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깊이 깨달은 자만의 가능한 고백
(로마서 7: 15-25)
바울의 갈등
사도 바울에겐 고민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남보다 더 잘 살며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을까?
이런 세속적인 고민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고민은 참으로 거룩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19절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바울 자신이 원하는 것은 선이었고, 원치 않는 것은 악과 죄였습니다.
그런데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15절도 마찬가지 고민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
는 그것을 함이라”
왜 원하는 선을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할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이 바로 바울의 갈등이었고 고민이었습니다.
바울이 사도로 부름 받기 전에는 유대교인이었습니다.
유대교인 중에서도 율법에 아주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증오하
면서까지 핍박을 했던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감옥에 넣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납니다.
다메섹으로 가고 있는데 갑자기 큰 빛이 비칩니다.
강렬한 빛 때문에 엎드려 있는데 하늘에서 음성이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나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
이러한 신비한 체험을 할 뿐 아니라 수많은 하늘의 계시를 받습니다.
또한 하늘의 세계에 이끌려가서 하나님의 세계를 직접 목격합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그는 그의 손수건만 얹어도 질병이 낫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바울은 더 이상 경험할 수 없을 만큼 신비적인 체험을 하며 어느 누구보다 더 분명한 은혜
를 체험합니다.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게 됩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신앙적으로 완벽한 사람입니다. 더 이상 성숙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여러분! 이쯤 되면 마음속에서 선을 행하려는 마음과 하나님만을 사랑하려는 은혜로운 마음
만 솟아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자꾸만 악한 생각이 솟아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고민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늘 삶 속에서 경험하는 현실이 아닙니까?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데 그것이 안 됩니다.
오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리라 단단히 결심하고 나왔는데 막상 그 사람을 보면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를 않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 안에 선과 함께 죄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20절과 21절입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
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나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또한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하고 있어서 선과 악이 늘 싸우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23절입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
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그래서 영적인 갈등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마음은 늘 있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영적인 갈등이 있
습니다.
갈등을 넘어 탄식
또한 바울은 죄에는 굉장한 힘이 있고 권세가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죄를 단순히 죄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23절에 보면, 죄의 법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법은 법으로 한번 제정되면 굉장한 힘이 갖습니다.
법은 제정하면 어떤 사람도 그 법아래 놓이게 되어 있어 법을 지켜야 합니다.
작은 교통법도 한번 제정해 놓으면 모든 사람이 다 지켜야 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법에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는 굉장한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어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 죄를 짓도록 하
는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등을 넘어 절규와 탄식을 합니다.
23절과 24절입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
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죄에는 굉장한 힘이 있어 죄가 자신을 죄의 포로로, 죄의 종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탄식을 합니다. 오호라는 슬픔이나 탄식을 나타낼 때 내는 감탄사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나는 불쌍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은 엄청난 고난 가운데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했던 사람입니다.
수많은 돌과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배고픔으로 굶주리기도 했습니다.
강도를 만나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타고 가던 배가 파선하여 익사 직전에서 살아나기도 했습니다.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것같이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기뻐했습니다.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로마의 차디찬 옥중에서도 빌립보에 있는 성도들에게,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외치던 바울이었습니다.
그렇게 복음전파에 목숨 걸고,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 인생을 걸었던 바울이었지만,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런 바울도 절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스스로에게 죄악을 이길 힘이 전혀 없음을 깨닫고 절규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거리가 자꾸만 멀어져 가는 마음 때문에 이렇게 절규를 해 보셨습니까?
무능하고 나약해서 자꾸만 죄를 짓게 되는 여러분 자신을 보고서 탄식을 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한량없이 큰데 그것도 생각 못하고 너무나 뻔뻔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자신
을 놓고 이렇게 몸부림쳐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전도도 못하는 자신을 놓고서, 사랑은 말로만 하고 실천은 하지 못하는 자신을 놓고서, 믿
음이 없어서 십일조도 제대로 못하고 살고 있는 자신을 놓고서, 이렇게 애석해 하고, 고민
하고, 마음 아파해 보셨습니까?
여러분은 오늘 아침 사도 바울의 갈등과 탄식과 절규의 소리를 들으셔야 합니다.
은혜를 깊이 깨달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고백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이 고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닙니다.
은혜를 깊이 체험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고백은 죄를 많이 지은 자가 하는 고백이 아닙니다.
죄를 깊이 깨닫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은혜를 깊이 받으면 받을수록, 신앙의 깊은 세계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죄성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느끼는 감성이 나는 형편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신앙의 깊은 세계에 들어간 사람은, 보통 사람은 죄로 여기지도 않는 것을 가지고 죄로 느
끼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하고 하나님께 탄식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목격하고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고 탄식하지 않습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죄를 지어서 이러한 탄식을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을 보니까 자신의 추한 모습이 보였던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상대적으로 자신이 더럽게 보였던 것입니다.
성 프란시스가 어느 날 수도원에서 사라졌습니다. 제자들이 선생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프란시스는 어느 동굴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도만 하고 있었습니다.
프란시스를 찾아낸 제자들은 선생님이 무슨 기도를 하시는지 듣고 배우기로 하고 동굴 밖에
서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프란시스는 하루 종일 한 가지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하나님, 제발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라는 것과 제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죄인인
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십시오.”
프란시스가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인지 모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 하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십자가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자기 안에 있는 더러움과 잘못이 크게 보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은혜에 깊이 젖어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는 민감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
서는 관대합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타인의 죄에 대해서는 민감하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둔감합니다.
왜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합니까? 나의 죄성(罪性)을 깊이 깨닫기 때문입니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의 깊은 세계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 남의 잘못을 크게 봅니다.
윤동주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잎새에 이는 바람은 아주 민감한 사람도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작은 바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바로 그와 같은 바람에도 괴로워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정말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러움이 없이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편지하기를,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
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많은 죄를 지어서가 결코 아닙니다. 그만큼 자신의 죄성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이 고백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닙니다.
은혜를 깊이 경험한 자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자신의 죄성을 깊이 깨달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시선을 주님에게로
은혜의 깊은 세계에 들어간 사람은 나 자신이 전적으로 부패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죄를 이길 힘이 없다는 것도 깨닫습니다.
나 자신을 바라보면 절망이요, 좌절입니다.
그래서 나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은 기쁨이 없습니다. 감사가 없습니다.
자신을 바라보던 바울이 이제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을 바라보니까 탄식이 멈추고 감사가 터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바울의 어조가 바뀌어 집니다.
25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감사가 나옵니다.
왜 감사가 나옵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싸웠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죄가 있
다면 이 죄 때문에 우리 주님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나의 지은 죄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 주님이 나를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게 아무개야! 네가 네 죄 때문에 고민하고 갈등하고 탄식하고 몸부림 치고 있느냐? 바로
네 죄를 위해서 내가 십자가를 짊어졌다! 내가 너를 위해서 모든 피를 다 흘렸다! 내가
네 죄를 위해서 십자가의 고통을 다 짊어졌다!”
이 주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나는 죄인이다! 라는 정죄의식이 다 사라집니다.
8장 1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마귀는 늘 우리에게 너는 죄인이다! 너는 죄인이야! 라고 정죄의식을 줍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면 이 모든 정죄의식이 다 사라집니다.
나의 죄를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알기에 모든 정죄의식이 다 사라집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 당시 어느 날 서재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마귀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종이에 가득 쓴 것을 루터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을 한참 들여다본 루터는 기가
질렸습니다. 앞이 캄캄했습니다. 맥이 탁 풀렸습니다.
자기가 오래 전에 지은 죄를 낱낱이 기록해 놓은 죄 리스트였습니다.
이제는 너무 오래되어 잊어버리기까지 했던 죄를 빼곡히 다 적어 놓았습니다.
마귀는 그 뒷면을 또 보여주었습니다.
자세히 보았더니 요사이 지은 죄를 다 기록해 놓았습니다.
마귀는 비웃는 얼굴로 루터를 향해서 ‘이 기록이 모두 사실이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마귀는 루터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이런 더러운 녀석이 무슨 종교를 개혁해? 너나 좀 똑바로 살아라! 너 이 죄 값을 어떻게
할래?’ 이때 루터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힘없이 앉아있는데 뒤에서 분명히 들리는 부드러운 음성이 있었습니다.
‘루터야, 네 모든 죄를 내 피로 다 씻었다. 너를 정죄할 자는 아무도 없다’
이 음성을 듣는 순간 루터는 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하는 오늘 8장 1절 말씀의 기
억 난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새 힘을 얻어 크게 외치며, 책상에 놓였던 잉크병을 들어 벽에 던졌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나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누가 나를 정죄할 것이냐?”
라고 외치자, 마귀는 어디로 사라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바라보면 감사가 터져 나옵니다.
탄식이 감사로 바뀌어 집니다. 갈등이 찬송으로 바뀌어 집니다.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심
그것뿐만 아닙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정죄의식이 사라질 뿐 아니라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이길 수 있는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우리 속담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는 놈 위에 뛰는 놈이 있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고, 나는 놈 위에 나는 놈에 붙어
서 나는 놈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날개가 없어서 결코 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나는 놈 위에 붙어 있으면 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마귀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길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되시고, 온 우주의 왕이 되신 주님에게 붙어 있을 때, 그 분을 의
지할 때 마귀를 이길 수 있고,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자신의 부패와 무능을 깨닫되, 여러분의 힘으로 살려고 하지 말고 주님이 공급하시는 힘과
능력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고, 꿈이 있고, 비젼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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