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정건이 사라지고 없는 집에 남은 진건은 열한 살 아이였고, 그해에 어머니를 잃었다. 나이 많은 첫째 ‧ 둘째 두 형은 진건이 태어난 이래 대구의 같은 집에서 동거한 적이 없고, 아버지는 쉰을 넘긴 중늙은이라 어린 막내아들과 따스한 교감을 나누기에 이미 늦은 나이였다.
다섯 살 많은 막내형수 윤덕경은 진건에게 친구이자 누나이기도 했고, 때로는 어머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5년을 지내다가 진건이 결혼을 했다. 윤덕경이,
“작은서방님, 조심 또 조심을 해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하고 배웅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도 그런 이력 때문이었다. 남편도 중국으로 가버리고 없는 상황에 친동생처럼 여겨온 시동생마저 또 상해로 떠난다니 그저 가슴이 먹먹하고 심장이 서늘하게 식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이제 두 살 아래의 22세 동서와 둘이서 이 집을 지켜야 한다.그런 심사 중에도 윤덕경은 진건에게 신신당부를 거듭한다.
“요즘은 예전보다도 훨씬 더 각별히 조심을 해야 한다는 것, 잘 아시죠, 작은서방님?”
대구은행 사건을 말하는 줄 진건도 익히 짐작한다. 작년 12월 어느 토요일, 대구은행 출납계 주임 이종암이 공금 1만500원을 불법 인출하여 종적을 감추었다. 이 일은 두 가지 측면에서 대구 사회를 뒤집어 놓았는데, 하나는 독립운동 군자금으로 돈을 가져갔다는 점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종암이 은행 두취 정재학의 처조카라는 점에서였다.
“항상 일본인 행세를 해야 됩니다. 불가피하게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밝혀야 하는 경우에도 절대 대구 사람이라고 해서는 안 되어요. 이종암 지사가 군자금을 들고 대구를 벗어날 때 대구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지 않고, 일제가 예상하지 못하는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었다고 해요. 이종암 지사가 일제 경찰보다 한 수 위였던 것이지요.
결국 일제는 이종암 지사를 아직도 체포하지 못했고, 그 바람에 국경 일대는 물론 방방곡곡에서 대구 말을 쓰는 청년이면 조금만 수상해도 무조건 끌고 가서 고문을 한답니다. 그러니 조심, 또 조심하셔야 해요. 아시겠지요? 보성고보 다닌 이력도 있으니 서울말투도 조금은 흉내낼 줄 아시잖아요?”
진건은 본래 이종암을 알았다. 부산상업학교를 중퇴한 후 대구은행에 취직한 이종암은 형 정건보다 네 살 연하로, 현경운이 셋째 ‧ 넷째 두 아들을 취학시켰던 북재서당에도 다녔는데, 그 서당으로 치면 정건의 4년 후배이자 진건의 4년 선배였다.
게다가 대구은행 본점 건물은 현진건의 계산동 집과 이상정 ‧ 상화 ‧ 상백 형제의 서문로 집 중간쯤에 있어서 매우 가까웠다. 이종암의 서상동 집도 친일파 대구부사 박중양이 대구읍성을 철거하기 직전까지는 성벽에 붙어 있었던 까닭에 이상화네 집과 지척이었다.
진건과 상화는 대구은행 앞을 지나치는 일이 많았다. 작년 여름 《거화》를 만드는 일로 한창 그 일대를 오가고 있던 중에 이종암이 길 가는 진건을 불렀다. 진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가니 종암이 봉투에 싼 무슨 책을 한 권 주었다.
“이게 무엇인가요?”
“내가 부산상업학교 다닐 때 한두 해 선배들이 ‘구세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하면서 교육자료로 활용했던 《동국역사》야. 1899년에 학부에서 발간한 소학교용 국사 교과서인데, 왜놈들이 모두 압수해서 불태웠기 때문에 복제를 해서 썼지. 요즘은 구하기가 무척 힘들지.”
‘그랬던 이종암 형인데 … 무사히 만주로 건너간 걸까? 그 형을 붙잡으려고 대구에서 신의주까지 역마다 어마어마한 검문검색이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던데….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했으니, 피체 소식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길 수밖에….’
다시 기적소리가 울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