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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은 사람에 따라 이 여행의 정점을 찍는 날일 것이다. 막고굴을 찾은 날이다. 막고굴은 8개 굴만 보여주도록 되어 있고 그나마 사전에 신청을 해야 한다고 한다. 관람의 시작은 영화로부터 시작된다고 하는데 우리는 9시에 예약이 되어 있다고 한다. 막고굴 영상을 보는 곳이다. 이곳에서 막고굴을 소개하는 영상물 2편을 보고 실제 막고굴로 이동을 하는데, 사전 지식을 알려주는 역할도 하지만 다 보여줄 수가 없어 중요한 굴을 영상으로 미리 보여주는 역할도 한다고 한다. 이 건물은 멀리서 보면 명사산의 모래 언덕들 닮은 조형물인데 제대로 표현되지 못하였다.
영화관으로 이동하는 통로. 시설이 최근에 지어진 듯 깔끔할 뿐만 아니라 매우 현대적이었다. 달라지는 중국의 현재를 보는 것 같았다. 관광산업에 본격적으로 투자를 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좋은 윈윈전략이 아닌가 싶다.
영화는 두 편이었는데 각각 20분씩이었다. 첫번째 영화는 막고굴의 탄생과정을 보여주었고, 두 번째 영화는 돔형 천장에 영사하는 3D 영화였는데 막고굴의 대표적인 예술품을 소개하는 영상물로 정말 실감이 났다. 입장할 때 헤드폰을 나누어주었는데 채널도 한국어 영어 일어 등 다양했고 영상은 허름한 병마용갱의 것을 상상했는데 그 스케일과 질에서 치밀한 영화를 찍는 것 못지 않은 하나의 "작품"이었다. 3D 영화는 막고굴의 작품을 먼저 영상으로 찍어서 이를 그래픽으로 처리하였고, 조각품 같은 것은 스캔을 해서 다시 제작을 하였는데 3D 안경을 쓰지 않고도 정말 현장에 와 있는 듯한 현실감이 느껴졌다. 다만 처음에 영화도 시작하기 전에 볼륨을 최대로 해놓는 바람에 영화가 시작할 무렵에는 깜짝 놀랐다.
드디어 셔틀버스를 타고 막고굴에 도착을 하였다. 보이는 곳은 북쪽 굴이다. 이곳의 굴은 모두 745개이며 이를 옆으로 나란히 연결할 경우 모두 50km에 달한다고 한다. 이 가운데 북굴은 개방을 하지 않고 아직도 연구 조사 단계에 있고 남굴은 491개로 개방을 하고 있는데 습도 등으로 인해 훼손이 심해져서 한정적으로 개방을 한다고 한다. 전문학자라면 샅샅이 둘러볼 기회를 신청해보겠지만 실제 8+1개를 돌아보는데도 3시간 가까이 걸렸다.
이곳 북굴은 주로 승려들이 수행정진하거나 숙식을 해결하기 위한 공간으로 지어졌다. 남굴에 비하여 규모가 작은 것은 그 때문이다. 비교적 큰 굴 속에는 또 내부가 감실 모양으로 석굴암처럼 안으로 파여져 개인이 좌선하기에 알맞도록 공간을 배치하였다고 한다.
다리 왼쪽으로 시야를 돌리니 드디어 개방된 남굴 쪽이 눈에 들어왔다. 앞쪽의 돌탑은 부도이고 숲 너머 보이는 지붕은 미륵불좌상이 있는 제130호굴인데 성당(盛唐) 시기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개방이 안 된 북굴은 절벽에 구멍만 뻥뻥 뚫려 있는데 비해 이곳에는 모두 통로를 연결시켜놓았고 굴마다 모두 문을 달아놓고 시건장치를 하였다. 모든 자물쇠는 하나의 열쇠로 열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안내원들이 똑같은 열쇠를 가지고 돌면서 문을 열 수 있게끔 한 것이다.
퇴색되어 가는 벽화. 아직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다행이었지만 이렇게나마 볼 수 있는 외부의 벽화는 그나마 얼마 되지 않았다. 외부의 것은 사실 달리 뾰족한 보존 방법이 없을 것이다.
막고굴 입구. 정확히 말하자면 입장권 확인하는 곳이다. 저곳을 일단 통과하면 사진 촬영은 금지된다. 그러나 사실상 SLR 같은 큰 카메라만 통제를 하지 똑딱이나 스마트폰 같은 것은 통제를 할 수도 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구리고 다니다 보니 중국인들은 큰 카메라를 당당히 목에 걸고 다니던데... 외국인을 차별하는 것인가? 아니면 지금이 비수기여서 통제가 느슨한 것인지? 나는 삼각은 유물을 훼손할 여지가 있다고 가이드에게 맡기고 카메라는 색 속에 넣어서 들어갔다.
일단 사진을 찍기 위해서 다리 너머서 보이던 130호 굴(窟) 앞으로 갔다. 저곳도 원래는 외부로 개방되어 있었는데 보호를 위해서 나중에 앞쪽에 건물을 추가로 지은 것이다. 외부서 보면 7층 건물로 보이는데 들어가면 하나의 불상만 놓여 있다. 왼쪽 아래쪽의 붉은 받침대는 기도하는 사람이 무릎을 꿇는 곳인데, 일행 가운데 몇 명도 이곳에서 향을 사르고 절을 올렸다. 부처의 영험은 어디서나 똑같은 모양이다.
본격적인 관람을 위하여 출입구 쪽으로 이동하며 보이는 막고굴의 모습은 과연 우리가 영상으로만 보고 상상했단 모습이 어떻게 펼쳐질까 기대와 궁금증을 동시에 자아내었다.
철책 안쪽으로 들어갔다. 지금부터는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이다. 6년 반 동안 쓰던 스투피 폰(바보 전화 2G)을 이번에 바꿨는데 효력, 아니 위력을 발휘했다. 이번에는 가족들과 그래도 연락이나 원활하게 하고자 해서 과감하게(?) 바꾼 것인데 인터넷 여건이 여의치 않아 집과의 연락은 예년이나 비슷하였고 뜻밖에 이렇게 활용할 수 있었다.
제일 처음 관람한 굴은 16-17호 굴이었다. 동시에 두 개의 굴을 관람하는 것인데 이는 굴 안에 굴이 있기 때문이다. 옆으로 뚫린 17호 굴은 원래 흙으로 발려져 있던 것인데 도사 왕원록이 발견하여 관리해오다가 스타인과 뻬리오, 오타니 등에 의해 헐값으로 유물을 빼앗기다시피 팔아넘긴 곳이다.
동굴 내부를 찍은 첫째 사진. 이 굴이 바로 17호굴이다. 전진(前秦) 건원(建元) 2년(366, 타설은 364 혹은 353)에 승려 낙준(樂僔)이 서쪽에서 불광을 발견하고 정착한 곳이 바로 돈황 막고굴이라고 하며 이후 14세기까지 꾸준하게 건설되었지만 대항해시대와 함께 사라졌다. 이후 다시 각광을 받은 것은 20세기 들어서이다.
이 안에서 2만여 점의 불경과 예술품 등이 발견되었는데 모두 외국인 탐험자들에게 헐값에 넘어가고 남은 것 수천 점만 중국이 늦게사 수습하였다고 한다. 그 중 오타니 탐험대가 가져간 이른바 오타니 컬렉션은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에 보관하다 갑작스런 일본의 패전으로 현재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 17호 굴에 안치되어 있는 좌상은 당나라 때 돈황을 수복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승려 홍변(洪䛒)이라고 한다. 원래는 다른 장소에 있던 것을 돈황연구소측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막고굴 안에는 장경동 진열관이라는 전시 공간이 있었다. 장경동은 경전을 갈무리해놓았던 동굴이란 뜻으로 곧 17호 굴을 말한다. 아래쪽 바위에는 현대의 가장 저명한 학자 중 한 사람인 진인각의 "돈황은 우리나라 학술의 가슴 아픈 역사이다."라는 말을 각해놓았다. 이보다 어떻게 더 슬픈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까?
진열관에 전시된 도사 왕원록의 사진. 보기에도 참 순진 순박하게 생겼다. 사실 왕원록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조치를 다 취하였지만 당시 중국이 제국에서 공화국으로 넘어가는 행정 부재의 상태였기 때문에 왕도사를 욕할 처지가 못 된다. 실제 한국어를 하는 한족 여자 가이드에게 왕도사에게 대한 평가를 해달라고 했더니 "좋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진열관에 전시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필사. 물론 원본은 프랑스 파리에 있기 때문에 이곳의 것은 사진으로 찍어온 것이다. 그리고 오른쪽의 것은 사기 백이열전이다. 이 두 가지만 보더라도 당시 장경동에 얼마나 많은 여러 방면에 걸친 문서와 자료가 보관되어 있었을 지 짐작할 수 있다.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관람객. 왼쪽 아래는 우리 팀이고 오른쪽 위는 현지인으로 보이는 다른 팀이다. 미리 예약을 받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진작 이렇게 체계적으로 관리를 하였으면 보존 상태가 훨씬 좋았을 것을... 만시지탄이 절로 나온다.
볼 수 있는 굴의 수는 8개라고 하였다. 가이드는 북한에 가서 한국어 교육을 받은 현지의 연구원이 직접 한다. 이것도 효과적인 통제를 위한 한 가지 방책일 것이다.
층계를 올라가는 일행들. 이곳에서는 귀걸이형 수신기를 모두 지급하여 듣기에 용이하도록 하였다. 옛날 같으면 허리에 차는 확성기를 썼는데... 좋기는 하였지만 한번씩 열쇠를 가지고 자물쇠를 여는 삐걱거리는 소리며 조금 거리가 떨어지면 지직거리는 잡음 등 각종 소리가 여과없이 들리는 것은 조금 불편하였다.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벽화. 붉은 바탕에 대충 선처리만 하고 단조로운 색깔로 마감한 벽면의 불상은 어제 본 서천불동의 벽화와 흡사하였다. 서천불동과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
멀리 보이는 건물은 130호 굴이다. 그러나 130호 굴은 반 지하로 내려가야 있다. 워낙 돌출되어 보여 130호 굴쪽 방향에서는 어디에서나 보인다.
벽화. 사람의 손길이 닿는 곳의 벽화는 훼손된 곳이 많았지만 손길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있는 벽화는 보존상태가 아직 훌륭한 것도 많았다. 막고굴 훼손의 주된 원인은 습기라고 하는데 바로 굴 앞을 흐르는 냇물 탓이라고 한다.
136호 굴의 미륵대상. 세계 여러 나라에서 중국을 따라갈 수 없는 것은 아마 그 스케일이 아닐까? 낙산대불이라든가 하는 불상들은 보기에도 위압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곳 막고굴에도 3개의 큰 불상이 있는데(본 것만) 136호 굴은 인지도가 조금 떨어지는 것 같다. 아래쪽에서 보니 콧구멍만 크게 보였지만 그 큰 규모에 압도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는 맛뵈기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더 사람을 놀라게...
촘촘이 이어진 석굴은 개방구간인 남굴만 해도 490개가 넘는다. 우리는 일반 관광객으로 와서 고작 허용된 8개에 하나만 더 보았지만 나머지를 더 본들 그 의미를 알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처음에는 외! 환호성을 지르다 몇 개만 보면 속으로 '다 그게 그거네...' 할 것이다.
130호 굴을 향해가는 길. 비교적 통제가 잘 되었는데 이는 비수기라는 철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항상 이 계절에 여행을 와서 비교적 호젓하게 관람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어진 관람 기회가 모두 끝나고 나와서 쉬면서 돌아보았다. 군데군데 원상태를 유지하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은 보존을 위해 외벽을 다시 발랐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지 외양은 아니니까... 그래도 보존이 잘 되어 원 상태로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묻어나는 것이 사실이다.
이 아가씨가 우리를 안내한 한족 가이드이다. 그러나 38세의 기혼 여성이란다. 한국어가 서툴러서 더 경청하게 만드는 것이 오히려 장점이 되지 않을까 한다. 의성어나 의태어를 풍부하게 구사하려고 노력을 하였지만 그다지 적절하게 사용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열성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관람을 끝내고 바깥에 나와서 사진을 설명하는 순간이다.
막고굴에서는 백년 전과 지금의 상태에 대한 비교 사진을 전시해놓았다. 설명을 들어보면 사람에 의한 훼손보다는 자연에 의한 손실이 더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의 힘으로 보호장치를 함으로써 그 시간을 조금 연장할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가 관람했던 와불상의 사진
130호 굴의 대불. 몰래몰래 사진을 찍었지만 나중에는 미안해서 찍지를 못하였다. 그래서 바깥에 전시된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사실 눈으로 목격하는 것이 최고의 경험이고, 집에 돌아와서 이미지 검색을 해보면 내가 찍은 것보다 백 배 천 배는 훌륭한 사진이 넘치고 넘치는 데야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저 내가 가서 찍어왔다는 자랑 아닌 자랑은 할 수 있겠지...
막고굴 관람을 끝내니 1시 가까웠다. 오던 날 아침을 먹었던 식위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회원들 몇 분의 요청에 의하여 말린 과일 파는 가게에 잠시 들렀다.
대부분이 비슷비슷한 과일들이었고 시식은 공짜였기 때문에 맛을 보는 것은 시식 만으로도 충분했다. 오죽하면 시식하는 것으로 화학작용을 일으켜 배탈이 나지 않을까 걱정을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50원에는 8원부터 800원에는 260원 어치의 사은품이 주어졌다. 50원 어치 넘게 산 사람들이 얻은 사은품을 버스에서 많이 돌렸는데 씨가 대부분이고 먹기가 아주 힘들었다.
돈황에서의 일정을 끝내고 380km 넘게 가욕관으로 이동하였다. 당초 오늘 오후에 잡혀 있던 사산 일정을 어제 끝낼 수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약 3시간 반 버스를 달리는 중에 처음으로 회원 소개 외에 진지한 관람 소감을 들어볼 시간이 있었다. 점심을 마친 시간이라 이민용 선생이 마이크를 잡고 쉽지만 깊이 있는 해설을 들려주는데 잠자는 사람이 많았다.
가욕관까지 가는 길은 거의 이런 길이었다. 황량한 황무지 저쪽에 같은 모양의 산이 띠처럼 계속 따라왔는데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흑산이라고 한단다.
가욕관까지 가는 길에는 3번의 휴게소에 들를 예정이었지만 두 군데만 들렀다. 첫번째 쉰 푸룽지 휴게소의 오른쪽에 고비오아시스(戈壁綠洲)라는 말이 보인다. 옛날 이곳을 지나다니던 과객들에게 보이던 오아시스나 자동차 운행에 지친 현대의 과객에게 나타내는 휴게소는 같은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돈황에서 꽤 멀어졌는데도 반탄비파상이 세워져 있었다. 아직 돈황의 영향권 안에 있다는 말일 것이다.
이곳 돈황은 발전소가 많은데 대부분 황무지라는 지형과 일기 조건을 이용한 것이다. 이런 풍력발전기가 끝없이 설치된 지점이 보이는가 하면 또 갑자기 집열판을 이용한 태양광 발전을 하는 곳이 끝없이 펼쳐지기도 하였다.
드디어 들어선 가욕관시. 이번 여행에는 길을 잘못들거나 헤매는 일이 거의, 아니 한번도 없었는데 이는 작년이나 그 전에 비해 네비게이션의 활용도가 거의 상용화되었기 때문이다. 가로등 중앙의 퍼런 불빛은 가이드가 스마트폰으로 네비게이션을 켜놓은 것이다. 작년 서안에서도 그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욕관시에서 저녁을 먹은 도연회관. 이곳은 회력상무공우(汇力商務公寓)라고 하는 곳에 딸린 식당이다. 공우는 아파트라는 뜻이지만 영어로는 Business Hotel이라고 표기한 것으로 보아 호텔이다. 우리는 가욕관을 찾아왔지만 이곳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흥 철강도시를 찾는 비즈니스 맨이다. 식당에도 그런 외국인들이 숱하게 보였다.
이곳은 이제 란주의 영향권인듯 멀리 로타리에 설치해놓은 마답비연상이 조명을 받아 찬란히 빛나고 있다. 마답비연상은 무위에서 출토되었고 현재는 감숙성박물관 실크로드관에 전시되어 있다. 중국의 대표적인 예술품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가 묵을 광장가일주점. 영어로는 홀리데이라고 하였다. 오른쪽 아레에 우리가 타고온 버스기 보인다. 들어가니 집게로 따뜻한 물수건을 주고 로비에 나오니 차를 대접하는 등 서비스가 지극하였다. 그러나 방이 지나치게 건조하여 감기에 들 뻔하였다.
이곳에도 옥을 얇게 깎아 만든 야광배가 트렌드 마크였다. 호텔 로비에 전시해놓고 파는데 사 가지고 가는 손님이 과연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호텔의 길을 건너면 광장이 하나 있고 조형물을 설치해놓았다. 신흥 철강도시 다운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건장한 노동자를 상징함직한 강철 인간(man of steel)이.
일부와 또 야간 순찰을 다녀보았다. 50년대부터 조성된 신흥도시답게 매우 깔끔하게 정비된 도시였다. 보름이 막 지난 달이 건물의 간판을 투과해 비치고 있다.
호텔 맞은 편에는 커다란 복합 상가가 있었는데 역시 강철구조물로 가족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중국은 이제 3인이 1가구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 같다.
호텔로 돌아오니 랜드로버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이집트에서부터 실크로드 탐사를 떠난 사람의 차량이었다. 기회가 되면 나도 차를 타고 한번 관통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다.
차량의 옆쪽에 붙은 포스터. 이렇게 일정의 절반을 훌쩍 넘기고 실질적으로 하루만 남은 이번 여행도 저물어간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덕분에 구경 잘 했습니다.
우리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돈황석굴, 의무감을 가지시고 용케 제법 사진을 찍으셨습니다. 정말이지 대단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할 말이 없는데 다른 분들도 다들 찍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