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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0월 19일 토요일
[(녹)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홍]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사제, 성 이사악 조그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또는
[백] 십자가의 성 바오로 사제 또는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만물 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그분의 몸인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1,15-23
형제 여러분,
15 나는 주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전해 듣고,
16 기도 중에 여러분을 기억하며
여러분 때문에 끊임없이 감사를 드립니다.
17 그 기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18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
19 또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
20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21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과 주권 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22 또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8-1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9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10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11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12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루카 12,11) 끌려가게 된다면 미리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 보니, 예수님 시대에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것이 지금보다 훨씬 위험하고 어려웠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당’을 말하는 것은, 아직 로마인들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기 전에도 유다인 출신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은 회당에서 쫓겨나고 박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도 가셨고 예루살렘 성전에도 가셨으며, 사도행전에는 사도들이 성전에 기도하러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그리스도인들은 유다교 회당과는 분리되고 배척을 받습니다. 로마의 박해도 곧 다가옵니다. 복음서가 작성되고 나서 이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교회는 박해를 받았고,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곧 목숨을 내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순교자들을 기억하여 봅니다. 그들이 잡혀갈 때, 무슨 말을 할지 염려하였을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그들은 세례를 받는 순간부터 이미 순교를 각오한 것이었고,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가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신앙을 당당하게 증언할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그들은 살아남고자 할 말을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을 고백하고, 그것도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려고 애쓰기보다 지극히 단순하게 목숨을 내놓음으로써 신앙을 고백하고 죽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할지 염려한다면, 그것은 순교자들만큼 우리의 신앙이 절실하지 않으며 우리가 목숨을 보전하고자 전전긍긍하기 때문입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우리를 파견하시지만, 절대로 홀로 보내지 않으시는 주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는 한때 정말이지 세상 소심하고 근심 걱정이 많던 사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쫄보였습니다. 대범한 사람 보면 그렇게 부러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늘 삶에 여유가 없고 팍팍했습니다. 인생이 늘 우울하고 울적했고, 긴장과 초조의 연속이었습니다.
날씨가 흐리면 흐리다고 걱정,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걱정, 시험 잘 못 볼까봐, 걱정, 만남의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걱정, 혹시라도 내 꿈이 좌절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 그리고 어떤 날은 걱정이 없어서 걱정, 특히 남 앞에 설 때, 뭔가를 발표해야 할 때, 근심 걱정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목숨이 아홉 있다는 고양이조차도 근심 때문에 죽는다.’는 속담이 남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근심 걱정의 연속이었던 어느 잔뜩 흐리고 우울한 날,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세수를 하다가, 세면대 거울을 들여다봤는데, 정말이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나이보다 열살은 더 들어 보이는 아주 낯선 제 얼굴이 거기 들어 있었습니다.
요즘은 정말이지 많이 변했습니다. 웬만한 일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큰일이 생겨도 ‘하늘 아래 별의 별 일이 다 생기는 거 당연하지.’ 하며 흘려버립니다. 수백 명 청중 앞에서도 그럭저럭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말씀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성령이심을 굳게 믿고 그분께 맡기니 그런 것 같습니다.
물론 직무상 갖게 되는 작은 근심 걱정이 없지는 않습니다. 이번에 오시는 분들 식사 메뉴는 어떤 걸로 해야 하나 하는 걱정 정도, 어떤 때는 식사며 침실이며, 준비가 하나도 안 되었는데, 이백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버스 다섯 대로 밀고 올라오는 꿈도 꾸다가 깨어나서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합니다.
오늘도 많은 분들이 한 보따리 걱정을 이고 지고 살아갑니다.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겠는가?’ ‘혹시라도 사람들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어쩌지?’ ‘나는 말주변이 없는데’ ‘나는 체력이 약한데’ ‘나는 남들 앞에 서면 완전히 쫄아 드는데’
이런 우리를 향해 세상 자상하신 예수님께서는 달래듯이 타이르듯이 말씀을 건네십니다.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다.”(루카 12,11~12)
우리를 파견하시지만, 절대로 홀로 보내시는 주님이 아닙니다. 든든한 동반자, 강력한 협조자, 하느님의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걸어가십니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의식, 내 뒤에 그분께서 받쳐주고 계신다는 생각, 그분께서 지속적으로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이야말로 복음 선포자가 지녀야 할 최우선적인 마음 자세입니다.
우리가 비록 나약하지만, 성령께서 함께하시니 강건합니다. 우리가 비록 무지하지만, 성령께서 함께하시니 지혜롭습니다. 우리가 비록 죄인이지만 성령께서 함께하시니 성스럽습니다. 우리가 비록 죽음을 향해 걸어가지만, 성령께서 함께하시니 영원히 살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이런 질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닭이 먼저입니까? 계란이 먼저입니까?’ 생물학적으로는 밝힐 수 있는 문제이지만 그 질문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소중한 존재임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도 가끔 합니다. ‘엄마가 좋으니, 아빠가 좋으니!’ 아이들은 이런 질문을 받으면 순간 당황할 것입니다. 엄마가 곁에 있으면 엄마가 좋다고 할 수 있고, 아빠와 함께 있으면 아빠가 좋다고 할 수 있고, 엄마와 아빠가 같이 있으면 엄마와 아빠 모두 좋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분법’이라는 사고에 익숙해 있습니다. 낮과 밤이 있고, 선과 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자와 가난한 이가 있고, 건강한 이와 아픈 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분법적인 사고는 사물을 이해하기 쉽고, 정의 내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분법적인 사고는 나와 상대를 가를 수 있고, 적과 아군을 나눌 수 있고, 때로 분열과 갈등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기준은 하느님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같은 병원에 두 명의 환자가 있었습니다. 두 명의 환자는 모두 현대의 의학으로는 치료하기 힘든 질병을 얻었습니다. 한 명은 ‘에이즈’였습니다. 다른 한 명은 ‘말기 암’이었습니다. 하지만 병을 대하는 태도는 서로 달랐습니다. 에이즈에 걸린 환자는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젊어서 방탕한 생활을 하였고, 하느님께서 그런 나에게 벌을 주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한 환자는 세상이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하루하루가 근심과 걱정이었고, 사람들을 피하였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가둬둔 체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말기 암에 걸린 사람은 다르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동안 건강을 주셨던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암이란 병이 생겼기 때문에 삶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고 감사하였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면 환하게 웃었고, 자신보다 더 아픈 환자들을 위로하였습니다. 편안하게 삶을 정리하였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지하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15년 전의 일입니다. 칠레의 산호세 광산에서 구조작업이 있었습니다. 600미터 깊이의 지하 갱도에서 69일간 갇혀있던 33명의 광부가 구조되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이 될 수 있었던 어두운 지하에서 구조된 광부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칠레의 정부와 국민은 모두 한마음이 되어서 구조되는 광부들을 환영하고 기뻐하였습니다. 구조된 광부의 말이 제게는 큰 감동이었습니다. ‘우리는 33명이었지만 우리에게는 또 다른 분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34명이 함께 있었습니다. 또 다른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은 굶주림을 이길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지켜주신다는 믿음은 어두운 갱도에서 희망을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도와주시기에 69일은 마치 하룻밤과도 같을 수 있었습니다. 광부들은 어두운 지하에서 구조될 때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먼저 올라가십시오. 저는 나중에 올라가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어두운 지하에서 69일을 견딜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 알려 주실 것이다.” 칠레의 광부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시련과 고난 앞에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저의 모습과는 다른 삶입니다. 신앙생활은 먼 미래를 위한 선택이 아닙니다. 신앙은 지금 이곳에서 나의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변화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기뻐하십니다. 하느님의 기쁨은 바로 우리들의 변화입니다. 고독과 절망 속에서 희망의 빛을 보는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사랑>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루카 12,8)
당신이
모든 사람들의
눈길 밖에서
외로워할 때에
홀로라도 따스한
눈길 보내는 것이
사랑입니다
당신이
뭇사람들의
비난과 손가락질에
비틀거릴 때에
그 사람들 바로 앞에서
당신을 품는 것이
사랑입니다
당신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목숨을 이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일 때
당신을 안다고
고백하며 죽는 것이
사랑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 요한 드 브레뵈프(John de Brebeuf)
신분: 선교사, 순교자
활동지역: 캐나다(Canada)
활동연도: 1593-1649
같은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프랑스 노르망디(Normandie)의 콩데(Conde)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성 요한(Joannes)은 어려서부터 사제가 되길 원하였다.
그러나 사제직을 감당해 낼 수 있을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몸이 약하였다.
하지만 그는 1617년에 루앙(Rouen)의 예수회에 입회하여 1615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선교사를 지원하여 캐나다 퀘벡 주로 떠났으며, 주로 인디언 휴런족(Huron)이 많이 거주하는 동부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캐나다로 온 이후 그는 인디언들 사이에서 34년 동안이나 전교활동을 개척한 유명한 선교사가 되었다.
그의 고초는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1629년 영국인들이 퀘벡을 점령하고 예수회원들을 몰아낼 때 그도 쫓겨나서 하는 수 없이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1633년 다시 캐나다로 돌아와 같은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1637년 천연두가 만연하여 수천 명의 인디언들이 사망한 사건이 벌어졌는데, 선교사들이 재앙을 몰고 온 악마로 간주되어 인디언 마술사들로부터 큰 곤욕을 치렀다.
하지만 요한은 그 와중에도 인디언들 곁을 떠나지 않고 1640년까지 함께 거주하였다.
그가 잠시 퀘벡으로 갔다가 다시 인디언 부락으로 왔을 때, 프랑스와 가장 적대적이던 이로쿼이(Iroquois) 인디언들로부터 체포당하여 처참하게 살해당하였다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사제와 동료 순교자
캐나다와 미국에서 후론족과 이로케족 인디언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하고 있던 8명의 예수회 회원들은 1642년과 1649년 사이에 잔인한 고초를 당한 후 순교했다.
그중에 이사악 조게스는 1647년 10월 18일에 순교했고 요한 드브레뵈프는 1648년 3월 16일에 순교했다.
프랑스 노르망디의 콩데-쉬르-비르에서 태어난 요한 드브레뵈프은 카앙 근교에서 대학교를 다녔지만, 그의 양친은 가나한 농부였다.
그는 1617년에 루앙의 예수회에 입회했고, 1622년에 사제로 서품되자 지원하여 캐나다 선교사로 길을 떠난 후로는 캐나다와 미국에서 후론족과 이로케족 인디언들 사이에서 24년동안이나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한 유명한 선교사가 되었다.
그의 고초는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1629년, 영국인들이 퀘백을 점령하고 예수회원들을 몰아낼때 그도 쫓겨 나자 하는 수 없이 프랑스로 돌아왔으나, 1633년에 재차 선교사의 길에 올랐다.
1637년, 천연두가 만연되어 수천 명의 인디언들이 죽게 되자, 선교사들은 재앙을 몰고 온 악마라고 간주되어 그 부족의 마술사들로부터 큰 곤욕을 치루었지만, 그는 1640년까지 인디언들과 함께 거주했다
그는 잠시 퀘백으로 갔다가 다시 인디언 부락으로 왔을 때 프랑스의 가장 적대적이었던 이로케족 인디언들로부터 동료 8명과 함게 체포당하여 1642년과 1649년 사이에 잔인한 고초를 당한 후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가 보인 용기와 성덕은 수많은 인디언들을 감동시켜 그가 죽고난 후에도 약 7천명의 인디언 개종자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그는 후론족의 사전과 교리서를 만들었다.
그중에 이사악 조게스는 1647년 10월 18일에 순교했고 요한 드 브레뵈프는 1648년 3월 16일에 순교했다.
그들은 1930년에 시성되었다.
그들의 신앙과 영웅적인 삶은 북아메리카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믿음을 깊이 심어 주었으며, 북아메리카 교회는 순교자들이 흘린 피로써 일어난 것입니다
성 바오로(십자가의)(Paul of the Cross)
활동년도 : 1694-1775년
신분 : 신부, 설립자
지역 :
같은 이름 :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파울로, 파울루스, 폴
이탈리아의 오바다(Ovada) 태생인 성 바오로 프란치스코 다네이(Paolo Francesco Danei)는 몰락한 어느 귀족의 맏이로 태어났고, 부모의 신앙 유산을 물려받은 탓인지 15세 때에 이미 카스텔라초의 자기 집에서 엄격한 고행과 보속을 행하였다. 1714년 그는 터키인들과 싸우는 베네치아(Venezia) 공국의 군대에 입대하였으나, 기도와 보속생활에 이끌려 명예 제대를 하고 귀향하였다.
그는 결혼도 마다하면서 몇 해를 은거하던 중 1720년에 예수의 성명과 흰 십자가가 그려진 고난의 문장을 검은 옷에 단 성모님의 환시를 보았는데, 이때 그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설교하는 수도회 설립을 명하셨다고 한다. 그의 환시가 올바른 사실임을 인정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부터 수도회 설립에 관한 허가를 받게 된 바오로(Paulus)는 40일간의 피정을 통하여 회칙 초안을 마련하였다. 그는 자기 동생인 요한 밥티스타와 함께 로마(Roma)로 가서 교황청의 허가를 신청하였다. 처음에는 거절당하였으나 1725년의 방문에서는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로부터 수련자를 받아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1727년에는 자신이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들은 몬테 아르젠타리오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처음에는 규칙이 너무 엄격했던 탓으로 많은 수련자를 잃었다고 한다. 1737년에는 첫 수도원의 문을 열었고, 1741년에는 교황 베네딕투스 14세로부터 개정 회칙을 승인받았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십자가와 고난의 맨발 성직 수도회'(예수 고난회)가 전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바오로는 자신의 뜻과는 달리 초대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탈리아 전역을 누비며 선교 여행을 하였고, 그의 설교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여 만인의 심금을 울렸다. 또한 그는 초자연적인 은혜로써 축복을 내렸고, 치유의 기적과 원거리에서 동시에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기적 등이 나타났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설교가였다. 그는 예수 고난회의 최종 승인을 1769년 교황 클레멘스 14세(Clemens XIV)로부터 받았다. 또한 그의 노력에 의하여 여자 수도회 수녀들이 코르네토에 첫 수도원을 갖게 되었다. 그는 3년 동안의 병고로 고생하다가 1775년 10월 18일 로마에서 운명하였고, 1867년 비오 9세(Pius IX)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녀 클레오파트라 (Cleopatra)
활동년도 : +4세기경
신분 : 과부
지역 : 시리아(Syria)
같은 이름 : 글레오빠뜨라, 글레오파트라
막시미누스 황제 치하의 박해 때 순교한 성 바루스(Varus, 10월 19일)의 유해는 클레오파트라라는 어느 신자 과부에 의하여 털로 만든 가마니에 숨겨서 아드라하로 옮겨졌다. 그곳에는 성녀 클레오파트라를 비롯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았으므로 그들은 순교자의 무덤을 중심으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성녀의 아들 요한(Joannes)이 군인이 되었을 때 그녀는 성 바루스를 공경하는 대성당을 짓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 성당을 완공한 날에 그 아들이 갑자기 병을 얻어 죽어버렸다. 그녀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몸부림치다가 하느님께 당신의 외아들을 살려주십사고 늘 기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꿈에 성 바루스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이 내게 보여 준 사랑을 내가 잊은 듯싶은가? 내가 그대의 아들을 살려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지 않은 듯 보이는가? 보라. 이제 그 응답이 왔다. 그는 이제 기력을 되찾았다.” 성녀는 “이제 만족합니다. 그러나 나도 이제 성인과 내 아들과 함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자, “안 된다. 나는 네 아들과 함께 있어야 하니 좀 더 기다리면 우리가 영접할 것이다." 하고 성인이 대답하였다. 꿈에서 깨어난 성녀는 지금까지의 모든 슬픔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녀는 오로지 순교자에 대한 사랑으로 여생을 살다가 운명하였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성 바루스와 아들 요한 곁의 대성당에 안장하여 공경해 왔다.
성 필립보 하워드(Philip Howard)
활동년도 : +1595년
신분 : 순교자
지역 : 영국(UK)
같은 이름 : 비리버, 필리뽀, 필리뿌스, 필리포, 필리포스, 필리푸스, 필립, 필립부스, 필립뽀, 필립뿌스, 필립포, 필립푸스
영국 잉글랜드(England) 동부 노퍽(Norfolk)의 네 번째 공작인 토마스 하워드(Thomas Howard)는 1572년에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명에 의하여 참수를 당하였기 때문에 그의 아들 성 필리푸스 하워드(Philippus Howard, 또는 필립보 하워드)는 노퍽의 공작 지위를 계승하지 못하였다. 그는 12세 때에 데크르(Dacre) 경의 딸 앤(Anne)과 결혼하였다. 그가 엘리자베스 여왕의 궁전으로 갔을 때, 그는 더 이상 당할 수 없는 모욕과 고통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여왕의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아내를 무시하고 또 여왕의 환심을 사려고도 노력하였으나, 런던탑의 끔찍한 이야기를 듣고는 다시 아내와 결합하고 또 예수회원인 윌리엄 웨스턴 신부의 도움으로 교회와 화해하였다.
그는 이 사건으로 재차 투옥되었다. 그래서 그는 가족들을 플랑드르(Flandre) 지방으로 피신시키고 여왕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필리푸스 하워드는 결국 38세의 일기로 순교했는데, 10여 년 이상을 감옥에서 지냈다. 그의 개종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행위였고, 틈만 나면 신심서적들을 저술하거나 번역하여 영국내의 가톨릭 운동에 기여했다. 그는 일주일에 3일씩 단식함으로써 건강이 좋지 못하였으며 매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기도를 바친 열심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1970년 10월 25일 잉글랜드와 웨일스(Wales)의 40명의 순교자 중 한 명으로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안토니오 다니엘 (Anthony Daniel)
활동년도 : 1601-1648년
신분 : 선교사, 순교자
지역 : 캐나다(Canada)
같은 이름 : 대니얼, 안또니오, 안또니우스, 안소니, 안토니우스, 앤서니, 앤소니, 앤터니, 안당
프랑스 디프 태생인 성 안토니우스 다니엘(Antonius Daniel, 또는 안토니오)은 처음에 법학을 공부하였으나 곧 이를 포기하고 1621년 루앙(Rouen)의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4년 동안 가르치면서 동시에 신학을 공부하여 1630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잠시 외(Yeu)의 대학교에 봉직하다가 다른 세 명의 사제와 함께 케이프 브리턴 섬과 아르카디아, 뉴프랑스(New France, 캐나다)의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1년 후에 그는 다시 퀘벡으로 갔다.
그는 휴런족(Huron) 인디언들과의 선교활동이 대성공을 거두자, 인디언 아동들을 위한 학교를 퀘벡에 세웠다. 그러나 휴런족과 늘 적대관계에 있던 이로쿼이족(Iroquois)들에 의하여 순교하였다. 때는 1648년 7월 4일이었고, 온타리오주(Ontario) 힐스데일 근교의 테노스테이의 인디언 마을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다니엘은 캐나다에서 순교한 동료 예수회원 7명과 함께 1930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그들은 캐나다의 수호성인들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성 베드로 (Peter)
활동년도 : 1499-1562년
신분 : 신부, 신비가
지역 : 알칸타라(Alcantara)
같은 이름 :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에스파냐 중서부 에스트레마두라(Extremadura)의 알칸타라 지방장관의 아들로 태어난 성 베드로 가라비토(Petrus Garavito)는 살라망카(Salamanca)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고, 16세 때에 만하레테스(Manxarretes)에 있는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엄격한 보속 생활을 실시하던 중에 바다호스(Badajoz)로 파견되었고, 1524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에스트레마두라 지방에서 설교하면서, 로브레딜로(Robredillo), 플라센시아(Plasencia), 라파(Lapa) 그리고 에스트레마두라 수도원의 원장으로 봉사하였으며, 라파 수도원을 봉쇄수도원으로 요청하여 허가를 받기도 하였다. 또 한때 그는 궁중의 전속사제로 일하다가 1538년에는 관구장이 되었다. 그는 다소 엄격한 규칙을 만들었는데, 그것을 관구 총회에서 통과시키지 못하자 관구장직을 사임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리스본(Lisbon) 교외 아라비다(Arabida) 산에서 성 마리아의 마르티누스 수도원의 형제들과 함께 은수자 생활을 시작했는데, 수많은 수도자들이 그들의 생활에 매력을 느끼고 따르려고 하였다. 관구 내에서 자신의 규칙이 통과되지 못하자 그는 코리아(Coria) 교구의 주교로부터 승인을 얻은 후 새 수도원을 세울 허가를 교황 율리우스 3세(Julius III)로부터 받았다. 이것이 바로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의 프란치스코회의 시작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다른 수도원들도 그의 규칙을 받아들임으로써 결국 1561년에는 성 요셉 관구가 설립되었는데, 많은 반대를 물리치고 콘벤투알 프란치스코회의 관할 아래 두게 되었다.
1560년 그는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Teresa of Avila, 10월 15일)를 만나서 그의 고해신부 겸 상담자가 되었으며, 카르멜 개혁운동을 격려하였다. 그는 “기도와 묵상론”을 썼는데, 이것이 후일 성 프란치스코 드 살(Franciscus de Sales, 1월 24일)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1562년 에스트레마두라에서 사망하였고, 1622년 4월 18일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Gregorius XV)에 의해 시복된 후 1669년 4월 28일 교황 클레멘스 9세(Clemens IX)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리고 그는 1862년부터 브라질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는 위대한 신비가였다.
성 르네 구필 (Rene Goupil)
활동년도 : 1606-1642년
신분 : 선교사, 순교자
지역 : 캐나다(Canada)
같은 이름 : 레나또, 레나뚜스, 레나토, 레나투스
프랑스의 앙주(Anjou)에서 태어난 성 르네 구필은 예수회에 입회하였으나 건강 때문에 수도원을 떠나야만 했다. 그 후 그는 완쾌되어 캐나다의 퀘벡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다른 예수회의 선교사와 합류하였다. 그는 휴런족(Huron) 인디언 선교단의 평신도 보조자가 되어 봉사하기 시작하였다. 1642년에 성 이사악 조그와 함께 여행하던 중에 이로쿼이족(Iroquois) 인디언들의 포로가 되어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캐나다에서 순교한 7명의 동료 예수회원들과 함께 1930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그들은 캐나다의 수호성인들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성 르네 구필은 레나투스 구필(Renatus Goupil, 또는 레나토 구필)로도 불린다.
성 가브리엘 랄르망 (Gabriel Lalemant)
활동년도 : 1610-1649년
신분 : 선교사, 순교자
지역 : 캐나다(Canada)
같은 이름 : 가별, 랄러망
성 가브리엘 랄르망은 1630년에 예수회원이 되어 외국 선교에 헌신하였으나 건강은 늘 좋지 못하였다. 2년 동안 캐나다 퀘벡에서 사목한 후 그는 성 요한 드 브레뵈프(Joannes de Brebeuf)와 합류하여 인디언 휴런족(Huron) 선교에 나섰다. 그곳에서 6개월 정도 활동할 즈음에 이로쿼이족(Iroquois)의 습격을 받아 2명의 사제가 포로가 되어 생 이나스까지 호송되었다.
여기서 그들은 몸서리치는 고문을 받았는데 브레뵈프 신부는 몇 시간 내에 운명하였으나, 아주 묘하게도 가브리엘 랄르망 신부는 그날 밤은 넘겼지만 결국은 살해되고 말았다. 랄르망 신부는 캐나다에서 순교한 7명의 동료 예수회원들과 함께 1930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그들은 캐나다의 수호성인들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성 가롤로 가르니에 (Charles Garnier)
활동년도 : 1606-1649년
신분 : 선교사, 순교자
지역 : 캐나다(Canada)
같은 이름 : 가니엘, 가롤루스, 까롤로, 까롤루스, 샤를, 찰스, 카롤로, 카롤루스, 칼
성 카롤루스 가르니에(Carolus Garnier, 또는 가롤로)는 예수회 사제로 서품된 후에 인디안 사목을 위하여 캐나다의 퀘벡으로 갔다. 1649년 그가 정착해 있던 휴런족(Huron) 인디언 마을이 적대적인 이로쿼이족(Iroquois) 인디언들의 공격을 받자, 그는 그들을 도망가도록 하다가 총을 맞고 쓰러졌다. 그러나 그는 있는 힘을 다하여 기어가다가 전투용 도끼를 맞고 절명하였다. 가르니에 신부의 장상은 그를 이렇게 말하였다. “웃으면서 선을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가르니에 신부는 캐나다에서 순교한 7명의 동료 예수회원들과 함께 1930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그들은 캐나다의 수호성인들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성 노엘 샤바넬 (Noel Chabanel)
활동년도 : 1613-1649년
신분 : 선교사, 순교자
지역 : 캐나다(Canada)
같은 이름:
프랑스의 망드 근교에서 출생한 성 노엘 샤바넬(또는 나탈리스 샤바넬, Natalis Chabanel)은 1630년에 예수회에 입회하였으며, 1643년에 캐나다 뉴 프랑스의 휴론(Huron) 인디언들의 선교사로 떠났다. 그는 에타리타의 인디언 마을에서 성 카롤루스 가르니엘(Carolus Garnier) 신부의 보좌로 활동하다가, 이웃 마을인 생트 마리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느 배교자 인디언에 의하여 무참히 살해되었다. 노엘 샤바넬은 캐나다에서 순교한 7명의 동료 예수회원들과 함께 1930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성되었고, 그들은 캐나다의 수호성인들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