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두 두두… 영예의 대상은, 목화 하모니카 합주단!”
대상 팀이 발표되는 순간이다. 함성을 지르며 옆자리 단원과 얼싸안았다. 장려상 정도만 기대했는데 대상이라니….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전국 실버하모니카 연주대회에는 서울과 수도권 열 한 곳의 노인복지관 합주단이 출전했다. 모두 다양한 곡을 준비하여 실력을 선보였다. 검정색 중절모자를 쓰고, 흰 와이셔츠에 검정 반짝이 조끼와 붉은 나비넥타이로 한껏 멋을 낸 우리 팀은 ‘그 건너’와 ‘삼포로 가는 길’을 연속으로 연주했다. 청중들은 손뼉 치며 노래 부르고,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첫 출전에 대상이라. 우연이었을까. 육십 초반의 선생님은 같은 또래부터 여든 사이의 실버 단원들을 열정적으로 가르쳤다. 박자를 놓치거나 음이 틀리면 아무리 나이 많은 제자라도 호되게 야단 쳤다. 특히 합주 단원들은 반장중심으로 대회 여섯 달 전부터 수업 시작 전에 40분씩 맹연습을 했다.
유년 시절,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중천에 떠 있는 밤 어디선가 들려오던 애달픈 하모니카 선율에 매료된 적이 있었다. 언젠가는 나도 멋지게 하모니카를 불 수 있으면 좋겠구나 싶었다. 그래서일까? 교직에서 은퇴한 나는 복지관 하모니카 초급반에 등록했다. 색소폰이나 기타 같은 악기보다 배우기 쉬울 것이란 막연한 생각도 한몫했다. 악기 가격이 저렴하고 어디서나 쉽게 연주할 수 있으며, 휴대가 편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배우고 연주하는 일이란 결코 녹록치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선생님이 연주하면 맑은 소리가 나는데, 내 하모니카는 삑삑거리는 소리만 났다. ‘싸구려라 그런가?’ 요령부득이라는 것을 깨닫기 까지는 석 달이 걸렸다. 한 개의 음만 입술을 오므려 하모니카 구멍에 정확하게 입을 대고 연주해야 되는데, 입을 너무 넓게 벌려 연주를 하니 옆의 음이 더해져 잡음이 날 수 밖에. ‘재주 없는 놈이 연장 탓 한다’고. 아름다운 음을 내지 못하고 연장만 탓하다니.
하모니카를 배우기 시작한 지 삼 년이 흘렀다. 합주는 지휘자와 MR에 맞춰 모든 단원이 일사분란하게 물 흐르듯 연주를 해야 한다. 음정과 박자, 강약이 조화를 이루어야 곡의 느낌이 살아나고 청중도 즐겁다. 그런데 나는 박자를 먼저 가거나 놓치기 일쑤였고, C와 C#키의 하모니카를 바꾸어 연주하는 바람에 선생님과 단원들의 따가운 눈총도 받았다.
하모니카 합주를 하면서 지나온 내 생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교직에서 나의 역할을 다했는가. 조직과 구성원들에게 피해는 끼치지 않았는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경청하지 않고 내 생각만 고집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보니 듣기 좋은 말에만 귀를 열고, 좋아했던 것 같았다. 하모니카 합주처럼 나의 소리를 낮추고 다른 사람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교육자는 아니었다. 초급반 시절, 배운 곡을 안방에서 연습이라도 할라치면 방문을 닫으라고 성화였던 아내 같았다. 그럴 땐 자존심이 상한 나는 텔레비전 음량을 최대한 높이고 하모니카를 연주했다.
초급반에서는 C와 C#키 하모니카로 비교적 쉬운 멜로디의 동요와 싱글주법을 배웠다. 중급반부터는 A와 Am키 하모니카로 대중가요와 베이스, 트릴, 아르페지오, 트레몰로, 바이브레이션 등 다양한 연주법을 익혔다. 최근에는 동요밖에 모른다고 타박하던 아내도 유행가 연주곡을 청한다. 흥겨운 하모니카 연주에 맞추어 아내가 노래까지 흥얼거린다. 신바람이 난 나는 틈만 나면 하모니카 연습을 한다.
지난 10월에는 내가 소속된 ‘목화 하모니카 합주단’이 요양원을 방문, 휠체어를 탄 치매 환자들에게 동요와 가요를 연주했다. 처음에는 전혀 반응이 없던 환자 중 몇 명은 노래도 따라 부르고 불편한 몸으로 어깨춤을 추기까지 했다. 창백한 얼굴과 무표정한 그들도 한 때는 가족들과 함께 오순도손 재미있게 살았을 터인데…. 휠체어와 요양사의 도움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그들이 어쩌면 우리의 미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아팠다. 무대와 객석과의 거리는 불과 5m 밖에 안 되는데, 서로의 마음속엔 측정할 수 없는 심리적인 가까움을 느낄 수 있었다. 환자와 동년배인 단원들은 이구동성으로 내가 건강하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며, 아프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봉사하겠다고 다짐했다. 11월엔 유치원생들의 피아노발표회에 초대받아 하모니카 합주를 했는데, 강당을 메운 학부모들과 아이들은 우리의 연주에 맞춰서 신나게 동요를 불렀다.
올해 어버이날에는 나의 동요 연주에 맞춰 손자는 리듬 악기를 치고 온 가족이 노래를 불렀다. 오랜만에 집 안엔 웃음꽃이 피었다. 하모니카는 어린 손자가 울며 떼를 쓸 때도 특효약이다. ‘작은 별, 나비야, 학교 종, 섬 집 아기’ 같은 동요를 연주하면 금방 울음을 뚝 그치며 따라 부른다.
행복한 노후 생활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건강과 ‘즐거운 여가생활’이라 말하고 싶다. 하모니카는 연주자는 물론 청중에게도 건강, 소통, 평화, 봉사의 도구로 희망과 행복을 주는 악기이다. 앞으로 단원들과 요양원을 방문하여 병들고 지친 이들에게 아름다운 선율로 희망을 들려줄 계획이다. 모쪼록 하모니카 독주도 할 수 있는 그 날을 꿈꾸어 본다. 나의 연주를 듣고 위로받을 수만 있다면…. 책상 위에 놓여있는 하모니카를 바라보니, 심장에서는 뜨거운 사랑이 샘솟는다. 금방이라도 하모니카에서 감미로운 선율이 들려올 것만 같다.
첫댓글 참바세님,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님의 생활이 곧 수필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수필이 시도해 본다는 의미가 있는데 끝없이 각 분야에서 시도하는 님의 삶이 또 좋은 글로 남으니 부산물로만 보기에는 그 가치가 큽니다.
우-우~ 아름다운 음률 속에 사랑이 가고 오고 사는 보람이 그 속에 있고. 좋아요, 멋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