳訴)하니, 본로(本路)에서 사유를 갖추어 황제에게 아뢰었다. 지정(至正) 3년(1343) 정월에 원(元)나라에서, 조씨는 적실(嫡室)이 아니고, 교주(咬住)는 유약(幼弱)하다고 하여, 환조로 하여금 임시로 관직을 이어 받았다가, 교주가 정년(丁年)이 됨을 기다려 그에게 관직을 주도록 하고, 이내 사자(使者)를 보내어 나해(那海)를 목 베게 하였다. 나해가 이 소식을 듣고 선명(宣命)과 인(印)을 가지고 차인사(遮仁寺)에 숨으니, 잡아서 이를 죽였다. 완자불화(完者不花)는 영돈녕(領敦寧)으로 치사(致仕)한 이지(李枝)의 아버지다.
【원전】 1 집 2 면
【분류】 인물(人物) / 가족(家族) / 왕실(王室) / 역사(歷史)
[주-D001] 원윤(元尹) :
고려 때 종친(宗親)과 훈신(勳臣)의 작호(爵號).
[주-D002] 정윤(正尹) :
고려 때 종친(宗親)과 훈신(勳臣)의 작호(爵號).
총서환조가 교주에게 관직을 돌려주고자 했으나 받지 않다. 교주가 우달치에 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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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조(桓祖)의 휘(諱)는 이자춘(李子春)이니, 몽고 이름은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이다. 7, 8세부터 보통 아이들과 다른 점이 있었으며, 점점 장성해지자 말타고 활쏘기를 잘 했는데, 관직을 이어받으매 사졸(士卒)들이 즐거이 붙좇았다. 교주(咬住)가 점점 장성하매, 환조가 직사(職事)를 그에게 돌려주고자 하니, 교주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교주가 뒤에 환조를 따라 공민왕(恭愍王)을 뵈오니, 왕이 우다치(亐多赤)에 소속시켰다. 벼슬이 중순 군기 윤(中順軍器尹)에 이르렀다.
【원전】 1 집 2 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王室) / 역사(歷史) / 인사(人事)
총서태조가 환조의 적장자인 이천계를 극진히 대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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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환조(桓祖)가 세상을 떠나니, 이천계(李天桂)는 자기가 적사(嫡嗣)가 된 이유로써 마음속으로 태조를 꺼리었다. 태조의 종[奴]이 양민(良民)임을 하소하는 사람이 있으니, 천계는 그 누이인 강우(康祐)의 아내와 모여 모의(謀議)하고 양민(良民)임을 하소한 사람과 서로 결탁하여 난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여의치 못하였다. 태조는 이 일을 마음에 두지 않고 그들을 처음과 같이 대접하였다. 병진년 여름에 이르러 어느 사람이 천계의 관하(管下) 사람의 이미 혼인한 아내를 빼앗으므로, 천계가 노하여 구타해 죽이니, 천계를 마침내 옥에 내려 가두었다. 천계가 일찍이 권세를 부리[用事]는 재상(宰相)을 꾸짖어 욕하였으므로, 재상이 드디어 그전 감정으로써 장차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태조가 변명하여 구원하고 힘써 청하였으나, 마침내 구원하여 내지 못하였으므로, 매우 이를 슬피 여겨 여러 고아(孤兒)들을 어루만져 양육하고 무릇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들을 모두 자기가 주관(主管)하였다. 강우(康祐)의 아내는 집이 가난하니, 태조는 이를 불쌍히 여겨 노비(奴婢)를 많이 주어 그 생업을 넉넉하게 하였다. 개국(開國) 후에 천계의 아들을 모두 높은 관작에 임명하였다. 천계는 곧 교주(咬住)이다.
【원전】 1 집 7 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王室) / 사법(司法) / 외교(外交) / 신분(身分) / 역사(歷史)
> 고전번역서 > 동사강목 > 동사강목 부록 상권 상 > 고이 > 최종정보
동사강목 부록 상권 상 / 고이(考異) 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지을 때에 뭇 책을 참고하여 그 같고 다른 점을 평하고 취사에 뜻을 두어 《고이(考異)》 30권을 지었으니, 전실(典實)하여 법다운 것만 뽑았다. 이것이 역사를 쓰는 자의 절실한 법이 되기에 이제 그를 모방하여 《동사고이(東史考異)》를 짓는다.
명(明)의 복진(濮眞)이 고려를 정벌하다가 잡히었는데 굴하지 않다가 죽었다 홍무(洪武) 10년 정사 11월 신우(辛禑) 3년(1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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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명통기(皇明通紀)》에 의하면,
“도독 첨사(都督僉事) 복진이 고려를 정벌하다가 잡혔는데, 고려 왕이 그 용맹을 아끼어 그에게 항복을 권하였다. 진(眞)이 굴복하지 않자 왕이 노하여 죽이려 하니, 진이 크게 왕을 꾸짖으며 칼을 뽑아 가슴을 갈라 보이고 죽었다. 왕의 본의는 협박에 그칠 뿐 그가 죽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진이 죽자 왕이 크게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사죄(謝罪)하고 아울러 그를 따라온 군사까지 돌려보냈다. 상은 그 충절을 가상히 여겨 낙랑공(樂浪公)으로 추봉하고 시호를 충양(忠襄)이라 하였다.”
하고, 정효(鄭曉)의 《오학편(吾學編)》에도 같아서 그 사실이 명확하여 의심할 것이 없는데 본사(本史)에 보이지 않는다. 또 신우(辛禑) 당시 대국과 틈이 생겨 황제의 조서 가운데는 세쇄한 죄과까지 들어 책망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복진의 피살 사건은 없으니 이는 중국 역사가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취하지 않는다.
【안】 삼국(三國) 이전은 우리 나라 사책에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중국 역사를 취하여 보충하였고, 고려 이후는 본사에 이미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본사를 위주로 하였다.
明史 卷330 열전 第218 서역 2 >적근몽고위(赤斤蒙古衛) >복영(濮英)의 서정(西征) 복영(濮英)의 서정(西征) 국가적근몽고위(赤斤蒙古衛) 홍무 13년(1380)에 도독 복영(濮英) [주] 이 서쪽으로 정벌을 하였는데, 백성(白城)에 머물면서 몽고평장(蒙古平章) [주] 홀도첩목아(忽都帖木兒) [주] 를 사로잡았다. 적근참(赤斤站)까지 진격하여 반왕(豳王) 역린진(亦憐眞) [주] 과 그 부곡(部曲) [주] 1,400명, 금인(金印) 하나를 획득하였다. [주] 군대가 돌아오자 몽골 부족 사람들에게 다시 점거되었다. 주 001 濮英(?~1386): 명초의 將領으로 濮眞이라고도 불렸다. 安徽 鳳陽 사람이다. 처음에는 西安衛의 指揮였다. 洪武 19년(1386)에 황제가 耿炳文에게 陝西에서 부대를 선발해서 변방수비를 담당하도록 했는데, 유독 濮英의 부대가 뛰어나서 濮英을 都督僉事로 승진시켰다. 北元 納哈出과의 교전에서 포로가 되었으나 자결하였다. 후에 金山侯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忠襄이었다.
연행기 제2권 / 열하에서 원명원까지[起熱河至圓明園] ○ 경술년(1790, 정조 14) 7월[16일-26일]
16일(갑오)
조공(朝貢)을 바치는 몽고(蒙古)는 아래와 같다.
과이심(科爾沁) 명 나라 초기의 부여외위(扶餘外衛)로서, 원(元)의 후예인 올량합 부장(兀良哈部長)에게 도지휘(都指揮)의 벼슬을 주어 위(衛)의 일을 맡게 하였다
> 고전번역서 > 천동상위고 > 천동상위고 제14권 > 요혜 > 최종정보
천동상위고 제14권 / 요혜(妖彗)
혜성점〔彗星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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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恭愍王)
11년 임인년 6월 신사일. 혜성이 자미원(紫微垣)의 화개(華盖) 아래에서 나타났는데 길이가 1척 남짓으로 모두 3일 동안 이어졌다. 점사에 이르기를 “천하가 혁명(革命)하리라. 덕이 있는 자는 창성하고 덕이 없는 자는 쇠망하리라.”라고 하였다. 7월. 납합출(納哈出 나하추)이 군사 수만 명을 이끌고 이곳 홍원(洪原) 땅의 달단동(韃靼洞)에 들이닥치니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출전하여 대파하였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무척 많았다.
12년 계묘년 4월 병인일. 객성(客星) 일곱 개가 한꺼번에 나타나 세 개의 작은 별이 서로 다투었다. 점사에 이르기를 “병란이 일어나 크게 싸우리라.”라고 하였다. 그 당시의 왜구(倭寇)ㆍ홍적(紅賊)ㆍ장사성(張士誠)ㆍ납합출(納哈出)과 최유(崔濡)가 원나라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덕흥군(德興君)을 받들어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에 주둔하고, 또 평택현(平澤縣) 사람 어량대(於良大) 등이 정역(征役)을 피하려고 사람들을 위협하여 반란을 모의하여 성문에 들이닥쳤다가 날이 밝자 스스로 궤멸되니 그 괴수 8명을 추격하여 붙잡아 목을 벤 것 등은 모두 객성이 서로 싸운 것을 입증한다. (공민12년 1362년)
13년 갑진년 2월 신유일. 혜성이 나타났는데 하나는 태미원의 남쪽에 있고, 하나는 대각(大角) 멀리에 있고, 하나는 북두(北斗)의 동북쪽에 있고, 하나는 저성(氐星)의 북쪽에 있었는데, 빛깔이 붉고 길이는 1자 남짓이었다. 이것은 모두 병란이 일어나고 가뭄이 들 조짐이었다. 3월 기사일. 왜(倭)의 선박 200여 척이 갈도(葛島)에 정박하였다. 임신일. 하동(河東)에 침입하였다. 을해일. 고성(固城)과 사천(泗川)에 침입하였다. 갑신일. 왜가 김해(金海)에 침입하였다. 을유일. 밀성(密城)에 침입하였다. 병술일. 양주(梁州)에 침입하여 200여 가구에 불을 질렀다. 4월 갑진일. 장사성(張士誠)이 장수를 보내 내빙(來聘)하였다. 갑인일. 회양(淮陽)의 주평장(朱平章)이 사신을 보내 개초(鎧稍 갑옷과 창)를 바쳤다. 6월. 왜가 또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였다. 7월. 장사성이 또 사신을 보내 내빙(來聘)하였다. 원나라 사신이 또 와서 왕을 책봉하였다. 이것은 병란을 입증한 것이리라.
15년 병오년 9월 신축일. 어떤 별이 방성(房星)과 허성(虛星)의 상성(上星)에서 패(孛)하였다. 임인일. 또 남쪽에서 나타났다. 점사에 이르기를 “천하에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 죽으리라.”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혜성이 남방에서 나타나니 천하에 병란이 일어나리라.”라고 하였다.
16년 정미년 정월 무술일. 혜성이 땅에 떨어지며 나타났다. 점사에 이르기를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펼치리라.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서 사람들이 많이 굶어 죽으리라.”라고 하였다.
17년 무신년 2월 기미일. 혜성이 서쪽에서 나타났는데 길이가 1장 남짓이었다. 점사에 이르기를 “새북(塞北)에서 병란이 일어나 중국(中國)에 들이닥치리라.”라고 하였다. 3월 갑신일. 혜성이 서쪽에서 나타나 경술일에 대릉(大陵)과 적시(積尸) 사이로 들어갔다. 신묘일. 대릉과 적시 사이에서 나와 천선(天船)의 제9성을 비추었다. 병신일. 권설성(卷舌星)의 위쪽에서 나와 기해일에 대릉의 위쪽으로 들어갔다. 4월 신축일. 또 나타났다. 점사에 이르기를 “죽는 자가 생기리라.”라고 하였다. 이해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7월. 서리가 내려 콩을 죽였다. 이해 대명(大明)의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가 청(淸)을 소탕하였다. 중화(中華)는 곧 황제의 자리이다. 이것은 아마도 묵은 것을 뒤집어 새로운 것에 나아간다〔革舊就新〕는 것을 입증한 것이리라.(공민왕17년 1368년)
19년 경술년 정월 갑오일. 혜성이 동북쪽에 나타났다. 점사에 이르기를 “장군이 왕이 되려고 하리라.”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군사를 일으키는 자가 패자가 되리라. 이적(夷狄)이 침입하리라.”라고 하였다. 갑진일. 저녁에 서북쪽에서 자기(紫氣)가 허공을 가득 메웠는데 그림자는 모두 남쪽에 생겼다. 그 당시에 우리 태조(太祖)께서 기병 5000명과 보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동북면(東北面)으로부터 황초령(黃草嶺)을 넘고 압록강을 건넜다. 당시 사람들은 맹장(猛將)의 기운이라고 말하였다.
23년 갑인년 2월 무술일.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는데 길이가 1장 남짓이었다. 45일 만에 사라졌다. 점사에 이르기를 “장군이 왕이 되려고 하리라.”라고 하였다. 9월. 홍륜(洪倫) 등이 왕을 시해하고, 이인임(李仁任)이 신우(辛禑 우왕(禑王))를 세웠다. 또 왜구의 침략이 있었다.
동사강목 제14상 경진 고려 충혜왕 후 원년부터 계묘 고려 공민왕 12년까지 24년간
갑오년 공민왕 3년(원 순제 지정 14, 1354)
하4월 왜구가 전라도의 조선(漕船)을 약탈하였다.
왜구가 해마다 침략하여 노략질하기를 그치지 않았는데, 이때에 와서 또 전라도의 조운선 40여 척을 약탈하였다.
○ 원에서 노책(盧𩑠)을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로 삼았다.
책(𩑠)이 딸을 원주에게 들어 총애를 받았기 때문이다. 책(𩑠)은 본디 탈(頉)이라 하였는데, 음은 책(策)이니 바르다[正]는 것으로 훈고(訓詁)한다.
○ 원에서 군대를 징발하였다.
이때에 원의 정사가 쇠퇴해져서 하남(河南)의 요망(妖妄)한 도적 한산동(韓山童)ㆍ한교아(韓咬兒) 등이 처음 난을 일으키고, 영천(頴川)의 요인(妖人) 유복통(劉復通)이 또 군사를 일으키어 홍건(紅巾)으로 명호를 삼고 그 무리 관선생(關先生)ㆍ사유이(沙劉二)ㆍ장사성(張士誠) 등과 같이 중원(中原)을 노략질하여 산동(山東)에 나누어 웅거하니, 그 세력이 크게 떨치고 도적이 떼를 지어 일어나서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졌다. 승상(丞相) 탈탈(脫脫)이 도적을 정벌하라는 명을 받고 남정(南征)하려 하는데, 이 당시 마침 채하중(蔡河中)이 왕명을 받들고 원에 사신으로 가 있다가 다시 재상이 되려고 꾀하여 본국으로 돌아가 군사를 내어 정벌을 돕기를 청하고, 이어 정승 유탁과 염제신 등이 용맹과 지략이 있다고 천거하므로 원에서 사신을 보내어 유탁과 염제신 및 권겸ㆍ원호ㆍ나영걸(羅英傑)ㆍ인당(印璫)ㆍ김용(金鏞)ㆍ이권(李權)ㆍ강윤충(康允忠)ㆍ정세운(鄭世雲)ㆍ최영(崔瑩)ㆍ이방실(李芳實)ㆍ안우(安祐) 등과 서경(西京)의 수군(水軍) 3백 명을 징발하고 날래고 용감한 군사를 모집하여 8월 10일을 기한으로 연경(燕京)에 집합하여 장사성을 토벌하게 하였다.
동사강목 제14하계묘년 공민왕 12년(원 순제 지정 23, 1363)
하4월 별이 하늘 복판에서 서로 싸웠다.
○ 장사성(張士誠)이 사신을 보내와 빙문하였다.
홍두적 평정한 것을 축하하여 채단(綵段)ㆍ양(羊)ㆍ공작을 바쳤다.
동사강목 제15하기유년 공민왕 18년(명(明) 태조(太祖) 홍무(洪武) 2, 1369)
하4월 대명 황제(大明皇帝)가 사신을 보내어 천하가 평정되었음을 알려왔다.
대명의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바닷길로 부보랑(符寶郞) 설사(偰斯)를 보내어, 왕에게 새서(璽書 천자의 옥새를 찍은 조서(詔書))를 내리고 천하가 평정되었음을 알렸다. 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숭인문(崇仁門) 밖에 나아가 맞이하였다.
그 조서는 다음과 같다.
대명 황제는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내노라. 송(宋)이 통어(統馭)하기를 상실하고부터 하늘이 그 제사를 끊었다. 원(元)은 우리 족류(族類)도 아닌데 중국에 들어와 주인 노릇한 지 1백여 년에 하늘이 그 혼음(昏淫)함을 미워하여 또한 그 천명을 끊어버려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이 요란하게 된 지 18년이다. 군웅(群雄)이 처음 일어나던 때에 짐(朕)은 회서(淮西) 지방의 한 포의(布衣 평민)였는데 홀연히 포악한 군대가 들이닥쳐 잘못 그 가운데 들어갔다가 그 성공의 가망이 없음을 보고서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편안하지 못하였었다. 이에 하늘의 신령(神靈)이 문무(文武)를 부하(負荷)시켜주어 동쪽의 강좌(江左 강남)로 건너가 백성을 기르는 도를 익힌지 14년 만에 서쪽으로는 한왕(漢王) 진우량(陳友諒)을 토평하고, 동쪽으로는 오왕(吳王 장사성(張士誠))을 고소(姑蘇)에서 결박하고, 남쪽으로는 민월(閩越)을 토평하여 팔번(八蕃)을 평정하고, 북쪽으로는 호군(胡君 원 순제(元順帝))을 축출하여 화하(華夏)를 숙청하고 우리 중국의 옛 강토를 회복하였다. 그리하여 금년 정월에 신민(臣民)이 추대하여 황제의 위에 나아가 국호(國號)를 대명(大明)이라 정하고 연호를 홍무(洪武)로 세웠다. 사이(四夷)가 복속해오므로 국서(國書)를 써서 사신을 보내어 바다를 건너 고려에 들어가 왕에게 통보하여 이를 알게 하노라.
설사는 양 2마리를 왕에게 바쳤다. 설사는 설손(偰遜)의 아우였다.
그가 돌아가게 되자 왕이 안장마와 의복을 선물로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 사신을 보내어 원(元)의 회왕(淮王)에게 빙문하였다.
천동상위고 제2권 / 지변이점(地變異占)수적점〔水赤占
공민왕(恭愍王)
16년 정미년 5월 병자일 삭일. 이현(泥峴)에 혈우(血雨)가 내렸다. 6월 경오일. 연주(漣州) 징파도(澄波島)의 물이 3일 동안 붉어졌다. 점사에 이르기를 “병란이 일어나리라.”라고 하였다.
이듬해(17년 1368년) 정월. 원(元)나라 사신이 와서 대명(大明)의 군사가 세력이 무척 강성하다고 일러주며 마음을 다하여 대비하라고 요청하였다. 8월.왕이 대명의 군사가 황성을 포위하여 몹시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조민수(曺敏修)를 의주안위사로 삼고, 임견미(林堅味)를 안주순무사로 삼았다. 9월. 대명의 주사(舟師 수군(水軍)) 1만여 척이 통주(通州 중국 북경 동쪽에 있는 지명)에 정박하였다가 경성(京城 원나라 도성 대도(大都). 지금의 북경)으로 들이닥쳤다. 원나라 황제는 상도(上都)로 달아나 대명에 사신을 보냈다. 11월. 오왕(吳王 원나라 말기의 무장 장사성(張士誠))에게 사신을 보냈다. 또 원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고전번역서 > 천동상위고 > 천동상위고 제11권 > 경위성변점 > 최종정보16년 정미년 8월 신해일.
화성이 방성(房星)을 침범하였다. 점사에 이르기를 “죽는 임금이 생기리라. 장수와 재상이 근심하리라. 후비(后妃)에게 재앙이 닥치리라.”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정삭(正朔)을 개정하리라. 천하가 두려워하여 근심하리라.”라고 하였다. 정유일. 화성이 남두(南斗)를 침범하였다. 점사에 이르기를 “군사가 패배하여 장수를 죽이리라.”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면령이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경자일. 달이 태미원으로 들어갔다. 점사에 이르기를 “궁중이 어지러워지리라.”라고 하였다. 11월 갑오일. 달이 태미원의 병성(屛星)으로 들어갔다. 점사에 이르기를 “임금과 신하가 예를 잃어버리리라. 보신(輔臣) 가운데 주벌 당하거나 쫓겨나는 자가 나오리라.”라고 하였다. 이해 3월. 왜가 강화부(江華府)에 침입하였다. 이해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다. 7월.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이제현(李齊賢)이 죽었다〔卒〕. 그 당시에 원나라가 망하였다. 형혹(熒惑)의 변고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7년 (1368년)무신년 5월 무인일. 달이 태미원으로 들어갔다. 8월 갑오일. 화성이 태미원의 상장을 침범하였다. 달이 태미원의 상장(上將)으로 들어갔다. 점사에 이르기를 “대장이 죽으리라.”라고 하였다. 이해는 대명(大明)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 홍무(洪武) 원년이다. 원나라에서 사신이 와서 대명의 군사가 세력이 무척 강성하다고 일러주고 마음을 다하여 대비하라고 요청하였다. 8월. 왕이 대명의 군사가 황성을 포위하여 몹시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좌상시 조민수(曺敏修)를 의주(義州)와 정주(靜州) 등지의 안위사로 삼고, 전(前) 전리판서 임견미(林堅味)를 안주순무사로 삼았다. 9월. 대명의 주사(舟師) 1만 여 척이 통주(通州)에 정박하고 경성(京城)으로 들이닥쳤다. 원나라 황제와 황후는 상도(上都)로 달아나고 태자는 전투에서 패배하여 역시 상도로 달아났다. 정사일. 백관들에게 대명과 사신을 통할 것을 논의하게 하였다. 12월. 예의판서 장자온(張子溫)을 보내 오왕(吳王)을 방문하였는데, 오왕 장사성(張士誠)이 무척 예로써 대우하였다.
18년 기유년 8월 계미일. 화성이 남두를 2일 동안 침범하였다. 점사에 이르기를 “군사가 패배하여 장수를 죽이리라.”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사면령이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9월 무술일. 달이 남두를 가렸다. 점사에 이르기를 “신하가 배반하리라.”라고 하였다. 11월 경술일. 목성과 화성이 서로 침범하였다. 점사에 이르기를 “기근이 들리라. 가뭄이 들리라. 신하가 자신의 임금을 해치리라.”라고 하였다. 이해 4월. 대명(大明)의 황제가 사신을 보내 국서(國書)와 사라(紗羅) 단필(段匹)을 내렸다. 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나가 숭인문(崇仁門)에서 영접하였다. 5월. 사신을 보내 표문(表文)을 받들고 금릉(金陵)으로 가서 등극을 경하하고 은혜에 감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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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우(辛禑 우왕(禑王)) 2년 병진년 2월 기축일.
유성이 두괴(斗魁)에서 나왔다. 점사에 이르기를 “대신이 임금의 명을 거스르리라.”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병란이 일어나 장수가 출전하리라.”라고 하였다. 5월 계미일. 유성이 크기가 단지〔壺〕만 하였는데 헌원(軒轅)에서 나와 동쪽을 가리키며 사라졌다. 점사에 이르기를 “궁중의 여자가 많이 참소하여 어지럽히리라.”라고 하였다. 이해 3월. 반야(般若)가 밤에 몰래 태후궁(太后宮)에 들어가 울부짖기를 “제가 실제로 주상을 낳았는데 어찌하여 한씨(韓氏)를 어머니로 합니까?”라고 하였다. 태후가 반야를 쫓아내니 이인임(李仁任)이 반야를 옥에 가두었고 대간(臺諫)과 순위부(巡衛府)가 함께 죄를 다스렸다. 반야는 새로 만든 중문(中門)을 가리키며 울부짖기를 “하늘이 만약 나의 원통함을 안다면 저 문이 반드시 무너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이 잠시 후에 저절로 무너지니 사람들이 몹시 기이하게 여겼다. 마침내 반야를 임진강(臨津江)에 던져 죽이고 그 친족인 용거실(龍居實)을 참살하였다.
7년 신유년 3월 임자일. 유성이 남쪽에서 나와 동북쪽 모서리에 이르렀다.
11년(1385년) 을축년 3월 기축일. 유성이 남쪽에서 발생하여 서쪽을 가리켰다. “대개 유성이 간혹 탁(濁)의 사이에 드나들면 반드시 색깔이 있고 소리가 난다.”라고 한다. 또 말하기를 “유성은 머리부터 꼬리까지의 길이는 크기와 걸맞으나 지금은 출발하여 향한 방향을 기록하면서 소리와 색깔 그리고 크기의 형상을 밝히지 않았으니, 어찌 거기에 담긴 깊은 이치를 탐구하고 비밀스러운 사정을 더듬어낼 수 있겠는가? 기록한 의도도 자세히 알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 당시에 남쪽에서는 도이(島夷 왜(倭))의 잦은 침략에 패배하였고, 북쪽에서는 새호(塞胡 북쪽 변방의 야만인)가 서로 싸우는 것에 대응하였고, 서쪽에서는 홍적(紅賊)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싸움을 벌였다. 장사성(張士誠)은 또 대장을 보내 주(州)ㆍ현(縣)을 위협하여 약탈하였으니 생령(生靈)이 도탄에 빠진 것이 이 무렵보다 더한 적이 없었다.
첫댓글 대륙 대명조선은 고려를 이은 만승천자국으로 봉국을 나눈 것을 후세에 역사조작을 한 것입니다. 치욕의 한반도 조선사로. 조선에는 6경이 있고, 양녕대군이 동경의 왕이 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선조대왕이 이덕형을 왕으로 봉하겠다는 농담도 하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