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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比스님과 함께 하는 임제록 공부(2021.1.13.PM7시)
임제록 시중(示衆)
연야달다가 머리를 잃다 / 사조용
임제록 한단락 공부하겠다. 어제 ‘연야달다가 머리를 잃다’ 연야달다라는 사람이 자기 머리가 있는데 거울을 보다가 ‘거울에 있는 사람은 머리가 있는데 나는 왜 없나? 내 머리는 어디갔나’ 하고 한순간 착각을 한 것이다.
우리 모두가 착각 속에서 산다. 마음을 가지고 모든 행위를 다 하는데, 일체 행위를 전부 내 마음이 다 들어서 하는데도 마음을 따로 찾고 있다.
마음 찾는다고 하는 것이 다 착각 아닌가?
온통 마음투성이다.
제가 비유를 들어서 말씀드렸다. 겨울에 고무장갑을 끼고 김장을 담그는데 하루종일 무도 만지고 배추도 만지고 양념도 만지고 온갖 도구들도 만지고 그릇도 만지는데 무엇을 만졌는가? 하루종일 장갑을 만졌다.
그와 같이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간에 마음이 들지 않고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또 따로 마음을 찾는다면 그야말로 연야달다실각두(演若達多失却頭)다. 연야달다가 한순간 착각해서 머리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가 다시 본래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까 아무 일이 없어졌다. 선종에서 마음공부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치다. 줄기차게 그런 이치를 설하고 있다.
대덕(大德)아 차요평상(且要平常)인댄 막작모양(莫作模樣)하라 유일반불식호오독노(有一般不識好惡禿奴)하야
“대덕들이여! 평상 생활 그대로이기를 바란다면 다른 모양을 짓지 말라. 좋고 나쁜 것을 알지 못하는 머리 깎은 노예들이 있다.”
머리 깎은 노예들이 있다, 누구겠는가?
변즉견신견귀(便卽見神見鬼)하며 지동획서(指東劃西)하며 호청호우(好晴好雨)하나니 여시지류(如是之流)는 진수저채(盡須抵債)하야 향염로전(向閻老前)하야 탄열철환유일(呑熱鐵丸有日)이니라 호인가남녀(好人家男女)가 피저일반야호정매소착(被這一般野狐精魅所著)하야 변즉날괴(便卽捏怪)하니 할루생(瞎屢生)이여 색반전유일재(索飯錢有日在)로다
“그들은 문득 귀신을 보고 도깨비를 보며, 동쪽을 가리키고 서쪽을 구분하며, 맑은 것이 좋으니, 비 오는 것이 좋으니 한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모두 빚을 지고 염라대왕 앞에 가서 뜨거운 쇳덩이를 삼킬 날이 있을 것이다.
공연히 아무 탈 없는 집안의 남녀들에게 일종의 여우와 도깨비의 정령이 붙어 있다. 마치 멀쩡한 눈을 비벼서 괴상망측하게 허공에서 헛꽃을 보는 일과 같이 되었다. 이 눈멀고 어리석은 것들아. 밥값을 받을 날이 있을 것이다.”
달마스님께서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서 ‘관심일법(觀心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이다, 마음 하나 잘 살피는 것, 그것이 모든 수행을 다 포섭하고 있다’ 이렇게 크게 선언을 하셨다. 그 후로 선종에서는 그저 마음, 마음, 줄기차게 마음만을 노래했다.
사실이 맞다. 왜냐하면 마음이 근본이니까, 마음이 들지 않고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화엄경에서도 제가 자주 인용하는 봉행불교상섭심(奉行佛敎常攝心) 불교를 받들어 섬긴다고 하는 것은 항상 마음관리 잘하는 것이다, 그런 일면도 있다.
마음의 입장에서는 선종과 화엄경이 통한다. 다 맞다. 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하는 것도 화엄경의 가르침인데 그 입장에 있어서는 통한다.
그러나 선종에서는 오로지 마음 하나뿐이고, 화엄경 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니 하는 한마음의 문제가 극히 일부분이고, 화엄경 전체에서의 한 부분에 해당될 뿐이다. 그런 차이가 있다.
저에게 강의를 들으시는 분들은 잘 아실 것이다.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 이치다.
평상심이 도라고 했다. 도는 평상의 삶인 것이다. 그런 도를 위해서라면 아무런 조작이나 인위적인 꾸밈을 짓지 말라. 조작이나 꾸밈은 다 가짜다. 진실이 아니다. 생각해보라. 사람이 사는 일밖에 달리 무엇이 있는가. 도니 진리니 불법이니 하는 것은 모두가 이대로 사람이 사는 일이다. 평상의 삶이다.
그런데 여기에 아무도 모르는 머리 깎은 노예들이 있다. 그들은 이상한 불교를 배워가지고 있지도 않은 귀신이나 도깨비들을 보고 그것의 노예가 되어 있다. 자신을 저버리고 부처를 말하고 조사를 말하는 이들도 다 그와 같다.
자신을 저버리고 부처를 말하고 조사를 말하는 이들도 다 그와 같다.
또 불교를 말하면서 동쪽이 어떠니 서쪽이 어떠니 하는 일도 있다. 그리고 맑은 날 비 오는 날을 운운하는 괴상망측한 사람들도 많다. 관세음보살이 영험이 있느니, 지장보살이 영험이 있느니 한다. 무슨 산이 영험이 있느니, 무슨 섬이 영험이 있느니 한다. 이 진언이 좋으니, 저 다라니가 좋으니, 참선이 좋으니, 염불이 좋으니 한다. 간화선이 좋으니 묵조선이 좋으니 한다. 이 스님이 큰스님이니, 저 스님이 큰 도인이니 한다. 완전히 도깨비에 홀린 삶이다. 불교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라. 아니면 불교를 그만 두어라. 불교는 없다. 차라리 낮잠이나 늘어지게 자라.
임제록 불교, 선종 불교는 이렇다. 아주 단순하고 명쾌하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임제록 불교이고 선종불교라고 하는 것이다. 오늘날 선(禪) 선(禪) 하는 그 선종불교가 바로 이것이 큰 근본이고 큰 종지, 근본취지다.
사람이 일상의 삶을 버리고, 또 당당한 자기 자신을 버리고 밖으로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임제 스님은 그와 같다고 본다.
이런 일들은 모두 염라대왕 앞에 가서 뜨거운 쇳덩이를 삼킬 날이 있을 것이다. 공연히 아무 탈 없는 집안의 사람들에게 여우나 도깨비들의 정령이 붙어서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며 돌아다니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공연히 눈을 비벼서 허공에 꽃이 가득 피어 있는 것을 보는 사람과 같다고 본다. 야, 어리석고 눈 먼 자들아, 시주들의 밥값이나 갚아라.
이 어리석고 눈 먼 놈들아 시주들의 밥값이나 갚아라, 제가 임제록 강설을 한참 쓸 때, 벌써 오래됐지만, 임제록 강설을 한참 쓸 때 이 임제록불교에 도취해서 임제스님의 표현에서 더 플러스 해서 한 표현인데 맞장구를 더 잘 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상당히 오래된 강설인데 그렇다. 재미가 있다.
11 사조용(四照用)
시중운(示衆云), 아유시선조후용(我有時先照後用)하며
임제스님이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어느 때는 먼저 지혜로 비춰보고, 뒤에 작용을 하며”
네 가지 비추는 것과 작용 그 말이다. 마음으로 비춰보는 것이다. 지혜로 비춰보는 것, 그리고 거기에 작용을 표현하는 것이다.
유시선용후조(有時先用後照)하고유시조용동시(有時照用同時)하며 유시조용부동시(有時照用不同時)니라
“어느 때는 먼저 작용을 하고 나중에 비춰 본다. 어느 때는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며, 어느 때는 비춤과 작용이 동시가 아닐 때도 있다.”
그것을 부연해서
선조후용(先照後用)은 유인재(有人在)요
“먼저 지혜로 비추고 뒤에 작용하는 것은 사람이 있는 데 해당된다.”
사람이 있는 데 해당한다. 또 두 번째
선용후조(先用後照)는 유법재(有法在)요 조용동시(照用同時)는 구경부지우(駈耕夫之牛)하며 탈기인지식(奪飢人之食)이니 고골취수(敲骨取髓)하고 통하침추(痛下鍼錐)요
“먼저 작용을 하고 뒤에 비춰 보는 것은 법[대상]이 있는데 해당된다.
비춤과 작용이 동시인 경우에는 밭가는 농부의 소를 빼앗고, 굶주린 사람의 밥을 빼앗는 것처럼, 뼈를 두들겨 골수를 뽑아내고, 아픈 곳에 다시 바늘과 송곳으로 침을 꽂는 것이다. ”
그 다음에 네 번째
조용부동시(照用不同時)는 유문유답(有問有答)하며 입빈입주(立賓立主)하야 합수화니(合水和泥)하야 응기접물(應機接物)이니
“비춤과 작용이 동시가 아닐 때는, 물음이 있으면 답이 있고 손님[객관]도 세우고 주인[주관]도 세운다. 물에 합하고 진흙에 합하여 근기에 맞춰서 사람들을 제접한다.”
물에 합하고 진흙에 합한다. 이 말은 참 좋은 말이다. 타니대수(拖泥帶水)라고 해서 중생들의 근기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물에도 들어가고 진흙속에도 들어가서 그 진흙 속에 빠진 중생을 건지고 물에 빠진 중생을 건진다는 뜻이다.
약시과량인(若是過量人)인댄 향미거이전(向未擧已前)하야 요기변행(撩起便行)이라 유교사자(猶較些子)니라
“만약 뛰어난 사람[過量人]이라면 법을 거량하기 전에 떨치고 일어나 곧 가버린다. 그래야 조금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임제록 원문에 그렇게 되어 있다. 그것을 해설하기를
임제의 사조용이다. 이 내용은 없는 책도 있다. 서문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보면 있어야 옳다.
저의 견해다.
사람들을 대하여 깨우치고 법을 쓰는 경우에 이러한 네 가지 방법이 있다.
사람을 대하는 경우, 예를 들어서 장사를 한다. 그러면 가게에 어떤 사람이 물건을 사러 들어왔다, 라고 했을 때도 그때도 역시 네 가지 방법을 쓸 수가 있다, 하는 것이다. 거래하는 데도 그렇고, 대화를 하는 데도 그렇고 국가와 국가가 협상을 하는 데도 그렇고, 예를 들어서 큰 물건을 사고팔 때 흥정하는 관계도 역시 그렇다.
최상의 지혜를 일깨워 주려면 먼저 사람을 잘 관찰하는 지혜의 활동이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할을 하든지 방을 휘두르든지 하는 행동이 뒤따를 것이다. 그런 경우를 사람이 있는데 해당한다고 한다.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탈인(奪人) 탈경(奪境)
사람을 빼앗고, 경계를 빼앗는다. 빼앗는다는 말은 부정한다는 말이다. 사람을 부정하고 경계를 부정하는 경우는
부정하는 것으로 드러내고, 여기서는 긍정하는 방법으로 드러낸다. 표현은 달라도 뜻은 같다. 사람이 있다. 법이 있다. 라는 것은 사람은 주체적 사람, 법은 경계며 대상이다. 사람만 두기도 하고 법만 두기도 한다는 뜻이다. 요는 비춤과 작용이 동시인 경우[照用同時]가 문제다. 밭을 가는 농부의 소를 빼앗아 버리면 어쩌자는 것인가?
밭 가는 농부의 소를 빼앗아 버리면 농부는 어쩌라는 것인가.
굶주린 사람의 밥을 빼앗아 버리는 것은 또 어쩌자는 것인가?
굶주린 사람은 지금 밥이 꼭 필요한데 그것을 빼앗아 버린다? 의미심장한 내용이다.
뼈를 두들겨 골수를 뽑아내고, 아픈데다가 다시 바늘과 송곳으로 침을 꽂는 것은 또 어떤가? 위와 같은 상황들은 조용(照用)을 동시에 당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소낙비는 오는데 끌고 가던 소는 도망을 가고, 지고 있는 짐은 무거워 걸을 수 없는데 설사까지 났다.” 라는 우리들의 옛 말과 유사하다.
사람을 정신없이 만든다. 혼비백산이다. 그러나 그 그림이야말로 볼만한 가치가 있다.
비춤과 작용이 동시가 아닐 때[照用不同時]는 물음이 있으면 답이 있어서 매우 친절하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기 위해 물로 뛰어드는 노파심이다. 그래서 좀 뛰어난 근기들은 재미가 없어서 떨치고 가버린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고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이 단락에서는 이 말이 좋은 말이다. 합수화니 응기접물(合水和泥 應機接物).
물과 합하고 진흙과 합하고 근기를 응해서 중생을 제접한다. 합수화니 응기접물(合水和泥 應機接物) 합할 합(合)자 물 수(水)자 화합할 화(和)자에다가 진흙 니(泥)자 응기접물 근기에 응해서 사물을 접한다. 물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중생이다. 근기에 응해서 중생을 제접한다. 이것이 좋은 말이다, 라고 여기에서 소개를 했다. 이것이 아주 좋은 말이다.
다른 것 세 가지 경우는 또 법을 쓰는데 필요할 경우도 있지만 마지막 이것이 제일 사람들에게 해당되고 우리들이 이해하기도 쉬운 내용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오늘 임제록 법문 여기까지 한다.
*
오신 분들 한 번 쭉 살펴보겠다.
벌써 113명이나 동참하셨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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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성불하십시오.
첫댓글 _()()()_
演若達多失却頭ㅡ본래의 일을 알고 나면 더 이상의 착각은 없다.
평상심이 도, 아무런 조작이나 인위적인 꾸밈을 짓지 말라.
四照用ㅡ사람을 대하는 경우에 쓰는 네가지 방법. 일상에서도 적절히 사용하면 혼란과 시기가 없는 조화로운 삶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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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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