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길을 막다
/이원규(시인/ 2004년 생명평화탁발순례단 총괄팀장)
먼길을 걸어보면 알리라
길이 오히려 길을 막고 있다는 것을
오래 걸어본 자는 알게 되리라
고속질주의 차도에 사람의 길이 막히고
사람의 길에 야생동물의 길이 막히고 있다는 것을
그대의 마을까지
걷고 걸어서 가려면 위험천만
먼저 목숨부터 내놓아야 하나니
그대 또한 내게로 오는 길이
그러하고 그러하리라는 것을
허공의 새들에게도 길이 있고
물속의 고기들에게도 길이 있듯이
무심한 바람에게도 길이 있어
아무 절에나 들어가 아무 풍경을 울리지 않고
지상의 수많은 별들이 떠올라도
아무 십자가 위로 떠오르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달마다 천 리 길
해마다 만 리 길을 걸어보면 알리라
길이 없는 곳에 길이 있고
종교가 없는 곳에 종교가 있고
농민과 아이들이 없는 곳에 농촌이 있고
정치인이 없는 곳에 국회가 있고
대통령이 없는 곳에 청와대가 있다는 것을
고속도로에 당산나무가 쓰러지고
골프장 그린 홀 속에 조상들의 무덤이 있고
대형 댐의 깊은 물속에 살구꽃 지는 고향이 있나니
길이 길을 막아
그 길 위에서 목놓아 우는 이들이
어찌 생명평화의 탁발순례단뿐이랴
밥을 주면 밥을 먹고
돌을 던지면 돌을 맞는 순례단이
지치고 아플 때마다
손짓하는 여인이 있었으니
밤마다 머리맡에 다가앉아 우는 여인이 있었으니
노고단의 마고선녀신가
백록담의 설문대 할망이신가
여전히 맨발의 어머님이신가
마침내 걷고 걸어서
일체원융의 동그라미를 그렸나니
지리산에 그 둘레가 1천5백리인
거대한 동그라미 하나 그리고
다시 한라산에 1천리 동그라미를 그렸나니
무시(無始)의 먼길을 걸어보면 알리라
길이 길을 막는 게 아니라
길이 길을 부르고 있었다는 것을
무종(無終)의 오랜 길을 걸어보면 알게 되리라
한걸음 또 한걸음
이보다 더 빠른 길은 이승에 없나니
발바닥이 곧 날개였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