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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의 시학
김동원 시인 · 평론가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한 시인(함민복)의 시집 제명이기도 한 이 말은 서로 다른 것들의 사이와 접점에 참된 아름다움과 새로움이 있다는 뜻이다. 인게니움ingenium의 시가 그렇다. 이런 새로움과 아름다움을 생성하는 장소로서 경계(境界)는 본래 사물이 어떤 기준에 의해 나누어지는 범위나 한계를 말한다. 유의어로는 경경(竟境), 경계(經界), 계경(界境), 계역(界域), 임계(臨界), 진역(畛域) 등이 있지만, 경계의 함축적 의미는 사물의 근본 또는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막다른 고비를 일컫는다. 생의 아름다움과 구경(究竟)은 이를 기반으로 하며 그 결과 유어예(游於藝, 예에서 노닌다), 응신(凝神, 정신집중), 심수상응(心手相應, 마음과 손의 상응) 등의 말들은 모두 선인(先人)들이 생각하는 이상적 경계론에 포함된다. 동아시아 예술과 미학의 독특한 개념 가운데 하나인 경계는 감각과 인식의 대상으로서 외계(外界)나 외물(外物)을 지시한다. 하지만 그 본래의 지점은 대상의 자리도 아니고 주관의 배타적 영역도 아니다. 대상과 주관이 만나는 접점으로서 몸과 세계의 상호 참조와 간섭과 교감의 체험 속에서 발현되는 경계는 기(氣)의 요동(搖動)이자 힘의 장(場)이다. (이성희,『미학으로 동아시아를 읽다』, 제1부 생성의 예술론 참조) 이런 경계는 경계인 동시에 경지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경계의 사유와 방법론적 모색은 현대시작법에서 간요(肝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추구하는 시와“예술은 항상 현재가 아니라 도래할 미래이다. 그 미래는 안으로 문을 닫아 걸은 골방이 아니라 주체와 세계가 만나는 접점, 경계 위에서 피어난다. 시인은 그 경계에서 새로운 방식으로‘말을 하는 자’이다.”(오민석,「욕망의 사회학을 향하여」,『시와 표현』여름호, 2020)
현대시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주체와 욕망 사이의 경계를 들 수 있다. 라캉의 욕망 이론에 의하면, 우리는 수많은 ‘대상 a’에 대한 환상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허구화된 소타자로서 ‘대상 a’는 응시와 목소리를 말한다. 즉 나의 아이덴티티는 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 사이의 경계에 있다. 하여 인간의 무의식은 언어의 은유와 환유로서 반복된다. 다른 하나는 언어의 조탁과 탁마, 영화적 기법의 도입과 환타지, 비극적 디스토피아를 지목할 수 있다. 언어는 사물을 투과하며 고통을 느낀다. 비극적 페이소스는 몸의 압화(壓畵)이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에서 언어는욕망을 디자인한다. 지독한 물질성으로 반드시 행과 연 사이에 얼룩을 남긴다. 가상현실의 등장은 시적 흐름을 우주로 확장한다. 경계의 시학에서 말과 사물의 관계는 필연적이지도, 불변적인 것도 아니다. 언어는 “사물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 사물은 ‘사라지고’, 그것의 은유적 대변체인 기호의 그물망 속에 인간은 위치한다. 이것이 상징계로의 진입이 가져오는 사물의 타살과 기호적 중재가 의미하는 것이다. 이후부터 인간은 사물과 직접적인 교류를 중단하고 기호와 기호, 혹은 시니피앙과 시니피앙이 엮어가는 의미의 연결 고리 속에서 삶을 영위해간다. 라캉의 또다른 명제, “시니피앙은 다른 시니피앙을 위해서 주체를 재현한다”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주체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행복한 결합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시니피앙이 다른 시니피앙으로 은유적 대치를 이루는 시니피앙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의미 생성의 문제는 그대로 주체의 탄생과 직결된다.”(박찬부『기호, 주체, 욕망』창비, 2007, 87~88쪽)
이 장에서는 가시계와 비가시계의 사이와 경계를 예각적으로 묘파한 송재학의「공중」, 절망에서 놀라운 해학과 페이소스를 발견한 엄원태의「민들레하우스」, 감각적 이미지의 다층적 시선을 환경에까지 확장한 류인서의「눈」, 사물과 환타지를 리믹스하여 우주적 차원으로 사유한 송종규의「구부린 책」, 선(禪)의 모순과 비약을 통해 현실의 정곡을 찌른 노태맹의「碧巖錄을 읽다 2」, 화폭 속 점묘의 세계를 가상과 현실 세계에 빗댄여정의「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 현실의 고행과 도(道)의 수행이 불이(不二)함을 역설한 김기택의「사무원」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공중의 안감 - 송재학,「공중」
사물은 이름을 가질 때 존재한다. 송재학(1955~, 경북 영천 출생)의 시는 그만이 갖는 독자적인 하나의 독법이 있다. 그의 미학적 글쓰기는 매혹적이다. 언어의 창조성과 사물 간의 비례에서 행간을 파고든다. 그의 시는 전(前) 시대의 유물인 감정 과잉에 대한 반성과 성찰에서 출발한다. 이미지만으로 모더니티modernity의 본질을 끄집어낸다. 모호한 시법에다 언어는 심층적이고 다층적이다. 단순히 사물을 이야기하지 않고, 언어의 조각도로 문장의 무늬와 결을 세공한다. 송재학의 시가 팽팽한 긴장과 의미의 모서리가 예리한 것은 그런 연유다. 시의장인(匠人)이 한 행 한 행을 갈고 닦아, 사색과 관찰, 절차와 탁마로 빚은 빼어난 기교(技巧)의 시다. 현대시에서 빠져 있는 디테일한 언어감각과 숨/결이 그의 시 행간 속에 잡힌다. 이런 극사실적 언어의 생동감은 그의 시가 갖는 특장이다.「공중」(『소월시문학상 수상집』, 문학사상, 2010)은 제25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작품이다. 그는 “특유의 언어 감각과 조사법(措辭法)을 바탕으로 시적 진술의 이완과 긴장을 동시에 포괄하는 산문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으며, “풍부한 감성과 섬세한 지적 통찰은 산문체의 언어와 그 율조의 변화를 통해 다채로운 이미지의 조화와 균형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특히 시적 대상에 대한 시인의 생태주의적 관심이 그 존재의 가치를 미학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시적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심사평)
허공이라 생각했다 색이 없다고 믿었다 빈 곳에서 온 곤줄박이 한 마리 창가에 와서 앉았다 할딱거리고 있다 비 젖어 바들바들 떨고 있다 내 손바닥에 올려놓으니 허공이라 가끔 연약하구나 회색 깃털과 더불어 뒷목과 배는 갈색이다 검은 부리와 흰 뺨의 영혼이다 공중에서 묻혀온, 공중이 묻혀준 색깔이라 생각했다 깃털의 문양이 보호색이니까 그건 허공의 입김이라 생각했다 박새는 갈필을 따라 날아다니다가 내 창가에서 허공의 날숨을 내고 있다 허공의 색을 찾아보려면 새의 숫자를 셈하면 되겠다 허공은 아마도 추상파의 쥐수염 붓을 가졌을 것이다 일몰 무렵 평사낙안의 발묵이 번진다 짐작하자면 공중의 소리 일가(一家)들은 모든 새의 울음에 나누어 서식하고 있을 게다 공중이 텅 비어 보이는 것도 색 일가(一家)들이 모든 새의 깃털로 바빴기 때문이다 희고 바래긴 했지만 낮달도 선염법(渲染法)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공중이 비워지면서 허공을 실천중이라면, 허공에는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들이 있다 바람결 따라 허공 한 줌 움켜쥐자 내 손바닥을 칠갑하는 색깔들, 오늘 공중의 안감을 보고 만졌다 공중의 문명이란 곤줄박이의 개체수이다 새점을 배워야겠다
― 송재학, 「공중」 전문
「공중」은불교사상과 동양화풍의 요소가 무르녹아있다. 현학(성)의 날줄과 미학의 씨줄로 엮은 상상력의 치밀함은 돌올하다. ‘공중’ 그 자체가 색깔이라는 놀라운 발견과 심미안은 선(禪)적이다. 곤줄박이가 이미 허공이란 색깔의 일부라는 것, 그 허공의 색을 그 새가 훔쳐왔다고 상상한 지점은 놀랍도록 정치(精緻)한 데가 있다. 이 시의 매력은 “허공(虛空)”과 “공중(空中)”이란 시어가 갈마들며 풍기는 뉘앙스이다. 먼저,「공중」이란 시 제목을 보자. 만약 ‘허공’이란 제목을 붙였다면, 굉장히 공허할 뻔했다. 나는 백 번 이상 독시(讀詩)하며, 시행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을 거친 이후에야, 비로소 왜 이 시인이 제목을「공중」에 낙점했는지 어렴풋이 감(感)을 잡았다. 두 단어가 갖는 미묘한 차이를 시인은 직관하고 있다. “허공의 입김”, “허공의 날숨”에서 그 예를 확인할 수 있듯, 허공이 만질 수 없는 ‘추상어’에 가깝다면, 공중은 “공중에서 묻혀온, 공중이 묻혀준 색깔”, “공중의 소리 일가(一家)” 등에서도 짐작되듯, 촉각과 청각으로 느낄 수 있는 ‘구체어’이다.
시「공중」의 굴대는 역시, “허공이라 생각했다 색이 없다고 믿었다” 이 표현이다. ‘허공’이라면 당연히 텅 비어 ‘색이 없다’라고 독자들은 연상한다. 그런데 이를 깨고 시적 화자는 ‘믿었다’란 단정적 과거형을 쓴다. 이런 패러독스가 독자들의 허를 찌르며, ‘대상에 대한 예사롭지 않는 발견과 성찰’을 촉발한다. ‘허공은 색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다’라는 시적 화자의 강한 암시가 행간을 메우고 있다. 시를 쓰는 것은 낡은 인식의 틀 위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시인은 “익숙함 속에서 익숙하지 않음을, 하찮은 것에서 하찮지 않음을 찾아내는” 비범한 눈이 있어야 하며, “그 눈길이 가 닿은 지점에 어김없이 생의 기미들과 예감들(안도현 시작법『가슴으로도 쓰고 손긑으로도 써라』, 2009, 한겨레출판)”을 길어 올려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비에 젖어 바들바들 떨고 있는 “빈 곳에서 온 곤줄박이 한 마리”를 묘사하면서 정지된 움직임으로서 ‘빈 곳에서 온’이란 모순어법을 쓴다. ‘빈 곳’은 어느 지점쯤일까. 들고 나는 우리 삶의 근원을 모르듯, 새의 생 또한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날아가는지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런 까닭으로 화자는 “허공이라 가끔 연약하구나”라며, 혼잣말을 한다.
시「공중」이 ‘허공’과 ‘공중’이란 실패하기 쉬운 추상적 공간을 끌어들였음에도 ‘좋은 시’의 전범으로 남는 것은, 추상적 이미지를 회화적 요소와 결합한 시인의 탁월한 미적 감수성 때문이다. 아름다운 언어의 무늬는 그 자체가 한 폭의 멋진 수묵화다.“허공의 색을 찾아보려면 새의 숫자를 셈하면 되겠다”란 발상은 기막힌 형상화이다. 자칫, ‘허공’과 ‘공중’ 속에 와해될 수 있는 현란한 이미지를, 독자로 하여금 마치 허공이 ‘쥐수염 붓’을 들고 그리는 듯한 착시효과를 준다. 먹물이 종이에 닿는 순간 번짐으로 인해 생긴 발묵이라는 독특한 효과를 모래 강가에 내려앉는 기러기와 노을로 병치시킨 행은 몽환적이다. “모든 새의 울음에 나누어 서식” 하고 있는 공중의 소리 일가(一家)인 노을을 정확하게 묘사함으로써, 시적 상상력을 극대화시켰다.
마지막 시행은 압권이다. “공중이 비워지면서 허공을 실천중”이라는 기발한 화두가 그것이다. “허공에는 우리가 갖추어야 할 것들이 있다 바람결 따라
허공 한 줌 움켜쥐자 내 손바닥을 칠갑하는 색깔들, 오늘 공중의 안감을 보고 만졌다”라는, 비답을 내린다. 천하에 그 누가 무(無)인 ‘공중의 안감을 보고’ 만져보았을까. 현대시사에서 송재학뿐이다. 이것이 시다. 시「공중」은 잘 빚은 항아리같은 텍스트만으로도 눈부시지만, “공중의 문명이란 곤줄박이의 개체수이다 새점을 배워야겠다”를 끝 행에 박아둠으로써, ‘곤줄박이의 개체수’의 증감을 통한 문명과 생태 환경의 문제점까지 깊이 찌른 환유(換喩)의 시법으로, 시의 영역은 더해지며, 자연의 문명(‘공중의 안감’, ‘공중의 문명’)이란 새로움을 얻고 있다.
사물의 인간화, 혹은 알레고리- 엄원태「민들레하우스」
대상과 자아가 하나 되는 순간, 사건의 서사는 깊어진다. 그리고 사물과 시인은 고유한 리듬을 통해 서로 스민다. 전근대의 시가 동일성을 전제로 한 은유의 미학을 추구한다면, 근대 이후의 시적 주체는 차이에 근거한 환유와 알레고리를 도모한다. 엄원태(1955~ 대구 출생)의「민들레하우스」(시집『먼 우레처럼 다시 올 것이다』, 창비, 2013)는 이런 두 가지의 미덕을 잘 간직하고 있다.그렇게 보면, 이 시의 중심 모티프로서 목줄에 매달린 ‘개’와 ‘나’는 서로 동일하거나 비동일한 은유와 환유의 주체이자 대상이다. 그렇게보면 이 시에 나타난 “어조는 화자의 ‘심리’ 상태에서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서 파생된다. 어조는 화자의 감정만을 드러내는 주관적인 태도가 아니라, 대상과의 관계를 반영하는 객관적인 지표”(권혁웅,『시론』, 문학동네, 2010, p.167)이기 때문이다. 시를 보자.
주인 내외가 나를
저수지 가 비닐하우스지기로 임명한 건 지난가을이다
갇혀 지낸 지 이백육십구 일이 흘렀다
대체로 견디기 힘든 날들이었지만,
한겨울 밤 추위는 따로 기록해둘 만한 시련이었다
목줄에 바투 묶인 탓에 운동을 할 수도 없었던 것도
가장 고통스런 일 중의 하나였다
그럭저럭 봄을 맞이하자
하우스 안 닭장에 병아리 스무 마리가 추가 입양됐다
내 임무는 한층 뚜렷해졌는데, 목줄은 더 꼬이며 짧아졌다
주인 내외는
앞마당을 에워싼 철망 울타리에 강낭콩 덩굴을 올리고
하우스 출입문 위에는
공사장에서 주워 온 ‘안전제일’이란 플라스틱 문패를 달았는데,
최근엔 철책 게이트 옆에다 ‘민들레하우스’라는 앙증맞은 팻말까지 달았다
그리하여 뜻밖에 평화롭다는 민들레영토의 지킴이가 되었지만,
목줄에 묶인 신세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여름 오기 전, 장맛비가 얼마간 열기를 식혀주겠지만
본격적인 더위를 견딜 각오 역시 만만찮을 게다
내 유일한 전략이란 명상과 낮잠,
그나마 낮잠이 조금 더 편한 선택사항인 셈이다
민들레하우스 철책 안에는
상치며 쑥갓, 그리고 국화 화분 몇 개가 전부인데,
나는 목줄이 풀리더라도 닭장은 물론이고
푸성귀며 화분 따윈 절대로 건드리지 않을 것인데,
주인 내외는 그런 나를 아직도 믿지 못해서
오늘도 목줄이 단단히 매였는지 확인하고 돌아갔다
― 엄원태, 「민들레하우스」 전문
표면적으로「민들레하우스」는, “주인 내외가” 주말농장“비닐하우스지기”로 “목줄”을 “단단히 매”어 놓은 개의 이야기다. 사물을 의인화한 방식은, 견딤과 소멸, 체념과 달관의 극한을 보여주며, 이면에는 시인 자신으로서 ‘나’와 인간에 대한 알레고리컬한 느낌을 부여한다. 실제로 지난 삼십 년간신장투석으로 인한, 한 인간으로서 엄원태의 아픔과 비극이 무르녹아 있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비명’보다는 ‘달관’과 체념, 여유가 손에 만져진다. 무릇 가장 아름답고 슬픈 시는 천형의 아픔 속에서 태어난다.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지만 아무나 명시를 얻지 못하는 까닭은, 시가 ‘하늘에서 내리기’ 때문이다. 엄원태의「민들레하우스」는 그의 형벌 같은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행간에 배어있고 화인(火印)처럼 찍혀있다. 긴장과 이완의 적절한 균형은, 그의 아픔과 고통이 감정의 거리를 확보한 때문이다. 그것은 “한겨울 밤 추위”를 견딘 자(者) 즉 개에게만 찾아오는 놀라운 “평화”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엄원태의「민들레하우스」는 존재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연민이 깃들어 있다. 고통 속에서 실존을 긍정의 시학으로 체화해 가는 과정은, 깊은 울림을 준다. 매순간 절박한 생을 성찰해 가는 그에게, 죽음은 오히려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쓸쓸한 긍정’에 이르는 길임을 일깨워준다. 마치, 날마다 “주인 내외”가 개의 “목줄이 단단히 매였는지 확인하고 돌아”가듯, 시인의 운명 역시 밤이면 밤마다 생사의 밧줄을 만지고 산다. 이런 근본 기분이자 근원적 정서로서 페이소스야말로 엄원태 시학의 원형적 미학으로 규정된다. 겨울을 참아낸 봄의 민들레가 그렇듯, 길이 아니라 집(하우스)의 이미지가 그렇듯.
눈, 폭력과 성스러움 - 류인서 「눈」
어떤 시는 첫 줄이 먼저 오고 어떤 시는 과정을 지우려는 듯 마지막 문장이 먼저 온다. 어떤 언어들은 지독한 물질성으로 내 몸에 덩이째 달라붙어 꾸역꾸역 냄새를 피우며 얼룩을 남기지만 끝내 시가 되어주지는 않는다. 어떤 언어는 지독히도 의미의 바깥에 있으려하는 데, 이런 의미의 망실과 잉여 사이에 시의 비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언어는 사물과 부딪치면서 휘어지고 떨어지고 솟아오르기를 반복한다. 시는 나도 모르는 다른 곳으로 흘러간다. 의도치 않았는데 아주 멀리 나아가기도 하고 주변을 맴돌며 살을 파고들거나 다른 몸으로 건너뛰기도 한다. (류인서의 시작노트 중에서)
사유의 폭과 작품의 깊이 이 두 가지는, 류인서(1961~ 경북 영천 출생) 시집 전반을 커버한다. 그녀의 시는 ‘들킴 혹은, 비밀 사이’에 위치한다. 이는 파편화된 현실에 언어의 통일성과 질서를 부여하던 초기 모더니즘을 관통해, 탈중심, 다양성의 세계를 추구하는 포스터 모던의 방향으로 진행된다. 최근에 들어선 시적 언어의 혁신, 전통적 형식의 거부, 새로운 감각 이미지를 통해, 독자적 아방가르드를 추구한다. 사물에 새로운 질문을 던짐으로써 기존 서정을 탈피한 시안이 크게 돋보인다. 그녀의 시는 행과 연 사이, 제3의 의미공간을 확보한다. 섬세한 울림과 떨림은 묘사를 먹고 은유를 낳는다. 그녀는 줄곧 “쓰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시의 허기”를 고백한다. 현실 공간을 예술 공간으로 변주하는 힘이 강하여 작용-반작용의 대립과 긴장은, 그녀의 특징이자 상상이며 에너지다. 때론 비현실적이란 비판도 받지만, 이런 환상성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임을 상기시킨다. 그녀 시작(詩作) 공정의 매커니즘은 복잡계이다. 환유를 통해 정돈되지 않은 불확정성의 현실을 훔쳐낸다든가, 집요한 사물의 근접성에서 기인함이 그중 하나다.‘나와 사물의 틈’, ‘나와 사회의 틈’, ‘나와 세계의 틈’ 사이에서, 시를 잡는 그녀의 어투는 일견 견자(見者)의 시선을 확보한다. 사물 속에 내재한 환상(성)을 묘한 이야기 구조로 풀어낸다. 치밀한 관찰과 묘사는 덤이다. 안테나같은 그녀의 시는, 사물에 닿아있는 시감(詩感)을 즉발성으로 인식할 때 더욱 빛난다. “탁 봤을 때 들어오는 것이 시”라고 류인서는 갈파한다. 풍경을 찍는 방식이 아니라, 세계를 낳는 방식으로 진화하는 그녀의 시는 어릿광대의 줄처럼 팽팽하다. 시어를 꽉 물고 놓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말의 점층과 반복의 리듬은 역동적이다. 하여, 류인서의 감각적 이미지는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모른다.
한편, 시 「눈」(3시집『신호대기』, 문학과지성사, 2013)은 그로테스크하다. “먹어치운다”는 말의 반복과 그로 인한 리듬감이 돋보이는 이 시는 폭설로 인한 자연의 무자비함을 보여준다.「눈」의 감각의 전이는 (허공을, 땅을, 숲을) ‘먹어치운다’는 표현에서 보듯이 시각을 미각화한다. 그리고 ‘흰 것들’은 순수를 가장한 무자비한 폭력에 다름아니며, 완벽한 공포의 은유다. 그녀가 경험한 ‘눈(雪)’의 자연 상징과 연결된 내면 풍경이다. 흰색은 원초적 본능의 색이다. 부활의 색이자 빛의 광기이다. 그녀의「눈」은 반복을 통한 점층의 방식으로 시상을 전개한다. 눈과 사물과의 갈등은 첨예하다. “먹어치운다” 는, 죽음의 또 다른 메타포이다. 류인서는 아무 데나 시어를 툭 던져놓는 방식으로 행을 치고 나간다. 그녀는 이런 시법을 “어휘의 확장 공사”라고 부른다. 마치, 언어가 새로운 언어를 먹어치우는 방식이 그것이다.
눈이 온다
와서
먹어치운다
가등 아래 남자를 먹어치운다
벤치뿐인 벤치를, 거기 붙은 빈자리를 먹어치운다
공터의 이글루 같은 자동차들을 먹어치운다
먹어치운다
엘니뇨와 라니냐의 소란한 탁자를 먹어치운다
던킨도너츠 커피 한잔을 순식간에 먹어치운다
담벼락과 포장마차의 낡은 연애를
돌아와 쓰러져 눕는 반 토막 그림자를 먹어치운다
전화선 너머 국경 너머
둥지 밖 새들의 잔고를 먹어치운다
발 묶인 봄, 세상으로 가는 이정목을 먹어 치운다
저의 시작 북풍의 침대까지 남기지 않고 먹어치운다
다 먹어 텅 빈 눈의 식탁 눈의 위장
소화불량
폭설이 온다
― 류인서, 「눈」 전문
그래서인지「눈」을 읽으면 탐미적이고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가등 아래 남자를 먹어치”우는 흰 눈을 상상하면 강렬하면서도 대담한 개성의 해방을 시도한 야수파, 혹은 고야(1746~1828, 스페인)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눈이 온다 / 와서 / 먹어치”운다는 말은 도발적이자 본능적이며 폭력적이다. 수직의 폭설과 수평의 풍경은 절묘한 대비와 리듬을 연출한다. “벤치 뿐인 벤치를, 거기 붙은 빈자리를 먹어치”우는「눈」은, 이윽고 “공터의 이글루 같은 자동차들을 먹어치운다”. 반복과 점층을 통해 현대문명과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이런 사유와 리듬은 사물과 심리 간의 떨림과 울림으로 갈마든다. 동사 ‘먹어치운다’의 반복과 환유는, 드디어 “엘니뇨와 라니냐의 소란한 탁자를 먹어치”우는 지구환경 파괴의 주범이 된다. 이런 류인서 만의 놀라운 메타포는 “전화선 너머 국경 너머 / 둥지 밖 새들의 잔고를 먹어치”우고, “발 묶인 봄, 세상으로 가는 이정목을 먹어 치”우고, 끝내 시의 “소화불량”으로 환원된다. 이렇게보면,「눈」에는 현실을 물고 놓지 않는, 강력한 주술적 힘이 있다.설명적 이미지를 버리고, 생략과 압축만으로 처리한「눈」은 현실의 폭력성을 고발한 아이러니이자 비약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김수영의 작품을 배후에 두고 창작된 시이다. 류인서는 다른 작품을 빈번하게 자신의 시편 속에 기입(記入)한다. 물론 그러한 작업은 패러디(parody)나 패스티쉬(pastiche)와는 상이한, 구태여 비교하자면 존경과 환대의 의미를 갖고 있는 오마주(hommage)에 가까운데, 이는 류인서의 시학이 일상생활이나 사회적 현실과는 다소 거리를 둔 심미적 세계라는 점과 관련되어 있어 보인다.”(김문주 문학평론가,「사이[間]와 바람[風/願] 중에서)
기억과 상상의 우주– 송종규 「구부린 책」
그녀가 시집 『공중을 들어 올리는 하나의 방식』(민음사, 2015)에서 보여준 시의 스펙트럼은, 우주적 시선의 확장이다. 이런 말하기 방식은 시인의 개성적 호흡인 동시에 감각의 촉수가 밖을 향하고 있다는 뜻이다. 특히 사물과 인간 숙명의 문제를 연대기적 관점으로 예민하게 다루고 있다. 존재의 근원적 비애를 파고들며 어떤 결핍의 문제로 귀결시킨다. 한계에 직면한 자아를 통해 초월적인 대상을 찾아 외연을 확대한다. 송종규(1952~ 경북 안동 출생)의 시적 뿌리는 현재성과 초월성 사이의, 시간적 간극으로 보인다. 그녀의 시가 현실과 비현실, 일상과 초월의 틈입을 찌르는 것도 그런 연유이다. ‘경계의 예술’, 이는 그녀가 일관되게 추구해 온 언어의 극지다. 언어로서 언어를 넘어서는 시의 경지이며 외줄타기다.
켜켜 햇빛이 차올라 저 나무는 완성되었을 것이다
꽃이 피는 순간을 고요히 지켜보던 어린 나방은 마침내 날개를 펴, 공중으로 날아올랐을 것이다
바스러질 듯 하얗게 삭은 세월이 우체국을 세워 올렸을 것이다
숲과 별빛과 물풀들의 기억으로 악어는 헤엄쳐 나가고 행성은 궤도를 그리며 우주를 비행했을 것이다
천만 잔의 독배를 마시고 나서 저 책은 완성되었다
자, 이제 저 책을 펴자
잎사귀를 펼치듯 저 책을 펼치고 어깨를 구부리듯 저 책을 구기자
나무의 비린내와 꽃과 어린 나비가, 악어와 우체통이 꾸역꾸역 게워져 나오는 저 책
저 책을 심자
저녁의 우주가, 어두운 허공인 내게 환한 손을 가만히 넣어줄 때까지
― 송종규, 「구부린 책」 전문
「구부린 책」은부정과 긍정을 동시에 함의하고 있다. 정교한 논리와 모호성으로 구성된 이 시는 비약적이다. 자연과 우주의 경이로움을 따라가며 시(어)를 받아 적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이 시에서 ‘구부린 책’은 허공과 영원한 것에 대한 어떤 시적 지향점을 가리킨다. 가 닿을 수는 없지만 끝없이 꿈꾸게 하는, 그 비밀스런 공중이다.「구부린 책」은, 책을 ‘구부린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어두운 통로를 빠져나오면서 느낀 환(幻)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그녀의 “나무”는 우주의 맨살을 만지면서 깨어난다. “햇빛”의 마음을 가장 잘 따르는 것이 나무이듯, 그녀의 시는 기억의 색실이 풀려나와 이미지를 만든다. 송종규의 숲은 나무들의 말로 수런거린다. 끝없이 사물을 향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무늬를 짠다. 그녀의 초록 가지는 공중의 기분을 알아챈다.「구부린 책」에는 마술사가 부려놓은 환타지가 있다. “천만 잔의 독배를 마시고 나서 저 책은 완성되었다”. 이는 한 권의 책이 나오기까지의 시간과 사유에 대한 비유와 비약의 극치다. 우주는 한 송이의 꽃이다. 그 꽃을 피우기 위해 나무는 모든 감각을 열어둔다. 하나의 책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은, 나이테 속에 각인된 ‘나무의 기억’ 덕분이다. 인간의 무지를 밝혀준 것이 책이듯, 나무는 이 지구에 책을 선물하러 왔다.「구부린 책」은 우주적 사유를 묘사의 칼로 아로새긴다. 달빛 속에서 나무는 생각이 큰다. “숲과 별빛과 물풀들의 기억으로” 자신의 밤하늘을 찾아간다. 숲은 바람을 통해 나무에게 뜻을 전한다. “잎사귀를 펼치듯 저 책을 펼”쳐야 인간은 사랑에 눈을 뜨리라. 등을 구부려 책을 읽는 사람이 아름답듯, 바람에 구부린 나뭇잎은 위대하다. “저녁의 우주가, 어두운 허공인 내게 환한 손을 가만히 넣어줄 때까지”, 우리 모두 “저 책을” 심장에 “심자”. 송종규가 그랬던 것처럼, 지구가 다시 살아나게 나무에게 “나비”의 날개를 달아주자. 나무와 책, 즉 자연과 문명은 시인의 상상적 우주 속에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이음과 승화의 국면에선 시인을 따를 자 없다.
한 물건- 노태맹 「碧巖錄을 읽다 2」
우주가 법당이라면, 허공은 법문이다. 스님도 지구도 부처도 조사도 한 물건이다. 한 물건은 나고 죽는 일이 없다. “―허허, 이런. 雲門의 하늘 한가운데가 열렸다.” 그렇다. 운문(雲門)이란 한, 물건은 “도너츠!” 이기도 하고, ‘도너츠!’가 아니기도 하다. 노태맹(1962~, 창녕 출생)은 시 쓰는 철학자, 철학하는 의사이자, 사드 철회를 위해 삭발을 감행한 ‘경계의 시인’이다. 「벽암록을 읽다 2」는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벽암록을 불태우다(삶창, 2016)에 수록되어 있다.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소개한 한 줄은, 그의 안쪽을 살피는데 유효하다. 그는 이번 시편들을 쓸 때 ‘벽암록’에서 이미지를 훔쳐왔다고 하였다.『벽암록』은 설두 선사와 원오 선사에 의해 만들어진 공안록(公案錄)이다. 노태맹의 시들은 바로 이 벽암록 중 옛 공안(公案)의 시를 읊은 송고(頌古)에 해당한다. 공안은 사구(死句)와 활구(活句)로 이뤄지는데, 사구란 언어 해석으로 그 뜻을 알 수 있는 것이고, 활구는 언어 해석으로 그 뜻을 알 수 없는 것으로써, 흔히 우리가 말하는 화두(話頭)이다. 벽암록 해설을 한 석지현 스님은 “공안참구(公案參究)는 버리는 과정이라고 하였다. ‘생각, 감정, 선입관, 지식을 버리고 바보천치가 될 때 ‘활구’의 문이 열린다.”고 일갈한다.
1.
어떤 스님이 雲門 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와 조사를 초월하는 말입니까?”
“도너츠!”
―허허, 이런. 雲門의 하늘 한가운데가 열렸다.
2.
늦은 저녁 김밥 天國
떡라면에 젓가락질하며
유선 TV에 뚫어져라 시선을 박고 있는 나는
이를테면 연옥 앞에 와 대기하고 있는 것 아닐까,
분명 이곳은 아닌 곳을 향해 있는,
창 밖 고양이 한 마리
어둔 인도 위 웅크리고 앉아
라면 국물 마시는 나를 응시하고 있다.
여기로 뛰어들고 싶은 것일까,
창 이쪽도 펄펄 끓어넘치기 직전의 국솥 같은 것이거늘.
“어떤 것이 인민과 悲劇을 초월하는 말입니까?”
“옜다, 도너츠!”
3.
산허리에 얹힌 구름 그림자
여름숲에 엉겨 걸리다.
그림자만 버려두고
회색 뭉게구름 가 버린 후
여름숲 한 귀퉁이 해질녘까지 축축하다.
그림자 없는 구름은 끝내 비 되지 못할 테고
숲은 어두운 빗소리 계곡물 소리만 얻는다.
허니 이제 요량해 보라,
雲門 스님의 허기를 이제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 노태맹, 「碧巖錄을 읽다 2」 전문
다시 묻는다. “어떤 것이 부처와 조사를 초월하는 말입니까?” / “도너츠!” 말이 되는 것도 같고, 말이 안 되는 것도 같다. 행간은 놀라운 비약이자, 의미의 절벽이다. 그저, 두두물물(頭頭物物)은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는 한 물건”(월호 스님『선가귀감』강설, 2010, 조계종출판사. p14)일 뿐이다. 시가 시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듯, 노태맹의 시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미지의 안팎이 여일(如一)하다. 무엇이 처음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다. 이미지를 열어 이미지를 넘어서고 있다. 무의미가 의미의 단절이 아니라, 의미를 찾아가는 ‘허공의 길 내기’이듯,「벽암록을 읽다 2」는, 화두와 현실이 손바닥과 손등처럼 하나로 통한다. 이런 류(類)의 선문답 시는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깨닫게 된다. 천천히 호흡하며 한 행 한 행 시어들을 뜯어먹다 보면, 어느 순간 쑤욱 가슴으로 ‘한 물건’이들어온다. 그 세계는마치, 고양이가 국물을 쳐다보며 뛰어들고 싶어 하는, 펄펄 끓어 넘치기 직전의 국솥 같은, 모순의 세계이기도 하다.
하여, 시인은 연거퍼 묻는다. “어떤 것이 인민과 悲劇을 초월하는 말입니까?” / “옜다, 도너츠!”. 1920년대 신마르크스주의(Neo-Marxism)를 연상시키는 이 시구는 사회과학적인 접근을 통해 묻고 답한 ‘선(禪)과 빵’의 관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비인간적인 문화와 인간 소외를 딛고 나온 새로운 사상이다. 노태맹의 자기 검열은 엄혹하다. “침묵하고, 공부하고, 고민하고, 함부로 말하지 않고, 될수록 깨어 있으려고 노력한다.” “허니 이제 요량해 보라, / 雲門 스님의 허기를 이제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그의시는 약자 편에 서서 투쟁하는 투쟁가의 모습과 시집『벽암록을 불태우다』처럼, 관조와 초월의 시각을 마르크스주의에 버물린 ‘시와 철학’의 경계선에 서 있다. 결국「벽암록을 읽다 2」에서 그가 궁극을 향해 가리킨 것은, ‘손가락일까, 손가락을 통해 가리킨 달일까.’ 아님, 운문 스님이 궁구한 ‘허기’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옛다, 도너츠!”. 물론 그것들은‘생과 사’,‘시와 非詩’사이, 그 어디쯤일 것이다. 하여 노태맹의 시는, 시 이전에 놓이기도 하고, 시 이후에 가 닿기도 한다. 죽음의 비극이나 회의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따뜻한 시선이, 선(禪)과 불선(不禪)의 경계에서, 시의 방식으로 불쑥 드러난 셈이다. 벽암록을 읽는 것은 삶을 읽는 것이고 앎의 허-기를 메우는 일이다.
점묘 그리고 쇠라― 여정, 「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
여정은 어느 대담에서 2시집『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개인적으로 미술을 많이 알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내 시의 형식은 신인상주의 화가 조르주 쇠라(1859~1891)의 점묘법에 기초하고 있다. 내 시에서의 점묘는 인터넷이 가져온 파편화와 그 혼란의 와중에서 생겨난 당대 현실을 반영한다. 쇠라가 빛과 점, 선과 색채의 조합을 통해 현실을 캔버스에 담았듯이, 나 또한 단어와 기호를 전면적으로 재배치한 시를 쓴다. 하여, 나의 시작(詩作)의 궁극은, 실존과 서정의 모색이다.”
점묘는 19세기 후반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인상주의 미술 유파에 그 뿌리가 닿는다. 대상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재현한 인상주의는, 태양 아래서 빛과 색채, 대기의 변화무쌍한 양상을 미묘하게 묘사한다. 1874년 나달의 사진관에서 8회의 전시회를 연, 모네, 드가, 모리조, 기요맹, 고갱, 시슬레, 르누아르, 세잔은 인상파로 불려진다. 이 유파는 또, 세잔, 반 고흐, 고갱의 후기 인상파(신인상파)로 진화하면서 조르주 쇠라의 점묘에서 정점을 찍는다. 쇠라의 점묘는 햇빛 아래에서 펼쳐지는 당대의 일상생활 특히 여가의 모습을 화폭에 담은 점은 인상주의와 같으나, 다채로운 원색을 그대로 캔버스 위에 작은 붓 터치로 찍어서, 관람자의 눈을 통해 혼합된 색의 세계를 정지된 화면처럼 보여준다. 쇠라를 이은 시냐크는 이러한 기법을 색채 광선주의라고 불렀고, 색채를 섞지 않고 나누어서 칠한다는 의미로 분할주의, 무수한 색점(色點)을 찍는다는 의미로 점묘법이라고도 했다. 쇠라가 그림의 형태, 구성, 색채를 중요하게 생각했듯, 여정 또한 시,「178피스 퍼즐;「불면」―조르주 쇠라의 점묘법을 기념함」에서 점묘법을 “한 텍스트에서 의미를 품은 언어들을 점(point)으로 독립시키고 있다. 신기하게도 점점이 토막 난 단어들의 묶음에서도 의미의 연쇄는 생겨난다.”(권혁웅 시평)
점묘법의 한 갈래로 보면, 시「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2시집『몇 명의 내가 있는 액자 하나』, 2016, 민음사)은 반복된 쉼표를 통한 순수하고 정확한 언어 분할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문장 잇기의 은유 놀이는 언어의 기하학적 체계를 떠올리게 하며, 시작품의 다층적 깊이를 섬세하게 확보한다. 언어와 언어가 물고 가는 적확한 연결 방식은, 행간 속에서 유장한 내재율을 만들어, 문장에 독특한 느낌을 부여한다. 이런 시법은 쇠라가 점묘법을 통해 보여준 대비의 효과를 극대화할 뿐 아니라, 문장의 형태와 윤곽을 점묘로 찍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럼,「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을 살펴보자.
나는 새벽 5시에 게임 종료된 하루살이백수다, 나는 낮 12시에 개켜진 이불이다, 빈집이다, 나는 전기밭솥에서 금방 꺼낸 밥공기다, 냉장고에서 꺼낸 밑반찬이다, 수저다, 나는 개수대에 던져진 빈 그릇이다, 지저분해진 수저다, 나는 소화기관에서 배설기관까지 걸어 다닐 운동화다. 운동화에 걸쳐진 셔츠다, 모자다, 나는 짤랑거리는 동전이다, 자동판매기에서 금방 꺼낸 커피다, 주머니에서 꺼낸 담배다, 연기다, 나는 심심해서 나를 만지작거리는 핸드폰이다, 음성변조 장난 전화다, 귀신 목소리다, 나는 휴지통에 버려진 종이컵이다, 꽁초다, 재다, 나는 낮 1시를 걸어가는 길이다, 티셔츠에 그려진 2개의 해골바가지다, 나는 홈플러스 남대구점이다, 승객을 기다리는 개인택시들이다, 테이크 아웃 커피 전문점이다, 나는 KG&G 대구 본부다, 뼈다귀 해장국집이다, 나는 음식물 쓰레기통 주변을 서성이는 하얀 고양이다, 맛있어 보이는 카키색 깃털의 양무새다, 새빨간 입술이다, 남자다, 나는 낮 1시30분에 앉아 있는 벤치다, 노곤함이다, 지루함이다, 갈 곳 없는 바람이다, 강증이다, 나는 버튼에서 방금 태어난 캔 음료다, 찌그러진 빈 깡통이다, 나는 찌그러진 허공 속을 걸어가는 낮 2시다, 앞산에서 내려오는 황사 마스크다, 나는 2개다, 3개다, ……나는 다세대주택이다, 희미하게 나를 지우는 자동문 유리다, 나는 버려진 책들에서 건져 낸 뭉크/칸딘스키/아소르/마그리트 공동 화집이다,《현대세계미술대전집》11번이다, 금성출판사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는 불안이다, 절규다, 뼈가 있는 자화상이다,즉흥 19다, 즉흥 30이다, 나는 푸가다, 노랑=빨강=파랑이다, 나는 밝은 땅 위의 형상이다, 비통해하는 사나이다, 지옥의 행렬이다, 나는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춘 대문 열쇠다, 현관문 손잡이다, 나는 나를 통째로 먹는 거짓 거울이다, 과대망상광이다, 최후의 절규다, 나는 낮 2시20분에 다시 돌아온 내 방이다,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영역 Ⅷ이다, 나는 개켜진 이불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티셔츠다, 모자다, 공동 화집 표지다, 나는 가면들에 둘러싸인 자화상이다, 충혈진 눈이다, 야비한 웃음이다, 왼쪽 눈으로만 흘리는 피눈물이다, 나는 제임스 시드니 앙소르다, 나는 낮 2시50분에 새로 생성된 제임스앙소리다, 나는 다시 처음이다
―여정, 「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 전문
예술가는 자화상을 남긴다. 붉은색 분필로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자화상을 보고 있으면, ‘아!’ 하는 탄성밖엔 낼 수가 없다. 깊게 패인 주름, 내면의 깊이를 탐색하는 자의 우수에 찬 젖은 눈빛, 그것은 두렵고도 신비롭다. 고흐의 (「귀에 붕대를 한 자화상」, 켄버스에 유화, 60×49cm, 1889sus, 코톨드 미술관 소장) 은 섬뜩하다. 고흐는 1889년 생레미 정신요양원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거울에 비친 이 그림을 그렸다. 왼쪽 귀를 잘랐지만, 거울 속에 비친 그대로 오른쪽 귀에 붕대를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 눈과 마음으로 여정은 위태롭고 아픈「자화상」(1시집)을 세상에 내어 놓는다. 그에게 자화상은 “도화지가 자궁”이었다. 하여, 연필을 놓고 지우개를 집어 든 그는 자신을 “지울까 찢을까 잠시 망설인다”.「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은, 수십 개의 개체와 점으로 분할된다. 코드를 뽑는 순간 ‘나’는 게임 종료된 하루살이백수다. 새벽 5시까지 화자를 따라가며, 나는 이 시대의 바코드를 사색한다. 아니, 낮 12시에 개켜진 이불이 된 자신을 생각한다. 빈집에서 혼자 밥이 된 그는, 기막힌 은유다. 전기밭솥에서 금방 꺼낸 밥공기였다가. 냉장고에서 꺼낸 밑반찬이었다가, 금새, 수저로 변신한다. 시는 온갖 입구이자, 온갖 것의 출구이다. 날줄과 씨줄로 엮인 이 하루라는 언어의 거미줄은, 화자의 복사이미지이자, ‘동전’이며, ‘커피’이며, 휴지통에 버려진 ‘종이컵’이다. 아니, 그 모든 것이자, 아무 것도 아닌 가면의 자화상이다. 이런 현대인의 다층적 이미지는,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벗겨도 벗겨도 또 나오는,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틈’이다. 알고 보면「가면에 둘러싸인 자화상」은 한 개인의 하루를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생(生)과 사(死)의 바코드이자, 현대 사회의 안팎의 문제이며, 현실세계와 가상현실의 모순의 경계다. 또는, 바코드화된 자연의 비유이자, ‘나’의 또 다른 은유이며 환(幻)이다.
한편, “예술이 표현할 수 있는 기호의 본질은 무엇인가? 레이디 메이드와 미니멀리즘 그리고 팝 아트가 횡행하는 현대의 예술은 서정의 영기가 존재하지 않는, 그저 단순한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철저하게 자본의 묘리에 종속되었으며, 마침내 코드로 무장하기에 이른다. (…) 현대 예술은 ― 너, 나 그리고 우리는 비트적거리는 게걸음을 걸으며 각자의 방식으로 예술혼을 만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해받기를 원하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미지의 기호에 함몰된 채, 모든 것은 환유적 기호의 운동으로 환원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각자 자기만의 몽상의 세계에 귀의한 채 미적 기호를 아주 내밀한 의식의 코드로 무장한 채 이해의 저편에 예술을 위치시키게 된다.”(김석준 평론가) 그래서 화자는 말한다. 나는 “새빨간 입술이다.” “찌그러진 깡통이다” 끝없이 분열하는 “2개다, 3개다” 결국 시인은 화자를 통해 현대인의 ‘불안’과 ‘절규’를 지옥의 행렬로 은유한 것이며, 과대망상광이 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불확실성의 알레고리를 드러낸다. 하여, 오비디우스의『변신이야기』처럼, 현대의 군상들은 모두 “가면들에 둘러싸인 자화상”이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제각각 아침에 문을 열고 나오는 슬픈 시의 변신이라 하겠다. 진(眞)과 가(假)의 경계에 여정(1970~, 대구 출생) 시의 진가(眞價)가 있다.
밥과 도(道)― 김기택 「사무원」
천지는 도(道)의 양식-밥솥이다. 색(色)으로 밥을 지어 공(空)을 먹이고, 공(空)으로 밥을 지어 색(色)을 먹인다. 만물은 생사(生死)가 서로 먹인다. 하늘과 땅은 음양과 오행의 법칙으로 사계절을 먹인다. 개미 한 마리라도 원자(原子) 하나라도, 결코 먹지 않는 것은 없다. 하여, 옛 성현의 말씀에 “國以民爲本 民以食爲天”이라 하여 국가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걸 하늘로 삼는다고 한다. 그렇듯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먹고 사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봄은 꽃으로, 여름은 초록으로, 가을은 단풍으로, 겨울은 흰 눈으로 서로 먹인다. 천둥과 번개로 소리의 밥을 짓기도 하고, 태풍과 해일로 밥솥을 뒤집기도 한다. 알고 보면 자연은, 구상과 추상의 밥상을 우리 앞에 내놓는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이란 경이로운 재료를 버무려, 해와 달을 운행하여 일상의 밥을 짓고 꿈을 갖게 한다. 김기택(1957~, 경기도 안양 출생)의「사무원」(시집『사무원』, 창비, 1999)은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온갖 업무에 시달리는 사무원의 모습을, 불교 수행자의 고행에 빗대어, 현대인의 삶의 모습을 풍자하고 있다.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여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에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지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종일 損害管理臺帳經과 資金收支心經 속의 숫자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 업무 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종소리 북소리 목탁 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에다 자금 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산 부실채권 등등을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
끝없는 수행 정진으로 머리는 점점 빠지고 배는 부풀고
커다란 머리와 몸집에 비해 팔다리는 턱없이 가늘어졌다.
오랜 음지의 수행으로 얼굴은 창백해졌지만
그는 매일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렸다고 한다.
수행에 너무 지극하게 정진한 나머지
전화를 걸다가 전화가 버튼 대신 계산기를 누르기도 했으며
귀가하다가 지하철 개찰구에 승차권 대신 열쇠를 밀어 넣었다고 한다.
이미 습관이 모든 행동과 사고를 대신할 만큼
깊은 경지에 들어갔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30년간의 長座不立'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리 부르든 말든 그는 전혀 상관치 않고 묵언으로 일관했으며
다만 혹독하다면 혹독할 이 수행을
외부압력에 의해 끝까지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나마 지금껏 매달릴 수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의 통장에는 매달 적은 대로 시주가 들어왔고
시주는 채워지기 무섭게 속가의 살림에 흔적 없이 스며들었으나
혹시 남는지 역시 모자라는지 한 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의자 고행에만 더욱 용맹정진했다고 한다.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 다리였지만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김기택, 「사무원」 전문
「사무원」의 사무원은, 산거에 들지 않고 저잣거리에 숨어 수행하는 ‘그’를 통해, 현대인의 수동적 삶과 비인간화되어 가는 현대 사회를 비판한다. 누가 묶어서도 아니고, 그는 날마다 “의자(에 앉아) 고행” 중이다. 그렇다고 “30년간” 해온 “長座不立”을 당장, 그만둘 수도 없다. 그의 손만 쳐다보고 있는 입 벌린 처자식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의 통장에” “매달” 들어오는 “시주”는 ‘돈오(頓悟)’와 맞먹는 법열을 가져다 준다. 하여, 그는 “매일 상사에게 굽실굽실 108배를 올”리며, 전생에 업(業)이려니 넘긴다. 남들은 주체적 사고를 잃은 채, 타성에 젖어 산다고 타박하지만, “하루 종일 손해관리대장경(損害管理臺帳經)과 자금수지심경(資金收支心經)”을 읊으며, 이는 화엄경, 법구경 못지않다고 여긴다. 아무리 더러운 현실의 “습관”과 “행동”이 몸에 배였을지라도, 지옥 가는 것보다 ‘강제 해고’ 당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자기 최면을 건다. 처자식 다 버리고 산속에 들자고 친구가 꼬드겼지만, 죽을 때까지 “그의 책상 아래에는 여전히 다리가 여섯이었고 / 둘은 그의 다리 넷은 의자 다리였지만 / 어느 둘이 그의 다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한다.” 훗날, 그를 두고 어떤 자는 ‘인간 본연의 가치 추구를 상실하고, 헛인생을 살았네’,‘주체성을 잃고 현대 사회에 먹혀 버렸다’는 둥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지만, 정작「사무원」은 부처의 반열에 든 셈이다. 시는 자신이 만든 상상의 세계와 체계 속에서 행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다. 하여, 인간은 각자 사주팔자의 숟가락을 들고 ‘도(道)의 밥솥’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퍼먹다 사라져가면 된다. 그리고 일상을 비일상화한 이 시가 더욱 유의미한 것은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자재한 말과 뜻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