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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petros
전삼용 요셉 신부 2017,11,05 연중 제31주일 - 애완용 인간.mp3 2017년 가해 연중 제31주일 <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 복음: 마태오 23,1-12 애완용 인간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는 생각으로 이웃들에게 잘 보이면 그것이 좋은 관계일까요? 관계를 잘 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말일까요? 한 가수가 사람이 외계인들의 가축이 된다는 가정을 하고 ‘애완 인간’이란 제목으로 노래를 만든 적이 있습니다.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철창에 갇혀 자신이 선택되기를 기대하며 지나가는 외계인들과 눈을 마주치려합니다. 한 아이가 한 인간을 선택하고 엄마가 그 인간을 돈 주고 사 줍니다. 처음엔 잘 보이고 싶었지만 우울해하고 아프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싸기도 하여 아이의 마음에서 조금씩 애정이 사라져갑니다. 그래서 더 우울해집니다. 울지 못하게 성대 절제 수술도 해 보았지만 상태는 변하지 않습니다. 결국 아파 쓰러져 아이는 엄마와 함께 잘 가라는 인사를 전하고 애완용 인간을 변기통에 넣어 내려버립니다. 그리고는 더 건강한 검은 애완용 인간을 사러갑니다. 인간이 아무리 자기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해보았자 사랑해 주지도 않지만 사랑을 받는다고 해봐야 그 사람의 애완용 인간밖에는 되지 못합니다. 이는 행복한 인간관계가 아니라 노예적 인간관계가 될 뿐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아들러는 <미움 받을 용기>라는 책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연예인들도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합니다. 그때 연예인들은 사람들에게 애정을 빌미로 잡힌 노예가 되고 맙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이리 끌려 다니고 저리 끌려 다녀야 합니다. 사람들은 지치면 자신들이 좋아해 주었던 연예인들을 언제라도 내칩니다. 그것이 두려워 심지어 목숨을 끊는 연예인들도 생겨납니다. 버려지는 것이 두려운 애완 인간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 애완 인간이 되기 위해 그렇게 피나게 살았어야 했던 것일까요?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상태를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라고 일갈하십니다. ‘남에게 잘 보이려는 게 무슨 잘못일까?’라는 생각이 들 수 있겠지만 남에게 보이려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자체가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람들은 왜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 해답은 스스로 찾을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은 부모가 정해줍니다. 태어나게 해 주었으니 왜 태어났는지를 부모가 알려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부모는 그 이유를 ‘자기 나름대로’ 알려줍니다. 이렇듯 인간은 누군가로부터 삶의 의미를 부여받아야만 하는 존재이지 스스로 깨칠 수는 없습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들은 늑대로밖에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고 누구도 깨우쳐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불완전한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타인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원하는지를 찾아 그대로 살아보려는 마음을 지닙니다. 처음엔 부모님의 뜻대로 살며 더 이상 큰 의문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존재한 이유가 꼭 부모님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알게 되고는 반항하는 시기가 찾아옵니다. 이를 사춘기라 부릅니다. 이때부터는 자신이 그 이유를 찾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누군가가 자신에게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알려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이렇게 저렇게 살도록 해 달라고 구걸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이유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이유가 되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의미는 부모가 처음에 알려주었듯이 자신을 만들어준 누군가가 아니면 알 수 없습니다. 그 삶의 의미를 알려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만났다면 삶의 의미는 너무나 명확해집니다. 그분이 사셨던 것처럼 살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확신이 있다면 더 이상 누군가에게 잘 보이며 그들의 기대를 기대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삶의 의미 자체인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계속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것을 삶의 의미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주는 명예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 돼 봐야 애완용 인간으로 남게 됩니다.
접촉연구의 대가인 해리 할로우(Harry Harlow) 박사는 아기 원숭이를 어머니로부터 떨어뜨려 놓는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태어남과 동시에 바로 격리된 아기 원숭이는 최상의 환경과 먹이가 제공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신분열증 환자처럼 이상한 자세로 하루 종일 앉아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자기 발을 물어뜯어 피를 흘리는 자해행위도 했습니다. 새끼를 낳게 했더니 자기 새끼도 돌보지 않는 비정한 어미가 되었습니다. 예컨대 실험자가 긴 막대기로 새끼를 위협했을 때, 새끼는 비명을 지르며 어미 품으로 피했습니다. 정상적인 어미라면 새끼를 품에 안고 공격자를 피해서 달아나야 하지만, 격리 원숭이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새끼 원숭이를 위협하여 쫓아버렸습니다. 격리 원숭이는 자신의 생존과 쾌락만 추구하여 다른 원숭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허공만 바라보며, 때로는 자기 발가락을 빨거나 자기 성기를 만지며 스스로의 쾌락에 빠졌습니다. 다른 원숭이가 조금만 다가와 몸에 손을 대려하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쳐 구석에서 몸을 떨었습니다. 연구팀은 비정상적으로 자란 이런 격리 원숭이를 치료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바로 ‘치료자 원숭이(therapist monkey)’를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치료자 원숭이는 생후 3개월 된 원숭이들이었습니다. 원숭이가 생후 3개월이 지나면 상대의 기분을 살피는 능력이 생기는데, 상대가 자기에게 적대적인가 아닌가를 살필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 격리원숭이는 치료자 원숭이가 들어오자 매우 불안해했지만, 엄마의 따뜻한 사랑만 받고 세상의 험악함을 모르는 순결한 치료자 원숭이가 겁도 없이 다가가 만져주고 쓰다듬어주니 시간이 갈수록 격리 원숭이도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같이 놀고, 이제는 서로 털을 손질해 주게 되었습니다. 위스콘신 연구팀은 원숭이 전문가를 초빙하여 우리 안에 정상 원숭이와 격리 원숭이를 함께 넣고 그들이 노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격리 원숭이를 골라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원숭이 전문가는 격리 원숭이를 골라낼 수 없었습니다. 완벽하게 치료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동물이든 사람이든 행복을 위해 궁극적으로 찾고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자신의 힘으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무엇이기에 누군가로부터 ‘선물’로 받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 대상이 사랑을 만들어 낼 수 없는 인간이 아닙니다. 오직 사랑 자체이시고 사랑 자체가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더 이상 다른 이의 애정을 구걸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애정을 구걸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매우 편안하게 느낍니다. 애완 인간들이 있다면 그들을 사 줄 주인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수많은 애견 인간들이 그 사람 주위로 모여듭니다. 만약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 애완 인간들에게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다면 또 다른 구원자가 됩니다. 그렇게 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지 사람들에게 잘 보이라고 불러주신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하는 것이 높아지려고 하는 것이고 이미 높아져 잘 보일 필요가 없는 사람은 낮아집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타인들의 가치를 알려주는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부르셨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