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투스(행1:6-9)
2017,9,24 순교자기념주일, 김상수목사(안흥교회)
며칠 전 트럼프대통령이 UN에서 북한에 대해 “완전파괴(totally destroy)”라는 강경발언을 했다. 그랬더니 리용호 북한 외무상은 "개들이 짖어도 행렬은 간다"는 표현을 인용하면서 비난하더니, 이제는 김정은까지 직접 나서서 “늙다리 미치광이”, “깡패”, “사상 최고의 초강경 대응조치”등의 거친 말을 쏟아냈다. 이런 복잡한 북한문제의 상황들 속에서 “순교자기념주일”을 맞이하면서,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았다.
“만약 지금 과거 일제치하나 한국전쟁 또는 그 이상의 상황이 된다면, 나는 과연 기꺼이 순교할 수 있겠는가?”
순교(殉敎)라는 것은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순교자적인 삶(life)은 항상 살 수 있고, 또한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순교나 순교자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뜻 밖에도 우리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 속에 숨겨져 있다. 이 시간 이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주님의 뜻을 마음에 담자. 다함께 본문말씀을 읽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이 말씀은 주님께서 승천하시 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유언과도 같은 말씀이다. 보통 이 말씀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으로 이해한다. 물론 이런 해석이 의미상으로는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엄밀하게 말하면, 문맥상 ‘증인이 되라’는 명령이 아니라, ‘증인 될 것이다’는 약속이다. 쉽게 말하면 성령이 임하시면, 그 성령이 주시는 권능을 받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해서 땅 끝까지 증인이 되어 진다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에게 익숙한 이 말씀은 자세히 보면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는 명령 이전에, 증인이 ‘되어지는’ 또는 ‘되어 질 수 있는’ 비결을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나오는 “증인”이라는 말을 우리들은 보통 ‘전도자’나 ‘선교사’로 이해하고 적용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 속에는 또 하나의 아주 중요한 뜻이 있다. 그것은 ‘순교자’라는 뜻이다. 이 말씀에서 사용된 “증인”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마르투스(μάρτυς)”인데, 이 단어는 “증인”과 “순교자”로 동시에 번역될 수 있다. 실제로 순교자라는 뜻을 지닌 영어 단어 ‘마터(martyr)’도 이 말에서 파생되었다. 결국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순교자적인 증인의 삶도 살게 하시고, 순교자도 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만약 지금 저를 포함해서 우리들 모두가 나의 남은 인생을 온전히 주님이 기뻐하시는 복음증거 하는 일을 하면서 살기 원한다면(=순교자적인 삶),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나에게 임하시고, 나뿐만 아니라 나와 관계된 모든 것들(가정, 교회, 사역, 일 등)을 온전히 다스려 주시고, 친히 내 삶을 운전(driving)해 가시도록 간구하고 내어 드려야 한다. 이것이 순교자적인 삶을 사는 비결이다.
성경에서나 기독교 역사에는 수많은 순교자들의 이야기가 있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모든 순교자들의 공통점은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증인의 삶을 살거나 순교자가 된 것이 아니고, 한결같이 성령께서 그들로 하여금 증인이 되어 지게 하시고 순교할 수 있는 믿음을 주셨다는 것이다. 이처럼 수많은 순교사례들 중에 이 시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두 사례를 소개한다.
첫 번째 사례는 병촌교회 순교이야기다. 충남 논산시 성동면 개척리에 있는 병촌성결교회 성도들의 순교 이야기는 좀 남다른 의미와 도전을 준다. 왜냐하면 이 교회에서 순교당한 분들은 목회자나 장로님 같은 특정한 지도자들이 아니라, 우리들과 별다름이 없는 일반 평신도들이었기 때문이다. 병촌교회에서는 1950년 9월 27일과 28일 이틀 동안 전체신자 74명 중에 66인(남 27명, 여자 39명)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인민군에게 순교를 당했다. 66명의 순교자들 중에는 한 살짜리 영아 3명을 포함해서 주일학교 어린이들도 30명이나 있었고, 심지어 만삭 중이었던 임산부도 있었다. 병촌교회는 일제강점기인 1943년에도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일제의 탄압을 받아서 목회자와 성도들이 다수 구속되었고, 총독부의 성결교단 폐쇄명령과 함께 강제폐쇄 되었다가 해방 후에 재건된 바가 있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당시 남로당 좌익 세력이 강성하던 논산 지역 성동면 일대에서는 우익 진영의 사람들과 교회의 성도들을 향한 피비린내 나는 살육과 박해가 시작 되었다. 그러다가 인천상륙작전이 일어나자 공산군들은 퇴각하면서 총과 몽둥이, 삽, 괭이, 죽창 등으로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인민군들은 교인수를 파악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신자들을 모이게 한 후에, 마을 뒷산으로 성도들을 끌고 올라갔다. 그리고 총과 죽창 등을 들이대면서 “예수를 믿으면 다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을 했다.
그들 중에는 한 살짜리 젖먹이를 안고, 만삭의 몸 이었던 정수일 집사(당시 31세, 여)와 가족들도 있었다. 죽음의 순간이 왔음을 직감한 정집사님과 가족들(시부모, 시동생, 아들, 딸, 조카 등 일가족 10명)은 서로 붙잡고 기도하며 찬송을 했다. 그리고 살기 가득한 인민군들을 향해 정집사님은 이렇게 외쳤다.
"공산당은 패전할 것이니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시오!"
그리고 마치 순교자 스데반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을 용서하는 기도와 함께 “주님 내 영혼을 받아주옵소서”라고 외쳤다. 그러자 공산당들은 죽창과 곡괭이로 사정없이 찌르고 총을 난사했다. 이런 모습은 그 자리에 있던 주일학교 어린이들에 이르기까지 다 마찬가지였다. 이때 구상일생으로 살아남은 장년신자 4명 가운데 김주옥집사(32세, 남, 후에 병촌교회 장로)라는 분이 있었는데, 이 분의 증언으로 순교자들의 최후 모습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들이 어떻게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하고 찬송하고 담대히 복음을 외칠 수 있었겠는가?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처럼 성령님께서 증인이 되게 하시고, 순교자가 되게 하신 것이다.
두 번째로 나누고 싶은 순교이야기는 1971년 11월 30일에 함경남도 신흥군에서 있었던 프레스(Press) 순교사건이다. 북한군 특공대원으로 복무하다가 1977년 8월 19일 임진강을 건너서 귀순했던 이영선씨 라는 분이 있다. 이 분이 귀순 후에 “자유냐 죽음이냐”(신원문화사,1984)라는 책을 통해 자신이 경험했던 북한의 참상을 밝혔던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책에 보면 이영선씨는 17살 때(1971,11,30) 함경남도 신흥군에서 자신이 목격했던 북한교회 성도들의 순교 장면을 기록했다.
어느 날 노인 세 사람이 몰래 예배를 드리다가 적발이 돼서 신흥군 공설운동장에서 인민재판이 열렸다. 운동장에는 이미 25톤급 프레스가 설치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트럭 한 대 도착했다. 그리고 그 트럭에서 노인 세 사람이 내렸다. 그들은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얼굴은 너무도 평온해 보였다. 그들이 프레스 앞으로 끌려갈 때, 이영선씨는 그들 중 한 사람이 하늘을 보면서 쉰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기도하는 듯한 소리를 내었고, 나머지 두 명은 ‘아멘’이라고 말하는 단호한 소리를 들었다. 그때 중앙재판소에서 내려왔다는 지도원이 주민들을 향해 소리쳤다.
“동무들! 어버이 수령 김일성 동지의 유일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기 위해 전체 인민이 하나같이 단결해 나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 놀랍게도 아직까지 저 반동 종교인들이 남아서 지하활동을 펴왔다고 하니... 저들의 골통 속에 과연 뭣이 들어있는지 이제부터 관찰해 봅시다”
그리고 그의 명령과 함께 안전원들이 프레스의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25톤짜리 프레스는 윙윙 소리를 내면서 노인들의 머리를 향해 조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프레스의 압축판이 노인들의 머리를 사정없이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때 “주여~”라는 소리와 함께 '펑펑펑~‘소리를 내면서 두개골들이 터지고, 뇌수와 선혈이 사방으로 튀겼다. 그 장면을 본 주민들도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이것이 프레스 순교사건이다. 이들이 어떻게 프레스 앞에서까지 평온한 얼굴로 기도하고 주님을 부를 수 있었겠는가? 성령님께서 마지막까지 순교할 수 있는 믿음을 그들에게 주셨기에 순교자가 되어 진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순교자기념주일을 보내면서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과 함께 나눈 두 가지 순교 이야기는 우리들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들이 남은 생애 동안 ‘뭘 먹고 살 것인가?’라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남은 생애 동안 ‘무엇을 위해, 어떻게(how) 살 것인가?’의 문제다. 우리들 모두가 순교자가 될 수는 없어도, 얼마든지 순교자적인 삶은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순교자들이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서 죽음으로 복음을 증거 했듯이, 우리도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서 순교자적인 삶으로 복음을 증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