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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올리기 스크랩 `알렉 제프리` DNA 지문 .`아이작 뉴턴` 만유인력 / 유레카의 순간들 3.4.
청출어람(non-stop9) 추천 0 조회 103 15.12.07 20: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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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어린이’가 일으킨 과학수사혁명

 

유레카의 순간들 (3) 알렉 제프리 DNA 지문

 

 

“만약 지금까지 세상에서 발명된 것들을 모두 없애버린다면 세상에는 길거리에서 비를 맞고 있는 사람들 외에는 남아 있을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톰 스토파드, 체코 출신의 영국 극작가 -

 

 

▲ 동일인 여부를 확인하는데 있어서 지문보다 DNA지문이 더 정확하고 과학적이다.

 

 

2건의 10대 소녀 강간살인 혐의자로 지목된 불량배 리차드 버클랜드는 교수형에 처할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행히도 구세주가 나타났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순간까지 갔을 때 그를 구제한 것은 DNA 지문이었다.

 

1983년 11월 23일 영국 나보르라는 작은 마을에서 강간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15살인 여중생 린다 만이 한적한 오솔길에서 목이 졸려 죽은 채 발견됐다. 또한 심하게 성폭행도 당한 흔적도 있었다.

 

경찰이 수집한 유일한 단서는 범인이 여학생의 몸 속에 남긴 정액이 전부였다. 수사팀은 정액 분석을 통해 범인의 혈액형이 A형이라는 걸 알아냈다. 그러나 그 이상 이렇다 할 수사의 진전은 없었다.

 

성폭행 살인 용의를 엉뚱한 사람에게 씌워

 

다시 3년이 지난 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역시 나이가 같은 15세의 여중생 돈 애쉬워드가 성폭행 뒤 살해된 채 발견됐다. 앞서 살해된 린다의 시신이 발견된 지점에서부터 불과 1마일 정도 떨어진 오솔길에서였다.

 

범인의 정액이 검출됐다. 수사팀은 이 정액을 과학수사연구소에 보냈다. 범인의 혈액형 역시 린다 사건의 범인의 혈액형과 같은 A형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사팀은 두 사건 모두 한 사람의 소행이라고 결론지었다.

 

수사팀은 유력한 용의자로 직업이 없으며, 한때 성추행 혐의로 철창을 종종 드나들었고 마을에서도 행실이 좋지 않기로 평판이 난 리차드 버클랜드라는 불량 청년을 처음부터 지목해 수사를 벌였다. 그런데 묘하게도 그의 혈액형 역시 A형이었다.

 

아무리 다그쳤지만 버클랜드는 모든 것을 부인했다. 전혀 면식도 없으며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경찰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대학 문을 두드렸다. 유전학 교수로 DNA 지문 발견의 주인공 알렉 제프리가 근무하고 있던 레스터 대학이다.

 

결국 DNA 지문 기술에 의존해 문제를 해결

 

경찰은 희생자에게 묻은 혈흔을 비롯해 몸 속에 남아 있던 정액을 검사해 달라고 알렉 제프리 박사에게 요청했다. 제프리 박사가 유전자지문 기술을 개발했다는 소식은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한 번도 이 기술을 범죄 수사에 써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제프리 박사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상황이 벌어졌다. DNA 지문 비교결과 두 사건은 동일범의 소행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용의자 버클랜드는 사건과 전혀 무관한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경찰의 강압적인 심문으로 인해 용의자가 거짓 자백했다는 것이 입증된 셈이다.

 

DNA 지문 기술을 수사에 이용한 최초의 사례다. 물론 경찰은 이후 DNA 테스트를 이용해 수사망을 빠져나간 콜린 피츠버그를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계기로 DNA 지문은 더욱 명성을 얻게 됐고 법적 증거로 채택되는 계기가 됐다. 과학수사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가족 3명의 DNA를 검사하던 중 배열이 다르다는 사실 발견

 

1984년 9월 10일의 일이다. 그날 제프리 박사는 그가 몸담고 있던 영국 레스터 대학 연구실에서 개인마다 각기 다른 고유한 유전자 배열, 즉 DNA 지문(유전자지문)이 있다는 발견을 이룩했다.

 

월요일인 그날 오전 10시경 유전학 교수인 그는 자신을 돕고 있던 빅토리아 윌슨(Victoria Wilson)이라는 기술자, 그리고 그녀의 부모 등 세 사람을 상대로 DNA를 조사하고 있었다.

 

당시 제프리는 모든 유기체에 독자적인 DNA 서열부분(minisatellite, 미소부수체라고도 함)에 대해 깊이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을 다 다르게 만드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유전자 연구를 통해 밝히려고 노력 중이었다.

 

각기 세 사람의 유전자배열을 하나씩 현미경을 들여다 보던 그는 예상치도 않았던 놀랄 만한 결과를 포착했다. 현미경 속에서 본 세 사람의 DNA 배열이 각자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왜 놀라운 일인가?

 

다시 말해서 가족이라도 DNA의 유전자 배열이 다르다는 이야기다. 이는 가족이 아니라면 유전자 배열은 더욱 더 다를 수 있다는 것이며, 이러한 유전자 암호를 통해 동일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려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DNA 지문은 이렇게 탄생했다.

 

 

▲ 알렉 제프리가 발견한 DNA지문은 과학수사에 새로운 혁명을 일으켰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엉뚱한 면이 많았다. 8살 때 폭탄을 만들다가 턱에 난 상처가 지금도 가려진 수염 속에 희미하게 보인다. ⓒ위키피디아

 

 

조금 부연해서 설명해 보자. 우리 몸의 모든 세포 속에는 두 가닥으로 꼬여 있는 사다리 같은 DNA 분자가 있다. 이 사다리의 가로 막대 부분에 염기쌍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들의 배열이 각기 다른 인간에 정보를 제공한다. 제프리는 바로 이 DNA 배열(또는 염기서열)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동일인 여부, 그리고 친족관계를 가려낼 수 있어

 

기대하지도 않았던 놀라운 결과를 발견한 그는 불과 30분 만에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아하, 사람마다 각기 다른 유전자 암호의 차이점을 이용한다면 생물학적으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분간해낼 수 있구나!”

 

아마 소리를 치며 아르키메데스처럼 하얀 가운을 입고 거리를 질주했을 그런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냉정을 찾으려 애를 썼다.

 

“DNA 지문으로 자주 거론되는 친자확인 소송이나 범인을 검거하는 데 사용될 수 있구나. 아, 이걸 특허 내면 돈도 엄청 굴러오겠구나! 그래, 내가 해내고 말았어!”

 

이때 그는 사람의 지문이 다르듯이 DNA 배열도 다르다는 뜻에서 DNA 지문(DNA fingerprinting)이라는 말을 썼다.

 

그의 기대는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과학수사에 엄청난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비단 과학수사뿐이겠는가, 친자확인, 고고학 연구에서도 DNA 지문은 필수가 됐다. 돈방석에 앉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몇 년 후 어마어마한 부를 거머쥐었다.

 

엉뚱했지만 어릴 때부터 생물학에 호기심 많아

 

제프리는 어떻게 해서 이런 행운을 거머쥐게 되었을까?

침식(寢食)을 잃을 정도로 연구에만 매달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복권을 샀다가 떼돈을 거머쥔 로또 당첨자처럼 행운의 여신이 그에게 미소를 보였던 탓일까?

 

우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결코 없다. 그 속에는 항상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因果)의 법칙이 있다. 대부분의 발견 뒤에는 여러 해 동안의 힘든 연구와 과학적 사색, 그리고 남다른 관찰력과 어릴 적 호기심 및 상상력도 크게 작용한다.

 

제프리 박사는 명문 대학의 유명한 유전학 교수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길을 더듬어 보면 그저 평범한 학생이 아니었다. 훌륭한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모범생이 아니었다. 어릴 때는 좀 괴상할 정도로 특이한 괴짜 학생이었다.

 

옥스퍼드에서 태어난 그가 과학에 대해 발명과 호기심을 갖게 된 데에는 가족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특허 소유자였다. 특허권을 사고팔기도 했다. 때로는 특허를 이용해 사업을 운영하는 부유한 집안이었다.

 

8살 때 약품으로 폭탄 만들다가 턱에 큰 상처 입어

 

8살 때 일이다. 아버지가 커다란 화학 키트(chemistry kit)를 사주었다. 몇 년 후에는 약국에서 농축된 황산 한병도 사주었다. 당시만 해도 약국에서 황산에 대한 규제는 별로 심하지 않았을 때다.

 

 

▲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과학수사극은 DNA지문의 산물이다. ‘CSI:마이애미’에서 현장 검증을 하고 있는 배우 데이빗 카르소

 

 

어린 제프리는 화학약품을 서로 섞으면서 각종 실험을 하는 게 재미있었다. 그는 어디에선가 들은 지식을 이용해 폭탄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다가 황산이 턱에 튀어 커다란 화상을 입었다. 턱수염을 길러 가리고 있지만 그 상처가 지금도 남아 있다. 괴짜 어린이였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다.

 

그의 모험에 가까운 괴이한 호기심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9살이 되던 해에는 아버지가 아주 비싼 빅토리아 황동 현미경을 사주었다. 그는 현미경 놀이에 푹 빠졌다. 아마 생물학에 대한 관심이 이때 싹트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길에서 주운 부패한 고양이 집에 갖고 와서 해부하기도

 

아버지는 또 작은 동물해부 키트도 사주었다. 처음에는 주로 뒝벌(bumblebee)을 구해 해부했다. 그러나 조그만 동물에 싫증을 느낀 그는 큰 동물을 해부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마땅한 동물을 구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죽어서 쓰러져 있는 고양이를 발견했다. 훌륭한 해부대상이라고 생각한 그는 고양이를 종이로 말아 덮은 다음 가방에 넣어 집으로 가져왔다.

 

그는 적당한 시간을 기다리다가 부엌에서 몰래 보관해 두었던 고양이를 해부하기 시작했다. 일요일 점심을 앞둔 시간이었다. 썩어가는 고양이의 쾌쾌한 냄새가 집안에 진동했다. 더구나 고양이 내장까지 해부한 상태라서 냄새는 더욱 지독했다.

 

고등학교를 나와서도 괴짜스러운 행동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명문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예비교육기관에서 수업을 받으면서도 1960년대의 유행을 좇는 모드(Mod)이기도 했다. 모드는 모더니스트의 준말로 당시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음악과 생활 스타일을 일컫는 말이다.

 

모터사이클 광에다 히피 문화에 빠지기도

 

그는 또한 150cc 모터사이클을 끌고 다녔으며 나중에는 성이 차지 않아 350cc로 바꿀 정도였다. 항상 파카 재킷을 입고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다녔으며 히피 문화에도 푹 빠졌다. 로큰롤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로커였다.

 

DNA 지문을 발견한 제프리 박사는 그 공로로 세계 최고의 기술상이라고 할 수 있는 2008년도 밀레니엄 기술상(Millennium Technology Prize)을 받았다.

 

“범죄 용의자 신원 확인과 친자 확인, 그리고 입국 심사 때 논란을 해결하는 데 이용되는 DNA 지문을 발명했다. 어떤 다른 첨단 유전학 기술도 이제까지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명의 삶에 이처럼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업적이었다.

 

노벨상의 영예는 안지 못했다. DNA 지문은 이론이라기보다 기술이라는 차원에서 노벨상과 다소 거리가 먼 탓이다. 그러나 DNA 지문은 어떤 노벨 과학상 수상자의 업적보다 더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명성 또한 그렇다.

 

어쨌든 과학수사에 일대 혁명을 가져온 그는 평범한 어린이가 아니었다. 평범한 학생이 아니었고, 평범한 과학자도 아니다. 심하게 표현하자면 괴짜로 인생을 살아온 과학자다. 그 괴짜 과학자가 ‘일을 낸 것’이 DNA 지문이다.

 

 

 

 

“난 늘 예쁜 조약돌을 찾는 어린소년”

 

유레카의 순간들 (4) 아이작 뉴턴 만유인력

 

“세상에 나는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늘 바닷가에서 장난치는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내 앞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거대한 진리의 대양(大洋)이 있다. 그 속에서 나는 조금은 더 매끈한 조약돌이나 조개 껍질을 찾으려고 애쓰는 소년처럼 보이는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항상 예쁜 조약돌과 조개 껍질을 줍는 어린이”

 

근대과학의 서막을 열고 17세기의 거대한 과학혁명을 완성한 위대한 과학자인 뉴턴이 임종을 앞두고 친한 친구에게 남긴 이야기로 데이비드 블르스타의 ‘뉴턴의 전기’에 나온다. 뭉클한 감동을 주는 말이다. 또한 꼭 집어낼 수는 없지만 커다란 뭔가를 암시하는 명언이기도 하다.

 

 

▲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에서 만유인력의 영감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진실이 아니라 에피소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보는 대상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것을 생각해 내는 것이 통찰력이자 영감이다. 그렇다면 사과 이야기는 충분히 믿을만 하다. ⓒteachertech.rice.edu

 

 

이미 팔순을 넘어 꼬부랑 할아버지가 된 그가 어떻게 자신을 바닷가에서 장난질 치는 소년에 비유할 수 있을까? 더구나 거대한 과학적 업적을 일궈 존경 받는 인사가 말이다.

사람들에게 “나는 별로 한 것이 없다”는 겸손의 메시지인가?

 

뉴턴이 임종 직전에 한 말을 조그만 주의 깊게 들여다 보면 과학자로 성공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자질, 그리고 과학자가 지녀야 할 마음가짐을 읽을 수가 있다. 바로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 때묻지 않는 호기심과 상상력이 풍부해야 한다는 점이다.

 

주위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궁금증과 호기심을 갖고 샘솟는 상상력으로 호기심을 풀고자 애쓰는 소년의 마음을 가졌을 때에야 위대한 과학자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뉴턴의 명언 속에서 우리가 깨달아 할 교훈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뉴턴의 겸손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위대한 발견을 했다고 치켜세우는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만약 가치 있는 것을 발견했다면 어떤 재능보다 인내를 갖고 주위를 기울인 것뿐”이라는 겸손을 아끼지 않았다. 이 말 속에 역시 과학자의 마음가짐에 대한 교훈이 녹아 있다.

 

이런 겸손에도 불구하고 뉴턴과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은 뉴턴을 “신에 가장 근접한 인간”이라며 칭송했다. 그러면 절대자 ‘신’에 가깝다고 존경을 한 몸에 얻은 위대한 과학자의 삶은 어땠으며,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타임머신을 타고 그가 살았던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인류의 역사를 바꾼 세 개의 사과’ 중 으뜸

 

“인류의 역사를 바꾼 세 개의 사과”가 있다.

 에덴동산에서 뱀의 유혹에 넘어가 아담과 이브가 따먹은 금단의 선악과 열매, 그것이 바로 첫 번째 사과다.

그리고 두 번째는 빌헬름 텔이 아들의 머리 위에 올려놓고 화살로 쏘아 맞춘 사과가 바로 두 번째 사과다.

 

사과로 인해 아담과 이브는 낙원으로 쫓겨나 원죄의 굴레 속에 살게 되었다. 빌헬름 텔의 사과는 당시 약소국인 스위스의 독립운동에 도화선 역할을 하여 이후 전 인류에게 자유와 혁명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안겨다 주었다.

 

세 번째 사과가 바로 뉴턴의 사과다.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 그리고 수학자로 영국이 배출한 최고의 과학자로 인정 받는 뉴턴. 그는 고향집 과수원에 있는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영감을 얻어 유명한 만유인력을 발견했다. 세 개의 사과 가운데 가장 으뜸을 골르라면 뉴턴 사과라고 생각한다.

 

‘진실이냐, 에피소드냐?’ 하는 논쟁은 무의미

 

뉴턴 사과를 놓고 ‘진실이냐, 에피소드냐?’ 하는 논쟁은 쓸데없이 무모한 일이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항상 일화와 전설을 달고 다닌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 전설이 되고, 전설은 없었던 일을 있었던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어쨌든 뉴턴이 실제 사과나무 밑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사색을 하다가 잠시 눈을 붙인 사이에 사과가 그의 (좀 과장해서) 머리에 떨어지는 찰나 우주진리에 대한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든, 아니든 간에 이 사과가 인류 역사를 바꾼 위대한 사과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고전물리학으로 불리는 뉴턴 역학은 이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그리고 20세기의 ‘거대과학’인 양자역학이 탄생하면서 원래의 굳건한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기본 이론은 그때나 지금이나,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

 

뉴턴의 통찰력은 처음 세상에 선을 보일 때부터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물론 그런 이유에서 후세 사람들이 떨어지는 사과로 그의 직감과 통찰력을 포장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 본다면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는 주장이 일화나 전설로 치부할 정도는 결코 아니며 어느 정도 사실임을 알 수 있다.

 

뉴턴의 코앞에서 사과가 떨어졌을 때 마침 하늘에는 달이 떠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본 이 사색가는 과일이나 우리 인간은 모두 공중에서 땅으로 떨어지는데 저 위성은 어떻게 창공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사과가 떨어지면 허공으로 날아가야 한다. 한 없이 날아가 헤매다가 어느 행성에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런데 왜 다시 지구로 떨어지는가? 하는 질문에 마주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땅(지구)는 그 사과를 잡아당기는 힘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사색가는 거기에서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

 

뉴턴의 사색에는 두 가지 근원적인 통찰이 포함돼 있다.

하나는 질량을 지닌 물체는 모두 그 내부에 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땅은 그 질량을 통해서 사과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물론 사과도 자기 질량만큼 땅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지만 우리가 그것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이 힘이 바로 땅의 중력이라고 한다.

뉴턴의 아이디어는 우리들이 지구라 불리는 구형 위에서도 우주의 깊은 연못으로 떨어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까닭을 설명해준다.

 

일상생활에서도 마찬 가지다. 소파에서 일어서거나 높이뛰기를 할 때 이런 중력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높이뛰기를 할 때 우리가 느끼는 힘은 단지 질량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운동을 통해서도 발생한다. 이것이 뉴턴의 두 번째 통찰이다.

 

달이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운동에 있었다. 즉 달의 회전운동이다. 운동을 통해서 달은 지구 주변을 회전하는데, 그 회전을 통해 지구의 중력에 저항하는 힘(원심력)을 얻는다. 그 결과 달은 일정한 궤도에 따라 지구의 주위를 돌면서 균형과 안정성을 얻는다. 그런데 왜 사과일까?

숱하게 많은 과일들 가운데 왜 하필이면 사과가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하는데 영감을 준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뉴턴의 젊은 시절의 삶에 대해 약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사과 이야기가 단순한 일화나 전설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동쪽 별 갈릴레오 지고 서쪽 별 뉴턴 뜨다

 

뉴턴은 1642년 일글랜드 동부 링컨셔의 울즈소프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바로 그 해 저 먼 이탈리아에서는 갈릴레오가 세상을 떠났다. 과학계의 거대한 별이 지고 다시 서쪽에서 그에 버금가는 거대한 별이 하나 떠올랐으니 1642년은 과학사에 큰 의미를 지닌 해다.

 

유복자였던 그는 어머니의 재혼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하고 살았는데, 평소 소심했던 그는 주위 친구들로부터 ‘울보’, ‘겁쟁이’라며 놀림 받았다. 그런 탓인지는 몰라도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공부도 싫어했다. 그러나 하늘에 대한 관심은 많았다.

 

평소 점성술에 호기심을 갖고 있던 뉴턴은 1661년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해 데카르트의 수학, 케플러와 갈릴레오의 논문을 탐독하며 수학과 물리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특히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1665년 영국 전역에 페스트가 창궐하며 대학이 문을 닫는 일이 발생한다. 뉴턴도 어쩔 수 없이 공부를 잠시 접고 고향으로 가야만 했다. 흑사병인 페스트는 1937년 유럽에 나타난 이후로 3000년 동안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으며 유럽 인구의 4분의 1인 3000만 명 이상을 앗아간 무서운 질병이었다.

 

1894년이 되어서야 프랑스 세균학자 알렉산드르 예르생에 의해 병원체가 발견되었다. 뉴턴이 살았던 시대의 페스트는 유럽의 마지막 재앙이라고 불린 ‘런던 대역병’을 이야기한다.

 

대덕단지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뜰에 ‘뉴턴 사과나무’ 자라

 

뉴턴은 고향집에서 사색과 실험으로 시간을 보낸다. 그 때 뉴턴의 나이 고작 23살이었지만 시골에서 보낸 이 두 해(1665~1666) 동안 그의 위대한 업적 대부분이 싹텄다. 뉴턴의 사과 이야기가 탄생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어쨌든 뉴턴의 사과는 널리 알려지게 돼 18세기 말 뉴턴의 고향집 고향의 사과나무들 가운데 특별한 한 그루에 ‘사과가 떨어진 나무’라는 표지가 붙었다. 1820년경 그 나무는 죽었다. 그래서 그 나무로 의자를 만들었는데, 그 의자는 아직도 보존돼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나무의 곁가지 하나가 과수연구소로 보내져 여러 번의 접목 끝에 새로운 사과나무가 만들어져 세계로 널리 퍼졌다. 우리나라 대덕연구단지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 뜰에서도 자라고 있다.

뉴턴의 사과나무는 ‘켄트의 자랑’이라는 품종으로 뉴턴 시대에는 굽거나 삶아 먹는 사과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KRISS 홍보실에 따르면 이 사과나무는 오리지널 뉴턴의 사과나무의 4대손으로 KRISS의 상징물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뉴턴의 사과나무는 놀랍게도 350년이 넘은 지금도 뉴턴이 살던 고향집 (Woolstorpe Manor)에서 자라고 있다고 한다.

 

 

▲ 대덕연구단지 한국표준과학원 뜰에 탐스럽게 열려 있는 ‘뉴턴 사과나무’. 홍보실 관계자는 이 사과나무는 영국의 오리지널 뉴턴 사과무의 4대손이라고 설명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의 상징물이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

 

 

KRISS는 국립중앙과학관, 과천국립과학관과 서울과학고 및 대전과학고 등 11개 기관에 제 4대손 사과나무를 기증하여 젊은 학생들이 뉴턴의 과학정신을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수학자 가우스, “얼빠진 사나이의 끈질긴 질문 피하기 위해 급조한 이야기일 뿐”

 

그러나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안력의 법칙을 구체화했다는 데에 대해 이견(異見)도 당연히 많다. 특히 뉴턴의 장례식 때 송사에서도 당시의 철학자들이나 뉴턴의 전기를 쓴 데이비드 블루스타도 이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다. 유명한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가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사과 이야기는 밑도 끝도 없다. 그러한 대발견이 사과 때문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그 일은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한 얼빠진 사나이가 찾아와서 치근덕거리며 그가 어떻게 그러한 큰 발견을 해냈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뉴턴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상대방이 얼마나 바보인지를 깨달았다. 달아나 그 자리를 피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뉴턴은 갑자기 사과가 자기의 코 위에 떨어져서 대발견을 하게 됐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자 그 사나이는 만족스러운 대답이라고 생각하면서 돌아갔다.”

 

이것은 단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인력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사실 만유 인력의 법칙은 갈릴레이, 케플러 등에 의한 역학에 관한 많은 연구와 지식의 축적에서 탄생된 것이며, 더구나 17세기 후반의 과학 풍토에서 비롯됐다고 말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뉴턴은 당시 핼리혜성의 발견자로 유명한 애드먼드 핼리, 로버트 훅 등과 협력해 실험을 하거나 문제를 제기하고 편지, 팸플릿, 책 등으로 서로 토론하는 등의 협력 활동을 활발히 했다.

 

“내가 더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섰기 때문”

 

그러나 따지자면 모든 획기적인 발견과 발명들이 그렇듯이 완전히 무(無)에서 유(有)가 창조된 경우는 결코 없다. 그래서 뉴턴은 앞서 간 과학자들이 남긴 고귀한 지식들을 바탕으로 만유인력을 비롯해 많은 과학적인 업적을 이루게 됐다고 인정하면서 다음과 같은 위대한 말을 남긴다.

 

“내가 만약 다른 사람들보다 더 멀리 보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자신을 도와준 로버트 후크에게 보낸 편지 내용 가운데 일부다. 거인들은 당연히 그에게 영감과 도움을 준 유클리드를 비롯해 아리스토텔레스, 케플러와 같은 선배과학자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난 우주의 원리를 터득한 사람, 그런데 주식은 왜 이리 안 돼!”

 

만유인력을 비롯해 운동법칙을 발견한 이후 뉴턴은 “이제 물리학은 다 끝났다. 더 이상 연구할 것이 없다. 더 이상 물리연구에 시간을 쏟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돈을 발행하는 조폐국(우리 경우 조폐공사) 국장을 지냈으며 국회의원이 돼 의회에 발을 들여 놓기도 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주식에 손을 댔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가 않아 손해를 많이 보았다.

말년에 주식투자로 상당한 재산을 잃었다고 한다. 심지어 가산을 완전히 탕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럴 때마다 뉴턴이 중얼거리듯이 자주 내뱉는 말이 있었다.

 

“난 원래 우주의 원리와 삼라만상의 법칙을 터득한 사람이야. 그런데 주식을 언제 사고 팔아야 하는지, 그 투자의 비결은 도대체 잘 모르겠단 말이야, 참!”

 

묘하게도 천재 뉴턴도 주식투자의 이치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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