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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적이고도 집요한 소모전의 수행은, 과도하게 늘어난 일본의 전선을 뒤로 밀어낼 것이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943년 7월 28일 노변담화에서
일본과 미국의 전면전이 결국 발발했음에도, 그것이 곧바로 미국과 독일 사이의 정식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이 세계선의 국제정치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진주만 공습이 벌어진 지 불과 사흘 뒤인 1941년 12월 11일,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삼국동맹조약(Tripartite Pact)의 기계적 작동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삼국동맹조약 제3조는 어디까지나 어느 한 당사국이 유럽 전쟁 또는 중일전쟁에 참전하고 있지 않은 제3국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 상호 원조에 나서도록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일본이 먼저 미국을 선제공격한 실제 역사의 경우, 독일과 이탈리아에 자동적인 참전 의무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히틀러의 대미 선전포고는 조약의 법적 귀결이라기보다, 미국과의 충돌이 더 이상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그의 정치적 결단이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대체역사는 실제 역사와 갈라집니다. 히틀러가 그런 극적인 결정을 내리게 했던 여러 조건들 가운데 일부가, 이 세계선에서는 눈에 띄게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서양에서의 미독 간 긴장은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구축함 루벤 제임스(USS Reuben James) 격침 사건을 비롯해, 미국과 독일은 이미 선전포고 없는 해상 충돌의 단계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히틀러 자신도 양국이 형식만 갖추지 않았을 뿐 사실상 전쟁 중이라고 보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선에서는 그가 굳이 먼저 미국에 선전포고할 유인이 실제 역사보다 훨씬 약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진주만 공습이 없었습니다. 미국은 일본과 전쟁에 들어갔지만, 그것은 단 하루의 충격적 사건으로 폭발한 전쟁이 아니라 수개월에 걸친 봉쇄, 제한교전, 협상, 그리고 최종적인 파탄 끝에 도달한 전쟁이었습니다. 즉, 미국 사회 전체를 한순간에 격노하게 만들고, 세계대전을 하나의 전쟁으로 인식하게 만든 극적 계기가 사라져 있었던 것입니다. 히틀러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미국은 일본과 전쟁 중이기는 했지만 아직 독일에 대해 즉각적인 총력개입 태세를 굳힌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독일이 먼저 미국에 선전포고해,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미국의 전략적 결심을 앞당겨 줄 이유는 없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1941년 12월부터 1942년 3월 사이 동부전선의 정세 역시 독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모스크바 공방전은 조기 승전의 약속을 산산이 깨뜨린 채 실패로 끝났고, 독일군은 이제 단기결전의 꿈 대신 장기 소모전의 현실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히틀러와 독일 국방군 수뇌부는 곧 캅카스 유전지대를 향한 청색작전(Fall Blau)을 준비하기 시작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미국의 본격적 참전을 자초하는 선택은 더욱 부담스러워졌습니다. 독일의 입장에서는 소련을 쓰러뜨리기 위해 남부전선에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 할 시점에, 대서양 건너의 산업국가를 불필요하게 완전히 적으로 돌릴 실익이 없었던 것입니다. 실제 역사에서 히틀러의 대미 선전포고는 과신과 운명론, 그리고 정치적 과장의 산물이었지만, 이 세계선의 그는 오히려 모스크바 공세 실패의 잔해 위에서 더 계산적인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의 유럽전 참전 가능성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만 조금 미뤄졌을 뿐이었습니다. 미국과 독일의 이해관계는 이미 너무 깊게 충돌하고 있었고, 루스벨트 행정부 역시 독일을 세계질서 전체에 대한 더 근본적인 위협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전환의 형식과 속도는 실제 역사와 분명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1941년 12월 말부터 1942년 1월 초까지 열린 제1차 워싱턴 미영회담, 곧 아카디아 회담(Arcadia Conference)은 미국과 영국이 “독일 우선” 원칙을 선명하게 재확인하고, 연합참모회의 창설과 전쟁지도 체제의 기초를 놓는 결정적 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선에서는 그런 회담이 같은 의미를 띠기 어려웠습니다. 미국은 일본과는 전쟁 중이었지만 독일과는 아직 법적으로 전쟁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 세계 전역을 하나의 통일된 전쟁으로 관리한다”는 발상 자체가 실제 역사보다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아카디아 회담은 실제 역사와 같은 강한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됩니다. 연합참모회의의 정식 창설은 뒤로 미뤄지고, 미국과 영국의 공동전쟁지도 체제도 한동안 느슨한 조율 수준에 머무를 가능성이 큽니다. 이 세계선에서 1942년 초 가장 시급하게 의결된 다국적 군사조정은 오히려 태평양 방면, 더 정확히는 동남아 방면의 위기 수습을 위한 ABDA 사령부 창설 정도였을 것입니다. 미국, 영국, 네덜란드, 호주가 남방에서의 일본 공세를 막기 위해 급조한 이 지휘체계는 실제 역사에서도 불안정했지만, 이 세계선에서는 더욱더 “지역 전쟁 대응기구”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됩니다. 다시 말해, 연합국은 아직 세계대전 전체를 하나의 통합된 전쟁으로 운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기는 하지만 여전히 별개의 위기들에 따로 대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연합국 공동선언(Declaration by United Nations)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1942년 1월의 이 선언은 추축국에 맞선 광범한 전시연합의 정치적 기초가 되었지만, 이 세계선에서는 그 의미와 범위가 더 축소될 가능성이 큽니다. 미국과 영국 사이의 양자적 외교공약, 혹은 일본과 독일을 각각 다른 방식으로 상대하는 데 대한 원칙적 합의 수준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이는 단순한 형식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달라지고 있었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차이는 이후 전쟁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미국은 결국 1942년 후반 무렵 유럽전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서양에서의 선전포고 없는 충돌은 계속 누적되고 있었고, 루스벨트 행정부의 전략적 우선순위 역시 근본적으로는 독일을 더 큰 위협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참전은 실제 역사처럼 “세계 전체의 추축국에 맞서는 하나의 총력전”이라는 명확한 형태를 띠지는 못할 것입니다. 태평양 전선과 유럽 전선은 여전히 서로 관련되어 있었지만, 미국인의 눈에는 그것이 하나의 통일된 전쟁이라기보다 “서로 얽혀는 있으나 성격은 다른 두 개의 전쟁”으로 비쳤을 가능성이 큽니다.
여기서 진주만의 부재는 다시 한번 결정적 의미를 띱니다. 실제 역사에서 진주만은 미국 국민들에게 일본과 독일, 유럽과 태평양, 대서양과 동남아를 모두 하나의 전쟁으로 묶어버리는 충격적 계기였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선에서는 그런 단번의 감정적 통합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미국 국민들은 일본과의 전쟁 수행에는 대체로 찬성했을 것입니다. 필리핀 포위와 남방 침략, 그리고 태평양 질서에 대한 직접적 위협은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들은 나치 정권의 비도덕성과 폭력성을 규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나치 정권을 지금 당장 정벌하기 위해 유럽 대륙에 대규모 병력을 보내야 하는가”라는 문제까지 같은 강도로 받아들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일본과 싸우는 것과 독일까지 당장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은, 여전히 다른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즉, 미국 내 찬전 여론은 실제 역사보다 더 분절적이었을 것입니다. 일본과의 전쟁에는 찬성하지만 유럽 대륙 전쟁의 대규모 지상개입에는 유보적인 입장, 독일을 장기적 위협으로는 보지만 일본만큼 즉각적이고 감정적인 적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 영국 지원에는 동의하지만 미군이 대륙전의 주력으로 나서는 것에는 회의적인 여론이 함께 존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시 말해, 미국은 여전히 전쟁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실제 역사처럼 하나의 충격 속에서 모든 전선으로 단번에 돌입하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적과 서로 다른 전장을 상대로 각기 다른 속도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이 세계선에서 미국과 일본의 전면전은 결국 미국과 독일의 전쟁으로도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 연결은 실제 역사처럼 즉각적이고 극적이지 않았습니다. 히틀러는 미국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보면서도, 모스크바 공방전 실패와 청색작전 준비라는 현실 속에서 굳이 먼저 미국의 참전을 촉진할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미국 역시 독일을 더 큰 위협으로 인식하면서도, 진주만이라는 충격이 부재한 상황에서는 유럽과 태평양을 하나의 총력전으로 곧바로 통합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1942년의 전쟁은 실제 역사보다 더 분절되고, 더 느리게 연결되며, 더 많은 오판과 시간차 속에서 전개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시간차야말로, 이후 이 전쟁의 양상과 결말을 실제 역사와 다른 방향으로 밀어가는 또 하나의 결정적 변수로 작용하게 됩니다.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 본격적으로 대응하는 과정에서 채택한 대전략은, 큰 틀에서 보면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이중축선전략(Twin Axis Strategy)이었습니다. 다만 그 형성과 채택의 맥락은 상당히 달랐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이 전략은 과달카날 이후, 육군의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주장한 남서태평양 축선과 해군의 체스터 니미츠 원수 및 어니스트 킹 제독이 주장한 중태평양 축선을 절충적으로 병행한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선에서는 그 절충이 더 이르게, 그리고 훨씬 더 정치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진주만 공습이 없었던 탓에 미국의 전쟁지도체제는 실제 역사처럼 단번에 통합되지 못했고, 필리핀이 즉시 상실되지 않았던 탓에 맥아더를 단순한 패장으로 밀어낼 수도 없었습니다. 반대로 해군 역시 진주만의 물적 피해를 입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들의 전략적 주도권을 더욱 강하게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즉, 이중축선전략은 승리의 궤도 위에서 나온 정교한 조정안이라기보다, 초기 전략 혼선과 군종 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정치적 절충안으로 더 빨리 채택되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맥아더 축은 실제 역사보다 훨씬 더 강한 정치적 무게를 갖게 되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남서태평양 전략은 뉴기니를 거쳐 필리핀으로 복귀하는 장기 우회공세의 성격이 강했지만, 이 세계선에서는 처음부터 필리핀이 전쟁의 핵심 공간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었습니다. 필리핀이 즉시 상실되지 않았고, 맥아더 역시 전쟁 초반부터 남방작전 전체를 뒤흔든 핵심 인물로 부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남서태평양 축선은 단순한 뉴기니 전선이 아니라, 보다 노골적인 “필리핀 회복축”으로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맥아더에게 뉴기니는 목적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필리핀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경유지이자 남방전선 전체를 재편할 발판이 되었습니다.
반대로 니미츠와 킹이 대표하는 해군 축도 실제 역사보다 더 일찍, 더 강하게 자기 주장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진주만의 참패를 겪지 않은 해군은 처음부터 자신들을 태평양 전쟁의 실질적 주도세력으로 간주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해군은 필리핀 재탈환이라는 정치적 목표보다, 일본의 병참선을 끊고 중태평양의 제해권을 장악하는 쪽을 더 강하게 밀어붙였습니다. 이들의 논리에서 핵심은 명확했습니다. 일본의 남방 팽창은 결국 동인도와 말라야, 보르네오의 자원지대와 본토를 잇는 긴 해상수송선에 의존하고 있었고, 그 병참선이야말로 일본 제국의 진정한 약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마셜 제도, 북마리아나 제도, 더 나아가 포르모사 방면으로 이어지는 중태평양 및 서태평양 공세축은 단순한 진격로가 아니라, 일본 제국 전체의 동맥을 끊어버리는 “병참 절단축”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루스벨트에게는 이 둘 중 하나를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습니다. 맥아더는 정치적으로 너무 컸습니다. 필리핀 문제는 단지 군사적 계산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위신과 동아시아 질서 전체의 문제로 비쳐지고 있었습니다. 반면 해군은 군사적으로 너무 강했습니다. 살아남은 태평양함대를 바탕으로 해상 주도권을 주장하는 니미츠와 킹을 무시한 채 육군 일변도의 전략으로 갈 수는 없었습니다. 게다가 유럽전 참전은 지연되고 있었고, 미국 전체의 세계전략은 실제 역사만큼 단일한 방향으로 정리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 결과 이중축선전략은 실제 역사보다 더 이르게 채택되었지만, 동시에 더 경쟁적이고 더 비효율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하나의 태평양 전략을 가진 것이 아니라, 서로 긴장 관계에 있는 두 개의 전략을 동시에 굴리게 된 셈이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1942년 상반기는 일본의 팽창이 정점에 달하던 시기였습니다. 미군과 연합군은 먼저 산호해 해전에서 일본의 남진을 저지했고, 이어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항모전력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습니다. 그 뒤 1942년 8월부터 1943년 2월까지의 과달카날 전역과 1942년 말부터 1943년 초까지의 뉴기니 및 부나-고나 전역을 거치며, 연합군은 방어에서 공세로 전략적 주도권을 넘겨받았습니다. 1943년에는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 방면의 공세가 확대되고, 6월부터는 카트휠 작전(Operation Cartwheel)이 시작되어 라바울 고립화가 본격화되었습니다. 즉, 실제 역사의 태평양전쟁은 크게 보면 항모결전, 남서태평양의 육해공 소모전, 그리고 일본 외곽기지의 단계적 고립화라는 순서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계선에서는 출발점 자체가 달랐습니다. 세 가지 차이가 특히 결정적이었습니다. 첫째, 진주만 공습이 없었습니다. 둘째, 필리핀이 즉시 붕괴하지 않았습니다. 셋째, 미 태평양함대가 온존한 채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 가지 조건 때문에 일본은 실제 역사처럼 남태평양 방면으로 일찍, 깊게 찌를 수 없었습니다. 필리핀을 남겨두고 말라야와 보르네오, 동인도에 더 많은 자산을 투입한 이상, 일본은 처음부터 남중국해와 필리핀 봉쇄, 그리고 남방 병참선 유지에 훨씬 더 많은 전력을 묶어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산호해 해전과 같은 “호주 방면 남진 저지전”은 하나의 선명한 대회전이 아니라, 더 작은 규모의 해전과 호송선 보호전, 항공정찰전으로 쪼개졌습니다.
미드웨이 해전도 같은 이유로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계선의 일본 연합함대는 미 태평양함대를 유인하여 격멸하겠다는 구상 자체를 채택하지 않았습니다. 하와이를 때리지 않은 이상, 그리고 온전한 형태의 태평양함대를 상대로 즉각적인 결전을 치른다는 것이 지나치게 위험한 부담이라는 인식이 남아 있는 이상, 미드웨이식 대도박은 성립하기 어려웠습니다. 일본은 미국을 한 번에 부수려 하지 않았고, 대신 미국이 필리핀과 남방 해역에 개입하기 전에 자신들의 병참선과 방어권을 먼저 굳히려 했습니다. 따라서 실제 역사에서 미드웨이가 차지했던 “첫 결정적 항모결전”의 자리는 비어버렸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 바로 1942년 9월의 팔라우 인근 대해전이었습니다.
이 전투는 필리핀보다 동쪽이지만 마리아나 제도보다는 서쪽, 다시 말해 팔라우와 야프, 민다나오를 잇는 해역에서 벌어졌습니다. 미국은 마닐라 만의 전력과 합류하거나, 최소한 필리핀 전선을 완전히 고립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기 위해 서진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접근로가 하나가 아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민다나오 남쪽을 돌아 셀레베스해 쪽으로 접근하는 우회로, 필리핀 군도 사이 협수로를 통과하는 대담한 직행로, 그리고 루손과 대만 사이 북방 해역을 돌파하는 공격적 항로가 모두 가능했습니다. 일본은 미국이 어느 길을 택할지를 조기에 단정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연합함대는 점감요격을 위해 팔라우 방면으로 발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필리핀 군도에 너무 가까이 접근하면 미국의 항공기와 잠수함, 섬들 사이의 협수로에 발이 묶일 위험이 있었고, 너무 멀리 물러서면 미국이 필리핀 전선과 연결될 가능성을 허용하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이 이 전투에 투입한 기동부대는 실제 역사보다 훨씬 강력했습니다. 엔터프라이즈, 새러토가, 호넷, 와스프를 중심으로 한 4항모 기동부대에 전함 노스캐롤라이나와 워싱턴, 여러 중순양함과 경순양함, 다수의 구축함이 붙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찰이나 국지타격이 아니라, 필리핀 문제를 다시 열어젖히기 위한 실질적 주력이었습니다. 반면 일본은 아카기, 카가, 쇼카쿠, 즈이카쿠, 소류, 히류, 준요, 즈이호를 중심으로 한 훨씬 큰 항모전력을 내세웠습니다. 외형상으로는 일본 쪽이 분명히 우세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전력은 이미 필리핀 봉쇄, 남방 병참 엄호, 대만과 남중국해의 방어, 그리고 팔라우 방면의 요격이라는 여러 과제를 동시에 떠안고 있었습니다. 즉, 숫자는 많았지만 전략적 집중도는 오히려 미국보다 낮았습니다.
전투는 실제 미드웨이처럼 한 번의 기습으로 승부가 갈리는 형태가 아니었습니다. 양측 모두 상대의 정확한 접근 방향을 끝내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채, 정찰과 오인, 선제공격 경쟁이 겹쳐지며 교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의 첫 공습은 미국 항모전력을 결정적으로 묶어두는 데 실패했고, 미국의 반격 역시 일본 항모집단을 한 번에 무너뜨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전투가 길어질수록 차이는 분명해졌습니다. 미국은 함대 규모에서는 밀렸지만 전투통제와 손상통제, 항모 운용의 집중성 면에서 우위를 보였습니다. 반면 일본은 대형 항모를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숙련된 항공대와 갑판 운용 인력의 손실을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전투의 결과는 전술적으로는 애매했습니다. 미국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한 척의 항공모함이 대파되었고, 여러 중순양함과 구축함이 심각한 손상을 입었습니다. 일본 역시 즉각적인 붕괴는 피했습니다. 그러나 질적인 손실은 일본 쪽이 훨씬 컸습니다. 정규항모 두 척이 장기간 작전 불능 상태에 빠졌고, 경항모 한 척이 격침되거나 사실상 전열에서 이탈했으며, 무엇보다 숙련된 항공대의 손실이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누적되었습니다. 즉, 전투가 끝난 뒤 양측 모두 “우리가 이겼다”고 주장할 수는 있었지만, 전략적 의미에서는 미국이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은 셈이었습니다.
이 전투는 이 세계선에서 미드웨이가 차지했던 자리를 대체하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일본은 필리핀 봉쇄를 완전히 유지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고, 미국은 필리핀 전선을 완전히 구해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국이 여기서 처음으로 일본 연합함대의 외피를 벗겨내고 그 내부의 취약성을 확인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일본은 여전히 넓은 자원권과 점령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지켜낼 해군항공전력의 질적 우위는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미국은 필리핀을 당장 되찾지 못했음에도, 이후의 전쟁을 해상차단과 필리핀 회복이라는 이중 압박 구조로 밀고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1942년 9월 제1차 팔라우 해전은 양측 모두에게 승패가 불분명한 전투로 남았습니다. 미국은 필리핀과의 즉각적인 연결을 회복하지 못했고, 일본은 연합함대의 외형을 지켜냈습니다. 그러나 전투가 끝난 뒤 더 분명해진 사실도 있었습니다. 일본 해군은 여전히 강했지만, 미국 해군도 결코 꺾이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이제 미국은 일본을 한 번에 무너뜨리기보다, 필리핀을 살아 있는 전선으로 유지한 채 남방제국의 병참선을 차례로 조여가는 방향으로 전략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대로 일본은 넓은 점령권을 유지하기 위해 점점 더 큰 비용을 치러야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1942년 10월부터 12월까지 이어진 제2차 필리핀 접근전은 그 변화의 출발점이었습니다. 필리핀 동쪽과 남쪽 해역에서는 대규모 결전 대신 반복적인 해전과 공습, 정찰전과 잠수함전이 이어졌습니다. 미국은 엔터프라이즈, 새러토가, 호넷, 와스프를 중심으로 한 기동부대를 한 번에 투입하지 않고, 여러 갈래로 나누어 루손 북방과 민다나오 남방을 압박했습니다. 이 세계선에서는 진주만에서 침몰하거나 대파될 뻔했던 웨스트버지니아, 캘리포니아, 테네시, 네바다 같은 전함들까지 보조 전력으로 활용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기동부대의 주력은 아니었지만, 호송 엄호와 야간 포격전에서 묵직한 역할을 해냈습니다.
일본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연합함대는 필리핀을 단순히 봉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루손과 민다나오 주변 해역에서 미군의 접근을 끊임없이 저지하려 했습니다. 아타고, 다카오, 묘코, 하구로 같은 중순양함들은 구축함 전대와 함께 야간전에서 여전히 위협적이었습니다. 일본은 이미 전략적으로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지만, 전술적으로는 여전히 날카로웠습니다. 그래서 필리핀 전선은 완전히 회복된 전선도, 완전히 붕괴한 전선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남았습니다. 미국에게는 희망의 전선이었고, 일본에게는 끝내 지우지 못한 불안의 전선이었습니다.
이 교착을 무너뜨린 것은 1943년 1월부터 3월까지 이어진 제1차 남중국해 호송전이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비스마르크 해가 일본 수송능력의 취약함을 드러냈다면, 이 세계선에서는 남중국해가 그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보르네오와 수마트라, 자바와 팔라완, 하이난과 대만, 루손을 오가는 수송선단은 미국 잠수함과 장거리 초계기의 집요한 공격에 시달렸습니다. 이 전투는 하루아침에 결판나지 않았지만, 몇 달이 지나자 결과는 분명해졌습니다. 일본은 필리핀 방면 증원과 동인도 자원 수송을 동시에 감당할 수 없었고, 어느 쪽을 살려도 다른 쪽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방 자원은 확보했지만, 그것을 안전하게 북상시킬 능력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후 1943년 4월부터 6월까지의 민다나오 남부 상륙전은 미국이 필리핀 회복축을 본격화한 첫 단계였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뉴기니가 우회기동의 통로였다면, 이 세계선에서 민다나오는 필리핀을 완전히 탈환하기 위한 직접적인 발판이었습니다. 미군은 민다나오 남부의 취약한 연안에 상륙했고, 일본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육해군 전력을 집중했습니다. 특히 공고, 하루나, 히에이, 기리시마 같은 고속전함들이 장거리 포격으로 상륙 해역을 위협한 장면은 인상적이었습니다. 미국 상륙부대는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고, 여러 차례 위기에 몰렸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한 차례의 포격으로 흔들어놓은 교두보는 며칠 뒤 다시 복구되었고, 손실은 곧 추가 병력과 물자로 메워졌습니다. 일본은 여전히 강했지만, 미국은 그 강함을 견디고도 계속 밀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1943년 7월부터 9월까지 벌어진 제2차 팔라우 해전은, 이 세계선에서 미드웨이와 산타크루즈가 맡았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 전투였습니다. 일본은 아카기, 카가, 쇼카쿠, 즈이카쿠, 준요, 즈이호를 비롯한 남은 항모전력을 최대한 집중했고, 야마토와 무사시도 출격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두 전함의 존재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그 만재배수량 약 7만톤의 거대한 선체와 18.1인치 주포의 위압감은 미국 수병들에게도 강한 공포를 안겼고, 실제 몇 차례 원거리 포격은 미 수상부대에 상당한 압박을 가했습니다. 미국은 쉽게 이기지 못했습니다. 항모와 순양함이 손상을 입었고, 함재기 손실도 컸습니다.
그러나 전투가 끝난 뒤 더 크게 무너진 쪽은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은 함선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잃었습니다. 숙련 조종사와 갑판 운용 인력, 연속 작전을 감당할 수 있는 해군항공력의 질적 기반이 크게 흔들렸습니다. 미국도 피해를 입었지만, 손실을 보충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숫자를 유지해도 질을 되살리기 어려웠습니다. 이 시점부터 일본 항모전력은 겉보기보다 훨씬 약한 존재가 되어갔습니다.
1943년 10월부터 12월까지 이어진 대만 남부 공습전과 루손 북부 고립화는 그 약화를 결정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미국은 필리핀을 정면에서만 압박하지 않았습니다. 대만 남부의 비행장과 항만을 계속 타격하고, 루손 북부의 항공기지와 집결지를 마비시키며, 일본이 필리핀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북방 연결선을 서서히 끊어냈습니다. 이것은 실제 역사에서 라바울이 겪은 고립화와 비슷했지만, 훨씬 더 큰 전략적 의미를 가졌습니다. 대만은 일본 본토와 필리핀, 남방 자원권을 잇는 핵심 연결점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일본은 이 과정에서도 집요하게 저항했습니다. 대만과 루손 사이로 날아오르는 전투기들은 여전히 위협적이었고, 순양함과 구축함 전대는 야간 반격을 시도했습니다. 야마토와 무사시의 존재는 끝까지 미국 함대에 부담을 주었습니다. 일본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바다를 끝까지 피로 물들이며 버텼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격렬한 저항이야말로 일본의 궁지를 더 선명하게 드러냈습니다. 미국도 땀을 흘렸지만, 일본은 싸울 때마다 더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새 함선을 건조할 수는 있어도, 잃어버린 해상교통선과 숙련 항공대를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1942년 10월부터 1943년 말까지의 전쟁은 일본을 단번에 무너뜨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더 느리고 잔인한 방식으로 일본을 몰아붙였습니다. 미국은 필리핀을 즉시 되찾지 못했고, 일본 해군도 하루아침에 붕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2차 필리핀 접근전, 제1차 남중국해 호송전, 민다나오 상륙전, 제2차 팔라우 해전, 대만 남부 공습전이 차례로 이어지면서 일본은 점점 더 넓은 공간을 지키기 위해 점점 더 적은 숨을 내쉬어야 하는 제국으로 변해갔습니다. 바다는 아직 완전히 미국의 것도, 완전히 일본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 해상전의 대가는 단지 바다에서만 치러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방과 필리핀, 대만과 남중국해에 빨려들어간 병력과 연료, 선박과 항공기는 결국 중국전선의 버팀목까지 갉아먹기 시작했습니다.
바다에서 미군이 일본의 목을 서서히 조르는 동안, 중일전쟁 역시 실제 역사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였습니다. 일본은 여전히 난징과 상하이, 우한과 베이핑 같은 주요 도시와 철도망, 연해 거점을 장악하고 있었고, 충칭의 국민정부도 버티고 있었으며, 공산당 역시 화북과 화중의 농촌·산악지대에서 근거지를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이 기본 골격 자체는 실제 역사와 유사하거나 거의 동일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익숙한 외형 아래에서, 전쟁의 성격은 실제보다 훨씬 더 빠르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일본은 1942년 이후에도 중국전선에서 완전히 손을 놓지는 않았습니다. 태평양에서 잠시나마 작전적 우위를 확보한 덕분에, 중국을 여전히 “언젠가 다시 한 번 크게 흔들 수 있는 전선”으로 볼 여지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1944년에는 대륙타통작전 같은 대공세를 실제로 감행할 수 있었습니다. 늦고 비효율적이었을지언정,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주먹을 쥘 힘은 남아 있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이 세계선에서 그 주먹은 훨씬 더 빨리 힘을 잃었습니다. 진주만 공습이 없었고, 필리핀이 즉시 붕괴하지 않았으며, 미 태평양함대는 온전한 상태로 살아남았습니다. 일본은 남방 자원권을 확보했지만, 그 자원을 본토와 중국전선으로 끌어오려면 필리핀, 팔라우, 대만, 남중국해에 끊임없이 병력과 선박, 항공기와 연료를 쏟아부어야 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중국이 제국의 수렁이었다면, 이 세계선에서는 태평양과 남중국해가 또 하나의 수렁으로 동시에 입을 벌린 셈이었습니다. 중국전선은 여전히 끝나지 않는 전쟁이었고, 해상전은 그 끝나지 않는 전쟁을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만드는 기계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중국전선의 양상은 더 빠르게 “점령지 유지전”으로 굳어졌습니다. 일본은 여전히 넓은 공간을 점령하고 있었지만, 그 점령을 실제로 유지하는 힘은 눈에 띄게 약해졌습니다. 대도시와 철도선, 항만은 붙들고 있었으나, 그 점과 점 사이의 공간은 점점 더 느슨해졌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일본의 중국 지배는 완전한 면 지배가 아니었지만, 이 세계선에서는 그 얇음이 훨씬 더 빨리 찢어졌습니다. 철도 연선과 도시 외곽을 벗어나면 괴뢰정권의 행정력은 급격히 떨어졌고, 지방의 치안과 세금, 정보망은 갈수록 불안정해졌습니다. 지도 위에서 일본은 여전히 거대한 점령제국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더 빨리 “점과 선만 지배하는 제국”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이 변화의 최대 수혜자는 공산당이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공산당은 항일전쟁을 이용해 농촌과 산악지대에서 세력을 확대했습니다. 그 점은 이 세계선에서도 유사했습니다. 다만 차이는 속도였습니다. 일본이 필리핀과 남방, 남중국해에 더 많은 전력을 빼앗기면서 화북과 화중에 대한 소탕 능력이 더 빨리 약화되자, 공산당은 단순한 유격대가 아니라 지방행정과 민병, 조세체계를 갖춘 준국가적 세력으로 훨씬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의 성장이 구조적이었다면, 이 세계선에서의 성장은 일본의 전략적 분산이 불러온 가속 성장에 가까웠습니다. 일본이 중국을 붙들고 있을수록, 일본의 손이 닿지 않는 중국은 더 빠르게 다른 질서를 배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국민정부는 실제 역사처럼 살아남았습니다. 충칭은 무너지지 않았고, 장제스는 여전히 국제적으로 중국의 합법정부로 인정받았습니다. 이 점 역시 실제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의미는 달랐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국민정부는 일본의 대공세 가능성에 계속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 세계선에서는 일본의 압박이 상대적으로 약해지는 대신, 공산당과의 경쟁이 더 일찍 또렷해졌습니다. 일본이 더 이상 중국 전체를 뒤흔들 대공세를 조직할 여력이 줄어들면서, 국민정부는 완전한 붕괴의 공포에서는 다소 멀어졌지만, 동시에 전후 중국의 주도권을 누가 쥘 것인가 하는 문제와 더 일찍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일본의 약화가 곧바로 국민정부의 강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일본의 약화가 중국 내부의 내재된 균열을 앞당겨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차이는, 일본 육군이 실제 역사처럼 1944년에 대륙타통작전급 공세를 조직할 여력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필리핀 전역의 장기화, 남중국해 호송 손실, 대만 방어 부담, 해군항공력의 질적 소모는 모두 중국전선에서의 “마지막 대공세”를 위한 병력과 연료, 탄약과 차량을 갉아먹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일본은 끝내 한 번 더 크게 휘둘렀지만, 이 세계선에서는 그 환상 자체가 더 빨리 시들었습니다. 중일전쟁은 이제 더 이상 “언젠가 마무리할 수 있는 전쟁”이 아니라, 붙들고는 있으나 되돌릴 수 없는 수렁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쯤 되자, 고노에 후미마로와 이시와라 간지, 대정익찬회의 당료들과 아시아주의 이데올로그들, 소진되어버린 육해군의 장성들, 외무관료들까지도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국은 더 이상 제국의 의지로 굴복시킬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고, 남방 자원권 역시 점령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제국은 너무 많은 전선을 동시에 붙들고 있었고, 그 어느 전선에서도 결정적 승리를 약속할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의 현실인식은 실제 역사의 도조 내각보다 오히려 빠르고 냉정했습니다. 고노에와 그의 세력에게 중일전쟁은 “끝까지 달성해야 할 국가적 목표”라기보다는 “빨리 수습해야 할 골치 아픈 숙제”였고, 대동아전쟁 역시 “전략적 실책으로 발발한 위기상황”이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 일본이 패배를 인정하기 직전까지도 제국의 외형과 명분을 붙들고 늘어졌다면, 이 세계선의 고노에 세력은 훨씬 이른 시점부터 그 외형 자체가 이미 유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선의 일본은 실제 역사보다 더 적극적으로, 더 일찍 국가적 출구전략을 모색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습고도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결국 손에 쥔 출구전략의 방향은 그간 대정익찬회와 아시아주의자들이 떠들어 온 선전문구를 한층 더 극단적으로 현실화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정말로 ‘스스로’ 동아시아 지배를 해체하고,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진짜 반제국주의자처럼 행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점진적으로 진행되던 식민지 운영 전략의 변경에 속도를 붙이고, 조선과 대만, 점령지 중국과 남방 각지에 대해 “협력”과 “자치”, “공영”과 “공동방위”의 언어를 더 공격적으로 밀어붙이는 방안이 검토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국이 계속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있으려 할수록 더 빨리 무너진다면, 차라리 패권의 일부를 먼저 풀어주고 그 상실의 형식을 스스로 관리하자는 발상이었습니다.
여기서 다시 소환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시와라 간지가 오래전부터 주장해온 “동아연맹”의 관념이었습니다. 그것이 곧바로 평등한 국제주의나 진정한 해방을 뜻한 것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조선과 대만, 만주와 중국, 남방 각지를 더 이상 일방적 복종의 대상으로만 다룰 수 없다는 자각, 그리고 일본이 직접 지배의 외형을 조금씩 내려놓는 대신 보다 느슨하고 정치적인 결속을 통해 동아시아 질서의 주도권을 보존하려는 발상은, 바로 이 시기부터 점차 정책 언어로 번역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식민지의 독립운동가들에게 그것은 터무니없는 기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기만’이야말로 도쿄가 그동안 시도했던 어떤 동화정책보다도 더 강한 정치적 효과를 발휘하게 됩니다. 그 상세한 전개는 이후의 화들에서 다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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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으악 동아연맹..!
이와나리쿤…(?)
아 이러면 경쇼년으로 어케 가지? 했는데 방향성이 좀 다르게 흘러서 가겠군요 ㅋㅋ 원작에서는 간?단? 하게 중일전쟁을 중국이 선빵 깜(...) 이었지만 여기선 ㅋㅋ
정신나간 중일전쟁 중국 선빵(…)보다는 민족 단위 로맨스 스캠(?)이 좀 더 개연?성 있죠 아무래도 ㅋㅋ
어흐..... 이렇게 된 이상 CNT-FAI 이상을 일본에......(?)
그렇게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 20년 일찍 출범하는데…(?)
@E.E.샤츠슈나이더 왠지 파멸적인 구도로 만나게될거같은(....) 김선우와 권가연 반 제국주의자 듀오가 보고싶긴하네요(?)
일본이 현실보다 더 빨리 망하는거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