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허씨(金海許氏)
허씨는 가라국 김수로왕비 허황옥에 연원을 두고 있다. 허왕비는 아유타국(인도지방에 있던 옛왕국)의 공주로서 16세 때 배를 타고 지금의 경남 창원군 웅동면 용원리에 있는 부인당(夫人堂)으로 들어와 정박했다. 그 뒤 김수로왕이 왕비로 맞이한다. 허황후는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그중 둘째 아들에게 허씨로 사성(賜姓)하였다. 허황후가 자기의 허씨성이 이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했기 때문이다. 그 뒤 허황후의 30세손 ▲허선문이 양천허씨, ▲허사문은 태인허씨, 33세손 ▲허강안이 하양허씨, 35세손 ▲허염이 김해김씨로 각각 분관된다.
김해허씨의 시조 허염(許琰)은 고려 때 삼중대광을 지내고 가락군에 봉해졌다. 그 후손들이 시조이 세거지인 김해를 본관으로 삼았다.
김해허는 고려조에 허홍재(평장사), 허유전(정승), 허옹(전리판사) 등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그러나 고려조에 대한 절개를 지킨 탓으로 조선조에서는 크게 번영하지 못했다. 허대현의 후손으로 된 상서공파, 허인전의 후손인 가락군파 등 9개파로 나누고 있다.
허유전은 1321년(충숙왕8년) 81세의 노령으로 원나라에 귀양간 상왕(충선왕)의 환국운동을 위해 티베트까지 갔다 왔다. 그의 후손들이 가장 번창했다.
허위는 한말 의병을 모아 일군에 맞서 싸운 의병장이다. 그는 1897년(광무1년) 이은찬, 조동호와 함께 의병을 규합해 금산. 성주 등지에서 싸우다 고종의 종용에 따라 해산하고 귀향했다. 일본은 회유책으로 그를 칙임관 2등에 임명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낙향했다.
2000년 현재 121,031명이 있다. 주요파는 ▲가락군파 ▲호은공파 ▲중승공파 ▲전직공파 ▲증성군파 ▲판서공파 ▲상서공파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