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1년 5월 24일. 이 날은 빅토리아 여왕의 생일이었고, 다분히 의도적인 이유로 영국 군 역시 광저우에 상륙했습니다. 성 밖의 청나라 군사들은 영국군의 모습을 보자마자 겁을 집어먹고 총 한발 쏘지 않고 달아났으며, 곧 모든 부대는 재빠르게 달아나버렸습니다. 침략군 앞에 백성들만 무참하게 노출된 것입니다.
영국군은 무방비의 주민들에게 잔혹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료들이 민족주의 성향을 고취시키려는 정치적인 목적도 없지는 않았겠으나, 일단 광동군무기(廣東軍務記)의 기록을 보면,
"남편은 화를 당하고, 아내는 능욕을 당하며, 두 목숨이 모두 사라졌다. 자식은 묶이고, 어미는 고생하고, 몸과 집은 모두 망가졌다. 또한 논밭은 모두 짓밟히고, 집은 헐리고, 무덤은 파헤쳐지고, 노소를 불문하고 강간당했다. 가난한 자의 집은 경(磬)을 매단 듯 하고, 부자의 집은 벽만이 헛되이 서 있다. 참으로 귀신이 분노할 일이며, 초목도 한탄할 일이다."
병사들은 도망가고, 남은 주민들은 무참하게 학살당하고 강간당하자, 결국 참지 못한 주민들은 스스로 괭이나 삽, 몽둥이를 들고 영국군에게 대항했습니다. 상대가 될리는 만무하지만, 저들이 나를 죽이려 드는데, 알아서 죽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 법입니다. 영국군의 악명이 워낙 높아 곧 90여개 마을, 2만여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 마드라스 제 37보병단 소속 영국군 1천여명을 포위했습니다. 하필이면 이 날은 비가 내리는 날로, 마드라스 병단은 플린트록 총(flint lock) 사용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 날은 5월 30일입니다. 왜 날짜가 문제가 되는가 하면, 5월 27일, 일종의 광동화약(廣東和約)이라고 부를만한 형태의 협상이 벌어진 탓입니다.
요강을 모아 영국군을 막으려던 장군, 양방은 물론 이 무렵에는 그것이 아무 소용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래서는 전쟁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는지 영국군을 이길 자신이 없어 적당히 협상을 맺고 일을 끝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조정에서는 허락하지 않겠지만, 아마도 어떻게든 얼버무릴 자신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광저우에서 베이징은 먼 곳입니다.
당시 양방 등이 영국과 합의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대신과 장군 및 외성병은 깃발을 들지 않고 광주성을 나와 6일 이내에 성 밖 60마일 지점까지 물러날 것.
2. 청 당국은 영국군에게 600만 달러를 지불할 것. 100만 달러는 27일 해가 지기 전에 지불하고, 잔액은 1주일 이내에 지불할 것.
3. 전액이 지불되면 영국군은 호문 밖으로 철수하고, 점령한 요새들을 모두 반환하나, 양국 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청나라는 이들 요새의 방비를 강화해서는 안된다.
4. 청나라 측은 외국 상관의 약탈 및 스페인 선박 빌바이노호 공격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할 것.
5. 광주지부에 전권을 위임할 것
이 중 4번째인 외국 상관의 약탈의 경우에는, 영국군의 만행에 격앙된 민중이 외국 상관에 난입한 일이었고, 뜬금없다고 여겨질 수 있는 스페인 선박의 경우에는, 청나라 병선이 빌바이노호 호가 아편을 실은 영국 배인것으로 착각하여 화염통을 던진 일입니다. 5번인 '광주지부에 전권 위임' 의 경우에는, 해당되는 인물인 여보순(余保純)이 어떤 이유인지, 영국측으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들어간 조항입니다.
이러한 조약 탓에, 여보순은 2만여의 주민들이 영국군을 공격하려 하자, 비를 뚫고 달려와 민중들의 해산을 촉구했습니다.
"만약 포위를 풀지 않으면, 600만 달러의 배상금을 주민들에게 물리겠다."
600만 달러라면 주민들이 100년이 넘게 일을 해도 절대로 갚을 수 없는 금액입니다. 결국 이렇게 되자, 주민들은 자진해산했습니다. 광저우에서는 베이징에 적당한 핑계를 대며 ─ 물론 몰래 맺은 조약은 감추고 ─ 싸우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고, 공행의 대표인 오소행이 은 200만냥을 내는등 어찌어찌 요구한 배상금 600만 달러를 마련하여 영국측에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베이징에는 '영국군이 격퇴되었으나, 무역을 간청하고 있으므로 허락해주는것이 낫다' 는 요지의 보고를 올렸습니다.
만약 베이징의 조정이 이 모든 사기극을 전혀 눈치도 채지 못했다면 너무나 무능한 일이고, 만약 알고 있다고 쳐도 모른척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일이 더 꼬여봐야 복잡해지기만 할 뿐이므로, '지방 차원'의 국지적인 일로 마무리 짓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베이징, 광저우, 영국 함대의 손발이 척척 맞아떨어지고, 이런 식으로 끝나면 사건이 종결될 수도 있었지만, 개입하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런던의 시계탑이었습니다.
영국 외무부의 파머스턴은 현지의 지휘관, 찰스 앨리엇이 월권행위를 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마음대로 조약을 맺고, 점령한 지역을 내주거나 하는것은 독단이며, 대영제국의 위엄을 떨어뜨리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결국 찰스 앨리엇은 독단 행위로 인해 파면이 결정되어고, 1차 아프간전쟁에서 공을 세운 헨리 포틴저가 후임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는 정책 노선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단순히 상업적인 이익이 아닌, 영국이라는 국가의 위엄을 중국에 제대로 떨치겠다는 제국주의적 목표가 새로 생겨난 것입니다.
영국의 위엄. 이는 청이라는 지친 거인을 완전히 때려눕혀, 흙탕물에 쳐밖아야만이 세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베이징은 이 '아편 전쟁'이 광저우라는 지방에 한정된 일이기를 끊임없이 바래왔지만, 런던은 이 전쟁이 광저우와의 전쟁이 아닌 '중국과의 전쟁' 이 되는것을 원했습니다.
새로운 지휘관 헨리 포틴저는 8월 10일, 광저우에서 함대를 동북 방향으로 항진시켜, 하문을 손쉽게 함락하고 주산열도(舟山列島)로 진군했습니다. 순식간에 청나라 영토가 영국군에게 점령되었고, 이후 영국군은 닝보(寧波)로 진군했습니다. 닝보를 지키던 장군 여보운(余步云)은 상대가 안된다고 보고 싸워보지도 않고 퇴각했습니다. 여보운은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싸우지 않고 퇴각한다면, 이는 사형에 처해도 무방합니다. 문제는, 아편전쟁 기간 수많은 청나라 장수들이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기를 반복했는데, 책임을 지고 사형 당한 사람은 오직 여보운 하나뿐이라는데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보운이 한족이기 때문에, 다른 만주족 장수들이 책임을 면제 받을때 홀로 사형되었다고 중얼거렸습니다.
그 이후에 벌어진, 청나라 군과 영국군의 교전을 자세하게 열거하는건 쓸데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영국군이 공격하면, 청군은 도망쳤고, 청군이 공격하면, 영국군이 격퇴했습니다. 똑같은 내용의 반복입니다. 마치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이 벌이던 삼광작전(三光作戰)처럼, 영국은 중국에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해서인지 각지에서 학살과 폭력을 자행했습니다. 영국군은 여러 지역을 손쉽게 점령하고, 학살 하고, 다시 전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장강으로 진입했습니다. 중국의 대동맥으로 '서양 오랑캐'의 함대가 깊숙히 진입하고, 마땅히 저항하는 상대들도 없었던 것입니다. 영국군은 마침내 진강(鎭江)에 이르렀습니다.
과거, 정성공은 진강을 점령했고, 남경을 공포에 질리게 했습니다. 진강은 장강과 남북의 운하를 모두 제압할 수 있는 요지로, 그 전략적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곳입니다. 이를 공격하는 영국군의 병력은 7천여명이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지구 반바퀴를 돌아 강을 타고 중국의 심장부로 침입하는 영국군의 숫자가 7천여명인데 비해, 자국 영토의 요지에서 이를 방어하는 청나라 정부의 병력이 주방기병 1,200명, 청주병 200명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편전쟁을 치루는 청나라의 태도가 얼마나 형편없는 일인지 보여주는 것으로, '근대화된 서양 문명과 낡은 동아시아 문명' 같은 거대한 담론으로 들어갈 것도 없이, 무기나 함대의 질과 관계없이 태도만으로도 지고 들어간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나라는 이미 형편없는 나라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이러니한 일은, 이 진강 공략전이야말로 영국이 중국으로 원정을 하면서 걱정했을, 힘겨운 형태의 싸움이 벌어진 유일한 케이스라는 것입니다. 이곳을 지키는 인물은 주방만주기병 부도통(副都統) 해령(海齡)이라는 인물로, 괴팍한 인물로 통한 그는 전투가 벌어지기전, 내부를 깨끗하게 한다며 보증인이 없는 승려, 도사, 걸인, 부랑자 등을 모두 잡아다 매국노라며 목을 베어버렸습니다. 그는 성문을 걸어잠구고 모든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으며, 시민들도 싸움에 끌여들었습니다.
뭔가 이상한 분위기가 퍼지는 진강으로 영국군은 공격을 가했고, 그야말로 대단한 혈전이 벌어진끝에, 영국군도 중국에 들어오고 나서 가장 큰 피해를 입고 간신히 진강 제압에 성공했습니다. 수비병은 거의 대부분이 전사했고, 해령은 자살했습니다. 영국군은 진강에서도 여자를 보기만 하면 강간하고 죽였습니다.
진강의 함락은, 곧 남경의 함락이라는 말과 일치합니다. 남경의 함락은, 중국 전체를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 될것이 분명합니다. 그러한 점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이미 전쟁에 소모되는 비용도 어마어마했습니다. 이미 청나라는 전쟁을 하기전부터 은유출로 경제가 파탄이 나고 있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전쟁을 치루고 있으니, 경제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되었습니다.
마침내, 도광제는 - 사실상의 - 항복 선언을 했습니다.
"짐이, 어찌 연해 신민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외이를 다소 회유할 방도를 생각해 보지 않았겠는가."
영국 함대는 남경에 육박했습니다. 결국, 중화가 굴복했습니다.
첫댓글 역시... 건륭제때부터 급격히 눈에 띄던 청의 군사적 역량의 부실이 아편 전쟁때는 눈뜨고 보지 못할 정도였군요. 잘 보고 갑니다.
7000으로 대청제국이......
어느 민족이나 집단이든 권력을 잡고나면 썩고 나태해지는것......결국 도적이 창궐하든지 반란이 일어나든지 외적이 침입하든지 하여 망하게 됨.
사실 이때의 청나라는 [백련교의 난]으로 상당한 국력을 소모한 상태였습니다. 도광제의 아버지인 가경제 때의 일인데, 무려 10년이라는 기간동안 이어진 대란으로 ㅄ같은 관군 대신 각지의 의용군인 '향용'들이 주역이 되어 겨우 난을 진압하지요...-_-;
그리고 사실 이때는 물론이고 거의 1900년대 가까이 갈 동안에도 중국의 시각은 거의 변함 없었습니다. 이른바 '양이(洋夷)'는 양이일 뿐, 오히려 제국을 유지하는 비용과 대가가 양이들에게 떡고물 주는 것보다 더 막대했기 때문입죠...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