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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37 강 강해 / 아산 UBF 주일 메시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말씀 : 누가복음 22 : 1-38
요절 : 누가복음 22 :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이스라엘은 유월절이 가장 중요한 명절입니다. 죽음의 사자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유월절을 제정하십니다. 말씀을 통하여 새 언약의 예수님의 피를 영원히 기억하고 기념하기를 기도합니다.
1. 새 언약
1절을 보십시오. 때는 유월절이 가까운 때였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최대 명절로써 이집트에서 나올 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이 노예 살이 할 때, 하나님께서 무서운 재앙을 아홉 번이나 내려서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의 백성을 내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듣지 않았습니다. 괴로우면 내보낸다고 했다가 재앙이 지나가면 말을 바꾸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열 번째로 죽음의 사자가 온 이집트의 장자들을 죽이는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이집트 온 집을 다니며 장자들을 데려갔습니다. 하지만,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건너 지나갔습니다. 이 장자재앙이 임하자 비로소 파라오는 이스라엘을 내보내 주기로 결정합니다. 유월절은 죽음의 장자재앙에서 구원받은 날입니다.
구약의 모든 사건과 제도는 오실 메시야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그중에서도 유월절은 오실 예수님을 가장 뚜렷하게 예표합니다.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을 넘어가고 지나간 것은 하나님께서 일러 주신대로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를 우리가 마음으로 영접하고 고백할 때, 우리는 마지막 날, 심판에 이르지 않고 구원받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구원과 해방의 날, 예수님을 죽일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환자들의 병을 고치고 일하는 날이라고 하자 화가 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최고 가치인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용납할 수 없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안식일 율법에만 집착하는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건물 성전과 하나님을 동일시하고 성전 우상에 빠진 그들로써는 예수님을 그냥 둘 수 없는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잡고자 하여도 예수님께서 낮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말씀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사람들 눈이 부담이었습니다. 해가 지면 기도하셨는데, 어디서 기도하시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많은 유월절에는 하지 말고 명절이 지난 후에 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진정한 유월절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진정한 유월절 어린 양이 되어 이스라엘과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유다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님께서 무리들과 함께 있지 않는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유월절 이후로 미루고자 했던 것이 유월절 명절에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 진정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죽으시게 되었습니다.
한편,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좀 달랐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설마 예수님께서 죽으실까?’ ‘설마 그러실까?’ 했지만, 유다는 예수님께서 죽기로 작정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유다의 문제는 ‘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길을 가시면 나의 지난 3년은 어디서 보상받으라고? 인간적인 생각을 하는 그는 마음을 마귀가 들어오는 길로 열어 두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팔 생각을 그의 마음에 넣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유다와 같은 요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에 품은 생각입니다. 마음 중심에 무엇을 두는지 그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나라는 선교 초기 고쳐야 할 실생활의 문제가 많았습니다. 당시 조선사회는 누적된 사회적 모순이 견고하였는데, 일반 백성들의 삶도 그러하였습니다. 많은 아버지들이 노름을 일삼았습니다. 사회 지도층들은 첩을 두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초기 선교사들은 첩을 두지 말도록, 술을 금하도록, 노름을 끊도록 많은 수고하여야 했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때와 같이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 생활 규범을 고치려는 전통을 교회에서 하기 쉽습니다. 우리 시대 목자들은 학생들이 게임방에 갔다. 어디에 갔다 하는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는 외적인 것보다 더 세심하게 살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음 중심에 무엇을 두는지 입니다. 가룟 유다는 마음 중심에 자기 유익, 물질 욕심을 두었습니다. 마음 중심에 예수님 아닌 것을 함께 두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가룟 유다와 같이 될 수 있는가 하면 회개하고 돌이키는 베드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 중심을 회개하여야 합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야 합니다. 학생 때, 젊을 때부터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연습과 연단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대제사장들의 완고함과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인하여 죽으시는 것 같습니다. 이단 종파 중에는 ‘마귀가 예수님을 죽였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들의 이단 교리를 펴기 위하여 그렇게 표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죽으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도 하시는 것이며 스스로 죽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진정한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뜻에 순종하여 죽으시는 것입니다.
7,8절을 보십시오. 유월절 양을 잡고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무교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어 유월절을 예비하게 하셨습니다. 9-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은밀하게 유월절 만찬을 준비하셨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넘길 기회를 보고 있는 가룟유다에게 유월절 만찬이 방해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만찬을 통하여 진정한 유월절이 완성됨을 말씀하시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참된 유월절의 완성이 이제 예수님의 고난을 통하여 성취됨을 말씀해 주시고자 합니다. 유월절 만찬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이 세상에 주시는 예수님 사역의 결론이며 최종 메시지입니다. 유월절 만찬에서 주신 예수님의 메시지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할 때 후반부 대부분을 유월절 만찬에서 주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기록하였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표면적으로 이 식사가 이 땅에서 제자들과 드시는 마지막 식사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이제 예수님의 고난을 통하여 진정한 유월절이 완성될 것이며,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으로 인하여 죄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임을 담고 있습니다. 제자들과의 다음 식사는 십자가 고난으로 완성되어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으로 이루어지는 위대한 사역임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주 잔을 받으시고 사례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누게 하셨습니다. 잔을 나누신 후에도 동일한 말씀을 주셨습니다.(17,18)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먹고 주님과 함께 기뻐할 것을 기대합니다. 우리는 장차 기쁨 넘치는 하나님나라 잔치에 참여할 것입니다. 이 육신의 장막을 벗은 후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기쁨과 생명의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실 것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또 떡을 떼어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만찬에서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제자들에게 떼어 나누어 주시는 떡을 통하여 예수님의 희생과 고난을 가르쳐 주십니다. 무교병은 효모를 넣지 않아 딱딱하여 부수어 먹어야 합니다. 부수는 떡은 우리 죄를 없이 하고자 십자가에 달리시는 예수님의 몸을 상징합니다.
이사야서 53:4-6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자기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께서는 떡을 떼며 예수님의 고난을 기념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고난을 매일 기억하고 감사하여야 합니다. 기념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든 고난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할 때 운명과 저주와 죄가 우리에게 역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매일 밥을 먹듯이 우리는 매일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기념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사랑은 날마다 기억하고 날마다 감사하여야 할 내용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영혼은 더욱 살아나고 예수님의 주시는 생명력이 충만하게 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며 백성들과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신명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 그리심산과 에발산을 보이시며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살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율법을 지키면 늘 푸르르고 생명력이 넘치는 그리심산과 같이 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황무하고 거치른 저주의 에발산같이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겠다고 약속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옛 언약은 백성들이 연약하여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백성들은 모든 율법에 대하여 다 준행하겠다 대답하였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던 날부터 이스라엘은 불순종을 일삼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을 주십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은 모두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인간의 허물과 죄로 인하여 깨지고 말았습니다. 새 언약은 옛 언약과 같지 않습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의 피를 기초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간의 허물과 약점에 상관 없이 깨지지 않는 언약입니다. 옛 언약은 짐승의 피를 흘려 매년 죄 사함을 받아야 하였지만, 새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세우셨기 때문에 다시 피 흘릴 필요가 없습니다. 새 언약은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합니다. 히브리서9:12-14절에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게 하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새 언약은 영원한 효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고 영접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깨끗하게 하시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피를 믿는 믿음을 보시고 그 사람에게 있는 모든 죄를 용서해해주십니다. 예수님의 피가 누구든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합니다. 새 언약의 피, 예수님의 피는 구원을 주시는 강한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사람의 본성과 인격을 변화시키는 효력이 있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예수님의 피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영접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에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가볍게 여깁니다. 죄가 있지만 아무 일도 없으니 괜찮다고 여깁니다. 죄의 대가를 언제 지불할 것인지 때를 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죄를 청산하여야 합니다. 이 죄를 없애려면 죄의 대가를 지불하여야 합니다. 죄의 대가는 생명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로마서 6:23). 우리 인생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영원히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어야 합니다. 죄가 있으므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입니다. 죄는 지독하고 강하여서 사람이 어떤 방법으로도 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거룩해 지려는 어떤 노력도, 수행정진으로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를 믿는 자를 친자녀라 부르시고 우리를 거룩한 존재, 새로운 피조물로 빚으십니다. 우리는 놀라운 은혜를 주신 예수님의 고귀한 희생을 기억하고 기념하여야 합니다. 오늘날 온 세상의 예수님 믿는 교회는 성찬식을 거행하며 이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살아야 합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팔고자 작정하고 들어온 가룟유다에 대해서 예언하십니다. 유다가 회개할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배반의 역사가 일어 난 후 충격 받을 나머지 제자들이 상처받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2. 새 언약의 일꾼의 인격
24절을 보십시오.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께서 지상메시야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이들은 중요한 시간이 임박했으므로 서열을 정해 두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다투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누가 더 높은지 다투었습니다. 이들의 인격이 아직까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과 거의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다투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25,26절을 보십시오.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예수님께서 인간적인 다툼을 벌이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의 임금들과 집권자들 세상의 지도자들은 권세를 부립니다. 지시하고 명령합니다. 존귀하다며 칭송받기 원하고 높은 자리에 앉아 아래로 사람을 부리려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큰 자는 오히려 낮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스리는 사람은 오히려 종이나 하인같이 되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당시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로마시대는 강한 것이 선한 것이었습니다. 힘이 있으면 약한 것을 지배하고 강자는 약한 자로부터 섬김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위로 올라가 앉는 것을 원합니다. 예수 안에서는 왜 낮아져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억누르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방법은 희생하고 낮아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자비와 긍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하신 것처럼 낮추는 사람, 섬기는 사람과 함께 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에게 힘을 주시고 은총을 내려 주십니다. 변화의 능력, 성령의 놀라운 역사는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 넷째도 겸손, 다섯째도 겸손의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겸손과 희생만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합니다. 따라서, 자기를 사람들 앞에서 높이고자 하는 사람, 자기를 남보다 더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 자기를 사람들 앞에 자랑하기 원하고 사람들이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결코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루시는지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높임 받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들 아래로 내려가 겸손하게 낮아지셨습니다.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셨고 주님이시면서 많은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백성들에게 버림받으십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본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겸손하게 낮아지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높여 주십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이날 식사자리는 은밀하게 만든 자리였기에 하인이 없었습니다. 하인이 없으면 가장 젊은 사람이 참석자들의 발을 씻겨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경쟁하고 있었기에 누구도 발을 씻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수건을 두르시고 물을 떠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음식 나누어 주는 것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과 낮아짐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하셨고 그 시대의 연약한 사람들을 영접하고 그들을 돌보시며 섬겨주셨습니다.
28-30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제자들은 새 언약의 일꾼들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며 예수님의 섬김과 고난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헌신을 배운 새 언약의 일꾼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전하는 사명을 맡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명을 잘 감당한 제자들을 하나님 나라에 들이시고 예수님의 상에서 함께 먹고 마시게 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는 권세와 영광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후 영광에 들어간 것 같이 제자들도 고난 후 영광에 참여하게 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새 언약을 맺은 일꾼들이 예수님의 성품도 함께 배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겸손하게 낮아지고 헌신하여 주의 나라와 그 나라의 희락과 영광에 들이고자 하십니다.
요즘 이것이 잘못되었다. 저것이 문제다 논리적으로 지적질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분석하는 사람도 참 많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말 잘하고 논리적인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키지 는 못합니다. 단 한 사람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낮아지신 예수님을 배울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쓰셔서 세상을 변화시키십니다. 낮아지신 예수님을 배우면 나도 바뀌고 세상도 바뀝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섬김의 도리를 말씀하는데 자신만만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님께서 곧 시작될 고난을 앞두고 제자들이 보호될 수 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의 고난 후에 수제자로써 형제들을 굳게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문제없다고 대답합니다.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감옥에도 가고 죽는데도 가겠다고 큰 소리 치며 비장한 각오를 말하였습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34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베드로가 실패한 후에 예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발견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베드로가 연약함이 드러난 후 불의에 빠지지 않게 하시려고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35절에서 38절은 임박한 어려운 상황을 단단히 준비하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정말로 싸우기 위한 검을 준비해야 하는 줄 알고 검을 준비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메시야에 관한 구약 성경 이사야 53:12 말씀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흘리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언약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새 언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받아 그의 피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새 언약의 일꾼이 된 우리는 더 이상 다른 것에서 만족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새 언약대로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를 친 자녀로 받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더 이상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과나 업적을 통하여 억지로 나를 세우고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피 흘리셔서 나는 이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은 우리의 힘입니다.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감사하며 찬양 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아산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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