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생략과 여백, 그리고 모호성은 다의성과 함축성을 불러온다
- 테라스 나무 데크의 신묘한 형상
묘작도
테라스 나무 데크 위
고기 불판 숯불을 쏟아
미인도를 그리다
■ 화이트헤드와 폴 리쾨르
서구 철학은 전통적으로 플라톤의 이데아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처럼 세계의 근본을 지속하는 실체로 보았다. 화이트헤드는 세계의 궁극적 실재도 사물도 사건이라는 것이다. 세계는 사실상 순간순간 발생하는 사건들의 연속적 집적이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서 세계는 “있는 것(Being)”이 아니라 “일어나고 있는 것(Becoming)”이다. 과정철학에서는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경험적 사건을 현실적 계기라 한다. 경험하는 사건인 현실적 계기가 세계의 최소 단위라는 인식이다. 세계는 물질들의 집합이 아니라 경험 사건들의 그물망이다. 현실적 계기들이 서로 관계 맺는 방식이 파악(prehension)이다. 다른 사건을 감각적으로·정서적으로 받아들이는 작용이다. 세계는 외부에서 기계적으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느끼고 반응하며 구성된다. 현실적 계기도 단번에 생겨나지 않고 과거 세계를 파악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선택하며 하나의 구체적 사건으로 완성된다. 이를 합생이라고 한다.
여기 주목해야 할 것이 모든 현실적 계기는 자기 결정성(self-determination)을 가진다는 점이다. 현실적 계기에서 기계론적 결정론이 아니라 자유와 창조성이 작동한다는 것은 눈여겨 볼만한 대목이다. 화이트헤드는 영원한 객체(eternal objects) 개념도 말한다. 영원한 객체란 형식, 성질, 가능성의 영역이다. 현실에 그대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현실적 계기들이 자신을 형성할 때 참조하는 가능성의 저장소라는 것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고정된 초월적 실체는 아니다. 과정 속에서 선택되는 가능성이다. 화이트헤드의 신 개념도 기독교의 하나님과는 다르다. 신은 세계를 외부에서 지배하지 않고 가능성의 질서를 제공하며 각 현실적 계기에게 최선의 가능성을 가지도록 하는데, 그것을 유혹적 인과성이라 한다. 신은 명령하는 절대자가 아니라 창조를 돕는 동반자이다.
디카시 「묘작도」를 쓰게 된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을 끌어왔다. 고정돼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물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연속이라는 것이 공감이 된다. 지난 1월 16일 상하이에서 호찌민으로 오는 새벽 비행기 안에서 속도를 느끼지 못했다. 빠르게 달리는데 왜, 속도를 느낄 수 없는 것인지 새삼스럽게 의문이 들었다. 인간의 감각은 너무 한정된 것이고 신뢰하기에는 너무 불완전하다. 여객 비행기는 보통 800〜900 킬로로 달리는데 감각적으로는 정지해 있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은, 인간의 감각은 속도가 아니라 변화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지구는 시속 약 1,670킬로로 자전하고, 시속 약 107,000킬로로 공전하는데도 인간은 감각적으로는 그 속도를 느끼지 못하고, 지구가 정지해 있는 것으로 인식한다. 사물도 인간의 감각으로는 잘 포착되지 않지만 끊임없는 사건의 연속이라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는 주기적으로 걷쓰유 친구들과 고향집 서재 테라스 나무 데크 위에서 불판을 설치해 놓고 돼지 목살을 구워 먹으며 정담을 나눴다. 어느 날 돼지 목살을 구워 먹고 대충 정리를 하고 서재 안으로 들어가서 커피를 마셨다. 시간이 좀 지나서 밖으로 나와 보니까 고향집에 서식하는 길고양이가 돼지 목살 냄새를 맡고는 한 점 하겠다고 불판을 넘어뜨려 나무 데크에 불이 붙어서 까맣게 탔다. 그 형상이 미인도를 그려 놓은 것도 같고 다른 각도로 보면 고양이 그림이다. 화이트헤드 식으로 말하면 인간, 길고양이, 불판이 서로를 파악하며 합생하는 가운데, 유혹적 인과성과 자기 결정성이 작동해서 일으킨 사건이다. 그 결정적 순간을 날시로 포착해서 찍고 쓴 것이 디카시 「묘작도」이다.
테라스 나무 데크 위
고기 불판 숯불을 쏟아
미인도를 그리다
이 디카시는 테라스 나무 데크 위에 고기 불판 숯불을 쏟아 미인도를 그리다고만 하고 앞에서 말한 구체적 정황은 모두 생략하고 여백 처리한 것이, 이 디카시의 미학적 장치이다. 디카시는 일반 문자시보다 생략과 여백, 침묵의 공간이 더 큰 것이 특징이다. 원래 시는 언제나 언술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함의한다. 그것이 다의성이고 함축성이다. 이것이 없는 시는 시가 아니다.
시적인 언어는 폴 리쾨르가 말한 ‘잉여 의미’의 장이라고 해도 좋다. 폴 리쾨르에 따르면 텍스트는 두 가지 층위를 구축한다. 하나는 사전적이고 지시적인 '일차적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이면에 숨겨진 '이차적 의미'이다. 이차적 의미가 바로 잉여 의미이다. 폴 리쾨르에게 시적 언어란, 의미를 정확히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의미를 완결시키지 않음으로써 사유를 지속시키는 언어다. 일상 언어는 말이 끝나는 순간 의미도 끝나기를 원한다. “이 말은 이런 뜻이다”라고 정리되는 순간, 언어는 임무를 다한다. 그러나 시의 언어는 다르다. 시는 말을 끝내면서 동시에 의미를 시작한다.
폴 리쾨르에게 시의 언어는 항상 지시적 의미와 시인의 의도까지 초과함으로써 잉여 의미를 발생시킨다. 시의 언어는 문장 안에 갇히지 않는다. 문장 바깥으로, 독자의 기억으로, 경험으로, 감각으로 계속 번져 나가 의미는 계속 확산된다. 생략과 여백으로 말해지지 않았지만 분명히 작동하는 의미의 잔여가 바로 잉여 의미이다. 폴 리쾨르는, 잉여 의미가 시적 언어의 핵심 장치인 은유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고 본다. 은유는 단순한 수사적 장식을 넘어 의미 생성의 사건이다. 은유는 두 사물을 단순히 전이시키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비록 유사성을 바탕으로 하지만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의미를 일부러 충돌시킨다. 그 충돌은 불편하고, 불완전하며, 쉽게 봉합되지 않는 그 틈에서 새로운 사유가 솟아난다. 곧 잉여 의미의 발생 지점이다.
디카시 「묘작도」는 이중 은유 구조로 돼 있다. 하나는 나무 데크의 형상과 제목 ‘묘작도’이고 또 하나는 나무 데크의 형상과 본문의 ‘미인도’이다. 테크의 형상은 우선 보기에도 미인도이다. 한편으로 나무 테크 형상과 묘작도의 은유도 이중적이다. 묘작도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한자로 명기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 고양이가 그림을 그린다고 고양이를 주체화할 수도 있다. 이것이 더 타당한 해석이다. 한자로 표기하면 猫作圖이다. 그러나 변상벽이 고양이와 참새를 그린 그림 「묘작도(猫雀圖)에 나오는 고양이 형상으로 객체화될 수도 있다.
두 은유가 복잡하게 성립된 것은 테크의 형상을 보는 각도에 따라 고양이 그림으로, 미인의 얼굴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은유에 의해 생성되는 잉여 의미는 시인의 의도를 넘어선다. 모든 시는 시가 쓰이는 순간, 의미는 더 이상 시인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시적 텍스트는 자율적인 존재가 된다. 이후 독자는 의미를 발견하고 생성한다. 같은 시가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이것은 시가 불완전해서가 아니라, 시가 생명력을 지닌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잉여 의미가 생성되기 위해서는, 특히 디카시에는 생략과 여백의 미학을 더욱 극대화해야 한다. 디카시는 태생적으로 생략과 여백의 서정 양식이다. 시인이 날시를 포착해서 찍는 순간 사진기호는 세계에서 떨어져 나오는 관계로 전후 맥락이 생략된다. 디카시의 사진기호와 문자기호도 둘 사이에도 생략과 여백이 존재한다. 메타포 자체가 생략과 여백의 시적 장치라고 할 수도 있다. 이 디카시의 핵심적 미학 장치가 미인도와 묘작도의 이중 은유 장치인데, 여기서 또 다른 한 각도로 보면 미인도가 아닌 고양이 그림으로 드러난다는 데서 더욱 복잡하고 모호성을 가중시킨다. 언뜻 보면 대부분 나무 데크 형상을 미인도로만 보지, 또 다른 각도에서 보는 고양이 형상은 잘 파악하기 어려운데도 생략과 여백으로 처리해 버렸다.
결과적으로는 생략과 여백, 그리고 모호성으로 점철돼 다양한 관점에서 읽을 수 있게 함으로써 이 디카시의 다의성과 함축성은 두드러지는 것이다. 이것이 이 디카시의 전략이다.
변상벽의 「묘작도」
견본담채, 17세기경, 43 x 93.7cm,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 극순간 포착
디카시는 극순간 포착 예술이다, 조선 후기 화가 변상벽의 「묘작도(猫雀圖)」 고양이와 참새를 함께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은 한국 회화사에서 사실성과 서정성, 관찰과 유희가 가장 밀도 높게 결합된 작품으로 꼽히며 조선 회화가 도달한 감각적 리얼리즘의 정점을 보여준다. 고양이의 눈빛과 긴장된 털의 방향, 근육의 수축, 수염의 미세한 떨림까지 포착된 살아 있는 순간의 응축이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서 말하는 세계는 경험 사건들의 그물망이라는 말을 눈으로 보는 듯하다. 사건의 찰나를 붙잡아, 참새를 노려보는 고양이의 시선으로 인해 화면 전체가 팽팽한 긴장으로 충만하다. 조선 회화에서 드문 ‘극순간의 포착’이다. 변상벽의 그림은 정적인 재현이 아니라 사건이 발생하는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변상벽의 「묘작도」는 ‘살아 있는 순간을 붙잡는 예술’로써 디카시 창작에도 큰 영감을 준다.
첫댓글
살아있는 순간을 붙잡는 디카시
교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