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엔 마곡사, 가을엔 갑사
마곡사 여행 기사를
어릴 적 누나가 보던 여성잡지 여성동아에서 사진을 보고 읽었던 구절이다.
그 이후 내 마음의 절, 마곡사를 어제 오늘 처음으로 다녀왔다.
국어책에 나오던 이상보의 수필에서 남매탑이 있는 갑사는 언제 가 볼 인연이 생길런지는 모르겠다.
백범 선생은 계룡산 갑사에서 마곡사 이야기를 듣고 그 이름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고 했다.
선생의 집에 동국명현록이란 책이 있었고, 어릴 적부터 보아온 그 책에, 화담 서경덕 선생이
마곡사 상좌승이 밤중에 죽을 쑤다가 졸음을 못이겨 죽솥에 빠져 죽은 줄도 모르고 다른 중들이 희희낙락 죽을 퍼먹는 것을
임금 앞에서 신통력으로 내다보고는 웃었다고 하는 소설 대목을 선생의 부친이 늘 이야기해주던 일을 그 때 연상하였다고 한다.
포항에서 4시간 걸려 도착하였다. 점심을 먹지 않았더니 나른한 봄날에 몸에 힘이 빠졌다.
해탈문 앞에서 밥알을 쳐서 콩고물에 묻혀주는 인절미 한 봉지를 떡장수 할미에게
사서 들고 다니며 먹으며 사진도 촬영하고 참배도 하였다.
남방의 용담 선사를 찾아가다가
금강경에 나오는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는 퀴즈를
방대한 금강경청룡소초를 괴나리 봇짐에 지고서도 맞히지 못하고
떡장수 할미로부터 떡을 공양 받지 못하고
결국 마음에 점(심신에 에너지를 공급)을 찍지 못한
중국의 덕산스님 이야기가 생각났다.
물론, 나는 금강경의 이 뜻을 잘 헤아리고 있다.
정답은 연기법을 잘 이해해야 알 수 있다.
논리적으로 연기중도 진리를 알고 싶으면
김성철 교수의 <<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에 의한 해탈>>을 읽어 보면 되고,
직관적으로 연기를 체득하고 싶으면 간화선이나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된다.
해탈문을 지나 왼쪽의 건물이 영산전이고 그 앞마당에 매화당이 있다.
영산전 현판은 세조의 글씨이고, 매화당은 백범일지에 등장한다.
영산전 3천불전에 기도하고 한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늙은 벚 나무가 이런 화사한 꽃을 피우는 경이로움이란....
세조대왕 어필 현판
해탈문-천왕문-극락교-석탑-대광보전-대웅보전
백범이 처음 왔을 때 나무다리가 있었고, 이 물을 긷다가 청년 백범은 물 그릇을 깨고 은사로부터 되게 야단을 맞았다.
사모님이 염색한 쪽빛 두루마기를 곱게 입으신 교감 선생님. 대광보전 참나무 자리는 앉은뱅이가 기도하면서 짜고 기도 뒤에 일어났다고 하는 영험담이 전해온다.
상륜부가 티베트불교의 영탑 모양이다. 최근에 올린 것이다.
경천사지 탑, 원각사지탑과 같이 한국 3대 원나라 양식의 탑. 티베트불교를 받아들인 몽골의 원의 지배를 받은 고려후기-조선초기의 석탑이다. 몸돌 4방에 불상이 부조되어 있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광보전 비로자나불 후불벽화 백의관세음보살로 19세기 작, 크기가 일본에서 통도사에 왔던 700년 전 고려불화의 수월관음도와 맞먹고 구도가 기본적으로 같다. 대작이고, 예배자에게 신심이 솟게 한다.
대광보전 뒤의 대웅보전, 언덕 위에 이층 외관을 가져서 앞의 대광보전과 어울려 매우 웅장하고 걸출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백범 선생이 출가하여 여기서 수계식을 하였다.
지금부터 64년 전인 1946년 봄날에 마곡사를 방문하여 대광보전 앞에서 기념 촬영한 백범 선생 일행.
현판 아래의 주련이 뚜렷하다.
백범 옆의 흰 두루막 노인은 이시영 선생.
백범 김구 선생이 해방 뒤 귀국하여 1946년 봄날에 방문하여 기념 식수한 향나무. 무궁화도 식수하였다.
48년 전, 1898년(23세) 늦가을에 이 절에서 삭발염의하고 원종이라는 승려가 된 일을 회상하였다.
그로부터 다시 64년이 지나가는 봄날이다.
선생은 48년 전 무심히 보았던 대광보전(백범일지에는 대웅전이라 했으나 잘못이다.)의 주련이 마치 자신의 지나온 일들을 말한 것 같았다고 술회하였다.
물러나 속세의 일을 돌아보니(却來觀世間)
마치 꿈 속의 일만 같다(猶如夢中事)
그는 18세에 동학에 입문하여 2대 교조 해월 최시형(해월 선생은 포항 신광 마북리가 고향이다)을 보은으로 찾아가 만나고 수천명의 동학 동지의 접주가 되는 첩지를 받았고, 19세에 해주성 공격에 선봉에 섰으나 실패하여 패엽사로 후퇴하였다. 이 때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과 상부상조하기로 밀약했다. 20세에 안태훈에게 몸을 의탁하였고, 유학자 고능선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의 장손녀와 약혼하나 김치경의 훼방으로 파혼했다. 21세 1896년에 치하포에서 국모(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군 스파이 쓰치타를 때려 죽임. 인천 감옥에서 사형수로 있다가 파옥하고 탈옥하여 남부 지방으로 도피. 1898년 23세 늦가을에 마곡사에서 승려가 되고,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이듬해 봄에 평양으로 부모와 같이 만행을 떠났고, 곧 환속하였다.
"해는 황혼인데 온 산에 단풍잎은 누릇누릇 불긋불긋하였다. 가을 바람에 나그네의 마음은 슬프기만 한데, 저녁 안개가 산밑에 있는 마곡사를 자물쇠로 채운 듯이 둘러싸고 있는 풍경을 보았다. 나같이 온갖 풍진 속에서 오락가락하는 자의 더러운 발은 싫다고 거절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저녁 종소리가 안개를 헤치고 나와 내 귀에 와서 모든 번뇌를 해탈하고 입문하라는 권고를 들려주는 듯 하였다.
......
마곡사를 향해 안개를 헤치고 걸음걸음 들어갔다.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혼탁한 세계에서 청량한 세계로
지옥에서 극락으로,
세간에서 걸음을 옮겨 출세간의 길을 걷다.
처음 도착한 곳이 매화당(梅花堂)이었다. 큰 소리를 내지르면서 산문으로 세차게 내달리는 시냇물 위로 긴 나무다리를 지나서
심검당(尋劍堂)에 들어가니 머리를 빡빡 깎은 노승이 화폭을 펴서 보다가 우리를 보고 인사를 했다.
......
하룻밤 사이 청정법계에서 만 가지 생각이 다 재로 돌아가버린 듯한터였다. 사제 호덕삼이 머리털을 깎는 칼을 가지고 왔다.
냇가로 가서 삭발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내 상투가 모래 위로 툭 떨어졌다. 이미 결심은 하였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법당에서 종이 울리고, 향적실(香積室)에서는 공양주가 불공밥을 짓고, 각 암자에서 가사를 입은 스님 수백 명이 모여들었다. 나도 검은 장삼과 붉은 가사를 입고서 대웅보전으로 인도되었다. 곁에서 덕삼이가 부처님께 절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은사 하은당(荷隱堂)이 내 승명을 원종(圓宗)이라 명명하며 불전에 고하였다. 수계사는 용담(龍潭)이란 점잖은 화상으로, 경문을 낭독하고 오계를 읽어주었다. 예불을 마친 후에는 노스님 보경당을 위시하여 절 안에 있는 나이 많은 대사들에게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절을 하였다. 승배를 연습하고 진언집과 초발자경 등 간단한 규칙을 배웠다.
중이 되려면 제일 먼저 자기 마음을 낮추어야 한다고 하며,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금수나 곤충에게까지 자기 마음을 낮추지 않으면 지옥의 고통을 받는다고 하였다.
......
장작도 패고 물도 길었다. 하루는 앞내에 가서 물을 지고 오다가 물통 한 개를 깨뜨렸다. 은사 하은당이 어찌나 야단을 쳤던지, 보다못해 노사주 보경당이 한탄을 하였다.
......
그러나 나는 풍진 세상과의 인연을 다 끊지 못하고 있었다. 망명객의 임시 은신책으로든 어떻든 간에, 오직 청정적멸의 도법에만 일생을 희생할 마음은 생기지 아니하였다."
-<<백범일지>>
근세의 서화가로 활약한 해강 김규진의 글씨. 그는 한국 최초로 사진관을 열었고, 여성들에게 사진 기술을 교육하였다.
포항의 오어사나 통도사 등 전국의 많은 사찰에 그의 서화 흔적이 보인다. 난초 대나무 그림은 경기도 사람 죽농거사 안순환의 것이다.
금발의 외국인 무리가 템플스테이 중이었다.
백범이 출가 수행자가 되면서 삭발한 냇물이다.
마곡사의 봄풍경이 정말 좋았다. 산간이라서 그런지 아직 날씨가 차가웠고, 그만큼 봄이 늦었다.
마곡사 안 10분 거리에 위치한 전통불교문화원 선방.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하였다. 전체적으로 선적인 미감이나 컨셈이나 마인드가 적용되어 있었다. 벽은 황토 그대로이고, 채광이 알맞고 안팎이 잘 통하여, 깔끔하고 기가 잘 소통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연수원 안 마당의 석굴암 관음상.
전통불교문화원에서 본 영화.
마이 네임 이즈 카흐안-내 이름은 카흐안. 자폐증-9.11 이후의 미국 무슬림과 백인/백인과 흑인/무슬림과 힌두교/대통령과 시민/대중과 매체-소통(이해)의 벽을 흐무는 순수한 영혼.
래인맨과 포레스트 검프가 결합된 것 같기도. 할리우드와 볼리우드의 결합.
마곡사에서 차를 몰아 마곡사 톨게이트를 향해 한참 나오다 막다른 골목 정안에 오니 김옥균 선생의 생가터가 나왔다.
길을 잘못 들어서 우연히 다다른 발걸음. 네비게이션이나 지도를 미리 가지고 있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행운이었다.
김옥균 등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킨 우정국은 현재 조계사 담장에 붙어 있다.
개화파에게 영향을 준 개화승 이동인스님이 생각난다.
터는 역사적 인물이 태어날 만한 아주 명당이었다.
첫댓글 봄마곡이라더니.... 이번 봄에 어머님 모시고 동기간들과 함께 하려고 합니다.
전통불교문화원에 예약해두려구요.
희준샘 덕분에 사람 인연, 절집 인연.... 시절 인연이 풍성했습니다.
참 감사드릴 일입니다. ^^
비로자나불 후불벽화 다시 가서 감상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