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의 느림보숲 제주여행 겨울 비자림 슬프거나 기쁘거나 항상 그 자리에 있어주는 이처럼 소중한 친구가 또 있을까요. 내리붓는 삼복더위에도 매서운 한파에 온 몸이 꽁꽁 얼어붙을 때도 그 친구는 항상 그 자리 그곳에 서서 기다립니다. 우울하거나 피곤할 때면 나를 보듬어 안아줍니다. 제주에 눈이 내리니 마치 첫눈이 오면 만나자는 약속처럼 그곳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비자림, 그 곳으로 가는 걸음이 즐겁습니다.
수백년 세월을 간직한 순백의 느림보숲, 겨울 비자림 차창 밖으로 몰려드는 겨울바람이 매섭습니다. 길을 잘못 나섰나 후회도 해보며 도착한 겨울 비자림. 그 안에 들어섰더니 숲은 오로지 고요의 세상입니다. 그 많던 바람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오래된 숲은 그 자체만으로도 신성(神性)을 갖는다더니 이 숲, 칼바람마저 잠을 재웠습니다. 수령 500~800년 된 비자나무 수천 그루가 모여 살고 있는 비자림은 비자나무 단일 숲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로 손꼽힙니다. 하여 천연기념물 제374호로 지정 ․ 보호되고 있지요. 그러나 어쩐지 부족한 느낌입니다. 비자림에는 비자나무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흑난초, 풍란, 나도풍란, 콩짜개란, 비자란 등 희귀한 식물들이 비자나무 품에서 고이 자라고 있지요. 비자나무가 잠시 틈을 보인 자리에는 활엽수도 슬며시 얼굴을 내밉니다. 그래도 부족한 느낌입니다. 애초에 생명을 ‘세계 최대 규모’, ‘천연기념물’ 혹은 ‘경제적 가치 연간 얼마’ 정도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경박스러운 일이었나 봅니다. 비자림에 들어서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들을 절로 깨닫게 됩니다. 비자나무는 느리게 자라는 느림보나무로도 유명하지요. 100년 동안 살아도 지름이 겨우 20cm도 크지 않는다 합니다. 그렇게 쌓인 세월이 백년도 아니고 이백년도 아니고 팔백년 세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세월과 수많은 생명들이 숨 쉬고 있는 비자리에 들어서면 인간은 절로 겸허해집니다.
눈이 쌓여 순백의 세상을 이룬 겨울 비자림은 그 신성함이 더욱 빛납니다. 다른 말이 무에 필요 할까요. 들어서면 절로 청정해지는 그 숲을 고요히 걸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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