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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25
마태복음 5:33-37
맹세에 대하여
사람들은 살면서 많은 맹세를 한다. 결혼에 대한 맹세 외에도 과거에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때 언제나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는 ‘국기에 대한 맹세문’을 외웠었다. 암울했던 유신시대에 이런 맹세를 통해 국가에 충성을 강요당하는 일종의 세뇌 교육이었다. 이런 맹세로 은연중에 국가에 충성하는 애국심을 가지게 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을 외우고 맹세한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신앙적인 맹세를 한다고 해서 하나님 왕국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의 길을 따르겠다고 맹세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하나님 왕국 백성은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신다. 살인, 간음과 이혼에 대하여 율법의 본질적인 뜻을 밝히신 바와 같이 맹세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또 옛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33절). “헛맹세”의 ‘에피오르케오’는 ‘거짓 맹세를 하다, 맹세를 어기다, 위증죄를 범하다, 거짓증거하다, 서약을 어기다’라는 뜻이다. 맹세에 대하여 율법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민 30:2)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신 23:21)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신 6:13)
맹세나 서원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기에 지키지 않아서 헛맹세가 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2)라고 말씀한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실제 모습을 이렇게 폭로하셨다.
16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7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19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21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22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마 23:16-22)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맹세하고 지키지 못할 때의 책임을 피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뺀 맹세를 하였고 또한 맹세에 대한 대상을 여러 단계로 구분하여 맹세의 크고 작음을 판단하였다. 율법이 주어지면 본질적인 뜻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다 어떻게 하든지 스스로 지키려고 하다 보니 편한 방식대로 바꾸어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죄인들의 심성이다. 인간이 원하는 방식대로 바꾼 해석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도전하는 죄악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 먹는 것을 가지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들먹이면서 예수님을 비난하였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 15:18-20)
결국 죄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짓 증언, 즉 헛맹세밖에 없다. 마귀는 에덴동산에서 뱀을 통하여 선악의 나무를 취하도록 유혹할 때 결코 죽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거짓 증언을 하였다(창 3:4-5). 예수님의 시험에서도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화로운 모습을 보여주며 자신에게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거짓 맹세를 하였다(마 4:8-9).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이 가지고 다스리는 것처럼 거짓된 소유권을 가지고 십자가 없는 영광을 누리도록 예수님을 유혹한 거짓된 약속이었다. 거짓 증언, 헛맹세, 거짓된 약속은 마귀의 속성이고 그 마귀에 속한 자의 특징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율법의 본질적인 뜻을 드러내면서 단호하게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34-36절)라고 하셨다. “하늘, 땅”에 대하여 이사야서에 이렇게 말씀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사 66:1)
“예루살렘”의 헬라어 ‘히에루살렘’은 히브리어 ‘예루살랴임’의 역어로 ‘예루엘’과 ‘샬렘’이 합쳐진 단어인데 ‘예루엘’은 ‘야라’(세우다, 던지다)와 ‘엘’(하나님)의 합성어이다. 즉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평화’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평화를 가르치고 보여주기 위해 여기에 성전을 허락하신 것이었다. “예루살렘으로”라는 말의 ‘에이스 히에로솔뤼마’는 ‘예루살렘을 향해서’라는 말이다. “머리”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 11:3)
그러니까 “하늘, 땅, 예루살렘, 머리”는 하나님을 보여주려는 것들이기에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 맹세하더라도 하나님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인간이 그런 것들로 맹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전도서 5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3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4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5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 6 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7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전 5:2-7)
이 말씀의 핵심은 인간은 땅에 있기에 하늘에 계셔서 초월해 계신 하나님께 감히 근접할 수 없으며(사 55:8-9), 그 호흡은 코에 있어 셈할 가치조차도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사 2:22). 인간의 맹세는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 하셨더니 15 그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그들이 다투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이니라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히 6:13-20)
창조 언약, 아담,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을 잇는 언약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홀로 지키실 것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약속이었다. 그래서 “내 언약”이라고 하셨다(창 6:18, 9:9, 15 17:2 등). 하나님이 친히 이루시는 언약 안에서 인간은 신실한 말과 성실한 이행을 할 수 없는 존재로 죄인 됨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롬 3:20).
그래서 본문에서 33절과 34절에서 “맹세”를 다른 단어로 표현하였다. 33절의 “맹세”는 ‘호르코스’로 신약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나타내는 ‘디아데케’와 병행하여 사용하였고(눅 1:73, 행 2:30), 인간이 하는 맹세를 표현할 때는 ‘옴뉘아’를 사용하였다(약 5:12). 따라서 율법의 본질은, 맹세가 하나님의 것으로 진리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실 것이라는 뜻에서 주신 언약이다.
20 또 예수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21 (그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이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 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히 7:20-21, 28)
이런 점에서 언약의 보증은 예수 그리스도셨고(히 7:22) 그분이 언약의 실체로 또한 종결자로 이 땅에 오셨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이 성취됨을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그런데 우리는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는 마음먹기 달렸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마음먹으면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싶어 한다. 그것 자체가 바로 죄악된 마음에 나온 것이다. 십자가 앞에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인간 긍정과 자기 자랑 그것이 우리의 죄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맹세, 서원, 약속하는 이런 모든 것들은 거짓된 약속들이고 헛맹세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언약으로 “예”라고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옳습니다”라고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 성도는 하나님을 향해 맹세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께서 하신 맹세, 곧 언약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사로잡혀 이끌려 가는 존재임을 날마다 확인하게 된다.
자신의 죄악된 모습이 드러난다면 사실대로 “예, 그렇습니다! 나는 이렇게 악한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고 인간 긍정에 대한 죄성이 튀어나올 때 “나는 아니요!”라는 자기 부인과 십자가 죽음의 현장을 확인할 수밖에 없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이다(2024101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