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이 안남 왕자를 죽인 것에 비해, 안남국은 조선인 표류민에 대해 호의를 베풀었다. 1687년 제주를 출발한 김태황(金泰璜)과 일행 24명은 표류를 당해 안남의 회안부(호이안)이란 곳에 표착했다. 이들은 안남국에서 제공해주는 숙소와 쌀과 돈을 받아서 6개월 정도 살았다. 안남국의 왕은 안남국을 방문한 청나라 상인에게 부탁해 김태황 일행을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이 때에 왕은 청나라 사람들에게 수고비를 주었고, 조선과 교류할 생각으로 문서도 보냈다. 또한 만약 청나라 상인이 조선에서 답장을 받아서 안남으로 되돌아오면 큰 보답을 해주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청나라 배가 제주에 도착하자, 조선에서는 이를 표류한 것으로 취급하고 청나라 사람을 한양을 거쳐 청나라 수도 북경으로 돌려보냈다. 안남국왕의 호의와 청나라 상인의 성의도 무시하고, 오직 과거 사례에 따라 일을 처리해 버린 것이다.
안남과 조선이 외국인을 대하는 태도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 17세기 말 안남은 이미 중국, 일본을 비롯해 포르투갈 등 유럽의 여러 나라와 교류를 했기 때문에, 자기 나라를 찾아온 외국인을 어떻게 대할지를 잘 알고 있었지만, 조선은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과 안남과의 교류는 계속될 수가 없었다.
세상을 향한 열린 길, 표류
오늘날과 같이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과거에 표류는 다른 나라의 이국적인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일찍부터 활발한 해상활동을 펼쳤던 우리 조상들에게 표류는 어쩔 수 없는 상처였지만, 이로 인해 새살이 돋는 순기능의 역할도 많았다.
명-청을 제외하면 외국에 대한 정보를 거의 얻지 못했던 조선에 표류민의 경험담은 새로운 자극이었지만, 이를 적극 활용하지 못했던 것이 조선의 한계였다. 네덜란드는 하멜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조선과 직접 교역하기 위해 준비를 하기도 했었고, 안남국은 바다를 통해 조선과 국교를 맺기를 원하였다. 하지만 조선은 낯선 외국인을 원숭이 보듯 했다. 표류가 세계를 향해 열린 길이었음에도, 표류민의 경험을 적극 활용하지 못했던 것은 조선 역사의 아쉬움이었다.
참고문헌: 김영원 외 저, [항해와 표류의 역사], 솔, 2003;핸드릭 하멜 저, 김태진 옮김, [하멜표류기], 서해문집, 2003;최부 저, 서인범·주성지 옮김, [표해록], 한길사, 2004;장한철 저, 정병욱 옮김, [표해록], 범우사, 1979;서미경 저, [홍어 장수 문순득, 조선을 깨우다], 북스토리, 2010;조흥국 저, <한국과 동남아의 문화적 교류>, [실크로드와 한국문화], 소나무, 2000;전영섭, <10〜13세기 표류민 송환체계를 통해 본 동아시아 교통권의 구조와 특성>, [석당논총] 50집, 2011;정민, <표류선, 청하지 않은 손님>, [한국한문학연구] 43집, 2009;유서풍, <근세동아해역의 위장표류사건>, [동아시아문화연구] 25집, 2009;김용만, [지도로 보는 우리바다의 역사], 살림, 2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