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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사를 바꾼 암살사건들
“만일 그 인물이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하는 ‘또 다른 역사’를 생각해서라도 미래를 예상하는 것은 그 암살이 갖는 깊은 역사적 의미를 갖는 데 커다란 지침이 되지 않을까.”저자가 머리말에서 한 말이다. 저자는 1957년 일본 도치기현에서 태어나 대학 졸업 후 지방신문사 기자로 일하다, 현재는 출판·편집 프로덕션 대표로 프리 저널리스트로 정치·경제·잡학·취미 등 부문에 흥미를 갖고 나름대로 다양한 시선으로 사회문제를 취재하고 집필하는 활동가이다. 「저주받은 세계지도」등 저서가 있다.
이 책의 주제인 인물의 암살은 역사의 흐름을 늦추기도 하고, 가속화 시키기도 하는 것 같다. 한국 현대사에서 보면 몽양 여운형은 좌익과 우익의 합작을 위해, 통일 민족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1947년 극우 청년에게 암살되면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애썼던 백범 김구도 1949년 암살되면서 국민들에게 슬픔과 절망을 안겨주었다. 박정희는 강력한 야당 후보인 윤보선과 김대중이 당선되면 이들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는데, 김대중은 납치와 암살 위기에 몰렸으나 끝까지 살아남아 민주화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박정희 암살 후에는 ‘서울의 봄’이라는 민주화 가능성이 열리기도 했다.
암살이 그려내는 역사의 자화상 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고, 세상을 바꾼 암살은 더이상 과거형이 아니라 역사적 한순간으로 미래를 만드는 키워드가 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암살의 역사를 배우기도 하고 역사 속에서 더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지 모른다.
미국에는 대통령 암살사건이 많았다. 에이브러햄 링컨, 존 F 캐네디가 대통령 재임 시에 암살되었고, 도널드 레이건은 저격을 받았으나 살아남았다. 그들의 암살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겠지만, 아직도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경우도 있다. 링컨의 경우 1865년 4월 14일 워싱턴DC에 있는 ‘포드극장’에서 연극 〈우리 미국인 사촌〉이라는 연극을 관람하다가 26세의 무대 배우 ‘존 윌크스 부스’에게 저격당했다. 범인은 8명의 공범자들과 “대통령과 부통령 존슨, 국무장관 스워드를 암살하면 미합중국 정부가 힘을 잃고 남부가 부활한다”는 확신을 갖고 극장에 잠입해 관람석 뒤에서 단 한방으로 모든 것을 끝냈다.
부스는 현장에서 발코니로 뛰어내려 골절상을 입은 채 말을 타고 도주했는데, 도중에 다른 공범자 1명과 합류해 남부로 향하다 어느 농장에 숨어들게 되었고 두 사람을 수상히 여긴 농장주가 그들을 창고에 가둔 후 문을 잠가버렸는데 얼마 후 기병대가 도착해 기병대가 둘에게 투항할 것을 권유했으나 거절했다. 결국 기병대는 창고에 불을 질렀으며 이후 재판에서 4명은 교수형, 3명은 종신형, 나머지 1명은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이로써 남부 연합이 꿈꾸었던 링컨 암살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남부가 재기하거나 링컨의 이상(理想)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링컨 암살이 미합중국 역사를 바꾸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케네디는 1963년 11월 22일 오후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오픈카 뒷좌석에 앉아 도로를 가득 메운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카프레이드를 벌이고 있었다. 옆에는 ‘재클린’여사, 앞 좌석에는 ‘존 코넬리’텍사스 주지사가 타고 있었다. 네거리에서 좌회전하는 순간 날아온 총탄에 대통령은 목을 뒤로 젖힌 채 쓰러졌다. 총알은 이미 대통령의 머리를 관통했다. 범인은 30세 백인 남성 ‘리 하비 오스왈드’로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현장 부근의 창고 건물 6층에서 라이플로 대통령을 저격했는데, 현장에서 지문이 묻은 약통이 남아 있었으므로 증거가 명백했다.
그런데 사건 이틀 후 오스왈드는 시경에서 구치소로 이송되는 도중에 ‘잭 무비’라는 또 다른 남자에게 사살당했다. 확실한 범인이 살해된 것은 대통령 암살사건이 단순한 것이 아니라 배후가 있다는 반증이었다. 오스왈드를 살해한 루비는 재클린 여사를 동정해 암살범을 살해했다고 증언했지만,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 받고 재심을 청구했으나, 재심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해할 수 없는 병으로 사망했다. 대통령 암살사건은 조사가 진행되면서 많은 의문점이 나타났다. 카프레이드 중에 터진 사건이라 이를 목격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대통령이 오른쪽에서 날아온 총탄을 맞았다”고 증언했다. 그렇다면 오스왈드가 저격했다는 방향과 정반대다. 의사의 증언도 이해할 수 없다. 부검한 의사는 두 발의 총탄이 어느 방향에서, 어느 각도로 날아왔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의사의 이런 태도는 누군가 함구령을 내린 탓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실제로 오스왈드는 체포된 직후 기자들에게 “나는 책임을 지게 된 것 뿐이다”라고 말했는데, 그에게 책임을 지게 한 사람은 누구일까. 다양한 의문이 터져 나왔으나 오스왈드는 살해되고, 루비마저 병사한 상황이라 진상규명은 더욱 어려워졌다. 케네디 뒤를 이은 존슨 대통령은 대법원장 ‘얼 워런’을 위원장으로 암살사건을 수사하도록 했는데 1년 후 위원회가 내린 결론은 ‘오스왈드 단독 범행’이었다. 조사 결과를 믿지 않자 1970년 하원특별위원회가 재조사했고, 새로운 저격범의 존재에 대해서도 정식으로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인지는 특정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뉴올리언스주 지방 검사이던 ‘짐 개리슨’이 새로운 주장을 하고 나섰다. 그는 대통령 암살의 흑막에는 중앙정보국, 즉 CIA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는 암살 당시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 심각해 동서 관계는 날이 갈수록 긴장의 강도가 강해져 일촉즉발의 위기 상태였고, 특히 쿠바에 사회주의 정권이 탄생한 것은 미국에게는 큰 위협이었고, 또한 CIA가 베트남 전쟁에 무력 개입을 추진하려 했으나 대통령이 점차 소극적으로 바뀌면서 조기 철수를 암시하기까지 해 공산 세력의 출현을 막기 위해 CIA로서는 케네디가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는 것이다. 미국의 장래가 위험하다고 생각한 CIA가 미국연방수사국 FBI와 군부내의 반공주의자들과 손잡고 케네디 암살을 계획했다는 것이 개리슨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 주장에 대해서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하원특별위원회 조사 결과는 2039년에 공개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므로, 그때 가서야 케네디 암살 진상이 드러날지 궁금하다.
레이건 대통령 암살사건은 1980년 3월 30일 취임한 지 불과 70일 만에 일어났다. 케네디 암살 이후 17년 만의 사건이라 미국 국민들은 충격을 받기에 충분했다. 이날 오후 2시 반경 건설노조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대회장에 도착한 대통령이 검은색 전용차에서 내리는 순간 가까운 거리에서 6발의 총성이 울렸다. 보좌관과 경찰관이 현장에서 쓰러졌고, 비밀경호원들이 대통령을 차에 밀어 넣었다. 차에 탄 대통령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총알이 왼쪽 폐에 박힌 것이다. 차는 전속력으로 병원으로 향했다. 불과 3m 앞에서 있던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당시의 생생한 영상은 대통령을 취재하던 TV를 통해 처음부터 녹화되었다. 사건 발생 30분 뒤에는 전국에 방영되었다.
범인은 ‘존 힝클리’라는 25세 남자로 정치범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는 단지 18세의 여배우 ‘조디 포스트’를 열광적으로 좋아했던 팬이었으며 그녀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 대통령을 저격했다고 자백했다. 당시 ‘마틴 스코세지’감독의 〈택시 드라이브〉를 보고 힝클리는 그녀에게 팬레터를 보내고 전화를 걸기도 했으며 미쳐 부치지 않은 편지에서 “당신을 위해 일을 벌일 것이다. 나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등의 범행 예고와 유언 같은 글이 쓰여 있었다. 정권을 뒤덮거나 어떠한 정치적 의도도 없었다. 그러나 사건 이후 레이건에 대한 동정, 고령에도 빠르게 회복한 체력, 어려움에 처했어도 유머를 잃지 않는 냉정함 등이 국민의 지지를 모았다. 사건 3일 후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62%에서 73%까지 치솟았다. 취임 3개월이 지날 때면 국민들이 냉정하게 정책에 대한 비판이 시작될 즈음이었음에도 암살 미수사건으로 레이건의 인기는 급상승했던 것이다.
◌ 종종, 자주 뉴스에 등장하는 미얀마 군부와 민주화 세력 간의 충돌의 한 가운데는 ‘아웅산 수치’가 있다. 그녀는 군사정권으로부터 여러 번 연금을 당하고 암살 위협에도 운동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데, 처음부터 그녀가 정치에 뜻을 두었던 것은 아니다. 영국인 남편과 두 명의 자녀를 둔 평범한 주부로 살고 있던 그녀에게 변화가 찾아온 것은 1988년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귀국한 뒤였다. 조국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시설은 파괴되고 상점은 문을 닫고, 거리는 쓰레기투성이였다. 시민들은 주눅 들고 거리마다 군인들 뿐으로 군부독재와 부패한 정치에 불만을 가진 시민들은 수치가 귀국한 그해 8월 8일 대규모 시위를 벌였는데, 이로 인해 수백 명의 시민이 희생되었다.
수치는 당초 반정부 세력과 정부 사이에서 중재 역할만을 자청했으나 민주화를 염원하는 시민들의 요구에 힘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서 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8월 26일 수치는 단독정권 폐지, 복수정당제 채택,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목표로 연설하였고 사람들은 리더의 등장에 열광했다. 시민들의 열기가 고조되자 군사정권은 반체제 인사에 대한 압력이 노골화되기 시작해 1989년 7월 그녀를 가택연금시켰다. 수치는 국민민주연맹(NLD)당수로서 연금된 채 총선을 치렀는데, 이듬해 선거에서 NLD는 총 485개 의석 가운데 392개 의석을 획득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쯤 되면 군부가 손을 들거나 협상을 할 만한데 그렇지 않았다. 1년 또 1년 연장된 가택연금은 1995년 7월이 되도록 풀리지 않았고, 2000년 9월 두 번째 연금이 시작되어 2002년 5월까지 계속됐다. 군부는 NLD당원과 지지자들은 수감하고 폭행했음에도 수치에게는 물리적·정신적으로 타격을 주기는 했으나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민주화 동지들에게 수치는 집에서 편안히 지내는데 자신들은 왜 감옥에서 고생해야 하는가 하는 감정을 부추겨 그녀에 대한 반감과 신뢰를 실추시키고자 한 것이었고 또 아웅산 장군의 친딸로 절대적 지지를 받는 그녀를 섣불리 손댔다가 국민들이 어떤 행동으로 나올지 모르는 우려가 깔려있기도 했다.
2003년 9월 그녀에게 세 번째 가택연금형이 언도되고, 지금까지 장기 연금 상태인 그녀는 군정과 대립하는 것만으로는 결말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교훈으로 얻고, 신정부에 군부가 참여하는 것을 인정하는 선까지 양보하고 있다. 군부와 대화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그녀의 호소이자 바람이지만, 그녀의 바람이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미얀마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미얀마는 우리와도 인연이 깊다면 깊은데(1980년 아웅산 장군 묘지에서 북한의 폭탄테러로 우리나라 각료 수십 명이 희생된 사건 등) 미얀마 군부와 민주화 세력들은 우리나라의 민주화 과정을 모델로 삼지 않으려고 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다. 아웅산 장군은 미얀마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고 그는 수치가 두 살 때 정적에게 암살당했다.
◌ 암살보다 암살미수 사건이 재미있기도 한 것 같기도 한데, 역사적인 암살미수 사건은 진시황과 히틀러의 암살미수 사건이 아닐까. 이 책에도 소개된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을 보자.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기 직전 권총으로 자살했으나, 그전까지는 냉혹하고 비정한 독재자로 여러차례 암살음모에 휩싸였다. 영국과 소련의 첩보기관, 폴란드의 지하조직이 그를 암살하려 하는 등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40가지 이상이라고 한다. 독일 국내에도 신봉자만 있지는 않아서 그의 정책에 반대한 레지스탕스 그룹이 여럿 있었다.
처음 서방측과 싸우겠다는 히틀러의 선언을 듣고, 더이상 피를 흘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이는 ‘게오르크 엘저’다. 그는 1939년 11월 8일 암살계획을 실행한다. 그날 저녁 7시 반부터 뭔헨의 한 맥주집에서 히틀러가 연설 할 것이라는 것을 안 엘저는 연단 옆 기둥에 시한폭탄을 설치하고 숨어 있었다. 가구 만드는 일을 하던 그는 숙련된 기술로 3개월 전부터 맥주집을 드나들며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9시 20분 굉음과 함께 폭탄이 터졌다. 지붕과 벽이 무너지고, 연단 주위는 산산조각이 나 3명이 죽고 수십 명이 생매장되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죽지 않았다. 그날은 악천후로 비행기가 날 수 없게 되자, 히틀러는 9시 35분 출발하는 기차를 타기 위해 예정보다 빠른 9시 7분 이미 맥주집을 빠져나간 것이었는데, 불과 13분 차이로 엘저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히틀러와 한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 군부 내에서도 반기를 든 세력이 있었다. 처음에 그들은 히틀러에게서 빛을 발견하기도 했으나, 잔학무도한 그의 행동에 염증을 느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전황 악화에 조금이라도 좋은 조건에서 강화를 맺기 위해서는 히틀러를 제거해야만 했다. 반란 그룹의 중심에 ‘헤닝 폰 트레슈코프’대위가 있었다. 1943년 3월 히틀러가 탄 전용 항공기에 폭탄을 설치해 폭파하려고 했다. 그런데 총통이 탄 전용기는 무사히 목적지에 착륙했다. 전용기 실내 온도가 너무 낮아서 기폭장치가 작동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로부터 8일 후 히틀러는 베를린의 무기 박물관을 시찰했다.
트레슈코프는 자폭할 각오로 이번에는 주머니에 시한폭탄을 숨기고 스위치를 눌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폭발을 기다리는 시간이 왜 그리 긴지 그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히틀러는 전시물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고 눈 깜짝할 사이에 박물관을 나가버렸다. 트레슈코프는 기폭장치를 멈춰야만 했다. 이외에도 몇 가지 계획을 세웠지만 전부 실패로 끝났다. 청년 장교 신분으로 히틀러를 마주할 기회가 거의 없었고, 총통이 외출할 때를 제외하고는 계획을 실행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히틀러 암살 계획 중 다른 하나는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백작에 의한 〈발퀴레 작전〉으로 그는 튀지니 전투에서 오른쪽 손목과 왼손의 손가락 두 개, 왼쪽 눈까지 잃은 상이군인이었다. 카리스마뿐 아니라 신망도 두터웠던 그가 트레슈코프와 암살 계획을 세우기도 했으나, 트레슈코프가 전선으로 전출하는 바람에 혼자 일해야 했다. 1944년 7월 20일 슈타우펜베르크는 총통 본영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때 히틀러 암살계획을 세웠는데, 불안 요소가 있지만, 실행을 결심했다. 폭탄을 기동시키는 장치를 현지에서 조립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으로 복잡한 작업을 불편한 손으로 해 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불안감이 컸다. 그러나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그가 준비한 것은 독일제 플라스틱 폭탄이었다. 현지에 도착해 폭탄을 조립할 시간, 3시간 동안에 겨우 하나를 완성했고, 그는 폭탄을 가방에 넣고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실 의자 밑에 가방을 밀어넣고 보고를 마친 후, 긴급한 전화 통화를 해야 한다면서 회의실을 빠져나왔고 잠시 후 히틀러가 참석한 회의실에서 대폭발이 일어났다. 천장과 벽이 무너지고 사람들은 밖으로 내던져졌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이번에야말로 히틀러가 죽었다고 확신했다. 그는 서둘러 베를린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여기서도 히틀러는 죽지 않았다. 바지는 너덜너덜해지고 머리카락도 그슬렸지만 피해는 별로 없었다. 떡갈나무로 만든 튼튼한 테이블이 폭풍을 차단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두 개가 연쇄적으로 폭발했다면 폭발 규모가 커져서 회의장 안에 있던 전원이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지만,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그날 밤 슈타우판베르크는 총살되고 대규모 반역자 색출로 이듬해까지 1500명이 체포되고, 200명이 처형되었다.
진시황 암살미수 사건은 그가 아직 진왕 일 때 형가(荊軻)라는 자객에 의해 시도되었는데 진의 수도 함양에 당도한 형가는 영토 할양의 증표인 지도와 반역자 번어기의 목을 진왕에게 바치는 형식으로 진무양이라는 연나라 신하와 함께 왕궁으로 들어가자, 진왕 영정은 크게 기뻐하며 구빈(九賓)의 예로 형가 등을 맞아들였다. 그런데 진무양이 진왕 앞에서 공포를 참지 못하고 벌벌 떨기 시작했다. 이에 지켜보던 군신들이 미심쩍어 어떻게 된 거냐며 묻자 형가는 웃으며 “북쪽 촌놈이 천자를 뵈니 어쩔 줄을 몰라 저럽니다.”라며 둘러댔다. 형가는 진왕에게 지도를 해석해주겠다며 가까이 접근했고, 두루마리 지도가 풀리자 두루마리 끝에서 미리 준비해 간 단검이 나타났다. 형가는 검으로 진왕의 소매를 잡고 찔렀지만, 아슬아슬하게 옷소매만 끊어지고 말았다.
다급해진 진왕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내려 했지만, 너무 긴 검이칼집에 걸려 빠져나오지 않았다. 진의 법률에는 신하가 어전에 무기를 갖고 들고 오는 것은 사형으로 다스려질 만큼 중죄였고, 병사들도 왕명 없이는 함부로 전상(殿上)에 오를 수 없었다. 형가는 비수를 갖고 진왕을 뒤쫓았고 진왕은 필사적으로 기둥을 이리저리 돌며 도망쳤다. 검은 빼려고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오히려 잘 빠지지 않았다.
군신들이 맨손으로라도 형가를 제압하려 하던 중에, 시의(侍醫) 하무저(夏無且)가 갖고 있던 약상자를 형가에게 집어 던졌다. 형가가 놀란 사이 좌우에서 “왕이시여, 검을 등에 지고 뽑으소서!”라고 외쳤고, 진왕은 얼른 검을 등 쪽으로 돌려 짊어진 상태로 간신히 검을 빼 형가에게 휘둘렀다. 형가가 가진 짧은 비수는 장검에 맞설 수 없었고, 형가는 진왕의 검에 다리를 베여 걷지 못한 채 마지막으로 진왕을 향해 비수를 던졌다. 그러나 비수는 진왕을 비껴서 기둥에 박혔다. 자신의 일이 실패했음을 깨달은 형가는 기둥에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아 “내가 일을 이루지 못한 것은 진왕을 죽이지 않고 협박해서 연의 반환 약속을 받아내려 했기 때문이다”라며 웃고 진왕을 욕했다. (이때 격노한 진왕이 형가의 온몸을 산산이 토막 냈고, 형가가 죽은 뒤에 그 시신까지 참수했다고 한다) 진무양은 이 상황을 모두 지켜보면서 끝까지 벌벌 떨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그 뒤 암살당할 뻔했던 진왕은 격노해 이듬해 기원전 226년, 연을 쳐서 수도 계(薊,베이징)를 함락시켰고, 음모의 주모자였던 연태자 단은 연왕의 명에 따라 화해 교섭 차원에서 살해되었지만, 진은 멈추지 않고 기원전 222년 연을 완전히 멸망시켜 버렸다. [위키백과]
◌ 당연히 우리와는 상반되게 보고 있을, 일본인 작가가 본 ‘이토 히로부미’암살 사건을 보자. 서울 남산공원에는 안중근 의사 동상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곳은 그 전에 이토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히로부미사(博文寺)라는 신사가 있었던 곳이다. 이토는 1841년 야마구치(山口)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왕을 받들고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존왕양이파(尊王攘夷派)로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정부를 수립한 주역이었다. 젊은 시절 유럽에 건너가 입헌군주제를 학습하였고 귀국 후 내각을 조직해 1885년 초대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다. 그 후 네 번이나 총리를 역임하고, 메이지 헌법제정에도 중심역할을 했다.
이토가 안중근의 총탄에 쓰러진 것은 1909년 10월 26일,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체프’와 만주 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하얼빈을 방문했을 때였다. 미국이 만주 진출을 노리고 있어 일본은 만주에서 권리를 지키기 위해 러시아와 관계를 강화해둘 필요가 있었다. 이토가 기차에서 내려 코코체프와 나란히 플렛폼을 걸어 나올 때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이토는 코코체프에게 몸을 기대듯 하며 쓰러졌고, 첫발은 어깨에서 가슴으로, 두 번째는 오른쪽 어깨를 관통해 복부로, 세 번째는 팔과 옆구리를 뚫고 나갔다. 4년 동안 조선통감을 마치고, 추밀원 의장이 된 지 4개월이 되던 때였다.
이날 오전 9시 열차는 도착할 예정이었으며, 안중근은 그보다 2시간 전에 이미 하얼빈에 도착해 역 구내 찻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색 신사복 위에 반코트를 걸치고 모자를 쓴 평범해 보이는 그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9시 정각 열차가 도착했고 찻집을 나온 안중근은 환영인파 속에 섞여 이토를 찾았다. 안중근은 이토를 잘 몰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러시아인 옆에 나란히 걸어 나오는 하얀 수염과 작은 체구의 노인을 본 순간 바로 이토라는 것을 직감했다. 안중근과 이토의 거리는 불과 4∼5m, 이토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안중근은 이토 주변의 세 명을 향해서도 방아쇠를 당겼다.
다음 순간 거구의 러시아 헌병들이 안중근을 향해 달려들었고, 안중근은 그 자리에서 러시아어로 ‘코레아 우레!’(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현행범으로서 이튿날 일본측에 넘겨졌고, 재판에서 이토에게는 15가지 죄상이 있다고 진술했다. 을사늑약과 한일병탄을 강제로 맺은 죄, 대한제국 황제를 퇴위시킨 죄, 무고한 한국인들을 마구 죽인 죄... 등, 1905년 일본은 한일협상조약을 무력으로 위협해 체결했다. 이때 초대 조선통감이 바로 이토였다. 한국인들이 이토를 증오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토는 군부 출신 관료들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대륙을 일본 지배하에 둔다는 것은 같지만, 명목상 주권은 그 나라에 남겨두고 정치와 군사를 일본이 행사하는 형태를 생각했다. 그는 강경책만으로 지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이토 역시 비난받을 강압 행위를 저질렀지만, 당시 정치상황 속에서는 비교적 온건파에 속한 인물이었다. 그의 통치방식이 미온적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3개월간 재판받은 안중근은 사형이 언도되었고, 항일운동 영향을 우려한 일본은 정치적 의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단순 살인범으로 처리되어 언도 후, 한 달 만인 3월 26일 형이 집행되었다. 이토의 암살은 일본 내에서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러나 강경파들에게는 뜻밖의 행운이었다. 조선통감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아베에서 보듯 정계 중진인 그의 의견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한일병탄에서 장해 되는 인물은 없어진 것이었다. 이후 ‘가쓰다 다로(桂太郞)’총리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육군 대신에 의해 급속히 병탄이 진행돼 암살 이듬해인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방이 이루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책에서 나로서는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는데, 암살 실행범으로 안중근은 처형되었지만, 그가 진범이 아니라는 설이다. 러시아 헌병 다리 사이로 이토를 저격했다고 하는데도 이토에게 치명적이었던 것은 오른쪽 위에서 어깨와 복부를 관통한 총알이었다. 총알이 안중근이 쏜 총알과 달랐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에 대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아서 상세한 진상은 알 수 없다고 하기도 한다. 당시에 안팎으로 정적이 많았던 이토였던 것을 생각하면 암살을 계획한 자가 다수 있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어쨌거나 이토의 죽음은 한일병탄을 앞당겼다. 대한독립을 외치며 안중근이 행한 행위가 반대의 결과를 초래한 것인데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이슬람 제국 가운데 최초 여성 총리는 파키스탄의 ‘베나지르 부토’이다. 그녀의 아버지도 총리였으나 군사 쿠데타로 정적에게 암살되었고, 할아버지는 파키스탄 독립운동가였다. 학창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던 부토는 35세가 되던 1988년 그녀가 이끈 인민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오직(汚職)으로 물러났고, 인민당이 야당일 때는 야당 당수로 총선에서 승리해 1993년 10월 총리로 재선출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10월 ‘무샤라프’가 쿠데타로 대통령이 되자, 쿠데타를 비난하면서 영국에서 귀국해 2002년 치르진 총선에서 인민당이 다수당이 되면서 대통령의 정적이 되었다. 무샤라프 측은 총리 연임을 금지하는 법을 개정하는 등 부토 세력을 약화시켰다.
2008년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무샤라프와의 연대를 모색하던 그녀는 활발히 유세 활동을 펼치다 그해 12월 29일 선거 집회 도중 폭발사고로 희생되고 말았다. 총리까지 지낸 인물이 암살되었을지 모르는데도 수사는커녕 검시도 하지 않고 그녀의 시신은 서둘러 매장되었다. 미묘한 시기에 벌어진 사건임에도 범인이 누구이며, 배후에 흑막이 있는지 밝히지 않고 직접적인 사인도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파키스탄 정부는 그녀가 차에서 몸을 내밀어 지지자에게 손을 흔들던 순간 폭발이 일어났음을 인식하고 서둘러 차내로 몸을 숨기려고 하다가 선루프 레버에 오른쪽 귀 부근을 심하게 부딪쳐 두개골이 손상되었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사망했다고 발표했으나 가까이서 지켜본 목격자들은 폭발 전에 이미 총에 맞았다고 증언했고, 대통령도 한때 ‘부토가 사살되었다’고 했다. 나타난 증거를 종합하면 이슬람 원리주의자가 그녀를 사살한 뒤 폭발로 위장했다고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이슬람교는 고인을 즉시 매장하는 관습으로 부토의 시신도 이튿날 매장되었다. 시신을 파내 부검하려면 배우자의 허가가 있어야 하는데, 부토의 남편은 종교적 이유를 들어 거부했다. 결국 그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에는 총리도 대통령도 아니었던 부토가 암살된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파키스탄의 복잡한 정세와도 관련이 있다. 군사독재로 일관한 무샤라프 대통령은 미국과 중국에 호의적인 입장이었으나, 무샤라프에 대항하는 정당이나 파키스탄 북서부의 부족들은 미국과 중국에 부정적 입장으로 반미·반중 세력이 강화되고 있었다. 이는 미국에게 우려되는 상황으로 친미파인 무샤라프 정권을 받쳐줄 부토를 귀국시키고 후원했던 것이다. 이는 반무샤라프 측에서 보면 부토마저 방해꾼일 수밖에 없었다. 부토는 민주화를 추진한 셈이 되지만, 이슬람권에서 보면 그녀는 반이슬람의 입장을 고수하는 친미파의 대표 인물이었다. 그래서 충분히 테러의 표적이 될 수 있었다. 부토 암살은 반미테러리스트 소행이라는 설이 유력하나, 파키스탄 군부 내의 반미파 청년장교 집단이 저지른 범행이라는 설도 제기되었다.
무샤라프 대통령에 대한 암살 미수 사건도 여러번 있었던 것으로 봐서 이슬람권의 반미세력을 짐작하게 한다. 부토 암살 후 무샤라프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반감도 더욱 거세져 2008년 8월 무샤라프 대통령은 탄핵을 피하는 조건으로 퇴임했다. 그러자 미국 입장도 복잡미묘해졌다. 이듬해 9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아시프 알 자르다리’가 새로운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그는 부토의 남편이다. 이후 후세인에 이어 알비가 대통령으로 현재를 잇고 있다.
◌ 근·현대에 암살당한 인물 중에 ‘마하트마 간디’가 있다. 간디는 비폭력·불복종의 상징으로 인도 독립의 아버지기로 불리기도 하는데, 평생 폭력을 거부해 온 간디가 죽음에 이른 것은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이었으니 이또한 아이러니가 아릴 수 없다. 인도는 200년간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으나,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쟁취한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독립국이기도 하다. 처음 인도의 세포이(영국의 동인도회사의 인도 용병이었던 세포이들의 저항운동)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저항하기도 했지만, 결국 영국령이 되고 말았다.
간디는 인도가 영국의 식민 통치를 받던 1869년 항구도시 포르반다르에서 태어났다. 포르반다르 공국(公國)의 총리였던 아버지로 인해 윤택한 가정에서 성장했고 18세 때에 영국으로 건너가 공부한 뒤, 1893년 남아프리카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그곳에서 인도 이민자들을 도우다 1945년 인도로 돌아와서는 인도 사회의 모순과 싸웠다. 가스트제도로 고통받는 불가촉천민을 자신의 농장에 고용하고 소작농을 지원하며 빈곤층 구제 활동을 폈다. 반사회분자로 낙인찍히면 재판 없이 인도인을 투옥하는 ‘콜라트 법’이 시행되자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3억 명의 노동자가 참가한 총파업이 인도 전역에서 단행되었다.
1919년 영국의 탄압이 극에 달해 무저항 시민 1,500명이 사망하기도 했는데, 이때부터 간디는 새로운 운동을 전개했다. 영국제품 불매운동이그 것이었다. 국산 면제품만 사용하고 소금은 인도에서 제조가 금지되어있었지만, 직접 소금을 만드는 것으로 항의하고, 350㎞에 이르는 인간띠 잇기를 시행하기도 했다. 이것은 영국에게 커다란 타격을 미쳤다. 이에 영국은 장래 인도의 자치권을 허락하겠다고 제안했으나, 간디는 ‘완전 독립 이외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부했다.
간디가 체포되고 인도는 더 큰 탄압을 받았지만, 독립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인도로 몰려오자 더이상 인도 독립을 억누를 수 없다고 생각한 영국은 다시 자치권을 제안하였으나, 간디의 사상을 계승한 ‘페루 총리’도 이를 거절했다. 2차 대전이 끝나면서 피폐해진 영국은 인도 독립을 인정하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인도는 파키스탄과 둘로 나뉘는 독립이었다. 간디는 분리독립을 반대했지만, 이슬람교도들은 인도와 다른 국가를 원했다.
1947년 8월 마침내 인도는 독립했으나 두 나라로 분리되었는데, 각각 소수파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지고 국가 간 대립도 심화되었다. 이러한 질곡에서 간디는 1948년 종교간 화해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78세의 행동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흰두교와 이슬람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다. 1월 30일 평소와 다름없이 기도를 올리기 위해 길을 가던 그에게 한 남자가 총을 발사했다. 남자는 간디와 같은 흰두교도였는데, 이슬람과 공존의 길을 연 간디에 대한 원망이 원한이 되어 간디를 살해한 것이었다.
비폭력·불복종으로 인도 독립을 실현시켰지만, 그가 죽은 뒤 역사는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갔다. 인도는 군대를 창설해 파키스탄 침공에 대비했고, 현재는 두 나라 모두 핵무기를 보유하고 이를 방패삼아 심각한 대립이 계속되고 있다.
◌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은 나도 잘 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날의 역사를 돌아보는 마음으로 다시 본다. 1979년 10월 26일 오후 6시 소위 안가라고 하는 중앙정보부 관할 건물에서 대통령,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이 만찬을 위해 모였다. 접대역으로는 심수봉과 신재순이 같이 했다. 만찬에는 ‘시바스 리갈’도 있었겠지만? 분위기는 냉랭했다. 그전부터 김재규와 차지철의 대립이 심해져 있었고 대통령이 경호실장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만찬 자리에 술이 돌고, 여성들이 노래를 부르자 분위기는 차츰 밝아졌다.
비극은 7시 40분쯤 일어났다. 김재규가 권총을 꺼내더니 “이 더러운 인간과 함께라면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 없다.”고 소리치면서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총알은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을 관통했다. 놀란 차지철이 허둥지둥 화장실로 도망갔다. 이런 상황에서도 대통령은 태연했다. “무슨 짓이냐!”라고 소리치기는 했어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 대통령의 가슴에 다시 총이 발사됐다. 대통령은 옆에 앉은 심수봉에게 기대듯 하며 천천히 쓰러졌다. 확인하기 위해 연이어서 방아쇠를 당겼으나, 권총이 고장 나서 총알이 발사되지 않았다. 차지철의 반격이 두려웠던 김재규는 다른 권총을 찾으려 밖으로 나갔다.
그때 건물이 정전이 되었는데, 총소리를 전기합선으로 착각한 보일러공이 두꺼비함 메인을 꺼버린 것이었다. 그 사이 김재규는 밖으로 나갔고 김재순이 대통령을 지혈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고개를 내민 차지철이 “각하 괜찮으십니까?”하고 물었고 대통령은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 사이 김재규가 부하에게서 권총을 받아가지고 다시 방으로 들어오면서 차지철을 발견하고는 그를 향해 총을 쏘자 심수봉도 놀라 방을 뛰쳐나갔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김재순과 김재규가 눈이 마주쳤다. 김재순은 김재규가 이성을 잃은 괴물처럼 보였다고 한다. 김재규는 대통령을 내려다보더니 머리를 향해 총을 발사했고 김재순은 정신없이 화장실로 도망쳤다. 그때 또 총성이 울렸다. 대통령을 향해 마지막 한 방을 더 발사해 확인한 것이다.
박정희는 1917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시골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육군특별지원병 제도가 생기자 1940년 만주로 가 군관학교에 들어갔고 승승장구해 1961년 소장으로 진급했다. 틈만 나면 적화통일 야욕을 불태우던 북한에 맞서기 위해서는 혁명밖에 없다고 판단해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2년 뒤에는 선거에서 승리해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유신헌법과 독재체제로 18년 동안 절대권력을 행사했다.
사실 박정희에게는 두 번이나 암살 시도가 있었는데,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기습사건, 1974년 독립기념 식장에서 있은 문세광 사건이 그것이다. 당시 재빨리 몸을 피해 대통령은 무사했지만, 육영수 여사가 목숨을 잃었다. 아무튼 김재규는 측근 중에서 온건파로 꼽히는데 소원하던 미국과 한국 간의 중재 역할을 맡고 있었고, 그는 차츰 서구적 민주화에 감화를 받았으며, 부산·마산에서 일어난 대규모 민주화 요구 시위를 지켜보면서 박정희 정권도 이 정도로 끝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김재규는 민주화를 위해 대통령을 살해할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대통령 암살이 쿠데타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준비가 허술했던 것이다. 고위 관료들이 자신에게 동조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대통령이 암살되자 최규하가 대통령을 승계하고, 김대중은 가택연금에서 풀려나고, 김영삼은 야당 당수로 복귀했다. 조금씩 민주화의 흐름이 시작되는 듯했다. 그러나 새 대통령이 취임한 일주일 후에 사태는 급변했다. 전두환이 ‘12.12 사건’으로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고 노태우는 서울을 장악했다. 아직 민주화를 추진하기에 이르다고 판단한 전두환은 다음 해 초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발 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민주화에 다시 제동이 걸리고 만 것이다. 한국의 민주화는 1987년에서야 6.29 선언으로 빛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있은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경제와 민주화가 크게 도약했다.
◌‘검은 9월단’이라는 테러 조직은 1972년 9월 5일 서독의 뮌헨에서 열린 올림픽 선수촌의 이스라엘 숙소에 침입해 선수들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이들은 AK47과 수류탄까지 갖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선수와 코치 2명이 현장에서 살해되고, 9명을 인질로 잡고 탈출에 성공했다. 이들이 검은 9월단 과격파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게릴라 조직이었는데, 당시에는 잘 알려져있지 않았다. 이스라엘 선수 9명을 인질로 잡은 이들 8명은 성명을 발표하고 이스라엘에 수감되어 있는 팔레스티나인 234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그러나 ‘골다 메이어’총리는 요구를 거절했다.
사건 해결에 나선 것은 서독이었다. 오랜 협상 끝에 범인들이 비행기로 카이로까지 탈출하는 데 합의했다. 하지만 이것은 덫으로 비행기를 타려는 범인들을 저격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범인들이 인질을 잡고있는 상황에서 범인만을 일망타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총격전이 벌어졌고, 인질 전원과 경찰관 1명, 범인은 8명 가운데 5명이 사살되는 최악의 결과로 나타났다. 나머지 3명은 체포되었으나, 같은 해 10월 29일 루프트한자 항공기 납치 사건의 협상 결과로 모두 석방됐다.
이 사건 이후 이스라엘은 보복에 나서 팔레스티나 게릴라 기지를 공중폭격해 게릴라뿐 아니라 수백 명의 팔레스티나인을 희생시켰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으며 골다 메이어 총리는 비밀위원회를 결성하고 이스라엘 첩보특수국(모사드)에게 검은 9월단 조직원의 암살을 명령했다. 그 결과 최초 타깃이 된 인물이 ‘와사르 즈와이델’이었는데, 그는 1972년 10월 16일 로마의 한 아파트 엘리베이트 입구에서 한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와 ‘즈와이델씨냐?’고 묻는 순간 ‘노’라고 하였음에도 그 남자가 총을 꺼내 겨누자 재빨리 에리베이트 밖으로 도망쳤으나 뒤에서 총을 쏘았고, 14발의 확인 사살이 있었다. 그는 번역가로서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는 왜 살해되었을까. 그러나 이 사건은 그 후에 연속되는 암살사건의 1막에 불과했다. 30대 후반의 번역가였던 즈와이델은 로마의 리비아 대사관에 고용되어 번역일을 하고 있었다.
이것만으로 이스라엘의 암상대상자라고 생각하기 어려운데, 그에게는 또 다른 얼굴이 있었다. 그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아라파트의장의 사촌이었고 팔레스티나의 테러에 관해 조정역을 맡고 있었는데 사람을 모아 조직하는 것이 임무였다. 뮌헨 올림픽 테러에도 관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이 즈와이델을 암살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즈와이델 암살을 시작으로 팔레스타인 검은 9월단 암살이 연이어 일어났다. 어떤 사람은 총으로, 어떤 사람은 폭탄으로, 유럽의 각국은 이스라엘의 행동에 강한 경계심을 나타냈지만 모사드 암살도 계속되었다. 1979년 1월 22일 베이루트 노상에서 ‘알리 하산 살라메’(뮌헨 올림픽 테러 작전 책임자)가 자동차와 함께 폭파되어 살해되기도 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티나 간을 가로막고 있는 깊은 갈등은 계속해서 비극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시험을 쳐서 대통령을 뽑는다면 ◌◌이 감이야’하는 말이 있듯이 ‘암살에 올림픽이 있다면 카스테로는 확실히 참피언이 감이야’하는 말이 있다. ‘피델 카스트로’는 카리스마를 가진 쿠바 대통령이다. 1926년 쿠바 ‘마야리’에서 태어난 그는 ‘하바나 대학’에 입학하면서 정치에 뛰어들었다. 당시 쿠바는 미국수혜를 받는 일부 계층을 제외하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1956년 채 100명이 안 되는 동료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그중에는 아르헨티나 혁명가‘체 게바라’도 있었다. 게릴라전으로 반정부 세력을 확대한 카스트로는 3년 후 독재자 ‘바티스타’를 끌어 내리는 데 성공했다.
카스트로에게는 열렬한 신봉자가 있는 반면, 강한 반대파도 있었는데 양면을 다 가진 지도자였다. 미국은 카스트로의 혁명 세력에 찬성하지 않았고, 자신들에게 의존하지도 않는 카스트로가 미웠다. 또 카스트로가 실행한 토지 국유화는 소련에 대한 접근으로 보고 대립이 극대화되었는데, 냉전이 한창인 당시에 눈앞에 그려지는 사회주의 정권이야말로 미국으로서는 목에 걸린 가시였다. 카스트로를 암살하기 위해 암약한 조직은 미중앙정보부, 즉 CIA였다. 1960∼1965년까지 적어도 8번의 암살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카스트로는 2016년 11월 25일까지 건재했다.
CIA의 암살 계획의 실행자는 반카스트로 세력을 이용하는 것이었는데, 망명 세력들로 ‘2508 여단’을 지원해, 부대가 은밀히 쿠바로 잠입하면 국내의 레지스탕스와 함께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켜, 카스트로 군부를 분단시켜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실제로 1961년 4월 17일 새벽 1시 1,500명으로 구성된 2506 여단이 피그스 만에 상륙했다. CIA가 지원한 공중폭격도 있었다. 미국의 계획대로라면 카스트로 정권은 붕괴되고 미국에 우호적인 신정부가 수립되어야 했다.
그러나 쿠바의 정보기관이 한 수 위였다.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카스트로 정권은 국내 반정부세력을 봉쇄했다. CIA가 기대했던 레지스탕스의 신호는 어디에도 없었다. 카스트로는 피그스 만으로 향하는 배들을 공중 폭격했다. 화물선은 좌초하였고, 물자와 장비를 실은 수송선도 침몰했다. 상륙한 2506 여단은 아군의 지원을 받지 못하여 해안에 남겨진 꼴이 되었다. 오후에는 카스트로가 직접 전선을 찾아 병사들을 격려했다. 2506 여단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72시간 만에 결말이 났다. 1,000여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다.
피그스 만 침공작전은 카스트로에게 어떤 결단을 내리게 했다. 당초 그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가운데 그 어느 쪽도 동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는 냉전시대였다. 미국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취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카스트로는 자신이 일으킨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피그스 만 침공작전은 실패했지만, CIA가 카스트로 암살 계획을 완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CIA는 마피아와 손잡은 적도 있었다. 미국이 쿠바를 적대시하는 정책은 변함이 없다. 2001년 9.11테러 사건 이후 부시 전 대통령은 이란, 이라크, 북한을 ‘악의 축’이라 지칭하며 비난했는데, 이후에 시리아, 레바논, 쿠바도 더해졌다. 그런 가운데, 흑인인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 후보가 되었는데, 가스트로는 이런 말을 남겼다. “아직 인종차별이 남아 있는 미국에서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이 암살되지 않는 것은 기적이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