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한국전쟁
남주호 한창록
1. 죽령 전투
(1) 상황
한국전쟁시 국군 8사단이 제천을 방어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육본으로부터 “즉시 대구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고 열차를 통해 이동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단장이었던 이정일 대령은 전문내용이 이상함을 알아차리고 대전에 있는 육군본부로 직접 달려가 사실을 확인해본 결과 허위 명령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당시 안동까지 진출하였던 사단에 즉시 제천으로 돌아갈 준비명령을 하달한 다음 사단에 합류하였다. 일부 낙오병력이 방어하고 있던 단양을 점령한 국군 8사단은 하천선 방어진지를 편성하면서 한편으로는 반격 준비를 갖추어 나갔으나, 7월 8일 개시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하여 하천방어선이 무너지고 결국 단양은 적에게 피탈되고 말았다.
이런상황에서 국군 8사단은 북한 전투력과의 심한 격차로 인해 힘에 겨운 전투를 계속하는 가운데, 단양・죽령간의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북한군에게 상당한 타격을 가한 뒤 7월 12일 죽령을 넘어 풍기로 철수함으로써 단양지구 전투의 막이 내려졌다.
(2) 낙오병력의 공로
7월 7일 아침, 소속 미상의 1개 중대 병력이 제천 북동쪽 12Km 지점의 송학산 기슭에 출현하더니 제천을 거쳐 남쪽으로 행군을 계속하였다. 이 병력은 원래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방동리 부근 38도선에 배치되어 있던 국군 제6사단 제2연대 제9중대로서 정대원(육사 8기, 중령 예편) 중위가 지휘하고 있었다. 제9중대가 7월 4일 제천을 거쳐 가게 된 것은 상급부대인 제2연대 제3대대가 6월 25일 현리에서 분산 철수하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 대대 주력과 멀리 떨어진 까닭에 미처 철수명령을 받지 못하고 뒤늦게 적중에서 탈출한 데에 그 이유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제9중대장은 현리 일대의 북한군 동정과 상급 및 인접부대와 모든 연락이 두절된 상황을 고려하여 그의 재량으로 철수하기로 결단을 내리고, 6월 27일 10:00 방동리 남쪽 조경동을 떠났다.
그 후 중대장은 명지거리・창촌・창동・방림동・주천을 거치는 동안 때론 북한군 편의대와 교전도 하며, 굶주린 상태로 산악지대 행군을 강행하여 이곳까지 중대를 이끌고 왔던 것이다. 제천을 통과한 제9중대는 그 남쪽 4km 지점의 산곡동에서 마을 주민의 호의로 충분한 급식과 휴식을 취하여 심신의 피로를 푼 뒤에, 매포・상진 도선장을 경유 다음날(7월 5일) 오후 단양에 다다랐다. 이때 이 중대의 병력은 매포・상진에서 합류한 타 부대 낙오병을 합쳐 200여 명으로 증가되어 있었다. 그리고 제천・단양간의 5번 도로상에는 많은 피난민이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으며, 도로와 철로 상에 가설된 교량은 모두 파괴되어 있었다. 이날 이른 새벽, 국군 제8사단의 후발대가 단양을 통과한 이후부터 이 일대에서는 갑자기 어수선한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피난민 속에 끼어들어 단양으로 들어간 북한군 편의대와 불순분자들이 선동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정황을 전혀 모르는 제9중대장은 단양에 들어가자 곧 민가에 병력을 분산 수용한 후 단양 소재 공공기관을 찾아갔으나, 경찰을 비롯한 모든 관공서와 일부 주민은 이미 철수 또는 피난한 다음이었다. 제9중대장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이 곳에서 국군의 상황을 확인해야만 하겠다는 일념으로 여러 가지 방법을 궁리하던중 문득 철도비상전화 생각이 떠올라 곧장 단양역으로 달려갔다. 이리하여 중대장은 그 무렵 대구에서 안동까지 북상한 국군 제8사단 군수참모와의 통화를 통해 비로소 전황의 추이를 알게 되었다. 즉 북한군이 제천 방향에서 언제 단양으로 남하할지 모르는 상태임에도, 이 지구의 방어를 책임진 제8사단은 철도사정으로 말미암아 안동 일대에서 지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한편 제8사단은 한시라도 빨리 제천이나 단양으로 진출하려고 서둘렀으나, 이날 오후 마지막으로 피난민을 만재하고 단양을 떠난 열차가 과도한 하중으로 인하여 죽령터널에서 고장을 일으켜 선로가 막혀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진출할 수 없게 되었고, 철도 당국에 선로 소통을 독촉하는 것 외에는 속수무책인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런 판국에서 제8사단은 비록 낙오 병력이긴 하지만 단양에 증강된 국군 1개 중대 병력이 당도하였다는 상황을 알게 되자, 일단 단양을 방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중대장 정대원 중위는 제8사단과의 연락이 이루어진 감격도 컸으나, 그보다도 중대가 수행해야만 할 임무의 중대함을 절감하고 단양 방어를 위하여 병력을 배치하였다.
제 9중대의 병력 배치 상황
・ 중대본부 : 단양초등학교
・ 제 1소대 : 단양철교 좌측
・ 제 2소대 : 단양철교 우측
・ 제 3소대 및 화기소대 : 중대예비
※ 증강된 1개 분대로 수색조를 편성 남한간 북쪽 연안 상진 일대의 북한군 동정을
수색
이렇게 하여 제9중대는 다음날(6일) 09:00경 단양으로 진출한 제8사단의 선발대(제21연대 전술지휘소의 일부 요원과 2개 중대 병력, 트럭 10대를 이용하여 안동・단양 간을 차량행군)와 임무 교대하였다. 제2연대 제9중대는 비록 북한군 점령지역에 고립된 상황에서 탈출하느라 수없는 우여곡절을 겪기는 하였으나, 북한군에게 무혈 점령당할 상태에 놓여 있던 단양을 확보함으로써 상급부대와 지휘・통신이 단절된 상태에서 해당지휘관의 자율적・창의적 판단으로 성공적인 임무를 수행한 모범이 되었으며, 그 이후에 펼쳐진 제8사단의 북한군 남하 지연작전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다. 이날 밤도 단양에서 보낸 9중대는 7일 아침 단양을 뒤로하고, 안동・대구・괴산・충주를 거쳐 10일 오전 수안보에서 마침내 본대와 합류하였다.
(3) 국군 제8사단의 전선 복귀
국군 제8사단이 제천에서 이동할 때 사단 공병대대는 폭파반을 편성하여 제천・단양 간에 있는 대소 철교와 우회통행이 불가능한 지점의 도로를 폭파하였다. 한편 열차 행군으로 대구・영천까지 진출하였던 국군 제8사단 주력은 5일 23:00 안동에 일단 집결하여으며, 죽령터널 사고현장의 수습관계로 열차행군이 지연되자 이곳에서 숙영하였다.
다음날 10:00 안동을 출발한 제8사단 주력은 18:00에 단양에 당도하였으나, 공병 폭파반이 단양철교를 폭파한 다음이어서 남한강 북쪽으로는 진출할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때에는 이미 북한군 제8사단이 제천을 점령한 후 단양 북쪽 11km지점의 평동리에 전술지휘소를 설치하고 있었으며, 그 일부 병력은 전날 밤부터 남한강 북쪽 연변에 출몰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군 제8사단의 단양 진출은 촉각을 다투는 다급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국군 제8사단은 이러한 극적인 상황 하에서 북한군이 남한강을 도하하기 이전에 방어에 유리한 단양・죽령 지구를 확보하게 됨으로써, 전장의 주도권을 쥐고 작전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4) 북한군 8사단 실태
7월 5일 오전 제천에 진입한 북한군 제8사단은 중앙선 축선 상으로 남진할 임무를 부여 받았으나,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임무수행에 있어 다소 미흡한 점이 없지 않았다. 북한군은 제천에서 그들 제12사단과 임무를 교대하였으나, 국군이 제천을 포기한 작전 기도와 새 방어선이 어디에 형성되었는지 알 수가 없어 많은 시간을 허송하였다. 그러던 중 피난민 속에 끼어든 그들의 편의대에 의하여 제천・단양 사이에는 국군이 전혀 배치되어 북한군이 섣불리 단양으로 들어갈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리하여 북한군 제8사단은 단양을 무혈 점령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쳐 버리고 도하작전 준비에 착수하였으며, 다음날(6일) 그들이 선정한 도하 대기 지점에 병력을 전개하고 국군이 하천선 방어진지를 편성하기 이전에 도하작적을 감행할 계획으로, 평동리(단양 북쪽 11km) 소재 매포국민학교에 사단 전방 지휘고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강우로 말미암은 남한강 수위의 증가와 도하장비를 부족 때문에 그들의 작전계획에 차질이 생겼고, 공격 개시 시간은 연장되기만 하였다. 이때 이 사단의 병력은 사단 편제상의 100%인 1만 2,000명 선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전투원의 자질과 훈련 정도는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화력은 122밀리 곡사포 10문을 위시한 각종야포 약 50문을 장비하고 있어, 국군 제8사단에 비하면 월등하게 우세하였다. 그러나 T-34전차와 DR-76 자주포와 같은, 기동력이 있는 무기와 도하 장비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5) 국군 제8사단의 실태
국군 제8사단은 1949년 6월 20일 제10연대와 제21연대를 근간으로 하여 창설된 이후 단양에 병력을 배치할 때까지도 여전히 2개 연대 편제 그대로 였다. 이때 제8사단은 개전 이후 강릉・대관령・가리파고개 전투를 치르는 동안에 약 1,500명이 손실되어, 사단 병력은 5,600여 명으로 감소되어 있었다. 더구나 손실된 인원의 대부분이 전투요원이어서 각 대대 병력은 고작 250명 선을 겨우 유지하고 있었으며, 각 소총중대는 아예 화기소대를 해체하여 3개 소총소대로 임시 개편되어 있었다. 이러한 시정 하에서, 국군 제8사단은 7월 5일 대구로 열차행군을 개시할 무렵 때마침 제천에 집결한 500여 명의 청년방위대원과 군에 지원입대하려고 모여든 학생 중에서 250명을 선발하여, 도합 750여명을 2개 연대와 사령부 및 직할대에 각각 250명씩 충원하였다. 이때 사단이 보유한 주요 화기는 M-3, 105밀리 곡사포(구식 곡사포로 최대 사거리가 북한군이 장비한 122미리 곡사포의 절반인6,500m 밖에 되지 않았다) 13분과 57밀리 대전차로 11문으로서 보잘것 없는 화력이었다. 그렇지만 국군 제8사단은 강릉・제천에서 철수할 때 모든 보그품을 사전에 후송하고 많은 식량을 확보하고 있어 보급이 원활하였으며, 사단 장병들은 제천・대구・단양 간을 열차로 이동하는 동안 충분한 휴식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므로 사기왕성한 가운데 지휘관을 핵심으로 굳게 뭉쳐 있었고, 병력 구성요원이 모두 전투경험이 있는 고참병이어서 전투기량과 투지면에서는 북한군 제8사단을 능가하고 있었다.
(6) 사단장의 작전 개념
국군 제8사단은 단양에 다다른 얼마 뒤인 7월 6일에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23호(1950. 7. 6. 17:00)를 수령하였다. 여기에는 “제8사단은 1개 연대로 원주・제천으로부터 북서 방향으로 공격하고, 기타 부대로 현 방어정면을 고수하여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라.”는 임무가 부여되어 있었다. 즉, 육군본부는 제8사단이 제천을 떠나 안동・개구로 열차 행군하는 동안에 북한군이 제천을 점령할 수 있으리라는 상황은 아예 고려하지 않은 채, 제8사단이 제천까지 다시 북상하였을 것이라고 예측했던 것이다. 이 명령을 받은 제8사단장 이정일 대령은 “방어에 유리한 남한강 연변에 1개 연대를 배치하고 1개 연대를 예지로 대기시켜 상황추이에 즉응하면서 반격을 감행한다.”는 작전 개념을 세웠다. 당시 단양 일원의 북한군 동정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여건을 감안할 때, 국군 제8사단의 반격은 그 실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였다. 그러한 정황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던 사단장이 이와 같은 작전 개념을 가지고 전투준비에 임하게 된 dlas에는 의심스러웠던 육군본부의 자전 명령을 직접 확인해 보지 않고 제천을 떠남으로써, 단양까지의 22km에 달하는 지역이 고스란히 북한군 수중에 떨어져버린 데 대한 자책감이 스며 있었던 것이다.
국군 제8사단의 배치 상황
・ 사단 사령부 : 단양중학교
・ 전방연대, 제21연대 : 방어정면, 324괴지-도담동간 남한강 남쪽 연변(14km)
- 제1대대 : 심곡동 - 만학마을(상진나루 남쪽 강변)
- 제2대대 : 고수동 - 도담골
- 제3대대 : 324고지 - 현천동
・사단예비, 제10연대 ; 단양국민학교에 집결대기
・제18야전포병대대 : 단양역 부근에 포진
・사단 공병대대 : 하방동에 집결대기
(7) 반격 발판 확보를 위한 기습
국군 제8사단이 단양에 진출하여 남한강 연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기 시작한 6일 저녁부터 단양일대의 주민들은 본격적인 피난길에 나섰으며, 다음날까지도 죽령・예천바면으로 연결된 도로상에는 피난 인파가 줄을 이었다. 그들 중에는 제천・매포 일원에서 남하하여 거룻배와 뗏목 등으로 강을 건넌 피난민도 섞여 있어 혼잡을 더해 주고 있었다. 국군 제8사단은 피난민 속에 잠입한 북한군의 편의대를 가려내기 위하여 단양 북쪽에서 검문검색을 실시하던 중, 6일 20:00경 매포의 지방유지와 제천경찰서 경찰관(사복 변장) 한 명으로부터 “북한군이 평동리 소재 매포국민학교에 지휘소를 설치 중에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제8사단은 사단 정보참모를 통하여 이 첩보의 신빙성을 확인하자, 곧 북한군 사단지휘소를 기습하여 기선을 제압한 후 그들의 대응 상황을 보아가면서 사단예비로 반격을 감행하기로 계획하였다.
이에 국군 제8사단은 제10연대 제1대대에 평동리 기습 임무를 부여하고, 사단 공병대대에게 하진나루에다 도하 시설을 설치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리하여 사단 공병대대 제2중대가 뗏목을 엮어 만든 나룻배로 강 양안을 왕복 운행할 수 있도록 중방동에서 하진동 사이에 굵은 쇠줄을 가설하는 작업에 착수하였으나, 장비의 부족과 때마침 하진동에 출현한 북한군 정찰대의 방핼로 실패하였다. 이렇게 되자, 제10연대 1대대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대대 자체에서 하진나루 부근 주민의 도움을 받아 찾아낸 거룻배 한 척으로 이날 밤에 남한강을 도하하여, 상리・각 기동을 거쳐 8일 저녁에 평동리가 바라보이는 346고지 소대장을 지휘자로 편성한 수색조로 하여금 평동리 일대의 북한군 동정을 수색한 결과, 매포국민학교에 분명히 북한군의 사단급이 위치하고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그 남・동・북서쪽에 있는 267고지・265고지・257고지에 경계 병력이 배치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평동리의 지형은 방어자에게는 유리한 반면 공격자에게는 남쪽에서부터 저지대를 횡단하게 되므로 매우 불리하였다. 북한군은 이러한 지형의 이점을 과신한 나머지, 설마 국군이 이곳으로 접근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듯 그들 사단지 휘소의 경계태세를 허술히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적정 보고를 받은 제1대대장 박치옥(육사5기, 대령예편)소령은 지체 없이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계획된 시간에 공격을 개시한 제1대대는 주공인 제2중대가 목표 지근거리까지 접근하였을 때 비로소 목표에 박격포 사격을 가함으로써 기습을 달성하였다. 제2중대는 공격 개시선을 통과 한 지 불과 20분 만에 267고지를 탈취하고 곧 매포국민학교로 진격하였다. 이때, 이곳에는 45밀리 대천차로 10문과 장갑차 그리고 보급품을 만재한 트럭 5-6대와 마차용 말 100여 두가 집결되어 있었다. 북한군은 생각조차 하지 못한 국군의 습격을 받아 갈피를 잡지 못한 상황에서 저항 한 번 시도해 보지 못한 채 사살되거나 도주하였다. 국군 제10연대 제1대대는 공격 초기에 상상외로 큰 성과를 거두면서 267고지・257고지・매포 국민학교를 점령하였으나, 북쪽으로의 진출은 일단 보류한 채 북한군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바로 그때, 북한군의 122밀리 곡사포탄이 267고지에 작렬하기 시작하였으며, 점차 낙탄 빈도가 더하여 갔다. 그러던 중 하시동(매포초등학교 북서쪽 700m)에 집결하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 증강된 1개 대대규모의 북한군이 반격을 개시하였다.
국군제10연대 제1대대의 평동리 공격 계획
・주공, 제2중대 : 목표 267고지・매포초등학교
・조공, 제1중대 : 목표 257고지, 목표 탈취 후 제2중대를 지원한다.
・대대예비 : 제3중대
・제2중대가 267고지를 탈취한 후 의명, 265고지를 공격한다.
・공격개시시간 : 9일 05:00
・대대 지휘소 : 346고지, 단 제2중대가 목표를 탈취한 이후에는 267고지로 이동한다.
이로써 평동리 일대에서는 공격자와 방어자의 위치가 뒤바뀐 상황 하에서 한때 쌍방간에 치령한 사격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북한군은 공격 병력이 증강되어 가는 반면, 수세로 몰린 국군 제10연대 제1대대는 급기야 탄약이 바닥날 지경에 이르렀다. 이 격전의 와중에서 제2중대장 안동훈(육사7기)중위가 전사하고 그밖에도 여러 명의 병사들이 피해를 입었다. 제1대대장 박치록 소령은 북한군의 반응이 의외로 빠른데다, 반격에 나선 그들의 병력이 연대 규모로 증가된 상황 그리고 지휘 하에있는 각 중대의 전투 지속 능력을 감안하여, 더 이상 그곳에서 지체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철수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따라 제1대대는 제1중대를 후위로 하여 267고지를 경유 미면동(일명 쌀면이)부근을 통과하려 하였으나, 481고지와 272고지가 이러지는 능선에 이미 진출하여 대기하고 있던 북한군으로부터 사격을 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퇴로가 차단된 제1대대는 부득이 중대별로 분산하여 학강산 서쪽 솔고개로 우회 남하하여 이날 18:00경에 하진나루에서 낙오병을 수습한 후 21:00에 남한강을 건너 단양초등학교에 집결하였다. 철수 도중에 제1대대는 제2중대장 대리로 임명된 유학성(정훈 1기・대장 예편)중위와 같은 중대 제2소대장 이경용(육사8기, 대령 예편)중위가 부상한 것을 위시하여 20여 명의 병력 손실이 있었다.
한편 국군 제10연대장 고근홍(육사1기)중령은 제1대대가 평동리로 떠난 뒤에도 후속 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았던 탓으로 평동리에서 펼쳐진 상황에 즉응할 대책을 강구할 수가 없었다. 이때 제1대대가 북한군 제8사단의 전방지휘소를 기습한 목적은 반격의 발한을 확보하기 위한 기회조성에 있었다. 따라서 제10연대는 제1대대가 출발한 뒤 연대 주력을 후속시켜 481고지・천주봉에 전개시킨 다음 상황의 추이에 따라 그에 대응하도록 계획되어 있었으나, 하진나루의 도하시설 설치 작업의 실패와 연대장의 지휘판단상의 오류가 겹쳐 작전 쥐휘상의 차질이 빚어지게 딘 것이며, 이로써 국군 제8사단의 반격 계획은 그 실현성이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제10연대 제1대대의 평동리 기습 전투는 북한군 제8사단의 공격 기세를 꺾어 놓았고, 그들의 공격 개시 시간을 지연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로부터 이틀 뒤에 사로잡은 북한군 포로의 진술을 밝혀졌다.
(8) 돌파된 하천선 방어선
국군 제10연대 제1대대가 매포초등학교에 위치한 북한군 제8사단 지휘소를 기습하고 있을 무렵, 상진동・하괴동・덕천동 일대에 비치된 북한군은 국군 방어진지와 단양읍에 trur을 가하면서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날(8일)은 아침부터 내린 비로 남한강 물이 불어서 도하 작전에 매우 불리하였을 뿐아니라, 평동리의 그들 사단지휘소가 피습되자 일시 지휘체계마저 마비된 듯 감히 공격을 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국군 제8사단은 남한강 물이 줄어들기 이전에는 북한군이 대대적인 도하작전을 실시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였으나, 우발사태에 대비하기 위하여 제10연대로 하여금 1개 대대(제3대대)를 봉화대・중방동에 배치하게 하는 한편, 사단 작전지역 좌측방으로 우회한 북한군의 일부 병력을 저지할 대책으로 제21연대에서 1개중대(제7중대)ff 차출하여 청풍(단양 북서쪽 17km)에 파견하도록 조치하였다. 이처럼 제8사단이 측방경계 임무마저 광정면을 책임진 전방연대에 부여하게 된 까닭은 사단예비로 반격을 단행하고야 말겠다는 사단장의 강력한 의지 때문이었다.
(9) 북한군의 도하 공격
7월 8일(음력 5월 23일) 밤은 달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으로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국군 제21연대 제1대대와 제2대대가 배치된 만학마을과 도담동 2개 지역은 다 같이 나루터인데다 방어지대가 대안쪽으로 돌출되어 있으므로, 공격자의 도하 작전은 유리하지만 방어자에게는 3면을 에워싼 공격자로부터 집중 사격을 받게 되므로 매우 취약한 지형이었다. 제21연대장 김용배(대장 예편) 중령은 어둠이 깃들 무렵부터 점점 치열해지는 북한군의 포격을 그들의 도하 공격이 임박해졌다는 징후로 판단하여, 각 대대장에게 경계를 철저히 하도록 지시하면서, 특히 만학마을과 도담동의 방어태세를 강화할 수 있도록 병력을 재배치하였으며, 사단 포병 또한 2개 지역에 배치하여 화력의 우선권을 두게 하였다.
이렇듯 전방 연대가 예상되는 북한군의 주요 접근로에 전투력을 집중하고 있을 즈음, 단양읍내에 대한 북한군이 포격이 점점 가열되어 갔으며, 20:00경에는 국군 제8사단 사령부가 위치한 단양중학교 부근에도 포탄이 터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제8사단은 사단 사령부와 직할대 그리고 제10연대를 븍상동으로 이동시켰다. 그 얼마 뒤인 23:00에 상진동・하괴동에 전개한 북한군은 맹렬한 공격준비사격으로 만학・도담동의 국군방어진지를 제압하는 한편 뗏목을 이용한 도하 작전을 펼쳤으며, 덕천동에서도 소규모 부대가 국군 병력이 배치되어 있지 않은 아평동으로 건너갔다. 북한군 제8사단은 이날 야음을 틈타 상진동・하괴동의 나루터 부근까지 45밀리 대전차로플 추진하여 도하부대를 근접 지원하였고, 그들이 보유한 모든 야포와 박격포를 추진하여 도하부대를 근접 지원하였고, 그들이 보유한 모든 야포와 박격포를 총동원하여 도하 지점 건너편의 국군 방어진지를 맹타하였다. 이 때문에 국군 제21연대 제1대대와 제2대대 방어진지는 북한군의 공격준비사격이 집중된 지 얼마 후 개인호가 무너지고 유선이 두절되어 전투지휘가 어렵게 되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강변진지에 배치된 국군 제21연대 장병들은 완강하게 저항하면서 진내전까지 치루었으나 맹위를 떨치는 북한군의 포화에 완전히 압도되어 마침내 하천선 후방에 미리 준비해 둔 방어진지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제1대대는 슬음산과 그 서쪽 무명고지에서, 제2대대는 도담동 돌출부의 길목인 358고지에서 철수병력을 수습하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리고 제21연대의 좌전방대대인 제3대대는 우측방의 제1대대가 하천선 방어선에서 철수하게 되자, 곧 대대예비인 제11중대를 꽃거리로 진출시켜 506고지에 배치된 제10중대를 증원할 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도하 작전에 성공한 북한군 제8사단은 만학마을과 도담동을 점령하고 그 부근의 무명고지마저 점령하여 교두보를 확보한 후, 일단 진출을 멈추었다.
(10) 단양 외곽 방어선의 형성
7월 9일 이른 새벽, 북한군 제8사단의 주력은 만학마을・도담동 교두보를 확보한 그들 선발대의 엄호 하에 남한강을 도하하기 시작하여, 이날 오전 중에 공격부대의 도하를 일단락 짓고 13:00경부터 단양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한편 전날 밤에 하천선 방어진지에서 철수한 제21연대 제2대대(대대장 박영섭 소령, 육사 5기, 준장 예편)는 이날 새벽 358고지에서 북한군과 교전하고 있었으나, 덕평동에서 봉우등(695m)으로 진출한 북한군으로부터 배후에서 협공을 받게되자 이를 감당하지 못하여 결국에는 664고지로 철수하였다. 이에 제21연대장은 324고지・506고지(제3대대)-슬음산(제1대대)-664고지(제2대대)를 연결하는 선상에 단양 방어를 위한 마지막 보루가 될 방어선을 형성하고, 노출된 우측방을 경계하기 위하여 연대에 배속된 사단 공병대대 제1중대와 제2중대를 664고지 동쪽 무명고지에 배치하였다. 이때 제1중대장(박우팽 중위, 육사 7기, 대령 예편)이 통합 지휘하였다.
이 무렵 국군 제8사단은 제21연대로부터 봉우등에서 제2대대를 배후에서 협공한 수를 알 수 없는 미상의 북한군이 기촌동・금곡동・천동이 이어진 계곡을 따라 진출하기 시작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사단장은 이를 북한군 병력이 연화봉・죽령으로 우회하여 사단 주보급로의 차단을 기도하는 징후라 판단하고, 때마침 사단 작전 지휘 하에 들게 되어 북상동에 도착한 삼척경찰대와 정선경찰대(개인화기로 무장한 300여 명의 경찰병력을 삼척경찰서장 김두용 총경이 지휘하고 있었다.)에게 사단 후방지역 경계임무를 부여하고 이 경찰병력을 비로봉・연화봉에 배치하였다. 이렇듯 이날(9일)은 이른 아침부터 쌍방 간에 단양 공방을 위한 작전행동이 숨 가쁘게 펼쳐지고 있었다.
이에 맞선 국군 제21연대 제3대대(대대장 이창률 소령, 육사 3기, 대령 예편)는 5번 도로를 따라 진출하는 북한군의 주공을 방어에 유리한 324고지・506고지의 지형적인 이점을 활용하여 완강하게 저항했으며, 또한 제3대대 우측방의 제1대대(대대장 최취성 대위, 육사 4기)는 무명고지・슬음산에서 븍한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한편 제3대대 정면으로 진출하는 북한군에 대해 측방에서 사격을 가하였다. 사단 포병과 연대 57밀리 대전차중대도 5번 도로에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북한군 제82연대의 주공을 격퇴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북한군 제82연대는 단양을 일거에 점령할 계획 하에 진격하였으나, 공격 시작부터 의외로 완강한 국군의 정항을 받게 되어 공격 기세가 여지없이 꺾이고 말았다. 이들은 이를 만회하려고 파상공격을 반복한 탓으로, 종내에는 전투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 정도의 피해를 입게 되어 만학마을 교두보로 철수하고 말았다.
이 패전에 충격을 받은 북한군 제8사단은 도담동・고수동으로 투입한 그들 예하 제81연대를 보강하고 664고지를 집중 공격하여 국군 제8사단의 관심을 그곳으로 끌어들이려고 안간힘을 다하였다. 이리하여 이날 13:00경부터 664고지에서는 쌍방 간에 일진일퇴의 격전이 펼쳐졌으며, 이 고지에 배치된 국군 제21연대 제2대대는 차츰차츰 밀리기 시작하여 마침내 664고지 남동쪽 2km지점의 692고지로 철수하였다.
(11) 사단예비대의 투입과 단양 피탈
국군 제8사단장은 단양 외곽 방어선의 일각이 무너지자, 그때까지 간직하고 있던 제천 탈환을 위한 반격작전에 대한 집념을 버리고 사단예비를 전방에 투입할 계획<제8사단 작전명령 제14호(1950. 7. 9. 20:05)>을 세웠다.
국군 제8사단의 연대간 진지교대 계획
・ 제10연대 : 23:00에 제21연대와 임무 교대한다.
・ 제21연대 : 제10연대에 현 방어진지를 인계한 후 장림동에 집결하여 부대정비에
임한다.
・ 제18야전포병대대 : 23:00이후 제10연대를 직접 지원한다.
・ 사단 공병대대 : 23:00부로 제21연대로부터 배속을 해제하며, 장림동에 집결
대기한다.
・ 사단 전술지휘소 : 24:00이후 용부원동 새터마을에 위치한다.
이에 따라 제10연대는 이날 해질 무렵에 행동을 개시하여 제21연대와 임무 교대 후 곧바로 방어진지를 재편성하였다.
국군 제10연대의 방어 배치 상황
・ 좌전방대대, 제3대대 : 324고지・506고지
※ 이 대대에는 임묵대 중에 제21연대 제9중대가 배속되었다. 이에 대대는 324고지
방어 임무를 배속된 중대에 전담시키고 대대 주력을 506고지에 배치하였다.
※ 중앙전방대대, 제1대대 : 무명고지, 슬음산
※ 우전방대대, 제2대대 : 가락동・674고지
※ 연대 전술지휘소 : 단양역 건너편의 폐광괸 갱도
(12) 지연 작전으로의 전환
7월 10일, 이날은 며칠 동안 계속 내리던 비가 그치고 오랜만에 맑게 개었다. 국군 제10연대는 진지교대에 뒤이은 방어진지의 재편성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반격을 감행하여 664고지를 탈환하였다.
이 무렵 북한군 제8사단은 전날 공격에 실패한 그들 제82연대를 사단 예비인 제83연대와 임무를 교대시킨 뒤, 단양을 목표로 공격을 재개할 준비를 마친 다음 공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국군 제10연대는 성급하게 전개한 반격 작전에 전력 투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북한군의 공격 징후를 전혀 포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단양 방어를 위해 전술적으로 중요한 지형인 324고지를 제3대대에 배속된 제21연대 제9중대에게 전적으로 일임하였다. 그러나 이 중대와 제3대대 간에는 유무선의 교신이 되지 않아 모든 보고와 명령지시를 전달하기 위한 통신을 전령에만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324고지는 단양 외곽 방어선상의 유일한 허점으로 존재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럼에도 제10연대장은 단양 외곽 방어선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북한군의 주 접근로 상에 이러한 허점이 있다는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북한군의 소규모 부대가 출몰하고 있는 방어지대 우전방의 664고지 일대에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있었다. 또한 제3 대대장 하병래(육사 3기・1951. 2. 21. 전사) 소령은 324고지에 병력을 증원한다거나 그의 지휘 하에 있는 배속부대와의 유무선 통신의 소통을 위한 대책 등을 전혀 강구하지 않고 있었다.
국군 제10연대 제3대대는 7월 10일 오전에 남한강 대안에 포 진한 북한군 45밀리 댖ㄴ차포의 집중포격을 당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충격을 받은 제3대대장 하병래 소령은 506고지의 방어진지를 재편성하고 각 개 병사의 진지를 보수하는 작업에 힘쓰게 되었다.
이처럼 대대장의 관심이 온통 506고지의 방어진지를 재편성하고 각개 병사의 진지를 보강하는 데에만 쏠리고 있을 때, 단양철교 건너편의 수영개에 전개한 1개 대대 규모의 븍한군은 수영개 도선장에서부터 단양철교 교각을 차폐물로 이용하여 남한강을 도하할 방법을 강구하였으며, 파괴된 철교를 임시 보수할 채비를 갖추어 놓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윽고 해가 지고 어둠이 산야를 뒤엎은 20:30경, 북한군의 각종 야포와 120밀리리 박격포가 일제히 포문을 열고 324고지・506고지를 집중 포격하기 시작하였다.
북한군 제83연대는 전례 없는 치열한 공격준비사격에 집중하는 가운데 만학마을 교두보에 전개한 그들의 일부 병력으로 506고지・무명고지・슬음산을 공격함으로써, 이 일대에 배치된 국군의 관심을 그 방향으로 끌어들였다. 이러는 사이에 증강된 1개 중대 규모의 북한군은 뗏목을 타고 단양철교 교각 근방을 통과하여 324고지 우단 강변에 상륙하였으며, 지체 없이 이 고지를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때 그들의 작전행동이 어찌나 은밀하게 행해졌던지 국군 제21연대 제9중대는 북한군의 일부병력이 진내에 쇄도한 다음에야 알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324고지에서는 진내전이 벌어졌으며, 이러는 동안에 2개 중대 규모의 북한군이 증원되었다. 이 고지 중봉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제9중대장은 졸지에 진내에서 백경전을 치르기에 이르자, 도저히 방어진지를 지탱하기 어렵다는 판단 하에 철수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러나 그때에는 이미 지휘체제가 와해되어 제1소대와 제2소대의 병력은 삼삼오오 단양읍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약2시간 뒤에 단양읍은 속수무책으로 북한군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1950년 7월 10일 23:00경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국군 제21연대 제9중대장은 단양읍 중방동 부근에서 낙오병을 수습한 후, 북한군이 단양을 점령한 이상 단양 주변에 배치되었던 사단 병력은 죽령 너머로 철수하였을 것으로 판단하고, 이럴 경우 5번 도로를 사용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우화교를 건너 단양천 연변의 소로를 따라 남하한 끝에, 가산동・금당실을 거쳐 7월 12일 예언에 다다랐다.
국군 제8사단장은 북한군이 324고지를 공격한 상황을 보고 받게 되자 단양을 잃어버릴 위기에 직면하였음을 직감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가 충격을 받은 이유는 작전지역의 교통중심지이자 전술적인 요충지인 단양을 잃게 된다면 그 전방의 방어진지를 유지할 수가 없게 되며, 결국에는 단양지구에서 전면적인 철수를 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게 된 제8사단은 사단 포병으로 하여금 324고지 일대를 집중적으로 포격하게 하는 한편, 장림동에서 집결 대기 중인 제21연대를 북상동・북하동에 투입하여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게 하였다.
이때 사단장의 작전개념은 전방 연대인 제10연대로 현 방어선을 계속 확보하고, 제21연대를 단양 남동쪽의 5번 도로를 감제하는 고지선에 배치하여 북한군을 저지한 후 역습을 감행하되, 전방 연대 방어선이 돌파될 경우에는 단양・죽령간의 험준한 산악지대의 이점을 활요하면서 북한군에게 최대한 손실을 가한다는 것이 었다. 이에 따라 장림동 대강초등학교에서 부대 정비를 끝마친 제21연대는 사단 작전명령을 받자 곧 출동 준비에 착수하였다. 바로 이때 지난 6월 28일, 사단이 대관령에서 강릉을 목표로 반격작전을 펼쳤을 당시 실종되었던 제4중대 제3소대장 신영철(육사9기, 중령 예편) 소위가 북한군 지역에 고립된 지 13일 만에 소대 병력(81밀리 박격포 2문 휴대)을 지휘하여 포위망을 뚫고 원대 복귀함으로써 연대전 장병에게 깊은 감명을 안겨주었다.
국군 제21연대 배치상황
・ 좌전방, 제3대대 : 두악산・북상동
・ 우전방, 제2대대 : 북상동・437고지
・ 연대예비, 제1대대 : 대강초등학교에 집결 대기
・ 연대 전술지휘소 : 대강초등하교
이와 같이 국군 제21연대가 계획된 방어선에 병력을 배치하였으나 칠흑 같은 어둠으로 인하여 방향과 지형을 분별하기 어려워, 다음날(11일) 날이 밝은 뒤에야 좌우 인접 부대와 연결된 방어진지를 현성할 수 있었다.
한편 347고지와 단양읍을 점령한 북한국ㄴ은 506고지에 포화를 집중하면서 단양 철교 보수작업에 착수하였으나, 506고지에 배치된 국군 제10연대 제3대대는 진내에서 작렬하는 북한군의 포탄 때문에 이를 방해할 수가 없었다.
7월 11일 08:00경, 북한군 제8사단은 전날 밤에 324고지를 점령한 북한군 제83연대로 하여금 506고지를 서쪽에서 공격하게 하였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금곡동으로 진출한 일부 병력은 단양 북쪽 외곽선에 배치된 국군 제10연대를 양익 포위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로부터 30분간 국군 제10연대 방어진지에 공격준비 사격을 가한 북한군은 08:30분터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때 그들의 주공은 5번 도로와 중앙선을 감제하는 506고지에 화력을 집중하여 국군 방어진지를 맹타하는 것이었다.
506고지에 배치된 국군 제10연대 제3대대는 324고지가 피탈된 뒤 방어지대 좌측방을 강화하였으나, 북한군의 공격준비사격이 개시된 직후 진내에서 연속적으로 폭발하는 포탄으로 말미암아 방어진지가 파괴되면서부터 동요하기 시작한 장병들이 진지를 이탈할 기회를 엿보는 분위기가 만연되어갔다. 이런 가운데 진전으로 집근한 북한군이 진내로 밀어닥치자 순식간에 방어선의 일각이 무너지고 병력이 분산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 혼란 속에서도 대대예비로서 현천동에 집결대기 중이던 제10중대장 하상탁(육사 8기, 중령 예편) 대위는 북한군이 506고지 정상을 점령하여 재편성하고 있는 기회를 포착하자, 과감한 역습을 단행하여 북한군을 격퇴하고 고지를 탈환하였다. 이기회를 이용하여 제3대대는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고 있었으나, 이때 연대로부터 장현동(일명 넓은들)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제3대대는 제10중대를 후위로 하여 북한군과 접촉을 끊고 437고지에 배치된 제21연대 제2대대의 엄호를 받으면서 목적지로 진출하였다.
제3대대 우측방의 제1대대는 방어지대 정면에서 접근하는 북한군과 백병전을 치르면서 끝까지 그 진진를 고수하고 있었으나, 좌우 인접대대의 방어진지가 무너져 대대가 고립될 위기에 다다랐을 무렵 연대에서 하달된 작전명령에 따라 장현동으로 철수하였다.
제10연대의 좌전방대대인 제2대대가 664고지 북쪽에서 공격을 개시한 북한군과 교전하는 데에 온갖 힘을 기울이고 있는 사이에 방어진지 후방의 가락동으로 침투한 북한군으로부터 협공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배후에서부터 불의의 기습을 받게 되자 당황한 일부 병사들이 각자의 방어진지에서 이탈하기 시작하였으며, 얼마 뒤에는 전 대대병력이 동요하게 되어 결국에는 수습하기 곤란한 지경이 되고 말았다.
이 무렵 가락동에 출현한 북한군은 1개 소대 미만의 소수 병력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3대대는 이들에 대한 대응조치를 적절하게 하지 못 했고 결국 이러한 결과를 빚었던 것이다. 제2대대장 정순기(육사 5기, 중령 예편) 대위
는 664고지를 지탱하기 어렵다는 판단 하에 연대장에게 철수를 건의하여 승인을 받은 후 노동리 거쳐 장현동에 집결하였다.
국군 제10연대의 지연진지 편성 상황
․좌전방, 제2대대 : 따라굴 무명고지
․우전방, 제1대대 : 따라굴 북동쪽 무명고지
․연대 예비, 제3대대 : 양지말에 집결 대기
국군 제10연대는 장현동에 3개 대대가 집결한 뒤 사단 계획에 따라 - 마조동을 잇는 선상에 지연진지를 편성하여, 북상동․북하동선에 배치된 제21연대의 철수 엄호와 5번 도로에 지향된 북한군을 지연시킬 태세를 갖추었다.
(13)국군 제8사단의 지연 계획
국군 제8사단장은 단양 실함에 뒤이어 북한군 제8사단 주력이 남한강을 도하한적정과 제10연대의 철수 상황 그리고 험준한 지형으로 인한 보급의 곤란 등 여러 가지 사항을 종합 분석한 끝에 단양과 남한강 방어선의 탈환을 위한 반격작전을 전개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죽령 일대에서 북한군에게 최대의 타격을 가한 후, 전 전선의 전황 추이를 관망하면서 풍길로 철수하기로 작정하였다.
이리하여 국군 제8사단은 5번 도로를 가운데 두고 그 남쪽 지역은 제21연대, 북쪽 지역은 제10연대로 하여금 각각 책임지게 하는 연화봉․죽령고갯마루에 사단 공병대대를 배치하여 이 일대에서 경계임무를 수행 중인 경찰 병력과 임무를 교대시켰다.
그러나 11일 오후 북한군의 일부 병력이 마조동 북쪽을 우회하여 936고지로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북한군의 동정을 파악한 국군 제8사단은 그 대응책의 일환으로 제21연대의 예비를 제1고지에 급히 진출시켰다. 이때 목적지에 도달하여 진지를 편성하는 도중에 때마침 침투하기 시작한 북한군과 격돌하여 진내전을 치르면서 이들을 격퇴하였으나, 이 전투에서 대대장 최취성 대위가 전사하였다.
(14)제18야전포병대대의 분전
국군 제10연대가 지연진지를 편성 완료하고 얼마 뒤인 19:00경, 유엔군 전폭기가 단양읍을 폭격하였다. 이어 2시간이 지났을 즈음 북한군 제8사단의 일부 부대가 437고지를 공격하였으나 이 고지를 방어하던 국군 제21연대 제2대대의 완강한 저항으로 이를 점령하지 못하였으며, 여타 지역에서는 소강 상태가 유지되었다.
7월 12, 이날 단양․죽령 일원에서는 이른 새벽부터 짙은 안개가 끼어 시계가 극도로 불량하였다. 북한군 제8사단은 이와 같은 기상을 최대로 이용하여 06:00경에 공격을 개시하였으며, 안개 속에서 은밀히 국군 방어진지 정면으로 접근한후 일제히 사격을 가하면서 돌격하였다. 이 불의의 기습으로 국군 제8사단의 지연진지는 일시에 무너졌으나, 전날 유엔군 전폭기의 출격을 본 후 사기가 진작된 제10연대와 제21연대 장병들은 이 혼란한 가운데에서도 질서를 유지하면서 미리 계획된 지연진지로 철수하였다.
북한군 제8사단의 주공은 두학산․437고지의 국군 방어선을 돌파하자, 지체하지 않고 5번 도로를 따라 죽령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저지하지 못한다면 죽령리 피탈될 위급한 사태가 전개될 것이었다. 이러한 다급한 상황을 파악한 제18야전포병대 대장 장경석(육사 5기, 준장예편)소령은 사단에서 지정한 죽령 너머의 포진지로 진출하던중, 이 고갯마루 서쪽에 있는 양터(충북도립목장)에 이르러 대대가 보유한 105일리 곡사포 13문을 모두 발렬하여 북상중․장림동 일대를 집중 포격하였으며, 잠시 뒤에는 제10연대와 제21연대의 57밀리 대전차포 중대도 이에 가담하였다.
제18야전포병대대장이 사단 작전명령을 어기면서 북한군에게 포진지가 노출되는 양터에 포진한 이유는, 죽령 너머에 포를 방렬하게 되면 M-3,105밀리 고사포의 사정거리가(6,500m)짧아 전방 2개 연대의 철수를 효과적으로 엄호할수 없을 뿐만 아니라, 5번도로 상에서 철수 중인 국군에게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추격을 개시하는 북한군 제8사단의 주공을 저지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약1시간 동안 제18야전포병대대와 57밀리 대전차포 2개 중대(11문)는 포신잉 뜨겁게 달아오르면 물을 끼얹어 식혀기면거 85번도로를 따라 진출하는 북한군을 강타하였다. 북한군 제8사단의주공은 국군 포화에 완전히 노출된 상태에서도 4~5km 전방에 있는 이날의 최종목표(죽령)를 탈취할 집념을 버리지 않고 파상적인 진격을 강행하였으나, 맹렬하게ㅜ작렬하는 국군화력을 피하지 못한 채 상당한 피해를 립었다. 이 결과 국군 제8사단은 위태로운 고비를 극복하고 계회된 지연진지로 철수할 수 있게 되었다. 제18야 전포병대대와 57밀리 대전차포 2개중대는 이날 07:00경 안개가 걷히고 포진지기 노출되면서부터 북한군의 122밀리 고사포탄이 양터 부근에 떨어지기 시작하자 곧 죽령 너머로 철수하였다.
(15)풍기로 철수
국군 제8사단은 북한군 제8사단 주공이 단양으로 철수한 기호를 틈타 936고지와 1,179고지에 새 지연진지를 편성한후 산간 소로를 따라 침투한 북한군과 격전을 치르면서 이 선을 지탱하였다. 그러나 이날 오후에 북한군의 빌부 병력리 936고지․1,179고지 측방으로 우회하고 연화봉에도 소규모의 북한군이 출현하여 사단 공병대대와 교전하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국군 제8사단장은 이와 같은 담당지역내의 상황과 이 무렵 국군과 유엔군이 이화령-청주-금강을 연화하는 선상에 방어선을 형성하는 전황을 감안한 끝에, 전선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죽령에서부터 풍기로 철수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국군 제8사단은 죽령마루에서 도솔봉으로 연결된 능선에 제10연대의 1개 대대를 재배치하여 사단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도록 조치한 후, 이날 20:30부터 철수를 개시하여 풍기에 집결, 재편성에 착수하였다.
2. 유해발굴 사업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한국전쟁은 3년이라는 시간 동안에 사상자는 300여 만 명에 이르렀다. 10년이라는 전쟁 기간에 200여 만 명의 사상자를 기록한 베트남전과 비교해 봐도 5배가 넘는 기록이다. 한국전쟁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그중 민간인을 제외한 아군 병력의 인적 피해는 총 59만 8813명, 실종 1만9321명, 부상 44만 3634명으로 집계돼 있다.
(1996년 발간한국전쟁 피해 통계집)
유해발굴 사업은 이 중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나 시신이 확인되지 않은 채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이 산하 곳곳에 잠들어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시작됐다. 지난 2000년 공식적으로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발굴 사업을 전개하기 이전에도 유해발귤작업은 있어 왔다. 전후 사단별로 전사의 기록을 토대로 퇴로와 진격로를 가늠해 유해를 수습하기도 했고, 진지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5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산천이 변해 흔적마저 잊혀질 무렵이던 지난 1997년, 다부동에서 엄청난 유해가 발굴되자 여기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때마침 같은 해 6 25 전쟁 50주년 기념사업단이발족됐고, 지상군 전투 기념 사업과 유가족 찾기를 비롯한 다양한 전쟁 관련 사업을 준비하던 사업단에서 유해발굴을 기면 사업의 하나로 검토하게 됐다. 그야말로 역사적인 유해발굴 사업의 씨뿌리기가 시작된 것이다. 오랜 검토 끝에 드디어 1999년 9월 유해발굴 사업팀이 결성된다.
전사 기록을 토대로 유해발구 사업팀의 현장 담사가 시작되었고 거기에는 단양의 실금산, 양방산을 비롯한 주요 격전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실금산과 양방산은 앞서 애기했던 것처럼 단양․죽령 전투의 치열한 격전장이었던 곳이다.
1)실금산 지역 유해발굴
육군본부의 지시로 단양군부대에서는 자체 현장 답사를 벌이고 당시 생존자의 증언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 노력하였다. 왜냐하면 휴전 직후 지역부민들이 왕래하면서 방치된 시신들의 위치를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지역주민의 증언은 유해를 찾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였다. 또한 단양은 당시 아군8사단과 적군8사단이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며 많은 사상자를 냈고, 아군이 급하게 철수하는 상황 하에 전우의 시신을 제대로 거두지 못하고 적진에 남겨둔채 후퇴해야만 했다. 이를 바탕으로 제112보병연대 1대대장(중령 정태기, 학군22기)을 중심으로 주요 격전지였던 실금산 일대와 양방산, 적성면, 대강면 일대에 대한 현장 답사를 실시하였으나 전후 각종 도로 공사와 토지 개간, 그리고 충주댐 건설로 구단양 지역이 수몰됨에 따라 가장 유력하다고 판단되는 지역은 현장 답사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이런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계속적으로 탐문 활동을 하던 중 실금산 정상 부근에서 예전 군인들 유해를 많이 보았다는 증언이 접수되었고 지역일대에 대한 현장 답사 경과 전쟁 당시 사용한 것으로 추측되는 교통호와 여러 개의 참호, 그리고 탄피 몇 발이 발견되어 2003년 4월 18일부터 5월 17일까지 육군본부와 제37보병사단 주관 하에 3주간 단양군부대 장병 200여 명이 투입된 가운데 유해 발굴사업이 시작되었다.
개토제를 시점으로 시작된 유해발굴은 최초에는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않았으나 손종철씨(단양읍 심곡리 거주)의 증언으로 실금산 좌측 정상 부근에서 완전유해 2구를 찾 을 있었다.
유해발굴 기간 완전유해 2구를 포함한 부분유해 1구, 탄피 157개, 의류 43점, 기타 유품 30점을 비롯한 총 250점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유해를 발굴한 것은 유해발굴에 있어서 주민의 증언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준 좋은 예이다.
실금산 유해발굴 결과
첫댓글 귀한자료 잘 보았네.
* 뭐이가 궁금해서 이래 저래에 훑어보다가 옮기놨써요...^^
난, 머이 궁금했다가도 금방 까먹는기 일상이래서 큰일이여.
고향땅에 얽힌 중요한 자료인데 이글 읽다가 졸았어요....^^;
* 지금 세상사는게 그나마 행복하다는 당연한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