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그리 많지 않으나, 오랜 시간 잊혀지지 않고 있는 것이 있다.
내 고향은 '영월군 북면 마차리'였고 외갓집은 '같은 군 주천면'에 있었다.
지금은 도로포장으로 쉬갈 수 있으나 예전에 그렇지 못했다.
마차리에서 첫 차인 제천읍으로 가는 버스를 8시에 탄다.
12시쯤 '제천읍 장락삼거리'에서 내리면 제천에서 평창읍 가는 버스를 12시30분에 탄다.
그리고 주천에 들어 가면 오후 5시쯤 된다.
또 다른 길은 영월읍에서 평창읍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도돈(마지리)'에서 평창읍서 나와
제천읍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어느 방향을 이용하여도 오후 5시쯤 주천에 들어 간다.
요즘은 승용차로 1시간 남짓 걸린다.
국민학교 3학년때부터 외갓집을 간던 것 같다.
나와 나이차이가 일곱살난 형 같은 외삼촌이 마차리에 왔다가 같이 가기도 하고
두살 연상의 형과 같이 가기도 하였다.
식빵(집에 구웠다)과 진로소주를 꼭 사가지고 갔었다.
외할아버지는 '소주'가 없으면 손자가 와도 반가이 맞아 주지 않으셨다.
속마음은 모르겠지만.
하지만 소주를 몇 병 손에 들고 가면 그리 기분 좋아 하셨다.
아마 당시 외할아버지는 알콩의존증이었을 것이다.
매끼니 자실 때마다 소주를 반병 드셨다.
목수였던 외할아버지, 소주를 들고 간 날에 연장을 망가뜨려도 웃고 마시지만
소주를 들고 가지 않으면 엄청 혼을 내셨다.
키가 작고 도수 높은 돋보기를 끼신 외할아버지, 전주 이씨며 장자, 진자를 쓰셨다.
요즘 영화 <명량>이 공전의 히트를 하였다. 한국영화사상 1,600만 이상의 관중을 동원하였다.
김진규(고인)가 주연한 <성웅 이순신>이란 영화가 있었다.
내가 중학 1학년, 겨울방학 때 시골의 영화관에서 상영되었다.
(중학 1학년 4월5일 부산으로 전학 갔으니, 부산에서 올라온 상태였다)
돋보기안경을 써도 글을 잘 못보시는 외할아버지께서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신다.
문화관이란 이름의 영화관, 그 맨앞자리에 앉았다.
외할아버지는 <성웅 이순신>이란 영화를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고,
영화의 배경을 보고 싶어 하셨다.
영화의 배경은 외할아버지의 고향 '통영'이었기에.
외할아버지는 고향땅을 보셨는가 영화를 보는 내내 울고 계셨다.
1972년 겨울,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에서 '경남 통영군'을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였다.
어쩜 외할아버지는 생전에 고향을 가지 못할 것을 아셨고
그림으로나마 고향을 보고자 하셨던 것이다.
영화를 보고 고향이야기를 하셨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중학 1학년 겨울엔 외할아버지의 눈물을 보았다.
(글을 쓰기 위하여 <성웅 이순신>이란 영화를 검색하니 1971년10월 개봉되었고,
김진규와 김지미 주연, 이규웅감독으로 나온다)
고향이 통영인 외할아버지가 어떻게 강원도 영월에서 사시게 되었는 지는 모르겠다.
외할머니의 고향은 제천이시다.
어머니가 통영 충렬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를 따라 영월로 가셨으니
외할아버지는 총각 때 영월이나 제천에 계시면서 외할머니를 만나 결혼 하신 것 같다.
직업이 목수였으니 당시 강원도에서 산판용(탄광 받침목) 목재를 많이 생산 할 때라 아마
영월에 계셨던 것 같다. 그리고 해방이 되고 고향으로 돌아 가신 것 같다.
6.25사변 후에 다시 영월로 오셔서 전후복구사업으로 학교의 책걸상을 많이 만드셨다.
돈을 지게에 이고 다닐 정도로 많이 벌었다고 하지만 주색잡기로 탕진하였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의 삶이 어떠하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리 행복하셨던 것은 아닐게다.
첫 딸은 열다섯에 대구로 시집 보내고(대동아전쟁 당시 미혼 15세 이상 처녀는 위안부 등으로
끌려 갔기에 궁여지책으로 시집을 보내셨다), 사변 이후에 고향 통영에 둘째 딸과 맏아들을
놓고 영월로 가셨다. 셋째와 막내 딸만 데리고. 작은 아들은 영월로 이사한 후에 생산하셨다.
어머니가 셋째 딸이었는데, 그 밑에 여동생이 있었지만 사고로 잃었다고 하신다.
외할아버지는 넷째 딸은 가슴에 묻고 사셨던 것이고, 작은 외삼촌은 형과 누나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크셨다. 나이든 아버지와 함께 가난으로 많이 굶주렸다.
60년말부터 부산으로 이사 온기 전인 1971년말까지는 아버지께서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다.
요즘 <명량> 때문에 외할버지가 더욱 그립다.
내가 중학 3학년 겨울에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에 못간게 아직도 아쉽다.
주천의 공동묘지에 산소가 있을 때 자주 가서 벌초도 해 드리고 소주도 따라 드렸는데
원주의 공원묘원으로 이장한 이후에는 한번도 못찾아 갔다. 10여년 지났다.
고향을 그리워 하며 우셨던 외할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