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교 편, 『호열랄병예방주의서』, 1902년 6월.
1901-02년 중부지방에 비가 오지 않아 대기근이 덮쳤다. 윤치호는 1902년 11월 22일 자 일기에 “모든 한국인들이 이 해가 현 왕조의 마지막 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라고 적었다. 사람들은 하와이 이민 붐에 너도나도 떠나거나 화전민이 되거나 각설이가 되었다. 가뭄과 역병으로 대한제국은 파산했다. 일진회와 천도교 등 여러 집단이 종말론적 대안을 제시했으나, 한국은 안으로부터 무너졌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역병은 더 기승을 부렸다. 어느 쪽으로 보아도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조약에 반대할 힘이 없었다.
이때 교회에서는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기근과 전염병으로 무너지는 사회에서, 개신교는 한국의 신종교 운동으로 대안적 공동체를 제시했다. 진공 상태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난 게 아니다. 시대 상황을 알면 1903-07년 대부흥 운동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
1910-11년 만주 폐렴 흑사병
지금의 코로나바이러스 폐렴과 비슷한 신종 폐렴이 만주에서 발생하여 수만 명이 사망했다. 케임브리지 출신 중국인 의학자 오연덕(伍連㯖, Wu, Liande 1879~1960)은 이 전염병이 기침, 재채기, 대화할 때 공기 속에 흩어져 있는 병원체로 감염되는 폐 페스트이며, 그 매개체도 쥐나 쥐벼룩이 아니라, 산속 바위틈이나 평지에 굴을 파고 사는 마르모트라고 주장했다. 마르모트 가죽이 피혁 시장에서 인기를 끌자 너도나도 마르모트 사냥에 나섰는데, 이 과정에서 악성 페스트가 사냥꾼을 통해 전파되었다.
1910년 10월에 발생해 11월에 하얼빈으로 번진 후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만주에서 전염병은 늘 겨울에 발생했는데, 이는 추운 지방이라 겨울에는 실내 생활만 하면서 비위생적인 좁은 공간에 모여 지냈기 때문이었다. 간도 지역에는 한국인도 많아 한국인 피해도 적지 않았다. 만리장성을 넘느냐, 압록강을 넘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였는데, 다행히 북경이나 서울로 확산되지 않았다. 압록강-두만강 경계를 철저히 방어한 결과 페스트가 한반도로 넘어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염병 유행은 언제나 정치적 결과를 초래한다.
이 페스트 유행으로 위생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다. 그러나 1910년만 해도 세균의 전염이라는 세균론(germ theory)은 만주인들에게 인식·수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만주 정부는 환자의 기침을 통한 공기 전파와 면역이 약한 노약자들이 걸리는 것으로 소책자를 발행하고, 침술과 웅담과 어린아이의 소변을 먹고 면역력을 강화하면 예방하거나 치료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마르모트 유통을 금하고 감염자 시신을 장례 없이 바로 소각하면서 페스트가 잡혀나갔다.
일본은 이 일을 그들의 위생 정치의 승리로 선전하면서 조선 식민지 통치를 더욱 정당화하였다. 한국인은 이 선전에 대항할 다른 담화를 만들 수 없었다. 일본 정부와 경찰의 한국인 통제, 감시, 격리가 일반화되고 수용되었다. 일제의 경찰 정치, 무단 정치가 자리 잡았다.
무오년(1918) 독감으로 14만 명 사망
1918년 스페인 독감(Spanish flu) 유행 때, 한국에서도 “무오 독감”으로 약 14만 명이 사망했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의하면 당시 조선인 1,678만 3,510명 중 절반에 가까운 742만 2,113명(44%)이 감염되어 13만 9,128명(전체 감염자의 1.87%, 전체 인구의 0.83%)이 희생되었다.
이 ‘지독한 돌림 감기’ 때문에 간호원들이 병원을 떠나면서 간호원이 동이 났고, 그들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가 되었다. 당시 면허받은 졸업 간호사는 전국에 90명 정도로 대개 일본인이었고, 일반 조선인 간호원은 대개 보조 간호원으로 300명이 더 있었다. 일본인이나 부자들만 비싸고 좋은 병실에서 간호를 받고, 가난한 한국인은 근대 의료와 간호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1920-21년 만주 하얼빈에서 페스트가 재발하여 3,125명이 사망했고 그해 만주에서 9,300명이 죽었다. 삼일운동 후 핍박을 받은 만주 한인들은 전염병 유행으로 다시 한번 큰 타격을 입고, 독립운동도 지지부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