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얼마 전 송나라 진덕수(眞德秀)가 지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완역했다. 본격적으로 한문 공부를 시작한 지 7년 만이다. 상하로 각각 9백 쪽이니 참으로 방대한 작업이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늘 물어보는 게 있다. “전공은 서양 철학인데 어떻게 한문 고전을 번역할 생각을 했나?”, “한문은 누구에게 배웠나?” 두 번째 질문부터 답하자면 성백효 선생님에게 6개월 논어를 배운 것이 남에게 배운 것의 전부다. 나머지는 모두 혼자 힘으로 했다.
오늘날 한문의 세계에 발을 딛는 길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려서부터 가학으로 해온 분들도 있고 대학에 들어가서 영어나 독일어 배우듯이 한문을 배우는 경우도 있다. 점점 후자가 많아지는 경향이다.
필자의 경우는 한문 자체보다 우리 역사를 공부하다가 자연스럽게 한문 고전의 세계로 들어온 경우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참고나 도움이 될 듯하여 그 과정을 보고하듯이 정리해 보려 한다.
2001년 독일에서 1년간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니 한국 사회를 다시 한번 점검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우리 사회는 극한분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우리 유전자에 분열의 DNA가 있는지 아니면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인지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결심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을 완독해보자는 다소 무모한 도전이었다.
이 또한 7년이 걸렸다. 그래서 그 결과물로 나온 것이 ‘이한우의 군주 열전(전 6권)’ 외에 이런저런 에세이까지 역사 관련 단행본 10여 종이다. 이를 통해 얻은 결론은 좋은 지도자만 만나면 우리 민족은 얼마든지 화합하며 큰일을 이뤄낼 수 있고 좋지 못한 지도자를 만날 경우에는 백성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나라의 쇠락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전혀 뜻하지도 않게 실록 읽기를 통해 필자는 진덕수의 『대학연의』라는 책을 만날 수 있었다. 태조 이성계는 임금에 오르기 전 군영에 있을 때에도 경학에 능한 사람으로 하여금 『대학연의』를 읽도록 했고, 태종 이방원도 고비고비에서 『대학연의』를 통해 정치의 지혜를 익혀나갔는데, 무엇보다 필자에게 『대학연의』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일깨워준 인물은 세종대왕이었다.
세종은 어찌 보면 『대학연의』라는 책을 통해 성군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그것이 제왕학의 최고 텍스트임을 알고 있었던 세종은 즉위 직후부터 경연에서 『대학연의』를 진강토록 했고 이에 대한 강독이 끝나자 다시 한번 경연에서 진강토록 했다. 세종은 『대학연의』를 통해 임금이 가야 할 길을 깨우쳤던 것이고 끝까지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조선 백성의 운명을 크게 바꿔놓을 수 있었다.
필자로서는 너무나도 궁금했다. 과연 『대학연의』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길래 세종이 그처럼 탐독하면서 성군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에는 『대학연의』 번역본이 나와 있지 않았다. 어쩌면 조선 건국의 텍스트였다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이 아직 번역조차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실록 작업을 마친 2007년 한문 공부를 시작한 것도 실은 『대학연의』를 읽기 위한 준비작업의 성격이 컸다. 그래서 대학로에 있는 중국 전문 서점에 가서 『대학연의』를 구입했다. 처음에는 없다면서 구해놓겠다더니 2주 후에 연락이 왔다. 중국에서 나온 판본인데 책값이 상하 23만 원이었으나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때 책을 받아들고 집으로 올 때는 너무나도 큰 설렘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집에 와서 책을 펼치는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흰 종이 위에 뜻 모를 한자들뿐이었다. 실록을 읽을 때 수시로 한문 원본을 확인하며 알게 모르게 한문 공부를 하기는 했지만 『대학연의』를 읽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논어 공부였다. 사실 논어는 그 전에 이런저런 번역본으로 여러 차례 읽어보기는 했지만 늘 모호하다는 느낌뿐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논어집주’를 가져다 놓고 한 자 한 자 읽어가는 축자강독을 시작했다. 이미 영어나 독일어 철학책을 30권 가까이 번역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번역 자체로 인한 문제는 쉽게 넘어설 수가 있었다. 문제는 한문 혹은 한자 자체였다. 원문으로 반복해 읽기를 4년쯤 하고 나니 마침내 한자와 한문이 조금씩 내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공부하는 즐거움이 환희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심지어 한자 하나하나가 다 나를 향해 ‘나를 제대로 번역해주세요!’라며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이때부터 논어 읽기의 방향이 조금씩 잡히기 시작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논어로 논어를 풀자’는 것이다. 이를 통해 덕(德), 문(文), 명(明), 혹(惑), 총(聰) 등 핵심 기초 개념의 의미를 제대로 확정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마지막까지 필자를 괴롭혔던 것은 문(文)이다. 국내에 번역된 책들의 99.9%는 다 그것을 그냥 글이라고 옮긴다. 그러면 졸지에 공자는 글 선생이 된다. 이 점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역점을 두고 가르친 네 가지가 문행충신(文行忠信)인데 그 문이 과연 글일까?
결론적으로 그것은 문무(文武)의 문이 아니라 문질(文質)의 문, 즉 애씀[文]과 바탕[質]의 문이다. 그것을 확인한 것은 우연하게도 진덕수의 『대학연의』에서였다. 진덕수는 요임금의 네 가지 뛰어난 자질, 즉 흠명문사(欽明文思)를 한 자씩 풀이하는 가운데 문(文)을 ‘英華之發見(영화지발현)’이라고 풀어서 말하고 있다. 즉 꽃부리 안에 있는 잠재성을 남김없이 꽃피도록 하는 것이 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애씀의 사전적 의미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마음과 힘을 다하여 뭔가를 이루려고 힘씀.’
공자는 그 같은 애씀은 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배워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바로 그 때문에 논어에는 계속해서 학문(學問)이 아니라 학문(學文)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한 자 한 자 깨우쳐 가면서 필자는 마침내 논어, 중용, 대학을 풀어내는 책을 출간할 수 있었고 지난해에는 드디어 『대학연의』가 읽히기 시작해 원고지 7천 장에 이르는 번역 작업을 끝내고서 얼마 전, 두 권으로 된 완역본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조선왕조실록으로 돌아가면 그때는 임금이나 당대의 학자들이 정확히 ‘문(文)’의 의미를 이런 뜻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필자가 문을 글이 아니라 ‘애씀’으로 옮기는 것은 특이한 해석이 아니라 전통적 해석으로 돌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경전과 역사는 서로 교차해서 읽을 때 그 힘을 제대로 알 수 있다고 했는지 모른다. 세종이 말한 경사(經史) 통합적인 독서법 말이다.
이 독서법 혹은 공부법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는다. 다만 한 가지 추가하자면 동서고금 또한 서로 교차하며 책을 읽어갈 때 21세기 대한민국이 요구하는 바람직한 선비상, 혹은 지식인상이 정립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이제 겨우 출발선에 선 데 지나지 않는다. 가야 할 길은 참으로 멀다. 논어의 한 구절로 글을 마감하고자 한다. 증자의 말이다.
“선비는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되니 그 맡은 바가 무겁고 가야 할 길이 멀기 때문이다. 어짊을 자신의 맡은 바로 삼으니 진실로 무겁지 않겠는가? (그 길은) 죽은 뒤에라야 끝나니 진실로 멀지 않겠는가?[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 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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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학. 중용이 참 어려운 경전입니다. 시건방지게 詩傳은 남여간의 애정관련 詩로 여기고 읽으면 좋다고 伯兄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