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 47주년 기념 특별강연-고난의 벽을 넘어 기적의 한강으로-호미숙 파독광부 역사를 회고 한다 2010년 12월 21일 화(서울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 주최:(사)한국파독광부총연합회 후원:한국산업개발연구원, 주한 독일대사관, 보성파워텍
지난 21일 매섭게 차가운 바람이 회색의 빌딩 서울 도심을 휘감아 돌아가는 아침 시간 프레스센터 20층에는 희끗한 반백의 신사들이 국제회의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이미 깊은 주름과 함께 검은 반점이 거뭇하게 묻어난 모습의 깊은 눈에 지난 세월을 이야기 하지 못한 그분들만의 아픔과 슬픔이 번져 있었다. 그들이 이 특별한 자리를 마련하게 된 것은 47년 전 바로 12월 21일 김포국제공항에서 비행기에 몸을 싣고 머나먼 타국 독일 땅을 향해 가난한 나라 조국을 살리기 위해 떠났던 이 나라의 종자돈을 마련키 위해 조국의 이름을 걸고 자신의 몸을 담보로 독일 광부로 떠난 날이었다.
왜 그들이 독일 광부를 지원했어야만 했을까. 전쟁 끝에 초토화된 대한민국에서는 먹고 살 것이 없어 하루를 연명해야하는 것이 하루하루 또 다른 전쟁이었다. 전 국민 2400만명에 실업자가 250만명이 넘던 시절,1977년까지 독일에 간 광부가 7968명 그 젊은이들이 선택해야만 했던 외화벌이로 가난에서 벗어나 해방되고 싶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날 김태우회장의 환영사에 이어 주한 독일대사 한스-울리히 자이트대사가 축하를 해주었으며 고용노동부 장관 박재완장관의 축사와 이정현 국회의원의 축사, 그리고 임도수 한국디자인경영협회장 보성파워텍 회장의 축사가 있었다. 백영훈 산업개발원장의 강연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을 울리고 또 울렸다. 광부에서 교수가 된 권이종 부회장님의 회고에서는 그 어려웠던 회상에 격한 감동으로 강연을 다 잇지 못할 정도였다.
본인이 태어난 1963년 그 해에 먼 타국으로 떠나야 했던 청년들의 지난 시절 강연을 들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 내 유년 시절 가난했던 시골을 떠올리며 그후로 발전한 지금에 살 수 있는 것이 그 어르신들의 피땀 흘린 노고였음에 감사하고 또 감사드린다.
1963년 12월 21일 47년 전 바로 오늘 김포공항, 살을 에이는 겨울바람을 맞으며 2억만리 독일 땅으로 떠나야만 했던 그날입니다. 귀설고, 입설고, 낯설은 독일 땅에 도착한 우리들은 스스로 선택한 일, 누구를 원망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순간을 이겨내지 않으면 앞날이 없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해고당하면 독일 땅을 강제로 떠나야만 되는 절박한 현실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땀과 피와 의지만으로 주어진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1664년 12월 박정희 대통령과 경제사절단이 독일을 국빈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독일로 오실 때 비행기 일반석을 타고 오셨습니다. 얼마나 나라 사정이 어려웠으면 그랬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독일로 오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64년 12월 10일 오후 8시 페스탈로치 광산 홀에는 파독광부, 간호사와 교민 등 800여명이 숨죽이며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이 그곳에 들어오시는 순간 우리 모두는 울음이 복받치고 애국가가 연주되고 단상에 오르셔서 연설을 하시는 순간 한쪽에서는 훌쩍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이게 무슨 꼴입니까. 나라가 못사니까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지하 수천 미터 막장에서 생명을 담보로 일하고 고생하는 모습을 보니 내 가슴에 피눈물이 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우리들은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더 참을 수 없어 쏟아진 것입니다. 대통령 내외분은 이미 우리들에게 어머니, 아버지였습니다. 얼마나 고향이 그리웠고 형제들이 보고 싶었겠습니까. 우리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셨고 건강하게 일 잘 마치고 조국에 돌아와 잘사는 나라 조국근대화에 다 같이 일하자는 말씀에 우리들은 두 손을 불끈 쥐고 그렇게 하리라 다짐했습니다. -김태우 파독광부사단법인회장 환영사 중
김태우 회장은 "파독 광부들의 땀이 조국 근대화를 이루는 불씨가 돼 오늘에 이르게 됐다는 것을 모두가 기억하도록 기념관을 세우는 게 목표"라며 "세계에 흩어진 파독 광부와 그 후손들이 모국을 찾았을 때 쉬어갈 작은 숙박시설도 지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독일 탄광 지하 1200미터 죽음의 막장, 탄광에서 희생당한 대한의 젊은 광부들이 점점 늘어갔다. 그런 위험 속에서도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희미한 헬멧의 램프에 의존해 하루 16시간씩 연장근무를 하며 탄을 캐냈다. 막장일은 또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작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글뤽 아우프(Gl?jck auf)”라고 인사를 했을까. ‘죽지 말고 살아서 지상에 올라오라’는 뜻이다.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헬멧과 안전화를 착용한 뒤, 4L 이상의 물통, 무릎보호대, 충전배터리 등으로 중무장을 하고 소위 ‘막장’이라는 지하 800m 이상의 갱도로 내려간다. 숨이 콱콱 막히는 지하갱도에서 땀이 밴 속옷은 뚝뚝 물이 떨어지고, 장화 안에 가득 고인 땀을 몇 번이나 쏟아내야 했다. 아무리 안전모를 쓰고 있지만 돌이 떨어지면서 팔과 얼굴, 등에 난 상처에 석탄가루가 박히면서 그 자리가 곪고 아물면서 석탄은 그대로 있었다. 광부 문신이다. 나는 몸에 박힌 석탄가루를 일일이 파내고 타월로 빡빡 문지르기도 했지만 지울 수 없었다. 지금, 그들의 얼굴에는 검은 점들이 검버섯처럼 남아있다.그렇게 악착같이 벌어서 국내로 보낸 돈이 당시 우리나라 외화수입의 3분의 1이 됐다. 함보른 탄광에 1964년 12월 박정희대통령 부부가 찾아왔고 식순에 따라 애국가가 시작되자, 감격에 찬 광부와 간호사들이 흐느끼기 시작했고 곧이어 울음바다가 됐다. “가난 때문에 이역만리 지하 수천 미터에서 일하는 새까만 여러분 얼굴을 보니,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직까지 이렇게 못살지만, 후손들에게는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대통령의 연설에 우리는 울고 또 울었다. 육영수 여사도 한 사람 한 사람 껴안고 함께 울었다. 그날 흘렸던 뜨거운 눈물의 기억이 마치 엊그제 일처럼 나를 또 울린다.-권이종 파독광부사단법인 부회장)회고록 중
백영훈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과 김태우 회장 백영훈 박사님은 박정희대통령 내외 독일 방문 시 한.서독 정상회담서 통역 맡았다. 그때 그 시절 박대통령 내외와 독일에서 있었던 일 특히 차관을 빌리는 과정 등에 참여해서 통역을 맡아 독일광부들에 대한 회고는 누구보다 자세히 알고 있어 백영훈 박사의 강연시간 내에 청중들은 눈물을 훔치고 또 훔쳤다.
흑백 영상을 보며 그때를 회고 하는 그때의 파독광부들 이미 나이는 60을 넘고 70을 훌쩍 넘겼다. 그때 함께 떠났던 동지들 중에 탄광에서 사고로 생을 마감했으며 그 후유증으로 지병으로 돌아가신 분들도 많아 이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47년 전 오늘을 회상하며 듣는 애국가는 어떤 의미일까. 살아 돌아와 경제건설의 주인공이 된 나라의 종자돈의 산 증인들에게 애국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애국가만이 아닐 것이다. 절체절명의 선택하에 듣는 애국가 피눈물 나는 감동과 뜨거운 피를 끓게 하는 원동력인 것이다.
파독광부사단법인 초대 회장 김태우(신영필름회장) 환영사 전세계로 흩어진 파독광부 출신들을 규합하고자 만든 파독광부사단법인, 그 시절 고려대 3학년 재학 중이었다가 지원한 파독 광부, 혹시라도 합격하지 못할까봐 일부러 석탄가루를 묻혔던 추억을 떠올리며 위험했던 탄광 지하막장 시절과 박정희대통령 부부의 방문으로 울음바다를 일으켰던그때를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독일에서 돌아와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영화사업에 뛰어들어 국가발전을 위한 영상을 제작했다. 지난 해 48년 만에 고려대학을 졸업했다.
파독 47주년 기념 특별강연-고난의 벽을 넘어 기적의 한강으로 강연회에 300여명이 참석했다. 그 젊었던 시절은 한국의 경제 성장과 더불어 그들의 머리와 얼굴엔 역경이 세월이 새겨졌다.
강연하는 시간마다 눈물을 훔치는 노신사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부흥한 대한민국이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며, 그들의 노고와 업적을 기리고 새겨야 할 것입니다. 나이 들었다고 무시한 젊은이들! 지난 역사가 없이 지금의 현재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미래는 지금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즐기고 있는 이 행복은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기에 따른 행복이란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른들의 사고를 이해하기 보다 배타적으로 세대차로 그들에게 벽을 두지 않았는지 아직도 60년 70년의 어려웠던 그 시대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때의 그 시절의 고통을 간접적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 더 많은 그때의 기록과 역사를 공부하고 알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