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말기(晩唐시대) 문인 두목(803~853)은 시성 두보에 비견되어 小杜라 일컫던 대시인.
당나라 국운이 백척간두에 서 있던 841년경, 池州刺史(지주는 안휘성 남부) 두목은 지방을 순행하던 도중 烏江亭(안휘성 화현)에 들러 千古英雄 항우(항적)를 생각
하며 비장한 감회에 젖었는데...
일천년 전, 만약 項羽가 오강을 건너 후일을 기약했다면 충분히 帝業을 이루었을
것임에도... 일시적 수치를 참지 못하고 오강에서 자결하였음을 통탄하였던 것.
그때 남긴 七言絕句가 바로 제오강정(題/烏江亭)...!!!
![](http://cfile221.uf.daum.net/image/2569154656C5E0761337CA)
題烏江亭/杜牧
勝敗兵家 事不期 병가에서 승패란 기약할 수 없는 것
包羞忍恥 是男兒 수치를 참고 견디는 자가 진정한 남아라
江東子弟 多才俊 강동의 자제 중에는 준걸도 많은데
卷土重來 未可知 흙먼지를 말아 일으키며 다시 쳐들어 왔다면 어찌 결과를 알 수 있으리오
[승패병가 사불기/ 포수인치 시남아/ 강동자제 다재준/ 권토중래 미가지/]
![](http://cfile217.uf.daum.net/image/265B3E3756D788A8042845)
26세 때 급제한 두목은 한때 화류풍월로 나날을 보낸 적도 있으나, 당말 3대(덕종-순종-헌종)에
걸쳐 재상을 배출한 명문가의 혈통을 이어받아 결국 대시인으로 발돋움하게 된 것. 두목의 조부
두우는 [通典]을 편찬한 대학자...!!!
그런가 하면, 두목은 [번천문집]에 신라인 장보고와 정년의 전기를 남겼는데, [삼국사기]는
이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만약 두목이 없었다면, 우리 역사에서 장보고와 정년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을 것.
그로부터 다시 천여 년이 흐른 뒤, 조선 땅을 삼킨 일제의 서슬을 피해 李陸史는 [광야]에서 절규하였는데...
그때 이육사의 절창이 바로 두목의 심정과 같은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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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千古의 뒤에
白馬 타고 오는 超人이 있어
이 曠野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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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file236.uf.daum.net/image/2107854256C5E08201E371)
초한쟁패의 결전지... 해하대전 유적비
![](http://cfile236.uf.daum.net/image/23492C4356C5E07D156904)
![](http://www.daesang43.pe.kr/bbs/data/DSB30/%ED%95%AD%EC%9A%B0_%EA%B3%A0%EB%A6%AC2.jpg)
항우는 해하대전에서 참패한 뒤 미련 없이 목숨을 버렸으나,
그 영웅적인 기개로 인하여 2천 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중국인들의 가슴에 [千古의 英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http://cfile232.uf.daum.net/image/245CBB4356C5E07D093D53)
발산개새의 영웅... 항우사당
![](http://cfile215.uf.daum.net/image/2203533456D677A03510D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