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와 알음알이
우리가 안다[知]는 것은 어떤 사실을 인지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인지된 것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반응하느냐에 따라 앎은 알음알이[知解]와 지혜(智慧)로 색깔이 입혀지게 됩니다. 알음알이란 국어사전에 '약삭빠른 수단'이라 정의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실을 인지하고 그것에 대해 약삭 빠르게 내는 지식이나 분별심 등을 말하는데, 물론 그것은 이타적인것이기보단 이기적이고 보편적인 사고이기보단 다소 편협된 사고를 두고 이르는 말입니다. 이를 한문으로 지해(知解)라고 하는데, 지견해회(知見解會)의 준말로서 지식이나 분석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오온(五蘊)과 연기(緣起)에서의 식(識)이 곧 이 지해인 알음알이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습관적·교육적·환경적으로 분별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마음속에는 세상의 온갖 것들이 다 분별이 되기 때문에 다 분별밖에 없습니다. 분별이란 우리가“아 이거구나 하고 아는 것”, 알음알이가 전부 분별이고, 이걸 다른 표현으로 상(相=想), 또 다른 말로 하면 생각 (개념)입니다. 또 분별은 둘로 구분해서 나누는 것, 좋다 싫다, 맞다 틀리다 등, 그리고 우리가 분별해서 하늘이다, 땅이다, 무슨 나무다, 바위다, 산이다 부터 시작해서 춥다 덥다 즐겁다 괴롭다 기쁘다 슬프다 행복하다 불행하다 등등, 또 1+1은 2다, 3 곱하기 3은 9다, 이게 전부가 다 분별이고, 또 밥을 먹었다. 배가 부르다, 목이 마르다가 전부 분별입니다.
분별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뭐가 어떻다고 아는 것’은 전부 분별이라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분별이란 전부 상(相, 想)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끝없는 상이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 머릿속 모든 생각, 이미지, 그림, 모양이 다 상이고 분별입니다. 이 상이라는 글자는 우리가 많이 독송하는 금강경에는 모양 상(相)자로 되어 있는데 이 중국 한자로 번역된 금강경이 원래 인도에서 만들어진 반야경의 일부인데, 그게 한자로 번역이 된 게 7가지나 있는데 우리가 보고 있는 구마라집의 번역서에는 모양 상(相)자를 썼지만 다른 데서는 전부 생각 상(想)자로 번역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이 모양이나 모습이라는 것은 다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모양 상(相)자 밑에 마음 심(心)자가 붙으면 생각 상(想)자입니다. 그러니까 산스크리트어를 찾아 보면은 분명히 생각이라는 뜻으로 돼 있습니다. 생각이나 개념, 그게 상(相, 想)입니다. 생각이나 개념은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는 모양인데 눈에 보이는 모양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 들어 있는 온갖 그런 모습들, 이게 전부 마음속에는 우리가 생각으로 개념으로 모습으로 이렇게 기억이 돼 있고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우리 마음속의 모습이 문제입니다. 밖에 있는 모습은 나한테 괴로움이나 번뇌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그 뭔가가 자리를 잡을 때 그게 바로 번뇌가 됩니다. 예를 들어 밖에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있을때 지금까지 내가 모르고 왔다 갔다 할 때는 몰랐으니까 신경도 안 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이유로 그 사람이나 사물이 보기가 싫어졌습니다. 그때부터 볼 때마다 미워 보이고 보기가 싫어집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사람이나 그 사물이 어떤 문제가 있었기 때문일까요? 그 사람, 그 사물이 문제가 있으려면 검증이 되었거나 다수가 문제가 있다고 결론이 났을 때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내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괴로움이나 번뇌라는 것은 내 마음의 문제로 마음속에 있는 모든 모습 상(相, 想)은 허망한 것이고, 진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온(五蘊)은 공(空)이다.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이라 했습니다. 그 상을 없애는 것이 바로 마음공부고, 마음을 조복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본래의 마음인 본성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전부 분별 망상 때문입니다. 이 분별 망상을 하지 않으면 진정한 자신의 본마음, 즉 깨끗한 자기 본성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식[識]은 오온, 즉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에서의 그 식[識]이고 식[識]이 마음입니다. 식[識]은 아는 것 즉 앎입니다.
뭘 아는가?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안다는 것으로 여섯가지 외부 경계 대상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입니다. 식[識]은 앎의 기능입니다.
그렇다면 지혜[智], 즉 반야란 무엇인가? 대상의 본질 즉 실상을 꿰뚫어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智] 와식[識: 알음알이]의 관계입니다. 그 대상의 실상/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아는 것이 지혜고, 그렇지 못하면 무명입니다. 그런데 지혜도 앎이고, 무명도 앎입니다. 다 앎에 관련 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바르게 알면 지혜요, 틀리게 알면 무명이고 무지입니다.
그런데 지혜[智]와 식[識: 알음알이]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식[識:앎]으로 제법실상인 최상의 지혜....즉공[空]을 돈오/견성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지혜 [智]와 식[識: 알음알이] 이 서로 분리 되어져 있다면, 그 누구도 깨달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따로따로가 아니기에 깨닫는 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또 마음의 대상 중에는 선법과 불선법 등이 있고 또 열반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열반을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돈오(頓悟)요, 견성(見性)입니다.
그런데 우매한 중생들은 무엇이든 둘로 나눠서 분별합니다. 법의 본래 성품은 원융해서 둘로 나뉘지 않는 법입니다. 바로 둘로 나누지 않는 것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이 말은 분별심만 없으면 그 자리에서 참된 자성이 드러나고, 깨달음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알음알이 분별심을 여의고 열심히 나의 참 모습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나무 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