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읊다(詠雪), 빛이 뜨락에 비치자 소금이 쌓인 듯(光侵庭院已堆鹽)
····················································································· 서하 이민서 선생
소동파의 시에 차운해서 눈을 읊다〔詠雪 次東坡韻〕
겨우내 눈 내리지 않아 땅이 갈라졌기에 / 經冬無雪地坼龜
싸락눈 처음 내릴 적의 기쁨 알 만하리라 / 微霰初零喜可知
황혼에 머리 들어 구름 빛깔 바라보고 / 黃昏擧頭覘雲色
한밤에 귀 기울여 추운 바람소리 듣는다오 / 半夜側耳聽寒吹
새벽 들어 펄펄 내리는 형세 굉장해져서 / 紛紛到曉勢轉壯
일어나 보니 푸른 솔이 흰 수염으로 변하였고 / 起見蒼松變鬚髭
빛이 뜨락에 비치자 소금이 쌓인 듯 / 光侵庭院已堆鹽
얼어붙은 바다에는 비로소 유빙이 생겨났네 / 凍合溟海初生澌
사람 향해 빙빙 돌며 교태 지어 알랑대고 / 向人縈回巧自媚
어지러이 땅에 떨어지면서 어찌 험지라고 피할까 / 落地繽幡寧避危
휘날리는 눈송이에 눈은 아물거리고 / 空花凌亂眼生纈
빈방으로 날아와 머리 더욱 희게 하네 / 虛室飄揚白添絲
삼라만상 감싸 안아 온통 하얀데 / 包含萬象入混冥
온갖 모양 새겨내니 누가 그리 하였는가 / 刻鏤千形誰作爲
구름 사이 갓 뜬 해님은 빛 일정하지 않고 / 漏穿初日光不定
가로지르는 가벼운 바람에 유지할 힘 없어라 / 橫截輕飆力難持
동곽선생 처럼 맨발로 길을 나서니 / 出門東郭先生足
길을 걸음에 고야 선인의 피부 같구려 / 行路姑射仙人肌
가난한 선비는 홀로 큰 평상에 누웠는데 / 大床獨臥困貧士
어느 집이 부자자식에게 술상을 차리는가 / 誰家置酒宴富兒
파릉의 겨울 매화 응당 더욱 좋고 / 灞陵寒梅應更好
섬계의 맑은 흥 또한 함께 일어나네 / 剡溪淸興亦一時
병든 나그네 창가에서 홀로 잠 못 이룬 채 / 病客窓間獨不眠
아침 내내 쓸쓸히 서재를 지키누나 / 終朝寂寞守書帷
안석에 우뚝하게 앉아 어깨 억지로 세워 보지만 / 隱几突兀強聳肩
화로 끌어안고 추레해서 고운 자태 없나니 / 擁爐錯落無姸姿
해진 갖옷 자주 끌어당겨도 정강이 가릴 수 없고 / 弊裘數挽不掩脛
깨진 벼루에 담긴 붓은 꽁꽁 얼었구려 / 破硯點筆氷淋漓
주린 말이 마른 삼태기 씹는 소리 누워서 듣고 / 臥聞飢馬齕枯箕
새들이 빈 섬돌에 자취 남긴 걸 날이 개어 보노라 / 晴看鳥迹生空墀
큰 못에는 용과 뱀이 정녕 웅크려 있나니 / 大澤龍蛇時正蟄
추운 날씨에 새매 어찌 날개 펼치랴 / 霜天隼翼寧當披
토끼 잡고 사슴고기 굽는 일 비록 즐겁다지만 / 搏兔煮鹿雖可樂
병 많으니 어찌 사냥을 배울쏘냐 / 多病焉能學狂馳
평생의 덧없는 자취가 어렴풋한 꿈 같아 / 平生浪迹逐殘夢
천고의 그윽한 회포를 큰 술잔에 부치노라 / 千古幽懷付深巵
서호의 물색 모두 탈 없는데 / 西湖物色摠無恙
문득 외로운 학이 따라오네 / 却有孤鶴相追隨
낚시꾼의 도롱이 쓴 모습 누가 잘 그려낼까 / 誰能善寫漁蓑樣
내 머리 보는 것이 또한 마땅하리라 / 看我頭顱亦宜之
[주-1] 동곽(東郭) …… 나서니 :
《사기(史記)》 권126 〈골계열전(滑稽列傳)〉에 “동곽 선생은 오랫동안 벼슬길에서 대조(待詔)로 있으면서도 가난하여 주리고 떨며, 옷은 헤지고 신은 온전하지 못하여 눈길을 다닐 때 신이 위쪽만 있고 밑창은 없어서 발로 땅을 다 밟고 다녔으므로, 길 가는 사람들이 보고 웃었다.[東郭先生久待詔公車, 貧困飢寒, 衣敝履不完, 行雪中, 履有上無下, 足盡踐地, 道中人笑之.]”라고 한 데서 온 표현이다.
[주-2] 고야(姑射) …… 같구려 :
고야는 묘고야산(藐姑射山)의 준말로,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서 그곳에 거하는 신인(神人)의 ‘피부가 마치 얼음과 눈 같다.[肌膚若氷雪.]’라고 하였다.
[주-3] 가난한 …… 누웠는데 :
삼국시대 진등(陳登)은 자가 원룡(元龍)인데, 호기가 높기로 이름났다. 허사(許汜)가 형주 목사(荊州牧使) 유비(劉備)와 천하의 인물을 논하면서 “진원룡(陳元龍)은 호해의 선비라 호기가 없어지지 않았다.” 하였다. 이에 유표(劉表)가 무슨 까닭이 있느냐고 묻자, 허사가 “하비(下邳)를 지나다 그를 방문하니 손님을 맞는 예(禮)도 갖추지 않고 오랫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은 큰 침상 위에 올라가 눕고 손님은 침상 아래에 눕게 하였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사실을 들은 유비가 “그대는 국사(國士)라는 명성이 있으나 세상을 구제하는 데 유념하지 않고 편안히 살 전답과 집을 사려고 하니, 이 때문에 원룡이 그대를 홀대한 것이다. 나 같으면 나는 백 척(百尺)의 누대 위에 누워 있으면서 그대는 땅바닥에 눕게 하였을 듯하니, 어찌 다만 높은 평상과 낮은 평상의 차이일 뿐이겠는가.” 하였다. 《三國志 卷7 魏書 陳登傳》
[주-4] 파릉(灞陵)의 …… 좋고 :
파릉은 장안(長安)에 있는 파수(灞水) 위의 다리로, 일반적으로 시상(詩想)이 잘 떠오르는 곳을 의미한다. 소동파(蘇東坡)의 〈사진 하 수재에게 주다[贈寫眞何秀才]〉 시에 “또 보지 못했는가, 눈 속에 나귀를 탄 맹호연이 눈썹을 찌푸리고 시를 읊느라 쭝긋한 어깨가 산처럼 높네.[又不見雪中騎驢孟浩然, 皺眉吟詩肩聳山.]”라고 하였는데, 그 주(注)에서 정경(鄭綮)은 “눈이 내리는 날 나귀를 타고 파교를 건너면 시상이 절로 난다.”라고 하였다. 《蘇東坡詩集 卷12 贈寫眞何充秀才》
[주-5] 섬계(剡溪)의 맑은 흥 :
진(晉)나라 왕자유(王子猷)가 산음에 살면서 눈 내리는 밤, 불현듯 섬계(剡溪)에 있는 벗 대안도(戴安道)가 생각나서 작은 배를 타고 노를 저어 찾아갔다가 정작 그곳에 도착해서는 문 앞에서 다시 돌아오기에 그 까닭을 물었더니 “내가 본래 흥에 겨워 왔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가는 것이니, 대안도를 보아 무엇 하겠는가.” 하였다. 《世說新語 任誕》
[주-6] 주린 …… 소리 :
말이 사람들에게 여물을 얻어먹지 못해 바짝 야윈 채 불쌍하게도 마른 삼태기를 씹어 먹는 소리가 잠을 깨웠다는 말이다. 송(宋)나라 황정견(黃庭堅)의 〈6월 17일 낮잠에서 깨어[六月十七日晝寢]〉라는 시에 “말이 마른 삼태기 깨물어 먹는 소리에 깬 낮잠이여, 그동안 꿈속에 비바람 치며 강 물결 뒤집혔는데.[馬齧枯箕諠午枕, 夢成風雨浪翻江.]”라는 표현이 나온다. 《山谷集 卷9 六月十七日晝寢》
[주-7] 외로운 학이 따라오네 :
북송의 임포(林逋)는 매처학자(梅妻鶴子)로 일컬어지는데,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하면서 매화를 심고 두 마리 학을 길렀다. 그는 거룻배를 띄워서 서호의 여러 절에 노닐면서도 찾아오는 손님이 있으면 반드시 배를 저어 돌아오곤 하였다. 이는 동자가 손님을 맞이한 뒤에 우리를 열어 학을 날게 하면 임포가 이를 보고 손님이 온 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宋史 卷457 林逋列傳》
[주-8] 낚시꾼의 …… 그려낼까 :
유종원(柳宗元)의 〈강설(江雪)〉 시에 “모든 산에는 새들도 날지를 않고, 오만 길에는 인적도 끊어졌는데, 외로운 배에 도롱이 삿갓 쓴 늙은이가, 홀로 차가운 강 눈 속에 낚시질을 하네.[千山鳥飛絶, 萬逕人蹤滅. 孤舟簑笠翁, 獨釣寒江雪.]”라고 한 데서 온 표현이다. 《柳河東集 卷43 江雪》
<출처 : 서하집(西河集) 제2권 / 칠언고시(七言古詩)>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문화연구원 | 황교은 유영봉 장성덕 (공역) |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