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자, 그러면 지금부터 작품을 감상해 보기로 하지요.
작품 감상하기 1. 종착역 <최은정> 참으로 오랜만에 기차를 탔다. 기차를 탄 것은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무작정 나서보고 싶어서였다. 쾌속으로 달리는 바퀴소리와 함께 마음이 달리고 있었다. 연도에는 모내기가 한창이고, 둔덕에는 삘기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우리의 삘기꽃은 유럽의 ‘히이스’와 같은 느낌이라는 말을 들었다. 듬성듬성 소나무가 지나가고, 속살이 드러나는 황토들이 세차게 달리는 바퀴소리에 몸을 움츠린다. 나는 그런 것을 보면서 명상에 잠긴다. 지나간 일들이 스크린에 비치는 영상처럼 이런 저런 일로 형상화되면서 꺼졌다간 살아나고, 다시 꺼진다. 나는 시방 여행하는 기분으로 달리는 차 속에서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것들에 시름을 놓고 있다. 얼마를 달렸을까. 정거장에 멈췄다. 극락이라는 이름이 붙은 강을 건넜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이승을 떠나 천국으로 가는 기분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현실을 떠나 환상의 나라로 가는 것과 같은 말일 수도 있다.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그런 환상 속의 꿈을 안고 살아 온 것인지도 모른다. 첫 번째 멈춘 곳은 정거장 이름이 극락장이다. 나는 묘한 감상에 사로 잡혔다. 내가 정말 극락에 가고 있다는 것인가. 기차는 다시 들길을 가르며 힘차게 달렸다. 다음에 닿은 정거장도 잊히지 않는 인상적인 이름이다. 늙어서 편하다는 뜻인가. 아니면 늙어서 편하라는 뜻인가. 노안(老安)이다. 사람이 살다가, 가장 좋은 것이 후분이 좋아야 한다고들 하지만, 늙어서 편한 것이야 말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노안을 지나서 차창 밖으로 벌어지는 풍광은 더없이 아름다운 경관을 펼치고 있다. 푸른 둑과 지평선이 하나로 맞닿아 일망무제로 시야를 넓힌다. 나는 그 속에 빠져들며 새삼 자연의 아름다움을 실감한다. 탁 트인 시야로 인해 가슴이 후련해진다. 자질구레한 일들이 아득한 기억 속으로 모두 사라져 간다. 이래서 마음이 편해지고 몸이 건강해져서‘늙어 편안하다고’ 한 것일까? 나는 이 노안지대를 달리면서 마음이 저절로 비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부질없는 것들에 매여 마음을 얼마나 어지럽게 하였던가. 하늘은 끝없이 맑게 펼쳐진다. 내 마음도 따라서 청명하게 펼쳐진다. 이러는 중에 내가 젖먹고 자라던 영산포를 훌쩍 지났다. 영산포는 나의 수필 밭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 영산포에서 추억이 넘실대는 유년 이후의 소녀시절까지를 보냈다. 그래서 그 영산포에는 아름다운 기억들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몇 개의 정거장을 거쳐 학교(鶴橋)라는 곳에 닿았다. 그곳에서 나는 선로수가 찻길을 바꾸는 것을 보았다. 기차는 그 바뀌어 진 선로를 따라 달려간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인생길도 예외 아니란 생각을 하였다. 내가 부모를 떠나 결혼을 한 것도 그와 같은 것이고, 내가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것도 그런 것이다. 인생은 나면서부터 정해진 길이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걸어온 길이 그런 길인지도 모르나, 분명한 것은 선로수가 찻길을 바꾸듯이 인생의 삶 길에도 변화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의 생각 같아서는 더 바뀌어 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목포가 가까움에 따라 또 하나의 야릇한 지명과 만난다. 몽탄(夢灘)이라는 곳이다. 내 남편의 탯줄이 묻히기도 한 이곳 몽탄, 꿈 몽자,여울 탄자라면 꿈꾸는 물이란 뜻일 텐데, 물을 인생에 비유하면 삶 또한 일장춘몽이란 뜻으로 통하는가 ? 하면, 차라리 꿈에서도 탄식한다는 夢嘆(몽탄)이라는 느낌이 더 어울리다. 꿈에서 탄식을 한다면 생전에 그처럼 컸을 후회는 없을 것이다. 인생의 길이 고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살아가는 길에서 후회 없기를 바란다는 것은 더 없이 어려운 것이다. 이런 인생을 암시라도 하듯 누가 지었는지 몽탄이란 지명은 잘 지은 이름이다. 내가 만일 죽는다면 영원한 그 꿈속에서 무엇을 탄식하게 될 것인가 ? 다시, 몽탄을 뒤로하고 닿은 곳이 일로(一老)라는 곳이다. 이 지명을 풀어 말하면 인생은 누구나 한 번 늙는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렇다. 한 번 나서, 한 번 살다 죽음으로 간다. 나도 시방 그 길을 따라 한 번 늙는 길로 가고 있다. 참으로 묘한 지명들을 거치면서 꿈속에서 꿈을 꾸듯 나는 지금 달린다. 일로 역을 지나 마침내 기차는 목포역에 닿았다. “목포-”하는 애잔한 목소리의 노래가 들린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다. 나는 목적지도 없이 떠나 왔지만 이제 더 가려해도 갈 곳이 없다. 어느 땐가는 나의 인생길도 이처럼 어느 날 갑자기 총착지에 닿을 것이다. 그 종착지가 어떤 곳의 어떤 모양일지는 알 수가 없다. 극락강을 건너 극락역을 지나고, 일로 역을 거쳐 몽탄역을 거쳤듯, 내가 닿을 종착역도 그런 경로의 곡절을 안은 길임에는 분명하다. 나는 차에서 내려 유달산에 올라 이난영의 노래를 거듭 환청하면서 탁 트인 바다의 수평선을 보았다. 바다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점점이 떠서 저마다 가고 있다. 내가 걸어온 인생의 길처럼 물위에 떠 있는 배들도 파도를 가르며 저마다 제 길을 간다. 나는 오늘 호남선의 종착역 목포에 내려 기차의 종착지와 더불어 인생의 종착역도 생각해 본다.
[작품의 감상]
위 작품은 우선 독특한 소재가 눈길을 끌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하나의 평범한 기차 여행 중에 등장하는 역의 이름 “극락강-노안-몽탄-일로”등에서 작가는화자 만의 독창성이 번득이는 기지와 해학으로 그 이름들을 승화시키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즉 소재에 대한 화자만의 고뇌적 해석과 이해가 평범 속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필문학이 무엇보다 개성을 존중하는 문학이라 할 때 이 수필은 적어도 화자 나름의 독자적인 세계가 시선을 사로잡게 한다. ‘소나무가 지나가고 속살이 드러나는 황토들이 세차게 달리는 바퀴소리에 몸을 움츠린다. 나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 명상에 잠긴다“ 는 서두를 풀어낸 기차여행의 종착역. 목적지도 없이 훌쩍 떠나왔지만 이제 더 가려해도 갈 곳이 없는 화자의 고뇌는 바로 인간존재의 탐색으로 귀결되어 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수필은 어디까지나 선택된 화자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진실의 문학작품으로 형상화 시켜야만 한다. 즉 선택된 소재의 주제의식을 부여하고 사상과 철학을 심는 의미화작업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위 작품은 이를 훌륭히 이룬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수필다운 수필이란 같은 사물을 이야기 하더라도 남과 다른 그 어떠한 느낌을 주는 글이라야 생기가 넘치고 살아 있는 글이 될 것이다.
2. 빨래를 하며 <변해명> 세상 바람에 시달리다 풀이 죽어 늘어진 옷을 벗어 빨래를 한다. 살아가기 힘겨워 땀에 배인 옷, 시끄러운 소리에 때 묻고 눌린 옷, 최루탄 연기에 그을고 시름에 얼룩진 옷을 빤다. 장마 비 걷히고 펼쳐지는 푸른 하늘처럼 밤마다 베개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는 악몽에 시달리는 나의 잠을 깨운다. 그 물소리처럼 지심에서 솟구치는 물꼬를 찾아 콸콸콸 넘쳐흐르는 물에 빨래를 담가 절레절레 흔들며 빨래를 하고 싶다. 여름의 한 줄기 소나기는 도심을 태우던 열기를 식혀주고 악취와 쓰레기를 쓸어가며, 시원하고 깨끗한 거리를 열어 준다. 그처럼 소나기를 맞으면 머리카락 올올이 빗물로 감기고, 주머니에 담긴 먼지처럼 답답한 가슴도 후련해지리라. 씹지 않고 말의 응어리도 풀 수 있는 소나기-빗질하는 가로수처럼 빨고 싶은 나날들. 옛날 어느 날 신부님은 내 이마에 물을 부으시며 마음을 빨아주셨다. 다시는 너의 삶에서 후회로움이나 욕됨이 없을지니라. 그러나, 어인 일인가. 내 마음은 갈수록 번뇌와 욕심으로 더럽게 얼룩져 샘터로 달려가 무릎을 꿇지만 마음의 주름살은 펴지지 않고 빛바랜 기도엔 바람만 오간다. 가난한 날들의 어두움, 기다리는 세월의 덩이진 아픔, 쫒기는 두려움, 누더기처럼 짜깁는 인정들-나는 언제나 외롭고 허기져 눈물을 흘려도 지워지지 않는다. 빨래를 한다. 흐르는 물에 담가 빨래를 한다. 깨끗한 빨래, 활활 털어 햇볕에 널면 빨래는 바람에 물고기를 날리고 거듭나는 몸짓으로 활개를 친다. 햇볕아래 눕는 눈부신 정결, 비로소 자유롭다. 어머니는 날이면 날마다 빨래를 했다. 손톱이 다 닳도록 비비고 두드렸다. 마디 굵은 손가락에 끼운 가락지도 손톱처럼 닳아 끈으로 두 쪽을 묶어 끼웠다. 흐르는 물소리에 실려 가던 빨래 방망이질 소리. 가슴에 서린 한을 자근자근 빨아대던 소리-지금은 지워져 들리지 않는다. 나도 어머니처럼 빨래를 한다. 빨래를 비비면 열 손가락 사이로 옛날이 흐르고 아리고 쓰린 삶의 가락이 굽이굽이 흐른다. 콩깍지 태워 잿물 내리고 광목을 필로 삶아 자갈밭에 널면 한 줄기 고달픈 흰 강이 출렁거렸다. 시집가는 딸이 한 끝을 잡고 지팡이에 의지한 노 할머니 한 끝을 잡고 눈으로 마름질하는 어머니 강줄기. 꽃가마 꽃상여를 앞뒤로 묶고 햇볕 아래 박꽃처럼 속살 보이던 광목마전에 어머니 근심도 하얗게 바랬다. 물은 언제나 고향. 오늘의 빈 잔을 채우고 마른 혼을 적셔준다. 물을 보면 물보라 위에 살아나는 추억의 송사리 떼-,기억의 징검다리 사이로 빠져나가며 생활의 뱃전에서 찰랑거린다. 나는 깨끗한 빨래이고 싶어 강물에 눕는다. 심신이 투명해지면 학처럼 날개를 달고 구만리 장천으로 비상하리라. 한 벌뿐인 옷을 들고 물가를 간다. 북한산 계곡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수유리 샘터에 앉아 언제나 진솔이고자 빨래를 한다. 바람은 옷자락에 풀을 죽이고 하루도 못 가 땀에 젖지만 진풀 먹여 밟고 두드려 옷깃을 살려야지. 삼베 모시처럼 상큼하게 고개를 들도록. 빨래를 한다. 새벽마다 남몰래 더러움을 쓸어 가는 청소부 할아버지 비질 소리처럼 새벽 미사 때 빈 성당을 채우는 신부님의 기도 소리처럼 외로운 샘터의 빨래소리. 물소리를 들으면 살아나는 청청한 영혼들. 머리를 감아 빗고 새 옷 입고 새벽길 떠나는 신부(新婦)처럼 물가로 간다. 지친 삶을 행구려고 샘터로 간다.
[작품의 감상]
위 글을 읽으면서 우리는 초산문적인 작가의 움직임, 그리고 시각에 가시처럼 파고드는 비유, 뿐만 아니라 그 모든 표현상의 특질에 의해서 살려지고 있는 삶의 저 깊은 속에 대한 급습과도 같은 통찰을 보게 된다. 술술 읽어 내려가기엔 다소의 노동력을 요하는 변해명씨의 작품세계는 정서의 충격과 인식의 갱신으로 점철되는 읽기의 환희를 촉발함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작가인 변해명씨의 글 쓰는 버릇일 수도 있겠거니와 이미 있는 생각을 글에다 옮겨 놓으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파고, 후비고 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캐내는 일로서 글을 쓰는 그의 특이한 글 버릇에서 비롯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위 글은 정감에다 교훈을 담는 기술이 아주 뛰어난 글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안스러울 정도로 몸과 마음을 사리면서 세심한 배려와 옹골찬 조심히 글의 행간이며 뒤에 마디마디 박혀있는 낌새를 느끼게 하는 문체. 거기에는 허공 중천에 매달린 줄을 타는 사람의 발놀림과 과녁을 향해서 맞추어진 화살의 내면적 긴장과도 같은 것이라면 어떨까. 실제로 글을 쓰고 있는 동안 이 작가의 붓끝이 떨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3. 달걀 이야기, 셋 <양미옥>
<1> 시어머니께서는 자격증만 취득하지 않았을 뿐 숙련된 산파이시다. 슬하에 열두 명의 자녀들을 두신 시어머니는 동네 아낙네들의 해산수발을 도맡아 해 오셨다. 시집살이를 시작한 지 이태쯤 되던 해에 나의 출산 날이 잡혔다. 시어머니께서는 예정일에 맞춰 차츰차츰 만삭이 되어 가는 내 배를 보며 손자 받을 준비에 들떠 있었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3월, 해질녘부터 슬슬 진통이 시작되었다. 나는 조산소에 가고 싶다는 말을 삼킨 채, 남편과 함께 산실로 꾸며진 아래채 방으로 들어갔다. 시어머니께서는 황급히 어디론가 다녀오시더니 ‘아가! 이걸 톡톡 깨어 먹어라.“: 며, 달걀 열 알을 가져오셨다. 나는 그 진통 중에서도 영문을 몰라 “어머니! 왜 달걀을 먹어요?” 라고 했다. “응, 그걸 먹으면 아기가 미끄러지듯 수월케 나오는 거란다.” 그 후로 나는, 둘째 셋째 애들도 달걀 열 알씩을 먹었고 아이도 순산하였음은 물론이다. <2> 어느 해 봄이었던가, 잠에서 깨어 창문을 열자 라일락 향기가 온 집안을 맴돌고 있었다. 참새도 마당 귀퉁이에서 내게 무어라고 종알거리는 아침이었다. 내 가슴에선 알 수 없는 탄성이 울려나오고 있었다. 그 날 나는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을 들고 학교로 달려갔다. 학교에는 벌써 급우들이 운동장에 모여 따스한 햇살에 뒤섞여 도란도란거리고 있었다. 운동장 모서리에서 뿜어내는 꽃들로 교정은 더욱 생기가 돋아 있었다. 얼마 후, 우리는 학교를 출발해서 멀지 않은 미륵산으로 소풍을 갔다. 내 가슴은 너무나 설레어 녹아 없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아슴하게 바라보이는 쪽빛 바다도 아름다웠고, 산등성이의 연록빛 나뭇잎도 아름다웠다. 그러나 나를 더욱 설레게 하는 것은 어머니가 싸 주신 도시락이었다. 달걀 다섯 알이나 삶아 도시락에 싸 주셨던 것이다. 산들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신록 속에서 그것을 펼쳐놓고 까먹던 맛은 참으로 좋았다. 입안에서 슬슬 녹던 어머니가 싸주신 달걀의 맛. 그때 나는 혼자서 먹기가 아까워 집에 네 알을 남겨 가지고 왔다. 동생들이 덥썩덥썩 메어먹으며 좋아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가끔 그 시절이 그립다. 그때마다 달걀을 삶아 먹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지난날의 그 맛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어머니의 손맛이 들어 있지 않아서일까. <3> 얼마 전에 일이다. 모처럼 별식으로 떡국을 끓였다. 가족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수저를 들었다. 떡국을 유심히 보던 남편이 “왜, 노른자위가 보이지 않지?” 라고 물었다. 옆에 있던 큰애가 말했다. “그 달걀에는 노른자위가 없겠지요.” 하고 대신 답을 하였다. 그러자, 며늘아이가 한 술 더 떠서 “혹시 노른자위는 어머니께서 마사지하신 게 아니예요?” 하며, 빙긋이 웃는 게 아닌가. “그래, 새 아이 말이 맞다.” 하고 나는 웃어 주었다. 그러자 남편이 흐뭇한 표정으로 우리 고부간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장단을 맞추었다. “의좋은 신세대 고부간이로군.” 그 날 저녁에 끓인 떡국 속에는 달걀 노른자위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온 가족이 두 그릇씩이나 비웠고, 식사시간은 그 어느 때 보다 마냥 유쾌하기만 했다. 나는 오뚝이 모양을 한 달걀을 보면, 오뚝오뚝 오뚝이 인생을 배울 것만 같다. 게다가 싱싱한 달걀을 대하면 유난히 예뻐해 주셨던 시부모님과의 추억들을 잠시나마 회상할 수 있어 좋다. 또 삶은 달걀에게선 친정엄마의 따스한 체취가 느껴지는 것만 같다. 나는 달걀을 좋아한다. 싱거운 추억거리와, 내 인생의 영원한 노스탤지어(Nostalgia)를 사랑하기에.
[작품의 감상]
사상이 없는 수필, 철학이 없는 수필을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수필의 소재가 비록 신변의 일이어도 그 문장 속에 사상이 숨어 녹아 있다면, 문학적으로 형상화의 과정을 거친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수필문학이 신변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 특성이라면, 문제는 문학성을 확보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수필에서의 사상성 확보는 바로 수필문학이 문학성을 지니게 하는 관건이라 하겠다.
양미옥의 수필 ,달걀 이야기, 셋>은 주화소(主話素)인 ‘달걀’과 연관된 세 도막의 에피소드를 축으로 하여, 결미 부분에서 이를 통합하여 공통적인 주제를 발견해 내고, 이를 독자들에게 메시지로 전달하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과거 회상과 현재의 에피소드가 복합적으로 사용됨으로써 이 작품은 그저 회상조의 감상적이고 회고적 정서에만 매달리지 않고 있다. 문장이 간결하고 산뜻하면서 단편적인 세 이야기가 옴니버스 식으로 통합 처리되는 기교의 묘미, 완벽한 미적 구성의 원용, 주제 의식의 명료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신변의 이야기를 화소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흔히 신변수필에서 보이는 수필 쓰기의 안이함이나 읽기의 식상함에서 벗어나 사상성의 탁월함을 보인다. 이 수필은 우선 구성 방법이 특이하다. 달걀과 관련한 세 도막의 화소가 공통된 주제 구현을 위해 상호 유기적으로 연관을 맺으면서 접속되어 있다. 수필의 화소인 소재라고 해야 별반 특이하지 아니하다. 기상천외하다거나 경이적인 것도 아니다. 그저 누구나 한 번 쯤 생각해 보았음직한 그렇게 평범한 이야기, 신변잡사라고 해도 좋을 성 싶은 것이 이 수필의 소재요, 대수롭지 아니한 세 도막의 삽화에 불과하다. 그런대도 왜 이 수필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가 ? 이 수필은 일단 이야기의 수준에서 벗어나 불필요한 요소들을 과감하게 잘라낸 문장의 순수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이야기는 시어머니와 관련한 출산 과정에서의 고부간의 사랑이 진하게 묻어 나온다. 둘째 이야기는 소풍과 관련한 친정어머니의 사랑 이야기이고 셋째 이야기는 가족간의 대화를 통한 현대의 고부간의 사랑 이야기이다. 시대별로 본다면 첫째와 둘쩨의 이야기에 해당하는 것은 과거 회상의 시점이요, 셋째 이야기는 현재의 시점이다. 또 이 수필은 각 도막의 이야기가 대상의 추이를 보이고 있다. 즉 시어머니--친정어머니--가족(현대의 고부 사이)로 진행되면서 과거와 현대라는 두 시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시대가 변해도 변함없는 ‘사랑’의 진실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대상은 사믓 다르지만 결미에서 가족이라는 통합체로 승화함으로써 주제의식이 구현되고 있다. 필자가 여성이라는 측면에서 대상이 한정되어 있음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이 같은 구성의 묘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염두에 둔 작가가 천착하고자 하는 인간성 회복이라는 대전제 아래 놓여 있다. 첫째, 둘째 이야기에서 보듯 가난이라는 남루를 걸치고 살아야 했던 질곡의 시대, 그땐 달걀 한 알의 의미가 얼마나 큰 것이었던가 ? 그러나 이제 시대가 바뀌고 풍요를 구가하는 현대인에게는 달걀의 의미는 참으로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래 셋째 이야기에서와 같이 달걀은 생존의 문제가 아닌 삶의 질인‘마사지’용으로 퇴색되어 간다. 그럼에도 변할 수 없는 건 바로 ‘사랑’이라는 메시지다. 고부 사이에 달걀의 의미와 사상의 차이가 있을 지언정, 그 본래의 정신으로 회귀하는 감동이 있지 아니한가. 부모의 사랑, 가족 간의 사랑은 아무리 말해도 진부하지 아니하다. 수필문학은 바로 그 사랑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 수필을 그저 사랑이라는 주제만을 제시하기 위해 직설적 방식으로 써 놓았다면, 윤리교과서쯤에서 타락했을 것이다. 이 수필은 이런 보편적인 신변수필이 갖는 취약함에서 일탈하여 예술적인 승화를 꾀하고 있다. 수필어의 사용이 그러하고 정서의 동원이 그러하다. 오랜 세월 세상살이를 하면서 알게 모르게 화자의 내면 속에 용해되어 정서화 되고 사상으로 고착된 정신세계가 한 편의 작품 속에 이렇게 녹아 흐른 것이다. 이 수필의 묘미는 이들 세 가지의 화소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고 통합화의 과정을 거쳐 결미 부분에서 “나는 오뚝이 모양을 한 달걀을 보면, 오뚝오뚝 오뚝이 인생을 배울 것만 같다. 게다가 싱싱한 달걀을 대하면 유난히 예뻐해 주셨던 시부모님과의 추억들을 잠시나마 회상할 수 있어 좋다. 또 삶은 달걀에게선 친정 엄마의 따스한 체취가 느껴지는 것만 같다. 나는 달걀을 좋아한다. 싱거운 추억거리와 내 인생의 영원한 노tm탤지어를 사랑하기에” 라는 말로 마무리하고 있다. 확연한 주제의식을 갖고 독자들에게 메시지로 전달되고 있다는 점으로 적지 아니 감동을 자아내게 한다. 자족 사이에 뜨거운 사랑, 이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별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잔잔하게 파문일 일구는 ‘사랑’이 참으로 아름답다. 세상 모두가 이렇게 살 수 만 있다면 무엇이 걱정일까. 이 수필은 아주 작은 일상이지만 이를 통해 독자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엄청난 효과를 지니고 있다. 특히 이 수필의 강점은 작가의 건강성에 있다고 하겠다. 세상을 부정적 단견으로 보지 아니하고 긍정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우리를 기쁘게 한다.
그렇다. 수필문학은 분명 자잘한 일상을 중심으로 엮어지는 신변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수필이 여기에 이르면 감동과 정서의 파장은 엄청난 것이 된다. 이 점을 “수필의 특성도 모른 채 ‘신변잡기’라고 매도하기 일쑤인 소아병적 기질의 논자나 비판자들이”귀담아 들어야 할 일이고, 수필을 창작하는 수필가들도 자기반성의 계가가 되어야 할 줄 안다. <작품 및 감평 자료 참조 : 한상렬箸 ‘수필 창작과 읽기’에서>
자기 고백적 작품의 예
눈 내리는 창가 <김동필> 겨울의 밤공기를 공기를 가르는 마지막 완행열차가 요란을 떨고 지난 지도 오래다. 간간이 들려오는 개 짓는 소리가 방안을 더욱 고요하게 이룬다. 허한 마음이다. 밖엔 소복소복 흰눈이 쌓이고 있다. 창을 밀쳐보니 홀로 지키는 가로등의 멍청한 졸음 아래 활처럼 나뭇가지가 탐스런 눈송이를 무겁게 이고 있다. 난 고독한 시인이 되어 눈 빛깔의 예쁜 언어들을 모아야겠다고 벼르고 있다. 이 밤은 눈 내리는 소래로 가득하다. 아니 이 밤은 눈 내리는 소리로 충분하다. 이 밤의 적료함은 평범한 애인들이 느끼기엔 심각할 정도로 깊다. 창턱에 고이는, 문득 고향의 소식을 홀로 물으며 잠시나마 또 다른 눈 나라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 구도가 은은한 흰 빛 속의 설경, 캘린더에 머문다. 오늘밤의 향수는 찬란한 밤거리에 네온사인을 볼 때 느끼는 향수와는 다르다. 더 훨씬 진한 향수다. 핑크빛 삶으로 이끌어 주는 어떤 미소가 언젠가 미덥게 밑바닥을 자리했기에 난 이맘때쯤이면 눈 내리는 창가의 고향을 아프게 그리워하는 것일까. 아니면 지난날의 바래간 추억이 이 밤의 창가에 너무도 애련히 아롱지는 사연일까. 눈빛에 젖어 삼라만상이 침잠의 세계로 빠져가던 밤, 눈빛이 달빛을 삼키던 밤, 앙상히 흩어진 가지가 목놓아 추위에 떠는 심야의 늪에서 불이 마지막 사위어 가는 화롯가의 한가롭고도 부담 없는 담소를 즐기며 고향의 어린 시절을 보냈었다. 그 날 밤엔 어머니의 젖무덤 마냥 여기저기 쌓인 눈발을 밟으며 참새를 잡아 새탕을 즐겼다. 지금 아랫목에 두 발을 모두고 앉아 소반에 담아진 귤 한 개를 까고 있다. 나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일까. 창가에 쌓이는 눈빛에 취해 이렇게 흥얼거리고 있다. 사랑의 연가가 그리운 가슴에 사랑의 준비가 되듯이 이 밤에 불러보는 창가의 오붓한 이 노래가 마름밭에 가장 순한 숨결로 번져 영원한 내 인간 수업의 지주로 군림할 것 같다. 겨울은 정지요 무덤이라고들 한다. 정지 속에 적묵(寂黙)함을 배워 좋고 무덤 속에 전설이 아련하여 좋다. 그저 함박눈이 수북수북 쌓이면 좋다. 천부의 백설 앞 에 철저히 심화된 고독은 없어도 괜찮다. 애정과 회한의 눈물이 없어도 좋고 미인의 가슴처럼 유려하지 않아도 괜찮다. 애정과 회한은 서툴지 않게 대지에 고루고루 뿌려주면 만족하다. 그러나 그 속엔 수 없는 태고의 고요가 잠겨 있다. 그래 난 시정어린 설경 속에 격조 높게 창가에 기대고 있다. 지금, 밖엔 지나는 인기척이 밤공기를 흔든다. 파아란 불빛이 흘러내리는 포장마차 안에서 한 잔의 소주로 입가심한 심각한 표정들이 지나는 것 같다. 지금 눈 내리는 거리엔 다방에 홀로 앉아 생강차의 매큼한 냄새에 취해 있는 사람, 텁텁한 막걸리 사발을 앞에 놓고 의자 헝클어진 술집에서 작부의 역사를 듣는 사람, 흰 길을 사랑하는 사람과 백설의 난무를 완상하며 무작정 걷고 있는 사람, 포근히 안주 할 수 없는 쓸쓸한 여창(旅窓)에서 향수에 병들어 뜨근한 고향의 아랫목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눈 내리는 밤을 지키고 있을 게다. 그리고 또 누구는 눈 날리는 방파제 둑 위에 밤의 바다를 굽어보며 분출하는 인생 역정의 참담에서 회억(回億)의 흰 눈을 설명하고 있으리라. 온 누리가 백설로 은세계를 이룬 지금 난, 다시 창문을 열러 본다. 특유의 추위가 무서운 바람도 없 피부 속으로 파고든다. 저렇게 흰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데...... 저 속엔 혼탁한 세류에 번질 위선은 하나도 없다. 순백이다. 흰 세계로 다듬어진 품속에 내 몸을 던져 놓고 순백의 지순한 감정을 숙명으로 맞고 싶다. 저 흰눈을 사랑하는 사람은 진실한 삶이 가져다주는 막혀버린 절망과 고뇌 안에서 숙명을 사랑하며 살아야 하지 않았던가? 어떤 불행과 번뇌도 이 밤의 숙연한 감각 앞에는 아름다움으로만 승화한다. 이 밤이 새면 내일 아침 영창에 내 입김이 서려 비추(悲秋)빙화(氷花)의 멋이 가슴에 와 닿을 줄 알지만 그냥 이대로 잠을 이룰순 없다. 흰 눈 쌓이는 창가에 혼자 있는 연습을 더 익혀야 겠다. 만화방창한 봄날이나 비추(悲秋)의 시부(詩賦)에서도 느끼지 못한 이 고고한 한 허리의 밤을 눈 내리는 창가에 홀로 보내련다.
[감상 포인트]
위 수필은 한마디로 자기 고백적인 수필로 독백조의 전형을 보이고 있다. 흔히 이런 유형의 수필이 자칫 내용의 사상성보다는 언어의 성찬에 치우치는 잘못을 저지르기 쉬움에도 불구하고 자기 관조를 통한 인간 존재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수필의 경지는 상당한 수준의 내적 성찰과 언어적 연찬이 아니고는 문학성을 얻기 힘든 경우다. 위 수필의 소재는 간단하다. 눈 내리는 창가에 서서 명상과 사색에 잠겨 연상되는 화소들이 이 수필의 주조를 이루고 있다. 한 마디로‘고독’이다. 그러나 이 수필에서의 고독은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감상적 단상의 일단이 아니다. 부정적 삶이 아니고 건강한 삶의 모습이 수필의 전편을 감돌고 있다. 그에게 있어 눈 내리는 겨울의 고독은 미래를 지향하는 건강하고 생명력이 충일하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이런 생활인의 자세는 바로 존재의 문제를 규명하고자 하는 수필문학이 천착해야 하는 메시지에 충실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자칫 감상적 편린에 치우필 소재가 미학적으로 퍼리되었음은 바로 작가의 능력에 있다 하겠다.
콩트식 반전으로 전도된 가치의식에 대한 사회비판적인 글 어떤 콤플렉스 라대곤 별로 할 일이 없는 요즈음 나는 아침을 먹고 나면 집사람에게 다녀온다는 말 한마디로 대문을 나선다. 대성복덕방에 도착하면 오전 10시30분쯤이 된다. 대성 복덕방 박 사장은 우리와 죽마고우로서 한참 부동산 붐이 일어났을 때 바쁘게 뛰더니 요즈음은 겨우 난방비와 전화비 정도 벌이라고 하면서도 불평이 없다. 마음도 후해서 할 일 없고 갈 곳 없는 우리가 매일 모여서 떠들고 어느 때는 심한 다툼질을 해대도 박 사장은 항상 우리를 웃는 얼굴로 대해 준다. 그러다 보니 우리들은 그저 직장처럼 출근을 하고 있는데가가 바둑이나 장기는 물론이고 화투놀이까지 하는 가장 마음 편한 안식처이기도 하다. 사람 사는 곳에 아무나 오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이곳에 출입을 하려면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는 규약 같은 것이 정해져 있다. 가령 낯선 사람 같으면 받아주지도 않았고 혹여 몇 번 출입을 한 사람이라도 요즈음 말하는 매너가 나쁜 사람은 여러 사람의 냉담한 눈빛 때문에 그 스스로 발길을 끊곤 했다. 그 가운데 예외라고 할 수 있지만 김 교장 선생님이야말로 우리가 마다할 이유가 없는 좋은 사람이었다. 누구의 소개로 나오시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전에 초등학교 교장 직을 정년퇴임하신 분이었다. 선생님은 풍채도 점잖으셨지만 점심으로 자장면을 먹을 때면 언제나 앞서서 점심 값을 지불하고는 생색 한 번을 내시지도 않았고 더욱이 해박한 지식은 말할 것도 없고 조용하시고 항상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으시는 인자하신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존경받기에 손색이 없으신 분이었다. 아무나 하고도 잘 어울리시고 더욱이 한 잔씩 하시는 술자리는 노소를 가리지 않고 동석해 주셨고 주석에서의 해학과 유머는 우리를 즐겁게 해 주었다. 생겆 화(火)같은 것은 내실 일이 없어 보이던 선생님이 어느 날인가 우리가 민망할 정도로 몹시 화를 내신 적이 있었다. 우리 중 누군가 아들놈 주례를 부탁했었다. 그런데 그는 한 마디로 거절한 건 그만두고 망신스럽도록 화를 내는 것이었다. 얼굴까지 붉히시면서 들고 계시던 술잔까지를 팽개치고 밖으로 나가버리셨기 때문에 부탁한 친구를 그만두고 옆에 있던 우리까지도 우습게 되고 말았다. 멋쩍기도 하고 선생님이 너무 한다 싶어 망신당한 친구를 달랬지만 선생님과는 인사도 없이 헤어지고 말았다. 그 일로 해서 선생님과는 다소 서먹거리기 시작했는데 나는 우연하게도 며칠 후 선생님과 단둘이 목로집에 앉을 기회가 있었다. 장본인이 아니었던 나는 다소 이상하기는 했지만 선생님에게 화가 날 처지는 아니었기에 별 불편함 없이 술잔을 건네다가 전날 박 군의 주례를 거절하신 것은 좀 심하지 않으셨습니까 라고 말을 건넸다. 선생님은 고개를 숙이고 망연히 앉아 있다가 깊은 결심을 한 듯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나자장 내 말하리다. 평생 선생질을 한 내가 왜 주례를 거절하겠소. 나는 사실 현직에 있었을 때는 바쁘기도 했고 또 초등학교에 재직하다가 보니 주례를 부탁 받은 적이 별로 없었소. 한데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 얼마 후 동네에 살고 있던 제자 놈 하나가 찾아와 주례를 부탁하기에 참 기특하고 반갑기까지 하더이다. 해서 나는 새로 양복까지 한 벌 맞춰 입고 밤잠까지 설치면서 주례사를 연습했었소. 그 주례사라는 것이 신랑. 신부에게 영원히 귀감이 될 수 있어야 했기에 퍽이나 신경을 써야 하지 않았겠소. 평생 교단에 섰지만 주례는 서툴 수밖에 없었소. 그 날 하객들의 소란스러움에 긴장되어 있다 보니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소. 며칠씩 잠을 설치고 준비한 주례사가 분위기에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순간적으로 분위기를 바꿀 요량으로 유머를 써보기로 했소. 그래서 요즈음 고스톱 좋아들 하시는데 화투장이 몇 장인지 아십니까 ? 라고 서두를 꺼냈지요. 때 아닌 화투소리에 하객들이 이상해서 조금 조용해지는 것 같았지요. 됐구나 싶어 다음 말을 하려는데 사회를 본다는 친구가 메모지를 하나 전해줍디다. 힐끗 쳐다본 메모지에 신랑 . 신부가 비행기 시간이 없으니 주례사를 끝내 달라고 써 있지 뭡니까. 순간 나는 화도 나고 당황해서 밤새도록 외우고 연습했던 주례사의 순서를 까먹고 말았소. 그래 엉겁결에 오늘은사정이 있어서 주례사는 이것으로 끝이요 하고 말아버렸지요. 그러니 그 날 주례사는 ‘화투장이 몇 장이지 아십니까? 오늘은 사정이 있어서 주례는 이만 끝 입니다’ 이게 전부였소. 그 이후 나는 마을에서 웃음거리가 되었소. 길을 가다가 만나는 꼬마들도 화투가 몇 장이냐 끝! 이게 인사이니 내가 주례를 다시 할 수 있겠느냐 말이요“ 나는 그 날 이후 김 선생님을 만나면 웃음이 나오기 전에 요즈음 결혼식장의 무례와 젊은이들의 체면치레 형식에 웃음거리가 되고 쓸쓸해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에 연민이 보내졌고 요즈음의 황당하고 급한 예식장의 풍경에 그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상포인트]
위 수필은 콩트식 반전을 십분 발휘한다. 결혼식 주례를 부탁하였건만 평소 점잖고 인품 있던 김 교장 선생은 얼굴을 붉히면서 술잔까지 팽개치고 밖으로 나간다. 전에 없었던 이 일로 인해 주례를 부탁한 사람도 그렇고 같이 있던 사람들도 역시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이런 돌변할 일이 무엇 때문인지 알 리 없는 화자에게는 이런 심리적 변화의 원인이 궁금하기 짝이 없다. 이 수필은 위에 이 일의 원인에 대한 김 교장 선생의 주례에 얽힌 콤플렉스를 콩트식으로 엮어가고 있다. 주례의 부탁을 받고 기껏 ‘하투장이 몇 장인지 아십니까? 라는 말로 시작하여 주례사를 마감하게 했던 기막힌 사건을 소설적 기법을 사용하여 해학적으로 희화함으로써 일종의 페이소스를 일으키게 하고 있다. 이 수필은 오늘날 일그러진 결혼 풍속도를 비판하고 젊은이들의 전도된 가치의식에 대한 사회비판적인 성격도 다분히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발견해 낼 수가 있다 할 것이다. 흔히 오늘의 수필들이 단순한 신변잡기나 잡다한 신념의 무질서한 나열에 그쳐 참다운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수필문학의 자유분방한 형식과 제재의 다양성이라는 점 때문에 생긴 오해가 아닐까 . 그러나 수필이란 원래 지성을 바탕으로 한 정서적이고 신비로운 이미지를 표출하여 독자를 감동시키는 문학이다. 작가는 이런 수필 쓰기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의 희곡적 수필을 통해 비평정신까지 발휘하고 있음을 이 작품을 통해 엿보게 한다.
<작품 및 감평 자료 참조 : 한상렬箸 ‘수필 창작과 읽기’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