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산마을 나라에 큰 일 있을 때마다 '웅웅' 울며 예고한 당송
당산마을은 상율·도동 마을을 지나 2km 남짓 떨어져 있다. 여기는 마리면이 아닌 위천면이다. 당산마을 또한 역사가 오래 됐다. 들머리에 서 있는 당송(천연기념물 제410호)이 증명한다. 600살 정도 됐고 일부 가지가 꺾였으나 여전히 아름답다.
마을 사람들이 정월대보름마다 제사를 지내는 등 각별하게 보살피는 정성이 여기 있다. 당송은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웅웅' 소리를 내어 미리 알려줬다고 하는데 그래서 '영송(靈松)'이라고도 한다. 1910년 경술국치, 1945년 국권 회복, 1950년 한국전쟁 때 몇 달 전부터 밤마다 소리 내어 울었다는 것이다.
당산·모전·원당마을을 거쳐 4.7km 정도 떨어진 왼쪽에 무월마을이 있다. 들머리에 오장군 사적비가 있는데 옛것과 요즘것이 함께 놓였다. 요즘것은 드높고 크며 옛것은 조그맣다. 하지만 눈길은 옛것에 훨씬 많이 간다. 오장군은 조선 선조 대에 부사를 지냈다는 오적(吳勣)을 이른다. 오장군은 전북 무주 구천동에서 뼈재를 넘어 여기로 다니며 호랑이도 제압할 만큼 기상이 대단했다는 인물이다. 그이가 이곳에다 돌지팡이를 꽂았다.
이어지는 주상면 넘터마을은 1.8km 떨어져 고개 너머에 있다. 넘터는 마을 앞 고개 월치(越峙)를 이르는 우리말이다. 넘터마을에는 문의공(文毅公) 김식(1482~1520)과 관련된 자취가 있다. 김식은 조광조와 함께 훈구파를 제거하고 왕도정치를 실현하는 개혁정치를 펼치다 1519년 기묘사화를 맞아 여기로 몸을 숨겼다. 들머리 동구바위 아래 숨어 지내다 바위에 '白巖(백암)'이라 써 놓고는 이듬해 6월16일 목숨을 끊었다. 헌종 때 이 마을에 그를 기리는 완계서원이 들어섰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지고 지금은 모정비가 서 있다.
- 넘터마을 과거급제에 얽힌 남매 이야기 전해져
넘터마을에는 바래기재에서 고제원을 넘어 서울로 이어지는 옛길과 관련된 전설이 있다. 여기살던 남매 얘기다. 동생은 과거급제를 위해 열심히 공부했고 누나는 동생을 정성껏 보살폈다. 어느 날 누나의 꿈에 도사가 나타나 "내일 아침 너와 동생의 신에 보리를 심어 동생 것에 먼저 싹이 나면 과거를 보러 가고, 네 것에 먼저 나면 동생이 과거에 떨어질 운명이니 과거를 보러 가지 말라" 하고는 사라졌다. 이튿날 동생과 누나는 제각각 신발에 흙을 담아 보리를 심었는데, 사흘 뒤 누나 신에만 싹이 났다. 동생은 오히려 화가 나서 과거를 보러 황산을 지나 모동을 거쳐 서울로 넘어가는 길로 갔는데 웬 일인지 보름이 지나도록 산을 넘지 못했다. 보름 동안 헤매다 겨우 넘어갔지만 이미 과거는 끝난 뒤였다. 동생이 넘지 못한 그 고개를 그래서 '보름재'라 하는데 동생은 그 뒤 문과는 포기하고 무술을 닦아 장군이 됐고 그로써 마을 뒷산을 넘어갔다고 해서 마을을 넘터라 이르게 됐다. 마지막 고제원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고제원에 앞서 고제면 원농산마을에 잠시 들른다. 원농산마을은 넘터마을과 2.9km 정도 떨어져 있다. 용원정과 돌무더기가 있다. 냇가 언덕에 있는 이 정자는 둘레에 숲이 있고 아래로 시내를 따라 펼쳐진 들판과 먼 산이 눈맛을 시원하게 해 준다. 돌무더기 앞에서 옛날에 사람들이 당제를 지내기도 했다.
- 고제원 길손의 고달픔 덜어준 높은다리(고제)
고제원은 원농산마을에서 1.3km 정도 더가야 한다. 옛날 역원인 고제원은 사라졌지만 원터라는 땅이름은 남았다. 아울러 여기가 옛길의 중요한 지점임을 일러주는 높은다리와 음각선인상과 영세불망비도 남아 있다.
옛날 한 도승이 골짜기 시내에다 큰 돌로 다리를 놓아 길손의 고달픔을 덜었다고한다. 높이가 6m, 길이가 11m였다는 '높은다리(高梯)'의 유래다. 높은다리는 마을과 면(面)의 이름이 됐다. 돌로 된 높은다리는 없어지고 대신 콘크리트다리가 있다. 지금 다리도 그럴 듯하다. 아래로 자연 암반이 그대로 드러나 있고 물이 제법 낙차 있게 떨어져 흐르는 품새도 보기에 좋다.
다리 옆 높직한 데에는 입석(立石, 선돌)이 있다. 음각으로 선인상까지 새겨져 있어 거창 농산리 입석음각선인상(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24호)이라 일컫는다. 입석은 이정표 또는 수호신 노릇을 했겠다. 자연 화강암인데 높이 2.2m, 너비 1.5m, 두께 30cm 정도에 좌불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다. 입석 왼쪽 아래에 알구멍(성혈·性穴) 자취가 있다. 높은다리와 입석 사이에 있는 영세불망비도, 여기 옛길이 있었음을 일러주는 지표다. 영세불망비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세워야 했을 터이다. 옛길은 다만 통로로서의 길 이상이었다. 길은 그 시대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이 아로새겨져 있는 역사이자 문화였다. 과거길이 그랬고, 장터길이 그랬다. 길과 길이 이어지는 고개는 저마다 사연을 한자락씩 품고 있다. 옛길이 사라지면서 주막도 사라지고, 버스정류장이 되어주던 시골 점방도 덩달아 사라졌다. 이제 길의 주인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함양 삼산마을에서 바래기재를 거쳐 고제원에 이르는 길도 마찬가지다. 옛길은 그저 희미한 자취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이 빠름과 편리함에 익숙해질수록 더딤과 느림에 대한 향수는 더 강렬해진다. 이제는 거의 사라져버린 이 옛길은 우리가 지금 누리는 편리함만큼 잃어버리고 있는 소중한 무엇의 가치를 되살펴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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