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류무사 267 균현으로
다음날 세 사람이 다시 만났지만 둘 사이에 흐르는 썰렁한 공기 때
무에 하운만 안절부절못했다.
북궁단야의 눈이 먼 산을 향해 있는 거야 어제의 대화로 이해할 수
있지만 땅바닥에서 뭐 주워 먹을 거라도 찾는 참새마냥 머리를 처박고
있는 장추삼을 보자니 난감할 따름이었다.
'으이구, 한 사람이 좀 져주면 될걸.'
물론 둘은 절대 질 용의가 없었다.
"굳이 개봉까지 갈 건 없을 듯하고... 어디부터 갈까요?"
"하 형 마음대로."
"발길 닿는 대로."
'끄응.'
하 형 마음대로, 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네 발길 닿는 대로, 라
니!
'역시 밉상이야.'
북궁단야와 혼연일체되는 순간이다.
"험험! 그렇게 추상적으로 말하면 안 되잖소. 단초를 제공한 사람이
라면 특히나 말이오."
장추삼이 고개도 들지 않고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모이 수준이 아니
라 돈이라도 잃어버렸나 보다.
"단초를 제공했으니까 나머지 부분은 나머지 사람들이 생각을 해야
지. 내가 다 하면 재미없잖아."
나머지 사람들이 되어버린 둘의 얼굴에 고요한 분노가 깔렸지만 장
추삼은 털레털레 걸음을 옮겼다.
"북궁 형의 생각은 어떻소?"
"글쎄........"
인상을 구기던 그가 장추삼을 바라보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성큼 한
발 떼었다.
"이봐, 장추삼."
"음?"
순간 장추삼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북궁단야와 만난 지 벌써
사 개월여가 흘렀지만 그가 장추삼을 이름으로 부른 적은 한번도 없었
다.
"음이 아니야. 단초를 제공했다면 한두 걸음 뒤까지는 봐놓을 성격
이라는 거 잘 안다. 쌓아놓으면 뭐 하나. 아는 데까지 말을 해봐."
여전히 냉기 뚝뚝 떨어지는 음성이었지만 직감적으로 장추삼은 알
수 있었다. 그 속에 담긴 한줄기 온기를.
"에... 뭐...."
긁적긁적.
쑥스러움에 습관적으로 머리를 긁던 장추삼이 슬며시 고개를 들고
하운을 바라보았다. 왠지 북궁단야와 눈을 마주하기 껄끄러워서.
"에이, 그런 걸 일일이 다 말로 설명해야 해! 척하면 삼천 리라는 말
도 몰라!"
"삼천 리씩이나 바라지 않소. 장 형이 아는 삼십 리까지만이라도 일
러주시구려."
하운의 정중하면서도 여유있는 음성에 장추삼의 겸연쩍음은 찌꺼기
하나 없이 날아가기 충분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동료란 좋은 것인가
보다.
"흠흠, 뭐 그렇게 말을 하니 어쩔 도리 없군. 그럼 간단하게 생각해
보자고. 어제도 말했지만 개방의 몰락을 주도한 인물들이 무엇을 바라
고, 아니면 무엇이 겁이 나서 그랬는지 알아봐야 해. 그렇다고 무림맹
의 수뇌부들에게 그걸 물을 수는 없잖아?"
만나 줄 리도 없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찾는 법이야. 뾰족한 수는 없어. 호북의 개방
총타였던 곳을 기웃거리면서 단서를 찾아낼 도리밖에는."
북궁단야가 한숨을 내뱉었다. 말은 번드르르했지만 알고 보면 맨땅
에 머리 박고 보자는 거 아닌가. 그 심정은 하운도 마찬가지였는지 멀
뚱한 얼굴이 되어 흘러가는 구름에 시선을 던졌다.
뭔가 속은 기분이다.
"그런 얼굴들 할 것 없잔아?"
'입장을 바꿔봘, 임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북궁단야와 여전히 먼 하늘가를 그리는 하운
이 못마땅했는지 입을 툭 내민 장추삼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진짜로 하나부터 열까지 말해 줘야 될 사람들이네. 아무리 개방이
맛이 갔다지만 몇백 년의 전통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무너질 것 같아?
그리고 하루아침에 와해되어 버릴 조직 같냐고?"
"음?"
"그 말은!"
허무로 가득 찼던 두 사람의 눈망울에 즉시 생기가 넘쳐흘렀다.
"뭐가 그 말은이야? 주변을 뒤지면 누군가 튀어나오겠지. 그것이 개
방이든 날파리든."
북궁단야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타초경사."
기분 좋게 끄덕이는 장추삼의 눈에도 결연한 어떤 무엇이 스치고 지
나갔다.
"각오 단단히 해두라고."
각오는 했다. 그런데 이건 정말 낙양 가서 장 서방 찾기보다 더 황당
한 일이 아닌가.
균현은 산세가 유려하고 사람들의 인심도 좋다고 하여 호북성에서
는 최고로 살기 좋은 지역으로 꼽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무당산이 있
는 것으로 유명했다.
무당산이 유명한 이유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구파 가운데에서도 소
림과 양대산맥을 이루는 무당파의 근거지이기 때문이다.
강호 전체에서도 그 영향이 지대한 무당일진대 제 텃밭에서의 위상
이 어떨지는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렇게 대외적으로 유명한 균현의 외곽으로 또 다른 명소가 있었으
니 균현의 태평로(太平路)라는 거리였다.
모든 현마다 특정의 상업 지구가 형성되어 있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
이지만 호북성 균현의 태평로는 그런 상업 지구와 조금 다른 의미가
있었다.
그곳엔 개방의 호북 분타가 사백여 년이나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
다.
독립적인 성격이 강한 개방의 특성상 - 원래 거지들처럼 얽매이기
싫어하는 직업 군이 어디 있겠는가 - 개봉부에 있는 총타만큼이나 분
타들의 역할도 중요한 것이어서 본의 아니게 무림사의 전면에도 자주
등장했던 장소이기도 했고 호북서으이 개방 분타는 몇 가지의 사건을
거치면서 여탸의 분타들보다 위상이 높아졌었다.
"뭐야, 이거?"
"내 말이 그 말이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한 명이라도 손님
을 더 끌어보겠다고 호객에 열을 올리는 점소이, 깔아놓은 좌판들과
목처도 좋게 물건를 치켜들고 온갖 미사여구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보려는 장사치들... 을 기대했건만.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하운의 허망한 눈길은 잘 정돈된 거주 지역들과 엄숙함을 풀풀 흘리
는 무도관들을 향해 있었다.
"여기 상업 지구 아니었나?"
북궁단야가 장추삼을 돌아보자 대답할 말이 없는 그도 어깨를 움찔
들어 올렸다. 말로만 들어왔기에 이 변화를 어떻게 설명하기 어려웠고
영문을 모르기는 장추삼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무도관이 두 개나 있군. 어디 보자... 백송관이라... 현판의 문양으
로 보아 무당의 속가제자쯤으로 사료되고...비호관이라, 이름 참...아
무튼 이곳은 소림에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겠군."
현판을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하운이 도장을 드나들던 몇몇 젊
은이들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얼른 돌려 버렸다.
이런 식으로 충돌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으니까.
"흠......"
주위를 둘러보던 하운이 지나가는 사람에게 다가가 뭔가를 얘기하
기 시작했다.
"뭘 저리 얘기하는 거야?"
"오면 알겠지."
정중한 포권으로 대화를 마친 하운이 고개를 저으며 그들에게 다가
왔다. 뭔지 몰라도 대화 내용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으로 그는
얼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
"무슨 말을 했는데? 어서 얘기해요?"
"음, 그게....."
하운의 설명은 번화가였던 균현의 태평로가 이런 모습으로 바뀌게
된 이유가 이웃 동현에 있다는 것이었다.
"동현? 거기가 왜?"
"그리고 상업 종사자들이 터를 이전하기 시작했다고 하오. 아마 이
근처에 도장과 집이 하나둘 들어서면서부터라고 하오. 자고로 주택가
와 상업 지구는 궁합이 맞지 않는 법이니까."
멀쩡한 상업 지구에 갑자기 땅을 매입해서 도장을 지은 이유야 알
도리가 없지만, 하고 말을 맺은 하운이 문득 한숨을 뱉었다.
만약이지만 그의 가정이 맞다면.....
"공교로운 일이로군."
도장을 바라보며 북궁단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더 이
상의 추론은 내놓지 않았다. 왠지 그게 나을 듯해서.
맨 뒤에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장추삼이 한순간 눈을 빛
내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는 건가?"
"잠깐만."
북궁단야의 부름을 손사래로 넘긴 그가 주위를 둘러보면서 걸음을
멈춘 곳은 마을의 공터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이었다.
"여긴, 왜?"
망연히 뒤따르던 하운과 북궁단야도 우뚝 걸음을 멈췄지만 장추삼
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르르르ㅡ
이때 한 떼의 아이들이 저마다 손에 목검 따위를 들고 어디선가 나
타났다. 대략 스무 명이 조금 안 되는 인원수였는데 공터에 들어서자
마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두 무리로 나뉜 아이들은 나름대로의 규율이
있는지 아무런 말 없이 서로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양 진영(?)에서 대표 급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하나씩 나섰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쪽 편은 여자 아이였다.
"저번에 약속한 대로 오늘 이기는 쪽이 여기서 노는 거다!"
남자 아이가 호기롭게 외쳤다. 그도 그럴 법한 것이 남자 아이가 지
휘하는 무리는 여자 아이가 이끄는 무리보다 무려 세 명이 많았기 때
문이다.
"흥! 물론이다!"
여자 아이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그러나 머릿수 대문인지 아이의
음성은 조금 떨렸다.
"그런데 어쩌냐? 우리가 세 명이나 많은데? 그러지 말고 항복하면
저기 끝에서 놀게 해줄 수도 있어."
남자 아이가 배를 내밀며 자못 당당하게 외치자 여자 아이의 눈망울
이 상큼 빛났다.
"항복? 너네나 항복하지 그래? 우리는 세 명 없어도 너네 이겨!"
"오, 그러셔~?"
두 아이는 웬만한 무림고수들도 울고 갈 만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눈
싸움을 벌였다.
"쳇!"
"흥!"
눈싸움으로 별반 재미를 보지 못하자 둘은 나란히 고개를 모로 꼬고
콧방귀를 날렸다. 아마도 이런 일이 한두 번은 아닌 듯싶었다.
그에 따라 뒤에 서 있던 아이들의 눈에서도 저마다 전의의 불꽃(?)을
피워냈고 장내는 열일곱명의 투기에 의해 나름대로 후끈 달아올랐다.
"그럼 시작하자!"
"좋다! 방법은 알겠지!"
"패싸움이라도 하려는 건가?"
북궁단야가 중얼거리자 장추삼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꼬마라고 무시하면 안 되지. 패싸움을 할 거라면 목검을 내려놓을
리가 없잖아."
"음?"
아이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하운이 빙그레 웃었다.
"장 형의 말이 맞는 것 같소. 저 녀석들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승
부를 내려는 듯하오."
자기들끼리 빙 둘러앉은 아이들이 저마다 손바닥에 뭔가를 기표하
기 시작했다. 물론 손에 든 장난감들은 한구석에 모아놓고.
뭘 쓰는지는 모르지만 기표를 하는 중간중간 서로의 동태를 주시하
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표식임에 틀림없었다.
손바닥에 글자가 써질 때마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비장한 얼굴이 되
었는데 그건 기표를 하는 각 진여의 수장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여자 아이 측에서는 기표 와중에 자신의 손바닥을 보며 깜짝
깜짝 놀라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수장의 눈짓에 의해 곧 표정 관리를
하면서 이를 악물곤 했다.
그리고 여자 아이는 같은 편 가운데 가장 듬직해 보이는 아이에게
마직막으로 귓속말을 해주었다.
"그러니까 중환(重桓)이 너는...."
기표가 모두 끝나자 아이들은 각자 흩어져 서로 마주 보이는 나무
앞에 빙 둘러섰고 장내의 긴장감은 팽팽히 당겨졌다.
"저게 뭐요? 무슨 숫자를 기재하고 있군. 열부터 내려가고 있는데?"
"음... 다들 모르겠군. 저건 숫자치기 놀이야. 전략과 육체, 그리고
같은 편끼리의 호흡이 어우러져야만 승리를 따낼 수 있는 그야말고 멋
진 놀이라고 할 수 있지."
아이들의 놀이에 온갖 미사여구를 처바르고 장추삼이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치기라 함은 두 진영으로 나뉜 아이들이 열부터 사람 수대로 숫
자를 내려가게 되고 숫자가 높은 쪽이 낮은 쪽을 건드리면 낮은 쪽의
점수를 흡수하게 되는 놀이다. 물론 높은 쪽으로만 점수가 이동하는
것으로 낮은 편의 아이가 가진 본래 점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같은 편의 아이들이 손을 잡게 되면 그 두 아이가 가진 점수를
합치게 되는 것이다. 둘이든 셋이든 방식은 동일하다.
물론 처음에는 상대방의 숫자를 모른다. 그러나 몇 번 접촉이 이루
어지면 상대방의 숫자는 대충 알려지게 된다. 그렇깅 연합이 필요하
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승부의 끝은?
각 진영이 지키는 나무가 바로 그 해답이다. 나무는 무한의 수를 가
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아이들이 아무리 높은 수를 획득하게 되어
도 나무를 잡은 상태에서 치면 그쪽의 점수를 모조리 받게 된다.
그러나 상대방에서 만약에라도 나무를 그냥 만지게 되면 - 손이든 발
이든 - 시합은 종료가 된다.
숫자는 일반적으로 달리기에 능한 아이가 높은 수를 가지게 되고 가
장 낮은 수의 아이들은 대부분 나무를 지키는역할을 맡는 게 상례다.
어디까지나 일반적으로.....
"준비됐나?"
"준비됐다!"
두 아이의 눈에서 섬광이 일고 아이들의 움직임이 바빠질 무렵 여자
아이의 앙칼진 소리가 장내를 쩌렁쩌렁 울렸다.
"시~ 작!"
파바박!
개시 소리와 함께 일제히 뛰쳐나간 아니들은 공터를 돌며 서로를 탐
색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벌써 손을 잡고 한 명을 쫓기 시작한 경우
도 있었지만 행동의 제약에 따라 이내 놓치곤 숨을 몰아쉬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아이들은 역시 두 수장 아이였다. 그 아이들
은 달리기도 달리기려니와 급제동부터 속임수까지, 뭐 하나 나무랄 곳
이 없었다.
특히 여자 아이의 움직임은 단연 발군이라 남자 아이 두서넛은 그냥
제쳤다. 그래서인지 여자 아이가 번적 뜨면 상대방 진영 아이들은 손
잡기에 급급했다.
"수수(秀秀)를 잡아! 수수 십 점이니까 어떻게든 같이 잡으란 말이
야!"
여자 아이의 이름은 수수였나 보다.
그녀는 남자 아이들의 연합진에도 요리조리 빠져나갔는데 수수라는
아이를 막으려다 보니 자연 아이들은 뭉치게 되었고 빈틈을 노려서 이
쪽 편에선 따로 떨어진 상대방의 아이들을 야금야금 공략해서 점수를
올리고 있었다.
"동소(童昭)가 가면 무조건 손을 잡고 내 쪽으로 내려와! 순서 알지?
아무리 빨라봐야 동소는 십 점이야! 점수에 맞춰 손을 잡아!"
그때까지 남자 아이는 겨우 한번, 그것도 단 오 점짜리 아이를 건드
린 게 고작이었으니 수수라는 아이의 전략이 얼마나 주효했는지 알 수
있었다.
"대단하군. 여자 아이라고 보기 어려운 운동 신경이야! 마치 날다람
쥐 같지 않은가!"
하운이 껄껄 웃자 북궁단야가 혀를 끌끌 찼다.
"그에 비해서 남자 녀석은 영 한심하군. 차라리 자신이 직접 나서서
막았더라면 저렇게 끌려 다니지는 않을 것을. 어차피 동점이라면 서로
를 어찌할 수 없을 테니 주위를 먼저 이용하면 되지 않는가."
"말인즉슨 옳은데 그게 아니지."
장추삼이 흐뭇한 얼굴로 여자 아이를 가리켰다.
"저걸 보라고. 수수라는 아이, 달리기나 몸놀림뿐 아니라 심리전에
도 능하다고. 한 방향으로 미친 듯이 들려들어서 그쪽 아이들의 발을
묶고 잡힐 듯 잡힐 듯 거리를 두면서 한 바퀴를 돌잖아. 그렇게 진용을
망가뜨리면서 자신은 철저히 외곽만 돌고 있다고."
장추삼의 말대로 동소 쪽의 진용응 많이 망가진 상태였다. 여기저기
뭉쳐는 있었으나 실속없는 형태였기에 멀리서 보면 그 균열이 한눈에
들어왔다.
"헉! 헉!"
역시 체력에는 한계가 있었을까. 줄기차게 뛰어다니던 수수가 나무
를 지키던 아이에게 다가가 나가라면서 등을 쳐주고 웃었다.
"이제 나가, 청민(靑珉)아."
등이 떠밀려 나가는 아니는 한눈에도 병약했고 달리기 역시 느렸지
만 곧 다른 아이가 손을 잡아주었고 잡아준 아이의 점수가 월등한지라
상대편은 주위만 맴돌 뿐 어쩌지 못했다.
"수수 쉰다! 지금이 기회야! 어떻게든 밀어붙여!"
숨을 가드듬는 일방 나무를 지키며 차가운 눈으로 장내를 주시하던
수수가 그때까지 가장 높은 점수를 획득한 아이와 눈이 마주치자 뭔가
눈짓을 던졌다.
"가자!"
눈짓을 받은 아이가 소리를 지르자 이쪽 편의 아이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힘이 빠진 아이 하나가 수수
와 자리를 바꾸자 남자 아이의 눈에 당황이 어렸다.
"이번 막아! 이번만 막으면 우리도 기회있어!"
우르르르-
처음의 기세는 어디 갔는지 사람 수가 많았던 동소 편은 연신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수는 아이들의 뒤에서 냉엄한 얼굴로 천천
히 나섰다.
아마도 체력을 보충하는 기색이었는데 간간이 듬직한 소년과 눈을
맞추곤 했다.
"가자!"
"와!"
수수의 낭랑한 일갈에 꼬마들이 한 번 더 힘을 받고 고함을 지르자
나무까지 후퇴한 동소 쪽의 진용들은 길게 손을 잡고 방어하기에 급급
했다.
"둘러싸!"
나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세 무더기로 나뉜 아이들이 빈틈을 노렸지
만 여간해서 치고 들어갈 곳을 찾지 못하고 빙빙 돌기만 했다.
수수 역시 뒤에서 예리한 눈빛을 보내긴 했지만 딱히 방법이 없어서
맴돌 뿐이었다.
너무 빨리 움직여서일까. 듬직한 아이가 그만 허약한 아이의 손을
놓쳐 버렸다. 옆에 서 있던 아이가 급히 손을 잡아주었지만 그 아이 역
시 주력으로 뛰던 편이 아니었는지 주위를 급하게 돌아보았다.
"이때다!"
긴 줄의 끝에 서 있던 동소가 벼락처럼 뛰쳐나와서 아이를 건드리자
순간적으로 정적이 찾아왔다. 만약 남자 아이가 점수를 획득하게 되면
수수의 개인기는 더 이상 어려울 판이었으니까.
"네가 몇 점인지는 몰라도 청민이가 사 점이니까 십 점이 아니라면
점수를 줘야 한다?"
동소가 환호작약 소리 질렀다. 그때까지 점수가 나오지 않은 인원은
십 점하고 사 점. 십 점을 수수로 봤을 때 사 점은 당연히 허약한 아이
의 몫일 터.
이때 수수의 입가에 한줄기 선이 지나갔다.
"청민아, 손 펴라."
우물거리던 허약한 아이가 천천히 손을 폈다.
십(十)!
"어?"
순간 동소가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 옆의 아이 역시 손을 폈다.
육(六)!
수수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음성은 여자 아이답지 않게 차
분한지라 동소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네 점수는 십오 점이지?"
"그, 그럼 네가......."
싱긋.
수수도 자신의 손을 펴 들었다.
사(四)!
"치, 치사하게....."
"치~ 사? 누구한테 하는 소리야!"
해놓은 짓이 있어서 반박도 못하고 숨만 몰아쉬던 동소가 쓸쓸히 자
리로 돌아갔다. 이제 구멍이었던 아이들 둘은 모두 십점을 상회하는
점수를 얻게 되었고 동소가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판이니
형국은 그야말고 사면초가였다.
"승부났군."
북궁단야의 말에 장추삼과 하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의 머리
싸움은 단순히 몇 점 왔다 갔다 한 정도가 아니었으니까.
처음부터 완전히 지고 들어갔다는 열패감, 그것만으로도 아이들의
사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그건 아이들의 움직음으로 고
스란히 드러났다.
흐느적흐느적.
막는 쪽의 움직임은 마치 해파리처럼 흔들거렸고 공격하는 편은 더
욱 원활한 움직임으로 수세에 몰린 아이들을 압박했다.
"여기 간다!"
수수는 과연 사 점의 아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잽싸게 움직이며 동
소들의 혼을 빼놓았고 그녀의 귀계에 한번 당한 아이들은 우왕좌왕을
거듭했다.
"여기, 여기!"
중환이 역시 가장 높은 점수를 발판으로 이리저리 아이들을 몰아갔
고 끌려 다니던 아이들이 결국 빈틈을 보이고 말았다.
"가!"
빈 쪽을 가리키며 수수가 손가락질을 하자 한구석에서 우물쭈물 서
있던 청민이 몸을 움직였다.
"어림없다!"
동소와 아이들이 급히 방향을 바꾸었고 그건 수수가 바라던 바였다.
팍!
비축했던 힘을 한순간에 쏟아내듯 전력 질주로 나무에 달려든 수수
가 미처 몸을 돌리지 못한 아이들의 틉을 비집으며 미끄러져 들어갔다.
턱!
"헉, 헉!"
발로 나무를 찬 수수가 땀을 닦으며 일어서자 그 모습을 망연히 바
라보던 동소가 아이들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내 실수로 지고 말았어."
"아니야, 대장. 그냥 재수가 없었다고!"
"맞아. 다음에 한 번 더 해서 이기면 되지, 뭘!"
"그래도 사내로군."
"맞아, 어떤 쫌생이랑은 다른걸. 패배도 인정할 줄도 알고."
부릅!
북궁단야의 눈에 스산한 살기가 깔리자 애써 외면하던 장추삼이 언
덕에서 툭 뛰어내렸다.
짝짝짝!
"오, 멋졌다! 정말 재미있었어!"
그가 끼어들자 동소와 수수가 눈을 돌려 장추삼을 머리부터 발끝까
지 훑어보았다.
이건 뭐냐, 는 눈으로.
"근데요?"
수수가 한 발 나섰다. 할 말 다 했으면 가라는 식이니 넉살 좋은 장
추삼으로도 일순 말문이 막혔다.
"아... 근데가 아니라 너희들이 노는 걸 보니까 나도 옛날이 생각나
서 말이야. 숫자치기하면 이 오빠를 당할 사람이 없었거든."
"왠지 굉장한 설득력을 가진 말이로군."
"그냥 숫자치기의 화신이었다고 해도 난 믿을 거요."
이제야 장추삼이 뭘 하려는지 알 것 같아서 북궁단야와 하운이 피식
웃고 그의 다음 행동을 지켜보았다. 대충 짐작은 하지만.
"그래서요?"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고 따지듯 묻는 수수에게 장추삼이 목을 한
번 꺾고 무릎을 꿇었다. 역시 눈높이를 맞춰야 얘기가 좀 되려나 보다.
"자, 여기......."
품을 뒤져 뭔가를 꺼낸 장추삼이 그걸 들고 흔들어 보였다.
"여기 너희들 모두에게 하나씩은 돌아갈 분량의 유과가 있어. 만약
나와 내기를 해서 이기면 이걸 줄게."
어른스러워 보여도 아이는 천상 아이다. 유과라는 말에 숨길 수 없
는 관심을 보인 수수가 입맛을 다시다가 동소를 쳐다보았다.
"내기가 뭔데요?"
"그건 간단하다. 너희들 가운데 숫자치기를 가장 잘하는 열 명이 나
무를 막거나 나를 치면 된다. 물론 내게는 점수가 없지. 그리고 나는
도망 다니다가 나무를 칠 거야. 시간은 일각! 일각 동안 내가 너희
들의 나무를 치지 못하면 지는 걸로 하자."
"정말이에요?"
동소의 반문에 장추삼이 넉넉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그 정도면...."
"그건 불공평해요."
팔짱을 끼고 장추삼을 쏘아보던 수수가 손을 내저으며 그의 말을 막
았다.
"아저씨는 키가 크잖아요. 우리 머리 위로 짚으면 어떻게 해요?"
'약아빠진 녀석. 그리고 아저씨가 아니라 오빠다, 오빠!'
살짝 찌푸려지려던 표정을 가까스로 바로 하며 장추삼이 너그럽게
웃었다.
"하하, 내가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구나. 그렇다면 내가 너희들
의 머리 위로 나무를 짚으면 진 걸로 하겠다. 됐지?"
그러나 수수는 여전히 할 말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아홉 살
이란 나이에 맞지 않은 영민함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있었다.
"그럼 우리가 지면요?"
'어이구, 나중에 살림 하나는 똑부러지게 잘하겠네. 뭐 하나 넘어가
는 법이 없으니.'
그래도 장추삼은 웃어야 했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처럼.
"지면 너희들은 열 명이 한 사람도 못 이긴 바보가 되는 거지. 거기
다 맛난 유과도 먹지 못하게 되는 거고."
한 사람도 이기지 못한 바보.......
유과를 먹지 못한다.....
쿠르르르-
아이들의 전의가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수와 동소는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덥석 악수를 나누었다.
"반드시!"
"이기자!"
아마도 둘의 첫 악수이리라. 뒤에 서 있던 양편의 아이들도 서로에
게 악수를 청하고, 뭐 난리도 아니었다.
"너희 쪽에서 몇 명 나올래?"
수수의 질문에 동소가 생각에 잠겼다가 양손을 들며 몸을 돌렸다.
"네가 뽑아."
"뭐?"
"네가 뽑아. 나보다는 네가 숫자치기를 잘하니까 네가 뽑는 편이 나
아, 안 그러냐?"
그의 말에 동소 편의 아이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은 장
추삼이라는 대적(大敵)을 맞아 완전히 의기투합하였고 그 결과 이런 전
개까지 가능했던 것이다.
"그래, 누구든 덤비라고."
비아냥거리는데 이 인간보다 탁월한 능력을 보일 이는 없다. 그리고
이맘때의 아이들은 이런 원초적인 도발에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법이다.
"좋아!"
수수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아이들을 호명하기 시작했다.
"어?"
마지막 이름이 불리고 동소의 얼굴에 놀라움이 피어났다. 놀랍게도
수수는 자기편보다 동소 쪽의 아이를 하나 더 뽑았기 때문이다.
"정선이는?"
"정선이도 잘하지만 양평이 더 낫다고 봐. 이게 제일 좋다고."
그녀의 공정한 선발에 다시금 아이들의 의기가 뭉쳤다.
"설마 추뢰보를 쓰는 건 아니겠지."
"내공을 실어서 하는 움직임을 보인다면 내가 즉시 나설 거요. 그건
반칙이니까."
북궁단야가 칼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나서겠다는 건 좋은데 칼을 뽑
아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장추삼을 힐끔거리던 아이들이 주저앉아 작전 회의에 돌입했다. 아
무리 자신들이 어리다고는 하나 열 명을 상대로 싸우겠다는 건 정말로
왕년에 한가락 했다는 반증일 테니까.
"그러니까 너는......"
"수수 넌 뒤로 가서......"
한참을 그렇게 소곤거리던 아이들이 만세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
났다. 그들은 비록 어리고, 이건 놀이지만 아이들의 비장함은 장
난질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자! 우리는 준비가 되었어요!"
나무를 둘러싼 아이들이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그럼 시작할까?"
까, 자가 떨어지기도 전에 동소가 뛰쳐나가 장추삼을 노렸다.
"훗!"
아이의 진행 방향으로 몸을 트는 척하다 그대로 멈추자 동소가 균형
을 잃고 고꾸라졌다.
어느새 또 하나의 아이가 장추삼을 막아섰다. 이른바 차륜전의 형태
였는데 공격에 실패한 아이는 바로 나무에 돌아가서 경계를 게을리 하
지 않으니 그야말고 공수겸전(攻守兼全)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아쭈?'
장추삼의 입가에도 희미한 선이 하나 아로새겨졌다. 단순한 놀이라
고 생각했거늘 이 아이들, 나름대로 체계적인 공세로 달려들지 않는가.
그러는 중에도 아이들은 장추삼의 속임수에 번번이 넘어지기 일쑤
였다.
"둘!"
수수의 교갈에 이번엔 아이들 둘이 뛰쳐나가 장추삼을 좌우에서 막
아섰다.
'호오?'
눈빛을 빛내며 자신의 좌우를 막은 아이들에게 감탄을 보내던 장추
삼이 한쪽으로 어깨를 움직이자 아이들 역시 움찔 몸을 움직이려 했다.
'먼저 움직이지 마! 아저씨가 움직일 때까지 기다려!'
'저 녀석이, 오빠라니까!'
수수의 말에 흔들리던 아이들이 몸을 바로 했다. 이렇게 되자 난처
해진 장추삼이 헛웃음으로 답답함을 대신했다.
구경할 땐 몰랐는데 수수란 아이의 심계, 거의 교활에 가깝지 않은
가!
시간은 마냥 마냥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수
수의 눈짓을 받은 두 명의 아이가 이번에는 장추삼의 전후를 막으려고
나섰다.
'이제 보니?'
아이들은 옥쇄(玉碎)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일각의 시간만 흘려보
내면 승리는 거저 오기에 굳이 장추삼을 잡으려 들지 않는 거였다.
'그건 안 될 말이지.'
아이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그가 미처 후방으로 나머지 아이가 돌
아 들어오지 않음을 확인하고 오른발을 성큼 떼었다.
움찔!
이번은 직접적인 행동이었기에 아이들 역시 몸이 그쪽으로 흘렀고
그 틈으로 장추삼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다.
튕!
땅을 지지하던 왼발에 강한 힘을 실어 뒤로 몸을 뺀 그가 아이들의
당황함을 뒤로하고 나무 쪽으로 전력 질주를 하자 급급히 아이들이 막
아섰다.
"침착히!"
수수의 말이 떨어지기 전에 장추삼이 움직였다. 그쪽은 놀랍게도 수
수가 지키던 방향이었다.
"......!"
자기에게 올 줄을 미처 몰랐기에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곧 수수는
양팔을 벌리고 방어에 들어갔다.
스륵.
오른편으로 어깨를 움직이자 수수의 몸도 움찔했지만 반응하지는 않
았다.
스륵.
다시 왼편으로 틀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수수는 눈망울만 빛냈다.
팍!
순간적으로 장추삼이 사라졌다.
"어?"
수수의 시선이 당황 속에서 겨우 장추삼을 잡아냈지만 이미 그의 손
은 나무를 짚고 있었다. 물론 수수의 어깨 높이에서.
턱!
"내가 이겼다."
수수는 자신의 어깨 위로 걸쳐진 팔의 의미를 생각하는 데 조금의
시간을 할애해야만 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뭐가 어떻게냐?"
어처구니없어서 멍청하게 서 있는 수수의 이마를 퉁 때린 장추삼이
기지개를 켰다.
"간단하잖아. 아이들은 네 쪽이라면 안심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다
른 아이들과 네 거리가 조금 더 벌어져 있었지. 또한 너는 전체를 살펴
보느라 막상 내가 다가서자 주위를 돌아보지 못했어."
"으윽!"
분해하는 수수에게 장추삼이 마지막으로 충고했다.
"마지막으로 네 자만심이 날 이기게 한 거야. 설마 내 쪽으로 올
까.. 했었지? 언제나 그게 통하는 건 아니야. 하늘 위에 하늘이 있
다는 걸 명심하거라."
"그, 그래도....."
약간 귀찮았지만 패배를 믿지 못하는 수수의 얼굴에 어떤 쐐기를 박
아줘야겠기에 장추삼이 그녀의 앞에 다시 쪼그려 앉았다.
"넌 언제나 상대방을 속일 때 좌우로 몸을 움직여서 중심을 뺏곤 했
겠지.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움직임 역시 너의 방식대로일 거라
생각해 버린 거다. 좌우만 신경 쓰다 보니 오히려 정면을 내주게 된 거
야.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갔다고 할까?"
울먹.
어린아이답지 않게 수수는 눈가에 밎힌 눈물방울을 결코 떨구지 않
았다. 이런 아이들은 패배를 딛고 일어설 수 있다.
그런 그녀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바닥에 엎드
려 식식거리는 아이들을 불러 모으며 장추삼이 품에서 유과 봉지를 꺼
냈다.
"오늘 너무 재미있었다! 내가 비록 이겼지만 기분이 좋으므로 이건
그냥 줄게! 다 어서들 와라!"
아이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최종적으로 수수
에게 눈이 모아졌고 모두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눈가를 급히 훔치고는
장추삼을 외면했다.
"졌는데 왜 먹어요! 우리가 무슨 거지새끼들인지 알아요?"
"흐음....."
머리를 긁적이던 장추삼이 뭐라고 말하려는데 어디선가 장중한 음
성이 들렸다.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너희들이 우리에게 뭔가 말을 해주면 이걸
주는 걸로 하자. 쌍방 간의 교환이니 거지 취급받을 일도 없지 않겠느
냐?"
또 누구야, 하고 고개를 돌리던 수수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졌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표표히 내려서는 북궁단야의 모습에 그대로 압
도되어 버렸으니까.
'아무튼 어린애나 할머니나!'
장추삼이 속으로 꿍얼거리는데 이번에는 동소가 나섰다. 녀석도 북
궁단야가 썩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이미 한번 한 약속을 깰 수는 없어요! 그거 가지고 어서 가세요!"
"흐음....."
말인즉슨 옳은지라 북궁단야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야 했다. 요즘
애들, 어리다고 무시했다간 큰코다칠 판이다.
둘의 곤란을 나름대로 즐기던 하운이 천천히 장내로 다가오자 그때
까지 대치를 벌이던 공기가 갑자기 온화해지는 느낌이라 아이들의 시
선이 모여졌다.
"소형제들, 이 대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네. 그러니 졌다고 기
죽을 필요는 없어."
"무슨 문제!"
발끈한 장추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슨 문제냐니? 장 형은 아까 소형제들의 몸놀림을 보면서 이미 분
석을 해둔 상태가 아니었소? 그런데 소형제들에겐 그럴 기회가 없었으
니 이 어째 공평하다고 하겠소? 안 그러오, 북궁 형?"
"그건 그렇군."
북궁단야까지 가세하자 아이들의 안색이 조금씩 펴졌다.
"아, 아니......."
"결정적으로!"
뭔가 변명하려던 장추삼을 말허리를 여지없이 잘라 버린 하운이 수
수를 가리키며 준엄하게 일갈했다.
"아까 장 형이 자기 꾀에 넘어갔다고 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오.
비록 좌우에 신경을 쓰다 보니 중앙을 놓친 경향도 있겠지만 그보다
어른과 아이의 시선 차이가 이런 결과를 가져온 거요."
"음."
맞는 말이라 장추삼도 뒷머리를 긁으면서 쩍 뒤로 물러섰다.
수수와 대치했을 때 좌우로 움직이려던 장추삼이 수수의 눈앞에서
순간적으로 사라져 보인 것은 그가 워낙 빠르게 주저앉았기 때문이기
도 하다.
그렇지만 수수의 시선, 즉 어른인 장추삼을 응시하기 위해서 올린
눈높이가 아니었다면 주저앉는 것만으로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었을까?
"착시 현상이었군."
북궁단야가 마지막으로 결론짓자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자기들에
게 유리한 방향으로 얘기가 진행된다 생각했는지 아이들이 뭐라고 종
알거리기 시작했다.
"고로 이번 대결은 없던 걸로 치고, 사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찾고
있는 중이라오. 소형제들이 그에 대한 얘기를 좀 해주면 이 유과를 주
겠네. 어떤가?"
"어? 저거 저 아저씨 거 아니에요?"
동소의 말에 하운이 껄걸 웃었다.
"괜찮아, 원래 저 아저씨 것이 내 거고 내 것이 내 것인 사이라네.
우리는."
이런 경우를 두고 재주는 곰이 부리고 은자는 주인이 챙긴다고 하던
가.
얼떨결에 바보가 되어버린 장추삼이 입을 툭 내밀었지만 아이들은
공정한 지적을 내린 하운에게 완전한 신뢰감을 보였다.
아직도 북궁단야를 힐끔거리는 수수 빼고.
"으음......."
동소가 재촉하는 눈빛을 보내자 은연중에 두 무리의 통합 수장으로
등극한 수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대로 받자니 뭔가 찜찜하고 안 받
자니 아이들의 기대감이 장난 아니었으니까.
"음, 그럼 일단 찾는 사람이 누군지 듣겠어요. 괜히 우리가 모르는
사람이라면 곤란하잖아요."
"오, 그렇게 하지."
하운이 슬쩍 장추삼을 돌아보았다. 저 영악 덩어리 상대하느라 수고
했다는 존경을 담고.
"우리가 찾는 사람은 그러니까 한마디로 거지인데, 음 그냥 거지가
아니라 거지면서도 거지 같지 않은 거지... 아,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말을 하다가 자꾸 꼬이자 콧등에 잔주름을 잡고 쩔쩔매는 하운을 대
신해 북궁단야가 나섰다. 그렇다고 그 역시 뚜렷한 대안이 있었던 것
은 아니지만.
"한마디로 조금 다른 거지를 말하는 거다. 뭔가 다른 거지 말이야.
조금 특별한 거지들. 예를 들면 풍채가 좋다던가, 아니면 눈에서 빛을
발하는....."
그 말에 아이들이 까르르 웃었다.
"에이, 그런 거지가 어디 있어요?"
"거지가 거지지, 눈에서 빛을 발하는 거지라니!"
그들의 반으에 세 명의 어깨가 축 처졌다.
동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아이들이 뭔가 알지 모를 거라는 착상,
여기까지는 좋았지만 불행히 착상은 착상이었다.
셋의 그런표정에 아이들도 조금은 미안했는지 서로가 본 거지들을
떠벌리기 시작했지만 그들이 바라는 거지의 상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
다.
"아아, 고맙다. 많은 도움이 되었어. 자, 이건 소형제들의 몫이야."
유과 봉지를 흔들자 아이들이 함성을 지르며 하운의 손에서 그것을
냉큼 낚아챘다.
"이제 어쩌지요?"
"뭘 어째, 발로 뛰어야지 뭐."
"암담하군. 이건 단서 하나까지 완전히 지워놓은 상태니."
이때 한 아이가 쭈뼛쭈뼛 다가왔다. 그 아이는 아까 수수의 편에서
십 점을 가졌던 소년이었는데 걸음걸이조차 위태로워서 하운이 저도 모
르게 어깨를 잡아주었다.
"저....."
"어, 왜?"
장추삼이 하는 식대로 하운도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이런 말하면 웃을지도 모르는데....."
"괜찮다. 아무 말이나 하려무나."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용기를 내서 낯선 어른들에게 다가온 성
의가 기특한지라 하운이 청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안 웃을 거죠?"
"그럼, 그럼."
그때 이미 북궁단야와 장추삼은 심드렁한 얼굴이 되어 두어 발 앞으
로 가던 상태였다.
"아저씨들이 말하는 풍채 좋고, 눈에서 빛이 나가는 거지는 아니지
만 좀 이상한 거지 할아버지는 알아요."
"이상한 거지 할아버지라... 누굴까?"
하운의 친절한 응대에 청민도 화색이 돌아 얘기에 힘을 실었다.
"그 할아버지는 매일 울어요. 자주 보이는 건 아닌데 가끔 보면 언
제나 울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엄마 몰래 남은 밥을 주니까 제 몸을
한번 훑어보더니 침을 놔주고 갔어요. 근데 그 침을 맞고 잔기침이 없
어졌어요. 그런데 애들하고 엄마는 제 말을 믿지 않아요."
"......!"
"......!"
"......!"
셋의 눈에 신광이 일었다. 그리고 그들은 동시에 외쳤다.
"그 할아버지 어디서 봤니?!"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다녀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