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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내적 또는 외적 생활 속에서 뭔가 중대한 사건을 만나고, 평범한 이 세상의 삶의 게으른 잠에서 깜짝 놀라 눈을 떴을 때, 또는 더욱 진지한 삶이 가능하고 그것이 바람직하다는 감명을 받았을 때, 그들이 맨 먼저 던지는 질문은(그것을 분명하게 입 밖에 내든 안 내든) 언제나 "무엇을 해야 하는가?"이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방법주의'의 대한 답은 보통 다음과 같다.
즉, 그런 사람들의 말꼬리를 잽싸게 누르고 그들을 부추켜 어느 한 단체에 가입하게 하는, 더 이상 뒤로 물러날 수 없는 한 걸음을 실제로 힘차게 내딛게 한 뒤,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하게 하여 집단적으로 활동하게 하는 방법이다.
그 덕분에 그런 사람들이 즉시 전과는 다른 생활태도에 도달할 수 있거나 자신에게 없었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면, 아마 그들은 더 어려운 일도 마다하지 않을 테지만.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인간이 자신이 대해 아는 것 이상으로 인간을 잘 알고 있어서, 새로운 신자에게 처음부터 어떤 행위나 상태의 큰 변화를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선을 향한 자유로운 결심만을 바라며, 거기에 계속적인 좋은 의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앙을 구하는 것이다.
이때가 되어서야 비로서 복음은 그에게 위로부터의 힘과 촉구를 약속한다.
이 힘과 촉구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행위를 낳을 수 있다.
이에 반해, 자신의 힘으로 자발적으로 하는 일('행위를 의지한다'는 말의 본질적 의미 *작성자 주*)은 그들의 뿌리인 자아성을 새로운 생활 속에서도 계속 지니는 것으로, 실제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최선의 일을 부분적으로 자주 파괴해 왔다.
그것은 하나님의 가장 위대하고 또한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한 사업도 저절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며, 각 세대의, 아니 한 사람의 끊임없이 새롭고 자유로운 의지와 헌신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러한 정신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면 하나님의 사업을 지키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결코 실천에 옮기는 일이 없는 단순한 신앙은, 흔히 주해되어 있는 사도 야고보의 말을 빌리면 죽은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루터가 이 야고보의 편지를 그 시대의 요구에 적합하지 않다며 '지푸라기 편지'라고 부른 것에,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
야고보의 편지는 바울의 편지 못지않게 좋은 것이며, 루터가(바울이 아니라) 로마서 3장 28절(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에 삽입한 '기도(루터의 기도)'는 오늘날에 모든 성서에서는 원래 괄호 안(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는 *작성자 주*)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인생에는 그야말로 신앙과 행위의 두 가지가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행위에는 사명과 지시가 필요하다.
극히 사소한 점에까지 미치는 끊임없는 지시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성령의 가르치심대로 가르치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고, 성령의 행하게 하심을 따라 행하는 믿음의 행위를 말한다 *작성자 주*)
그러므로 산상수훈(마5~7장)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또 그 나라의 적극적인 백성으로 걸맞는 마음자세가 설교된 바로, 마태복음 10장에서 그 같은 자세를 토대로 실천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일반적 훈령이 제시되는데, 그것은 분명히 군대의 일반적인 훈령과 똑같은 특징을 가진 것이다.
이 일반적인 훈령은 위안의 말로 시작하여 위안의 말로 끝난다.
행위를 명령받은 사람들이 세상에 나가는 것은 자신의 의지에서가 아니며, 마찬가지로 자신의 부담에 의해서도 아니다.
그들은 주의 이름과 명령에 의해, 또 틀림없이 주어지는 주의 보상을 얻어서 그 의무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 의무는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그들에게는 사람의 영혼이 무엇보다 추구하는 것, 즉 모든 영을 지배하는 힘이 주어진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친구와 제자들을 찿아내어, 이 사람들이 그들을 자신의 마음 속에도, 집에도 맞아들이며, 그것에 대해 이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큰 보상이 약속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모든 인간의 진실한 요구는(또한 마찬가지로 영혼의 요구도) 이러한 의무 속에서 채워진다.
그것도 이 세상과 그 주인들에 대한 의무 속에서 보다 훌륭하고 더 확실하게 채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의 것을 먼저 터득한 뒤,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어 다음의 지시를 듣기 바란다.
우선 여러분이 속해 있는 나라의 사람들 곁에 가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고, 사람이 한 나라, 한 민족에 속하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이며, 그 질서를 완전히 무시하려는 국제적인 것, 인도주의적인 것, 또는 사회주의적인 것은 진정한 성공의 유일한 원천인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권장하라.
치유하고, 정화하고, 자각시키고, 모든 악을 정면으로 공공연히 반대하는 것이 좋다.
이것이 여러분이 매일 해야 하는 일이자 의무이며, 여러분은 그것을 완수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여러분의 활동 속에서 이득을 구하지 말고, 그것을 부수적인 것으로 마음에 깊이 두지도 말며, 필요한 것으로만 만족하라.
그것은 남는 것이 짐이 되거나 번거로움이 되어, 여러분이 모처럼 얻은 더 나은 사상을 방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작성자 주*)
또는 유약함이나 지나친 편안함이 여러분의 행위를 꺼리게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항상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비교적 좁은 범위에서 먼저 가까이 교제할 사람들을 선택하여 그들과 교제하라.
그 밖의 사람들과는 다투지 않는 것이 좋다.
그들의 여러분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도 없고,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에, 이미 그들이 받아야 할 심판이 들어 있다.
성실에 반하지 않는 한 현명하라.
다툼이나 위험을 멋대로 구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반대에 부딪쳤을 경우, 게다가 그 반대가 가까운 쪽에서 나타나더라도 그리 놀랄 것은 없다.
또 그것에 어떻게 대항할지 걱정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리스도교는 최후까지 미움을 받지 않고는 끝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결국 모든 것을 이기고, 또 그것에 편드는 자도 이기게 됨으로, 이 신앙에서 자신의 생명의 진수를 발견해낼 것이다.
여러분의 주가 받으신것 이상의 것, 너 나은 것을 구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싸움은 결코 오래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세 번 거듭하여 말해둔다).
두려움은 항상 죄이거나 죄의 결과이다.
여러분의 내부에 있는 죄를 경계하라.
분명히 여러분에 대해 입으로는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겠지만, 여러분에게 적대하는 행동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극히 사소한 일도 여러분에게 일어 나지 않는다.
여러분의 적은 스스로 깨닫지는 못해도 모두 하나님의 그릇이며, 만약 여러분이 증오와 복수심을 품지 않고 그들을 볼 수 있다면, 그들은 여러분을 위해 가장 유익하게 일하게 된다.
증오와 복수심은 오히려 여러분을 손상시킬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려워하라.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 많은 이유가 있다.
말에 있어서나 행위에 있어서나 하나님을 결코 거부해서는 안 된다.
또 결코 끊임없는 평화와 안식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생 본연의 모습도, 법칙도 아니다.
오히려 인생의 의무(고난 *작성자 주*)를 결연히 받아 드리는 것이 좋다.
만약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안락한 삶을 구한다면(이 세상의 영은 여러분이 이제라도 돌아와서 이 세상의 영을 주인으로 승인한다면, 그러한 삶을 쉽게 약속할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틀림없이 영원하고 진실한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눅4:6/존 번연의 천로역정).
그러나 여러분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그 지시를 믿고, 용기를 내어 눈에 보이는 많은 것을 버린다면, 그리고 인간이 생애에 이룩할 수 있는 이 최대의 약진을 날마다 그리고 모든 기회에 조용한 결심으로 새롭게 이행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질 뿐 아니라 여러분이 버린 모든 것이(그것이 높은 가치를 지니는 한) 백 배나 되어 다시 돌아오고(마19:29, 막10:29-30, 욥42장), 그와 아울러 영원한 생명도 얻을 것이다.
그때, 아니 그때라야 비로서 여러분의 인생은 진정한 내용과 영속적인 가치를 지니게 된다.(오오 주님! 우리 모두를 이 복된 경지로 이끄소서. *작성자 주*)
지금까지 말한 것은 올바른 인생의 모든 조건을 간단하게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이 조건을 변경할 수는 없다.(왜냐하면 이 조건은 그리스도의 지상 대위임령이기에 그러하다./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20 상).*작성자 주*)
그것을 감히 프로메테우스적인 반항심으로 시험한 사람들은 그들의 철학적 또는 사회적 이론과 실천으로도 늘 좌절하고 말았다.
주는 '그들을 비웃으신다'(시2:1-4, 9:15-16).
또 그들의 반항이 극단적인 정도에 이르면, 그들은 그 때문에 건전한 양식을 잃게 된다.
양식은 오직 하나님의 세계질서(복음의 원리)와만 일치할 수 있고, 그 외에 세계질서(세상의 원리)는 전혀 수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조건을 수용할 수 있거나 없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생활은 자유로운 의지를 토대로 하고 있고, 더욱이 하나님은 자유로운 인간과 스스로 나아가 일하는 종을 원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신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거나 그것을 포기하고 싶어해도 인정하지 않으신다.
이들도 올바른 길을 알고 있었을 텐데 단지 '그 길을 잘못 들어섰을' 뿐이다.
그것은 그들도 자의식의 바닥에서는 이 길을 똑똑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올바른 길은 실제로 큰 심연 사이를 누비며 나아가는 것으로, 오늘에서 내일로 가는 길조차 확인할 수 없는 일도 있어서, 먼 미래에 거울에 비춰볼때는 누구나 불안에 떨수 밖에 없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저 무서워서 떨면서도 이 좁고 올바른 길로 들어서는 사람들은, 그 지시를 내리신 주께서 동정과 관용으로 지켜 보신다.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내려주시는 무수한 조언을 통해, 또 가능한 한 고통을 줄이는 모든 방법을 통해, 그리고 일찍이 이 길을 따라가서 결코 헤메는 일이 없었고, 더욱이 그 인생의 마지막에 특별히 염세주의자가 되지 않았던 참으로 많은 사람들의 실례를 통해, 그들에게 용기를 주신다.
지금까지 세상에 있었던 어떤 철학, 어떤 다른 종교, 또는 과학에 대해서도 그들이 이러한 일을 이룩했다고는 행여라도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회의적인 사람들은 풍요롭게 번영하는 인생에 도달하는 길이 그 밖에도 있지 않을까 하고 때때로 의심을 품을지 모르지만, 가장 확실하고도 가장 쉬운 길, 또 과거에도 미래에도 최상의 동행자를 얻을 수 있는 길은 어쨌든 이 길밖에 없다.(복음이 삶의 실재가 되는 단계로 넘어 오지 않으면 우리는 끊임없이 흔들릴 수 밖에 없다. *작성자 주*)
자, 이 논문의 서두를 읽고,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하고 물었을 독자 여러분은 이상과 같은 일을 하면 된다.
이 길을 걸으며, 이 일반적인 훈령에 따르는 것이 좋다.
그러면 앞으로 당신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어떠한 인간의 지도와도 다른 인도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하루의 명령은 그날 그날 주어지며, 그 싸움의 전체에 대한 명령이 미리 주어지는 일은 없다.
아마 여러분은 그러한 전체적 명령은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뭔가 큰 일이 전체로서 여러분의 마음을 차지해 버리면, 자신이 얼마만한 일을 할 수 있을지 또 그것을 견딜 수 있을지, 전혀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상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일반적인 훈령이다.
그 밖의 점에서는 지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에 속한 모든 사람이 동일한 의무를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만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어떤 군대에 속하는 모든 군인이나 시민, 또 직업적으로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들은 뭔가 진정으로 쓸모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올바른 부서를 찿기 위해 특별한 임무를 지시받는 것이 좋다(창6:22).
왜냐하면 사람들의 영혼, 특히 젊은 사람의 영혼은 '지극히 다양한 소질에서 싹터서 자라나는'것이며, 그 중에는 자신의 진정한 천직을 끝내 깨닫지 못하거나 생애의 마지막에 가서야 간신히 깨닫는 사람들, 또 타인에 의해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되는 사람들도 무수하게 많지만, 성실하게 하나님의 인도에 몸을 맡기는 자라면 누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대문이다.
올바른 항로에 들어가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중대한 일이다.
카라일은 일찍이 자신의 모든 처세훈을 다음의 한 마디로 정리했는데, 그것이 틀린 말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자신의 일을 알고, 그것을 하라."
이 일반적인 훈령에 대한 몇 가지 특별한 주의 사항을 든다면, 대략 다음과 같다.
우리가 학교에서 받는 일반적인 종교교육은 고작해야 다른 수많은 공포에 하나님에 대한 공포를 덧붙여 주입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 공포도 살아 가는 동안 곧 더 흔하고 확실한 생활에서의 걱정거리 때문에 멀리 밀려나고 만다. 그리고 지극히 많은 사람에게는 인생의 한 낮에 이르기 전에 하나님이 그저 단순한 환상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것은 어두운 미신시대가 인간과 자연적인 욕구 사이에 설정한 환상으로, 이제 '계몽의 태양(계몽주의 사상)' 앞에 흩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현대의 문명인은 이제 공포의 길을 지나 하나님에게 도달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감하는 자뿐이다.
이 사랑의 실감은 결코 환상이 아니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가운데 가장 확실한 것이다.
언젠가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에 재촉되어, 성실하게 '주여, 나는 그 무엇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때 여러분은 이 인생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며, 어떤 영원한 것도 이것을 능가하는 것은 줄 수 없을 것이다.
그때야말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실현되는 것이다.
그 전에는 여러분의 그리스도교도, 행복의 영속성도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뭔가 올바른 것을 실천하고 있지 않은 게 아닌가, 또 굳게 결의한 사항을 중요한 순간에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공포가 사라지지 않는다.
또 그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기억력만으로 자신이 완수해야 할 모든 의무를 기억하고 있을 수는 없고, 더욱이 모든 순간에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충분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랑은 결코 사랑하는 것을 잊게 하지 않으며, 또 사랑이 있는 사람을 일깨워 사랑에 걸맞고 그 사람에게도 필요한 것을 실천하게 하는 장점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 아주 간단한 처세훈 가운데 모든 경우에 잘 들어 맞고, 각자의 요구대로 개성이 풍부한 활동을 허락하고, 또 확고하게 행복으로 인도하는 것을 찿는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라"(신10:22).
그것이 과연 가능한지 한번 시험해 보라. 그렇게 하면 그 이상 어떤 규칙도(교회의 것이든 시민의 것이든)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단순히 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다른 모든 감정을 능가하는 뿌리 깊고 완전히 진실한 감정이 아니면 안 된다.
그러나 그 감정이 없을 때는 아직 버팀목이 필요하고, 그 버팀목은 이 경우에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설교와 전도는, 아니 그런 방면의 강연과 집필만 해도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직무는 아니다.
이러한 일에 의해 자기 내부의 가장 좋은 것을 잃는 사람과 자기 생명의 나무에서 나중에 더욱 맛이 들 과실을 채 익기도 전에 그대로 떨어뜨리는 사람이 많다.(웨슬리는 이에 관해 좋은 충고를 주고 있다. 그것은 설교와 지도 교육에 부름을 받은 사람에게도 유익하다. "당신이 영의 금화를 적절한 목적에 사용할 때는 자만심 강한 사람들의 허영심을 흉내내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들은 사소한 물건 값을 치를 때도 오로지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금화를 한 줌이나 꺼낸다.")
그러한 일에 부름을 받은 다른 사람들도 청중에게 강요당하거나 자신의 포고열에 사로잡혀, 무리한 노력을 거듭하다가 육체와 정신의 힘을 빼앗겨 버린다.
외적인 사업에서는 그런 사태가 더욱 자주 일어난다.
그 사업(선교/구제/교회 건축 등 *작성자 주*)은 점차 그들의 힘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 되고, 때로는 더 이상 깨끗하다고 할 수 없는 모금(헌금)을 끊임없이 함으로써만 간신히 유지되는 수도 있다(교회가 무리한 일과 사업에 치중함으로 만성 적자 재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로 인하여 회원들에게 무리한 헌금을 요구를 하게 되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 *작성자 주*).
이 점에 있어서도 바울(그리스도가 아니다)은 그 최초의 실례이다(행11:28-30 *작성자 주*).
헌금을 모금하여 그것을 직접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는 것이 반드시 바울의 사명은 아니었다는 것, 또 아테네 사람들 앞에서 펼친 철학적인 설교(행17:16-34 *작성자 주*)도 실패했다는 것을 지금 의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또 그가 처음 쓴 것으로 추정되는 데살로니가 사람에게 보낸 편지(데살로니가 전후서*AD 51년경*)와 그 밖의 편지(옥중 서신서를 제외한 서신서들/바울이 많은 일과 사업에 치중하고 있을 때 보낸 서신서들을 칭함 *작성자 주*)속의 각 부분은 그가 마지막에 뜻밖의 여가를 보내던 중에 로마에서 써 보낸 편지(옥중서신/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처럼 깊은 내용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의 우리는 바울이 몇 장의 편지를 쓰는데 더 여유를 가졌더라면 하고 아쉬워하지 않을 수 없다.(그의 성급한 포교 성향에 대하여 *작성자 주*)
이에 반해 그리스도의 경우 호감을 갖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나 제자들이나 모두 성급한 포교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것이며, 또 모든 '거창한 등장',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 '전도여행'(요7:3-8), 대규모 활동, 그 밖의 영혼을 해치는 말로 표현되는 모든 것을 모조리 거절한 일이다.
더욱이 그리스도가 보여준 행위는 한 구석에 숨겨진 채 남아 있지 않고, 다른 어떤 것보다 더욱 전 세계를 채우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배려에 의한 것이다.
스스로 그것을 위해 배려한 적이 없는 사람들을 대신하여.(큰 일과 사업으로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하려고하는 이 시대속의 목회자들이 아닌, 감추어져 한 알의 밀알로 썩어지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 *작성자 주*)
지금으로서는 그리스도교회의 모든 제도와 예배, 그 관리, 국가와의 관계는 오히려 그냥 그대로 두는 것이 낫다.
그 대신 강한 신앙이 새롭게, 또 많은 사람들의 내부에서 태어나도록, 여러분이 놓여 있는 지위에서 배려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나머지는 저절로 되어 간다.
그리스도도 당시 예배의 모든 제도에 대해서, 그것도 부도덕하지 않은 한 거의 문제를 삼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그 제도를 지배하고 있는 단순한 형식주의를 결코 간과한 것은 아닌데도 오히려 그 제도를 따랐다.
인간은 무엇보다 그런 외적인 사물에 집착하는 일이 많은 법인데, 그것을 제거하거나 본질적으로 변혁하면 동시에 신앙 자체도 상당 부분 잃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런 경우에는 "그것을 상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느니라"(사63:8)고 말하게 된다.
또 외적인 개혁에 손을 대거나 그 일에 지나치게 무게를 두는 사람들은 모두 야심가이며, 나중에는 자신의 신앙조차 잃어버린 경우를 역사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개혁에는 축복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어떤 교회에도 있기 마련인 말라죽는 것은 분명히 때가 오면 묻힌다.
그러나 그 매장의 의무를 완수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자는 대개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이다(눅9:60).
그러나 당신의 생활에서는 그많큼 더 확고하게 신앙에 합치하지 않는 것과 하나님의 내적인 결합을 아직도 어딘가에서 방해하고 있는 것은 모조리 고치는 것이 좋다.
제도가 존재하는 이유와 그 수명에 대한 문제는 무언가의 주관적인 요구와 혐오와는 다른 척도로 재지 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반적인 외적 의미에서의 종교개혁자와 종교개혁의 시대는 매일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시기도 아니고 그런 임무에 부름을 받은 것도 아닌데, 스스로 그것을 자청하고 나서는 사람들은 위험한 길을 걷는 것이다.(이 시대속의 참된 개혁자는 한사람한사람이 그리스도로 채워져서 강한 신앙이 새롭게, 또 많은 사람들의 내부에서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작성자 주*)
좋은 행위를 방해하는 가장 흔하고 뿌리 깊은 두 가지 장애물은 허영심과 탐욕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자기 밖에 염두에 두지 않는 습관을 원천으로 하는 점에서 내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잇다.
그러나 어쨌든 이 두 가지는 모든 미묘한 색조를 띨 수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도 그 모습을 드러낸다.
허영심의 경우에는 특히 종교적 이기심이 생긴다.
즉, 언제나 오직 자신만의 신앙만을 높히고, 강화하고, 위안 받기를 원할 뿐, 그러한 개인적인 구원 외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탐욕에 대해서도 남에게 무엇을 주는 데 그저 마지못해, 말하자면(이 문제에 대해 얘기한 어느 책 속의 지당한 말을 빌리면) '신념을 굽히고' 주거나(자원하는 마음이 아닌 억지로 *작성자 주*), 팔 사람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물건 값을 싸게 후려서 산 것을 자랑하고, 또 절약해서는 안 될 것을 절약하고 싶어 하는 동안은 여전히 이 욕구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행복을 깨는 이 두가지 큰 적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이에 가장 도움이 되는 하나님의 은총을 제외하면, 자신만 생각하기보다 더욱 위대한 사상을 품는 것 말고는 달리 길이 없다.
또 허영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결국 이쪽의 기대와는 달리 타인에게 역효과밖에 주지 않기 때문에 항상 어리석은 일이라는 이성적인 깊이 있는 생각 또한 하나의 방법이다.
탐욕에 있어서는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한 최상의 수단은 오히려 기꺼이 주는 것이라는 경험이 가장 확실한 효과가 있다(대하25:8-9).
그러나 이것은 세상의 일반적인 현명함(세상의 원리)과는 일치하지 않는, 더 높은 세계질서(복음의 원리)에 속하는 축복의 법칙 가운데 하나이다.
이 법칙은 직접 시험한 뒤에야 비로서 알 수 있는 것으로, 스스로 시험해 보지 않는 자는 믿을 수 없다.
현대의 설교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언제나 '가난한 목수'로 설명하고 싶어하는데, 그 그리스도가 지상의 재물을 다룰 때의 그 관대하고 풍요롭고 권위에 찬 태도는 직접적으로 그를 따른 모든 사람들에게 아주 확실한 기준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진정으로 믿음 깊은 사람들에게도 배어 있는 옹졸한 소시민적인 태도는, 무엇보다,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완전히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그 본성과 의도에서 말하면 가장 넓은 사상을 지닌 웅대한 인생관이다.
그 사상은 일상의 번잡함과 비참함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만약 그리스도교가 진정으로 그런 것이었다면, 그리고 흔히 볼 수 있는 편협하고 인색하며 타인을 엄격하게 심판하는 신자의 모임이라는 희화적(우스꽝스러운, 또한 그런 것) 존재나 단순한 구호시설의 일종이 아니었다면,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가 주의 영을 항상 간직하고 있었다면(행5:1-11, 6:1-2) 그것은 이미 아주 오래전에 웅대한 정신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런데 실재로는 그들은 그리스도교가 그들의 고매한 요구에 맞지 않거나, 더 이상 맞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리스도교에서 멀어졌다.
시대의 요구를 너무 이해하지 못한 교회는 불안에 차서 마음의 평화를 애타게 구하는 사람들의 구원을, 다만 상투적인 몇 가지 선(교의적, 형식적, 이상주의적, 향락주의적 *작성자 주*)에서 끝내려 한다는 점에서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모습인 단순한 복음의 밝은 빛과 우리의 힘이 아닌 영의 도움이 있으면, 내적 파산을 초래하지 않고 근대 생활을 잘 극복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그것은 사도 바울이 '끊임없이 기도하라(하나님과의 끊임없는 친밀한 교제 *작성자 주*)'는 말로 표현하고자 한 경지로, 평범한 교회주의에 의해 거기까지 완전히 도달하는 것은 좀처럼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한 '옛날부터( 단순한 전통적 신앙 *작성자 주*)'의 신앙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시대에도 신앙은 초기 신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선함과 진실함이며, 신앙의 방식이나 특정한 교회적인 교제에 소속하는 것 따위가 아니다.
살아있는 신앙은 완전히 그 선언대로 작용(실천)하는 것이며 우리가 이 신앙에 의해 얻고 싶어하는 인생의 행복(모든 삶의 정황속에서 참된 자유와 평화와 만족을 누리는 *작성자 주*)을 틀림없이 주는 것이다.
선한 행위를 방해하는 또 다른 큰 장애물은 우상(자신의 인생에 힘과 용기를 준다고 생각하는 모든 버팀목 *작성자 주*)이다.
한 성서 주석자는 야고보(야곱)의 가정에서 일어난 수많은 악은 '드라빔'이라는 작은 우상 때문이라고 했다.
이것은 야고보의 아내 가운데 한 사람(라헬)이 메소포타미아를 출발할 때 훔친 것으로(창31:30-35), 훨씬 나중에 가나안의 테레빈나무(상수리 나무) 밑에 묻혔다(창35:1-4).
의심할 것도 없이 이러한 외적인 사물과 미개한 민족들에게 따라다니는 자연숭배를 특별히 고려하여, 모세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은 그토록 단호하게 '나'의외의 우상을 배격한 것이다.
게다가 유대교도와 이슬람교도도 그리스도교에 반대하는 데 항상 이 점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려 했다.(그리스도를 우상화했다고 비난 *작성자 주*)
그것은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교가 다른 신들도 믿는 종교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 첫 번째 계명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에 따라 가장 먼저 모든 종류의 '영교술', 즉 강령술(초월적인 현상이나 숨겨진 힘 따위를 추구하거나 연구하는 일)과 심령술(특이한 심령 현상을 일으키는 여러가지 기술) 등이 금지의 영역으로 쫒겨 간다.
그러나 그 밖에도 아직 여러가지 우상이 있다.
고귀, 부유, 교양에 대한 자만, 학문, 예술(특히 음악), 때로는 자식, 부모, 배우자, 성직자, 지배적 인물, 역사상의 위인 또는 현대의 위인 등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와 나란히 서는 것은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이따금 이것을 떠올리며 마음속에 깊이 새겨둘 필요가 없다.
인간의 마음은 단순히 '아무것이나 숭배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모든 우상 가운데 가장 크고 또 가장 위험한 '자아'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지극히 사랑하는 일 없이 그 우상의 왕좌에서 자아를 떨어뜨릴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이미 다른 데서도 말한 것처럼, 참으로 심각한 문제는 모두 이 점에 있다.
모든 인간이 우상이나 하나님 가운데 어느 한 쪽을 사랑하고 있고,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그리스도교도 포함하여) 둘 다 함께 사랑하고 있다.
그것으로 인해 수많은 불화와 다툼과 당파가 생기는 것이며, 이들은 그리스도교도 속에도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우상이 사라지면서 동시에 남김없이 자취를 감출 것이다.
인간에 대한, 또 일반적으로 우리 주위의 세계에 대한, 나아가서는 동물과 식물에 대한 올바른 관계(이것은 우리의 행복감을 실제로 크게 좌우하는 것이다)는 끊임없이 선한 행위를 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올바른 관계를 소홀히 하는 경우, 우리는 항상 인간을 과대평가하거나 경멸하며, 자신의 행복에 있어 타인의 영향을 너무 강하게 받게 된다.
또 인간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도 타인을 자신의 행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고, 또 경멸도 하지 않는 경우에 한한다.
그렇지 않을 때는 모든 것이 인간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을 방해하게 한다.
실제로 끊임없이 선한 행위를 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결합이 견고해졌을 때, 그때야말로 저절로 마음의 눈이 열려 인간 형제의 마음속을 꿰뚫어보고, 하나님에게 적의를 품는 해로운 모든 것에 대해 확실한 경고를 받을 수 잇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착각하는 일도 없고, 또 심하게 속아 넘어가는 일도 없게 된다.
물론 그러한 관찰력은 동시에 뭔가 조금이라도 좋은 점을 가진 것을 허락하려는 인내심, 또는 모든 일을 견디기 쉽게 해주는 동정심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위험한 성질(자신의 영적 우월감으로 정죄하고 심판하는 *작성자 주*)의 것이 될 수도 있다.
(선 그 자체를 목적으로 선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끊임없이 선한 행위를 함으로써만 사물과 사안에 대한, 또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이 통찰력은 끊임없이 자신을 깊이 성찰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작성자 주*)
인간에 대해 참으로 견딜 수 없는 느낌이 드는 것은(더 이상 속지 않게 된 사람들에게 그것은 아마 그런 종류의 것 가운대 가장 괴로운 일일 것이다)
인간이 대체적으로 타인의 친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고등동물에게 많큼도 친절이 통하지 않는다.
친절을 이해하고 그것에 감사하는 점은 오히려 고등동물이 인간보다 낫다.
인간은 남의 친절을 믿지 않고, 상대의 행위 뒤에(자신들의 사고방식에 일치하는) 비열한 동기가 숨어있지 않은지 끊임없이 의심하거나, 상대의 친절을 그 사람의 나약함 탓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때때로 야비하게 이용하기도 한다.
직업상 많은 사람과 교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대개 마지막에는 냉혹한 폭군(카리스마적인 폭군 *작성자 주*)이 되는 것도 이런 면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폭군만이 살아 있는 동안 그에 상당하는 존경을 받고, 죽은 뒤에는 폭군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뿐만 아니라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부터도) 찬양받으며 영웅으로 숭배된다(우리나라 근대사에도 얼마든지 이런 위인을 꼽을 수 있다 *작성자 주*).
이 어려운 점에 있어서의 올바른 처세술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상대로부터 어리석은 자라거나 나약한 자라고 멸시 당하지 않도록 하고, 오히려 자신의 사고방식과 행위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전혀 다른 입장을 태연하고 명확하게 유지하며, 더욱이 스스로 친절한 마음을 잃지 않고, '훌륭함'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한 천재적 능력을 부여받은 사람 외에는 극히 만년에 가서야 배울 수 있는 처세술이다.
또 많은 사람, 특히 여성들은 항상 누군가에게 '괜찮은 인물'이 되고 싶은 나머지 자신의 생명을 잃고, 온갖 노력을 다해 애쓰고 일하면서도 오히려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함께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성실한 노력을 상대가 일종의 방자함으로 해석하고 불쾌하게 여기는 것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만약 그가 실제로 괜찮은 사람이라면,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그 진가가 드러난다.
그리고 더 뛰어난 다른 성질은 부족하지만, 적어도 타인에게 기분 좋은 존재라는 타고난 장점만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크게 존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상대가 이쪽이 용인할 수 있는 한계를 넘지 않도록 끊임없이 주의하고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불쾌함은, 커다란 결점보다 더욱 남들이 싫어하는 성질이기 때문이다.
또 이웃의 친절과 신뢰감도 그러한 미덕이 허황되거나 번거로움을 수반하고 있는 한, 사람들은 그것을 신용하지 않는다.
물론 기분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선으로 나아가는 최초의 조그마한 단서에 지나지 않지만, 그렇다 해도 거기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단순히 좋은 인간이 되고 싶어 할 뿐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남에게 납득시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좋은 의지는 당신에게도, 또 그것을 보고 올바르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에게도 '최상의 것'임이 틀림없지만, 인간은 그 의지의 작용을 보고 싶어하여, 그 효과가 보이지 않으면 그 의지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사람은 일반적으로 보이는 것을 믿으려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다. *작성자 주*)
그러나 어쨌든 사람은 항상 불쾌한 인간으로부터 가능한 빨리 벗어나려고 노력하며, 그들이 가진 미덕조차 멀리서 칭찬한다.
하나님의 의지에 따르는 행위의 가장 확실한 결과는 그것으로 인한 기쁨이다.
그것이 눈이 부시는 듯한 밝음(그것은 흔히 단순한 신경의 흥분에 지나지 않으며, 뒤에 애수를 남기기 쉽다)이 아니라 조용하고 밝은 쾌할함과 힘찬 기쁨이며, 그것도 예외적인 기분이 아나라 평상적인 마음의 상태이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이 본래 가장 강하게 동경하고 추구하는 것으로, 한번 그것을 실감했다가 다시 잃어 버리면 견딜 수 없이 애석한 감정을 느낄 정도이다.
이 감정을 구약의 많은 시편이 참으로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에 반해 근대 문학은 정열적인 흥분이나 비애의 정서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어쩌다가 조용한 기쁨을 얘기 할 때도 뭔가 허술하게 표현해버린다.
우리가 진정한 '노래'를 더 이상 가지지 못하게 된것은 현대 시 전체의 커다란 결함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여전히 어두운 인생을 햇빛처럼 걸으며, 자신이 들어가는 모든 방을 환하게 밝히는 사람들이 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지상의 존재를 끝내고 다른 존재(우리의 상상에 의하면 그곳에는 영원한 쾌할함이 지배한다)로 옮겨가 버리면, 그들이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손실일 것이다.
도대체 그들은 타인에게도 나눠줄 수 있는 그런 끝없는 쾌할함을 어디서 얻었을까?
그것은 결코 정신적으로 특별한 재능을 타고났기 때문도 아니고, 특히 안정되고 높은 세속적 지위 때문도 아니며, 또 인생의 모든 어려움과 일반적인 슬픔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완성된 철학적 또는 윤리적 인생관에 의한 것도 아니고, 각별히 교회에 열심이거나, 특히 널리 알려질 만한 신앙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진실하고 단순한 마음에서 나오는 경건함 때문으로, 하나님은 바로 그런 경건함 옆에 다른 어떤 정신과 마음의 방향에 대해서보다 가까이 가시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경건한 마음은 반드시 실천을 수반하지 않으면 안 되며,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이 햋빛을 자신을 위해서만 저장해두고, 그것에 의해 자신만 끊임없이 신앙을 '고무'받고 싶어하지 않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에게 요구받지 않아도 그 빛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그것이 이들을 현대에서도 여전히 그리스도교의 살아 있는 상징이 되게 한다.
현대에 있어서 가장 부족한 것은 그러한 살아있는 표명이다.
이 순수한 경건함은 요컨대 아무런 반성도 기다리지 않고 저절로 넘쳐나는 마음의 친절인데, 이것을 낳는것은 어떤 종류의 철학이나 교양이 아니다.
하물며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모든 사정 아래에서 그것을 낳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교만이 가지는 부정할 수 없는 특권이며, 그리스도교가 존속했던 모든 세기를 통해 그 원천이 하나님에 있음을 실제로 보여준 살아있는 증거이다.
무언가의 방법으로 그리스도교를 대신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이 같은 쾌할함과 친절을 낳는 힘이 없기 대문에, 지금까지 수 없이 실패를 거듭해 왔으며, 오늘날에도 역시 실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와 같은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살아있는 화신이 되겠다고 마음먹어야 한다.
그 밖의 일은 모두 지나치게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 좋다.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믿으라. 항상 선량하라. 그리고 일하라. 인생에 있어서는 용감하라. 죽음에 임해서는 기쁜 희망을 품으라.'
이것이 잘못된 것이 없는 유일한 인생 설계이다.
그러나 여전히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모두 참으로 좋은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실천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미 그것을 시험해보았고 그러한 의도를 품은 적도 있지만, 달성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을 할 수 없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것에 대해 말한 것은 모두 사실 그저 '위선적인 구실'에 지나지 않겠다고 믿게 되었다."
이 말은 모두 진실이지만 마지막 결론만은 다르다.
이 말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 쪽에 서려고 결심하는 것이 좋다(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여! 하나님 창조의 목적을 아는가? 그 완성의 최고한 경지가 무엇인지 아는가?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려는 것이 아닌가? 그 약속의 신실하심을 믿는다면 그 믿음대로 이루어지리라. *작성자 주*)
다음에는 당신의 능력과 개성에 맞춰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내려지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라.
그러면 모든 것이 저절로 생기고 전보다 더 큰 힘이 주어진다.
그러나 물론 이 길 외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은 단순히 건강한 자뿐만 아니라 약한 자, 병든 자도 강해지게 만든다.
이것이 철학과의 차이점이다.
가장 뛰어나고 고상한 철학도 마찬가지다.
철학은 언제나 어느 정도 현명한 자와 비교적 선량한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으로,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당신이 해야하는 의무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먼저
마태복음 6장 33절(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오오 주님! 어떻게 하면 당신의 형상대로 만든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까? 도와 주시옵소서. *작성자 주*)과
요한복음 7장 17절(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먼저 믿어지는 교훈을 실천해 보라. 그러면 머지않아 신앙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볼 것이다.*힐티의 논문 '신앙이란 무엇인가'에서 발췌*)과
이사야서 45장 22절(땅 끝에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같은 간단한 말에 따라, 그것을 시험해(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보는 것이 좋다.
아니면 사람은 오직 하나님에게 자신의 의지를 바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한 제노아의 성녀 카타리나의 말에 따르도록 하라.
"하나님이 한번 인간의 의지를 소유하면 하나님은 그 사람 속에서 스스로 모든 것을 행하여 그를 완성으로 인도하신다."
그렇게 되면 한 불행한 예언자(발람)가 말한 것이 점차 실현되기 시작할 것이다.
"아무도 야곱을 해할 수 없다. 아무도 이스라엘을 해할 수 없다.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가 함께 계시니 왕의 기쁨이 그 속에 들려오도다."(민23장 19-24, 요일4:4-6절 참조)
모든 일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곤란하고,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가능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고 치자.
'만약 우리가 그러한 가르침을 모두 그때그때 힘을 다해 지킨다면, 그것에 대해 무엇이 주어질 것인가?'
이것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이미 그리스도의 질책을 받지는 않았다.(마19:27-30 참조)
이것은 우리에게도 교훈이 된다.
왜냐하면 이치에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과장하기 쉽고, 선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이에 반해 그리스도교는 여기서도 또한 의기양양한 철학적 극기주의와는 먼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 주의는 고통을 재앙이 아니라고 말하고, 어떤 보상을 바라고 하는 행위는 고상한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언제나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며, 그들이 할 수 없는 일은 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선한 사람에 대해서는 그 보상이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고, 외적인 보상도 주어진다.
게다가 복음은 그 보상이 어떤 내용의 것인지 아주 명료하게 말하고 있다.
어쨌든 그것을 한 마디로 더욱 분명하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의 선에 대한 보상은 축복이고 악에 대한 보상은 저주라고, 그리스도교적으로 말하면 행복과 불행이 원래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이 말안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리고 역사에 대서특필된 무수한 실례뿐 아니라, 누구나 가까이 알고 있는 예가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매일 끊임없이 증명하고 있다.
이를테면 대가족이 약간의 수입으로 연명하고, 가난한 과부들이 일정한 수입도 없으면서 구걸도 하지 않고, 해마다 무사히 생계를 꾸리며 자식도 훌륭하게 교육시키고 잇는데, 이에 반해 어떤 사람들은 많은 소득을 올리면서도 조금도 윤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평생을 악착같이 일하다가 결국 걱정과 빚에 파묻혀 죽어가고, 자식들에게는 모든 갈등과 불만과 불행 말고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는 것은 그야말로 일상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마찬가지로 자식과 손자들의 육체와 정신의 뛰어난 힘은 부모와 조부모의 도덕적으로 순결한 삶의 선물이며, 반대로 오늘날 신경병의 대부분, 나아가서는 광기와 범죄의 소질에 이르기까지 그 진정한 원인이 이 하나님의 질서(하나님의 계명)를 경시하는 데 있다는 것은, 적어도 일반 의사와 정신과 의사들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정직한 사람들은 신앙이 없어도 경제적으로 좀처럼 줄어 들지 않는다는 것도, 분명히 수 많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또한 수천 년전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장수한 사람은 누구나 주저 없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나는 옛날 젊었을 때부터 늙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올바른 사람(성서적 의미)이 몰락하여 그 자식들이 걸식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경우를 한번도 본적이 없다고(시37:25-26).
반대로 부자의 자손이 축복을 물려받는 대신 오로지 재물만 물려받은 경우에는 당장 몰락해 버리는 것을 우리는 수없이 경험해 왔다.
또 다음과 같은 사실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악인들은 그 사악한 의지에서 상상되는 것많큼 위험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젠가 타락하여, 그 결과 어이없을 정도로 갑자기 파멸해버리기 대문이다.
하나님의 의지에 반하는 일이 많이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세계의 질서가 의지의 자유를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지에 반하는 것은 오래가지 않는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세우는 모든 것은 이내 다시 무너지고 만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민족 전체에도 적용된다.
민족도 하나님의 축복이 없으면 저주 아래 놓이는 것은 지극히 명백하며, 이것을 거스르고는 국가의 어떤 정책도 효과가 없다.
지금까지 말한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의 근원은 신약성서보다 오히려 구약성서이지만, 이 성서는 오늘날 너무나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구약과 신약을 율법과 은혜로 나누는 신학적, 교리적 논리가 그 폐해이다. 그러나 율법은 은혜에 이르기 위한 필수적 과정이며 율법의 완성이 곧 은혜이다. 그러므로 구약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매우 중하다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복음서)이 그것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으며, 서신서의 저자들 또한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작성자 주*)
뿐만 아니라 구약이 덕행에 대해 이 세상의 보상을 약속한다는 바로 그 이유에서, 구약에는 고상함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은 오직 '선 자체를 위해' 선을 행해야 한다고(선 자체를 목적으로 선을 사랑하고 행해야 한다고 *작성자 주*) 주장할 뿐, 결국 이치(원리)에만 만족하고 실천은 남에게 맡기고 있다.
우리로서는 이 구약의 약속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 들이고 싶다.
특히 그 약속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보호와 감독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친구와 자손, 나아가서 그 민족에게까지 축복이 주어진다는 부분도 감사하게 받아 들이고 싶다(창12:2-3, 26:4).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축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남에게 축복이 되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격의 위대함이며, 그것에 비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른바 '영웅'이란, 바로 그 사람이 그 민족, 그 시대, 아니 어쩌면 모든 시대에 축복이 되었는지 아닌지에 따라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성서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어떤 민족에게 내려지기 전에 축복받은 사람들이 항상 먼저 제거되었다.
또 그러한 민족에게는 단 한 사람의 인간이 그 삶을 끝내는 것과 동시에 그 민족의 힘도 줄어들 거라고 확실하게 예감한 적도 드물지 않앗다.
그래서 당신이 스스로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거나, 충분히 활동하고 있지 않다고 느낄 때는 위에서 말한 사상을 가지도록 노력하라.
그러한 감정에는 오직 논리적 모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일단 살아서 작용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당연한 귀결로서 그 종들에게 일을 나눠주는 하나님의 지혜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제쳐두고, 언제나 겉모습은 항상 비천하게 보이는 사람이 모든 불순한 것을 태워 버리는 불길인 하나님 바로 곁에 있는 것을 견딜 수 있는 자가 되고, 또 그것에 의해 주위 사람들, 또는 넓은 범위의 사람들을 위해 영원히 살아있는 축복의 샘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위대함은 누구나 달성할 수 있다.
설령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어서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행위가 원래 무엇인지에 대해 올바른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외적인 행복은 우리 노력의 결과 즉 성공이라고 부르는 것,
또는 맹목적의 우연 즉 도박자들이 말하는 행운,
그것도 아니면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축복이다.
하나님의 세계질서를 믿을 때, 오직 마지막에 든 것만이 확실한 행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축복을 우리에게 부르는 힘과 방법은 단순한 신앙고백이나 신앙을 수반하지 않는 행위, 심지어 무언가의 의식(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예배)이나 고행과 희생 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직 하나님을 현실적으로 자기 곁에 불러들이는 데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한) 사람을 진심으로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과 성실과 상호 신뢰를 통해 가능한 일이다.
이에 반해 다른 모든 '종교적인 것'은 결코 영원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의지를 인간적으로 성취한 것으로, 그 속에 진정한 진리의 핵심이 내포되어 있는 동안만 아주 조금 '하나님의 허락' 아래 존재 할 수 있을 뿐이다.
"하늘의 행복, 축복의 샘이여,
당신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주시고,
마르지 않는 샘에서 솟아나게 하시니,
끊없이 물결치며 흐르도다.
당신이 만약 안 계신다면, 이 세상은 오직
두려움으로 가득찬 아수라장.
풍요롭게 내려주소서.
'이루어질지어다'는 말씀을,
기뻐하는 모든 신도에게 이르소서."
**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논문은 우리 내면을 채워야 할 하나님의 선물의 내용의 어떠함을 논술하고 있습니다. 많은 도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 곧 친구와 자손과 이웃과 나아가서 그 민족에게까지 축복의 근원이 되는 '진정한 인간적 위대함'을 갖춘 이 시대의 '영웅'들이 되시길 함께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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