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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티-외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1972)
들뢰즈와 가타리, 최명관, 민음사, 1994(원 1972) 608쪽.
Deleuze et Guattari, L'Anti-Oedipe: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Minuit, 1972, p. 494.
제1장 욕망하는 기계들 Les machines désirantes 7-59 [몸의 기능] [의식의 역량]
제2장 정신분석학과 가족주의: 신성가족 Psychanalyse et familialisme : La Sainte famille 60-162.
1절 외디푸스 제국주의
2절 프로이트의 세 원문들
3절 생산의 연결적 종합 [참조, 1장 1절] - 편집증 기계, – 과정, ...과 ...과
4절 등록의 이접적 종합[참조, 1장 2절] - 기적 기계 – 전유, 이거나 이거나
[들뢰즈는 외디푸스를 선천적 구성으로 보려는 듯한 프로이트의 외삽법의 오류를 지적하고, 마치 자아의 구성에 대한 오류추론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외디푸스를 사물의 내용(경험적 자료)에 적용하는 데도 외디푸스의 상징을 이용하려는 의도를 지닌 라깡을 비판한다. 즉 은연중에 세계에 대한 구성을 인간의 지성적 도구(이데아, 본유관념, 오성범주)에 의한 구성을 비판할 수 있듯이, 상징의 구성을 비판한다. 구성되어 있지 않고 열려진 자아지만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개체성의 단위 때문이며, 세계에 대한 이해 또한 열려 있지만 그 제한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지성의 인식의 한계 속에서이다. 직관이 가능하다면 생명 종에서는 내재성만큼 보편적으로 거의 무제한적일 가능성은 있다.] (40OLE).
다시 읽으면 칸트의 “순수이법 비판”의 비판 3가지로 서술하는 방식이 닮아서, 사람들이 말하듯이 들뢰즈가 칸트의 영향을 입었다고 하겠지만, 철학사적으로 자아, 세계, 신에 세 가지 비판은 고대의 스토아에서도 중세에 프란체스코학파에서도 그리고 벩송에서도 있어왔다. (논리) 개념적으로 칸트가 깔끔하게 세 가지로 만든 것은 장점이지만, 3+1에서 1의 실재성과 권능(능력)의 활동성은 세 가지와는 서로 전혀 다른 방향임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가 자연의 속성은 여럿이지만 둘 만이 인간의 지성으로 다룬다고 했던 것도 의미 있다. 어쩌면 들뢰즈가 나중에 스피노자의 윤리학이 세편이라고 한 것과도 연관일 있을 것이다.
3+1에서 3. 세 가지의 기호(signe)로서 보는 측면과 세 가지의 개념으로 보는 측면과 감화(공감성)의 다양한 갈래로(그것을 규준화하면 이항에서는 세 가지, 삼 항에서는 여덟 가지) 다루는 측면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들뢰즈는 이런 관점들을 스피노자를 설명하면서 점점 분명하게 전개했을 것이다(1978년, 1988년, 1993년 논문에서). 그 중에서 1993년의 「스피노자와 세편의 “윤리학”(Spinoza et les trois “Ethiques”, 1993)」에서 기호들(les Signes)/감화들(affects), 용어들(les Notions)/개념들(concepts), 본질들(les Essences)/지각들(percepts)이라 한다. 벩송에서 자연(기억)의 자발성, 공감성와 일반화의 두 갈래(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 이렇게 세 가지인데, EC에서 생명과 연관해서보면, 자연, 본능(직관)과 지성(논리)라는 세 가지이지만, 전 저작에서 자연의 자발성에서 보면, 영혼(DI, MM), 세계(EC), 공동체(MR)이다. 이를 자아, 세계, 신에 대한 개념적 일반화의 비판은 칸트가 분명하게 제시했다는 것을 옳은 이야기이나, 칸트가 다루는 방식은 벩송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칸트 인식의 논리로서 다루었고. 벩송과 들뢰즈는 자연의 생성과 과정으로서 다루었다. 대상화의 기능의 측면과 생성의 능력의 측면을 다루는 방식의 차히 때문일 것이다. (56VKH)
이접의 두 가지 가치 기준, 포함적과 배타적이 있다. 배타적은 A와 B 둘 다 맞아야만 진리인데, 둘 다 아닌 경우는 거짓이다. 왜 선택지에서 둘 다 아닌 것을 선택하면 안될까? 권력(권세, 권위)이 제시하는 2항이 아닌 생성은 인민의 권리(Droit)일 것이다. 새로운 생산은 자연권(droit naturel)에서 이다. 사회에서 새로운 권리란 소환권과 탄핵권이며, 이 권리를 인민이 행사할 때, 민주주의이고 또한 인민이 최종심급인 것이다. (56VL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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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등록의 이접적 종합 La synthèse disjonctive d'enregistrement 89, [번 119]
2.4.1. 그 두 가지 사용, 배타적이고 제한적인 사용과 포함적이고 무제한적인 사용
- Ses deux usages, exclusif et limitatif, inclusif et illimitatif.- 89
외디푸스가 욕망하는 등록의 이접적 종합들 속에 슬그머니 들어갈 때 외디푸스는 이것들에다가 어떤 제한적이고 배타적인 사용의 이상(ideal)을 강요한다. .. 이것은 근친상간의 금지에서 ‘이거나 또는 ..이거나’(ou bien)의 지배이다. (89) [포함적이고 무제한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사회체에서 초월적 적용이다. 여기에 오류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른바 가족적 세 가지 큰 신경증은, 차이화 기능의 즉 이접적 종합의 외디푸스적 파멸에 상응하는 것으로 보인다. 공포증 환자는 자기가 부모인지 아이인지를 더 이상 알지 못하며, 강박환자는 자기가 죽었는지 살아있는지를 더 이상 알지 못하며, 히스테리 환자는 자기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더 이상 알지 못한다. (89)
요컨데, 가족의 삼각형화는 그 아래서 하나의 자아가 세대, 성, (생사의)상태에 관하여 동시에 자기를 구별하는 좌표를 받아들이는 최소한의 조건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적 삼각형화는 다른 양태로 이 결과를 확인한다. (89-90) [권력의, 자본의 삼각화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이유로, 모든 것이 더 큰 총체(omnitudo realitas)의 한계에 의해 신으로부터 파생되는 한, 우리에게 신을 이접적 삼단논법의 아프리오리한 원리로 내세우는 칸트의 정의가 중요하다. 신을 하나의 삼단논법(un syllogisme)의 주인으로 만든 것은 칸트의 유머이다. (90) - [철학사적으로는 AAA논법을 만든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의 선전제 미해결의 오류라는 측면에서 파라독사인데 신념으로 받아들이면 낭만주의 아이러니가 될 것인데... (56VKH)]
2.4.2. 포함적인 이접: 계보 Les disjonctions inclusives: la généalogie -
외디푸스적 등록의 고유한 특성은 이접적 종합의 배타적, 제한적, 부정적 사용을 끌어들이고 있는 점이다.(90)
이 내재적[포함적] 사용은 더 이상 배타적인 것도 아니고... 여전히 이접적이면서도 선언지(선언항)들을 긍정하고, 이것들의 거리 전체를 관통하여(à travers) 이들(선언지들)을 긍정하고, 어느 하나를 다른 것에 의해서 제한하지도 않고 다른 것을 어느 하나로써 배재하지도 않은 이접, 이것은 아마 최고 패러독스이다. ‘이거나 .. 이거나’(ou bien) 대신에 ‘이건 ..이건’(soit .. soit)(90)
정신분열자는 남자이고 또 여자인 것은 아니다. 그는 남자이거나 여자이지만, 분명히 두 측면을 가지고 있다. 즉 남자들의 측면에서는 남자요, 여자들의 측면에서는 여자이다. 에마블 제이예(Aimable Jayet)(알베르 데지레, 등록번호 54161001)는 ... 남녀 두 측면을 평행하게 이어 놓는다. ... 정신분열자는 죽어 있거나 또는(ou) 살아있거나 이 둘 중의 한 상태에 있지 동시에 두 상태에 있지는 않는다. (90)
베케트(Beckett)가 그의 작품 중의 인물들과 이 인물들이 겪는 사건들을 등기할 때의 이접들의 의미이다. 모든 것은 분해되지만 자기 자신 안에서 이다. 이접들이 포함적인 것이 됨과 동시에, 거리들마저 긍정적인 것이 된다. 헤겔학파 철학자들 중의 마지막 철학자처럼, 분열증자가 모순되는 것들을 동일화하는 모호한 종합들로 이접들을 대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에서 말한 사고의 질서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91)
그 정신분열증자는 모순하는 것들을 깊이 파고 내려가 동일화함으로써 이접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반대로 분할 할 수 없는 거리를 날아다니면서 이접을 긍정한다. 그는 단순히 남녀양성도 아니고, 두 성 사이에 있지도 안으며, 남녀교차도 아니고 오히려 남녀횡단(trans-sexué)의 존재이다. 그 정신분열증자는 양성횡단(trans-sexué), 생사횡단(trans- vimort) 부모아이 횡단(trans-parenfant)의 존재이다.(91)
포함적인 이접은 그 항들에 대해서 닫혀있지 않고 반대로 무제한적이다. .. 슈레버(Schreber)는 남자이며, 여자이며, 부모이며 아이이며, 죽었으면서 살아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하나의 특이성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하나의 특이한 점을 지닌 모든 계열과 모든 가지들(rameaux) 속에는 어디에나 있다. (91) [분열자의 이접 종합의 예는 슈레버의 분열증자이다. 이는 내재성으로서 이질적 종합(단위)인데, 이것을 상징적으로 기호에 통합시킨다면 그것은 오류이다. 이런 오류는 삼단논법의 전칭긍정 판단을 만들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와 같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무한 퇴행을 걱정하여 개념작업을 한 것과 같다.]
이런 까닭에 정신분열증의 신과 종교의 신은 동일한 삼단논법의 대상이긴 하지만 같은 점은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 ... 클로소프스키(Klossowski, 1905-2001)는 밥호메(Baphomet, 1965)에서 ...신과 반그리스트 대립 .. 전자의 신은 자기로부터 파생된 실재성 속에서 배제와 제한의 주인이며,... 반그리스트는 변양의 왕자로서, 가능한 모든 술어를 통하여 주체의 이행을 규정하는 것이다. (92) [들뢰즈 의미의 논리의 부록 3 참조.]
니진스키(Nijinsky, 1890-1950)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신이고, 나는 신이 아니었고, 나는 신의 어릿광대이다.“나는 아피스(Apis)요, 나는 이집트인이요, 피부가 빨간 인디언이요, 검둥이요, 중국인이요, 일본인이요, 미지의 사람이요, 바다의 새요 또 육지 위를 나는 새요, 톨스토이의 나무요, 그 뿌리이다..” (92) [반과거 신이었고]
(니진스키는 그의 일기[일기(Journal)]를 이런 식으로 적고 있다) - 그래요 나는 내 아버지였고, 나는 나의 아들이였다. (93) [여기서는 복합과거로 썼다.]
2.4.3. 배타적 [세]분화들과 덜분화 상태
- Les différenciations exclusives et l'indifférencié.- 93
그러므로 등록의 이접적 종합은 우리를 연결적 종합과 동일한 결과에 나아가게 한다. 이 종합도 역시 두 가지 사용, 하나는 내재적이고 다른 하나는 초월적인(transcendant) 사용인 것이다.(93)
외디푸스에 의해 도입된 배타적 연관은 ... 세분화로써 생각된 다양한 이접들 사이에서 역할 할뿐만 아니라, 또한 연관이 부여한 세분화의 집합과 연관이 가정한 덜분화(l'indifférencié)들 사이에서도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93)
그러나 우리는, 외디푸스로부터, 두 가지, 즉 그(외디)가 배열한(ordonner) 세분화와 그가 우리를 위협하는 덜분화를 둘 다 창조했다고 말해야 한다. (93) [외디푸스 삼각형은 상층에도 심층에도 적용하는 방식을 갖게 된다. 상부 이데올로기로서는 낙관적이고 우화적이며, 심층에게는 금욕적이고 억압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고통(억압) 속의 인민은 우화에 기운다. 그럼에도 그 삶은 억압적이고 인고를 겪는 금욕적이다. 이 파라독스를 안 소크라테스에게 아이러니가 있다.]
그러나 이 덜분화를 그가 창조한 세분화의 이면(l'envers)으로 만든 것이 외디푸스 콤플렉스이며, ...(93)
“어린이는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해결해야만 어른이 된다. 이 해결로 어린이는 [기존] 사회에 들어간다. 거기서 어린이는 권위(Authorité, 권세)의 형상 속에서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다시 체험해야 하는 의무를 발견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출구가 막혀 있다 문화 상태에 앞서는 것에 회귀 불가능성과 문화상태가 일으킨 점증하는 불안감 사이에서 균형 잡힌 안정감을 찾을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다.” (94)
외디푸스 콤플렉스는 마치 미궁(labyrinthe)과 같다. 거기서 빠져 나오면 반드시 그 속으로 되돌아간다. 외디푸스는, 문제로써 또는 해결로써, 욕망하는 생산 전체를 동여매어 멈추게 하는 끈의 두 끝이다. 암나사를 단단히 조여서 아무 것도 생산될 수 없고, 다만 소음만이 들릴 뿐이다. (94)
모든 출구는 모두 막혀 있다(bouchées). 이제 더 이상 포함적이고 무제한적인 이접들의 사용이 가능하지 않다. 사람들은 [고아인] 무의식에게 부모를 창조했다! (94)
2.4.4.정신분석의 둘째 오류추리: 오이디푸스적 이중구속
- Deuxième paralogisme de la psychanalyse: le double bind oedipien. -
베이트슨(Bateson, 1904-1980)은 서로 모순되는 두 질서의 메시지를 동시에 발신하는 것을 이중 구속(le double bind)이라 부른다. (가령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계속해, 나를 비판해라고 말한다. 모든 유효한 비판이, 적어도 어떤 종류의 비판이, 환영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은연중에 생생하게 암시한다) (94)
베이트슨은 여기에 특별히 정신분열증화하는 상황이 있음을 보았고, 이 상황을 러셀(B. Russell, 1872-1970)은 유형이론(théorie des types de Russell)의 관점처럼 생각하여 넌센스(non-sense)로 해석했다. (94)
정신분석의 둘째 오류추리가 있다. 간단히, ‘이중구속’은 외디푸스 일체와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외디푸스는 하나의 계열로서 제시되어야 하고, 두 개의 축 사이를 왕복한다. 이 두 극은 신경증적인 동일화와 규범적 내재화이다. 양자는 외디푸스이며, 이중의 막다른 골목이다. 분열자가 여기서 본질(entité) 생산된다면, 그것은 이 이중의 길을 피할 유일한 수단으로 생산된다. (95) [첫째 오류추리: 외삽법(l'extrapolation) (86)]
프로이트(1856-1939)는 무의식을 이중의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었는데, 그 자신은 외디푸스가 이 막다른 골목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생생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가 1936년에 로망 롤랑(Romain Rollan 1866-1944))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모든 것은 마치 성공의 요인이 아버지보다 훨씬 더 전지하는 것인 듯, 또한 마치 아버지를 능가하는 일은 언제나 금지 된 듯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95)
프로이트가 한 시사에 부합하게, 미국사회, 즉 무명의 경영과 개인적 권력의 사라짐 등등을 특색으로 하는 공업사회는 우리에게 “아버지들 없는 사회”의 출현으로 나타나 있다. 물론 이 사회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부모와 맞먹는 것을 부흥을 꾀할 임무를 띠고 있다. (가령, 영구의 왕실은 뭐니 뭐니 해도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하는 미체를리히Mitscherlich의 놀라운 발견) (95)
망델(Mendel)박사 같은 사람과 스테판(les Drs Stéphane)박사 같은 사람들을 보라.어떤 사람이 외디푸스의 올가미에 빠져나오려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들이 빠지는 흥분상태, 그리고 그들이 정말 경찰을 불러들이는 것을 보라. (96)
이런 의미에서 이중 구속을 깊이 분석한 최초의 예는 맑스(Marx, 1818-1883)의 유태인 문제(À propos de la question juive, 1843)일 것이다. 거기서 가족과 국가 사이에서, 가족적 권위인 외디푸스와 사회적 권위인 외디푸스 사이에서 이중구속이 분석되고 있다. (96)
2.4.5. 오이디푸스는 번번히 승리한다 Oedipien gagne à tous les coups -
외디푸스는 엄격히 말해 무의식을 두 측면으로 묶는(ligaturer) 것 이외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외디푸스가 엄격히 “결정할 수 없는(indécidable)” 것인지를 볼 것이다. (96)
“프로이트는 결국 아버지의 세계로부터도 죄책감으로부터도 빠져나오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 대한 관계의 논리를 구축하는 가능성을 부여하면서 인간에 대한 아버지의 지배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길을 연 최초의 사람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 정신분석학이 약속하는 해방은 정신분석 밖에서 성취될 것이고 또는 이미 성취되었다.”
분열 분석은 외디푸스를 해결하겠다고 제안하지 않으며, 외디푸스적 분석보다 더 잘 외디푸스를 해결하겠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분열분석은 무의식을 탈외디푸스화하여 진실한 문제들에 도달하려 한다. 분열분석은 고아적 무의식의 영역들, 정확히 “모든 법 저 넘어(au-dela de toute loi)”에 도달하고자 한다. (97)
우리는 [정신분석의] 내부에서 역전(réversion) 가능성을 믿는다. (97) [들뢰즈의 주장]
그러므로 모든 것은 마치 외디푸스가 스스로 두 극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행해진다. 하나는 동일화하는 상상적 도형의 극이며, 다른 하나는 세분하는 상징적 기능의 극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외디푸스화되어 있다. (97)
사람들은 발작(위기)으로서 외디푸스를 갖지 않았다면 구조로서 외디푸스를 갖는다. 이때 위기를 다른 것들에 옮겨 놓고 다시 시작한다. 그러한 것은 외디푸스적 이접, 진자의 운동, 배타적 역비례이다.(97) [외디푸스는 적용이 안 되는 위기의 측면이 새로운 이접, 즉 모순관계인데 둘을 종합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상징화(추상화)를 하기 때문이다. 더 큰 공리를 산출할 수 있다는 가정을 원리로 삼는다. 이점에서 선결문제 미해결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사람들이 질료적 상상작용에 접근할 때, 구별하는 기능은 감소되고 사람들은 등가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이 형상적 요소들에 접근할 때, 구별하는 기능은 증가하고, 그들은 서로 구별되는 원자가들(des valences)에로 향한다.”
구조로서 외디푸스화가 그리스트교 삼위일체이며, 다른 한편 발작으로서 외디푸스가 신앙에 의해서 불충분하게 구조화된 가족적 삼위일체이다.... 항상 역비례의 두 극이 있다. 외디푸스는 영원하도다!(98) - [비참과 위대함(?)- 파스칼을 연상하지만, 클로소프스키의 니체 해석처럼, 외디푸스에 매인 것이 비참이고 이탈이 위대함이다.(42MKD)]
라깡주의자의 해석도 마찬가지.. 이 이중의 막다른 골목을 형성하여 봉쇄하고 우리를 우리의 아버지 문제 되돌아가게 하고, 정신분열자를 외디푸스화하기 위하여 ... 외디푸스를 얼마나 원용했던가.(98)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에 ... 발작-외디푸스와 구조-외디푸스 사이에, 문제와 해결 사이에, ... 우리는[들뢰] 본성상 차이도 경계도 한계도 인정할 수 없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오로지 상관적인 이중의 막다른 골목이다. 즉 무의식 전체를 싹 쓸어버리고 끊임없이 이 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되돌려 보내는 임무를 띤 진자 운동만 중요하다. (98)
2.4.6.상징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사이에 경계선이 있는가?
- La frontière passe-t-elle entre le symbolique et l'imanginaire? 99
본성상 진정한 차이는 상징과 상상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하는 생산을 구성하는 기계적인 것의 실재적 요소와, 단지 신화와 그 변형을 형성하는 상상과 상징의 구조적 집합 사이에 있다. 차이는 외디푸스의 두 가지 사용에 있지 않고, 포함적이고 무제한적인 이접들의 비외디푸스적 사용과 배타적 이접들의 외디푸스적 사용 사이에 있다. (99)
이미지들에서 구조로, 상상적 형상들에서 상징적 기능으로, 아버지에서 법으로, 어머니에서 위대한 타자로 거슬러 올라간다 할지라도, 문제는 그저 후퇴했을 따름이다.(99)
어째든 라깡이 방금 암나사를 풀어놓고서 다시 죄고 있는 것을 적절한 일이 아니었다. 그가 방금 신경증까지도 정신분열증화하여, 정신분석의 터전을 뒤집어 엎을 수 있는 정신분열증의 흐름을 흘러가게 해놓고는 정신분열자를 외디푸스화 한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었다. 라깡의 작은 대상 a가 지옥의 기계, 즉 욕망하는 기계의 방식으로 구조적 평형의 한 복판에 침입하고 있다. 라깡의 제2세대가 뒤이어 등장했는데, 그들은 외디푸스라고 하는 가짜 문제에 대해 더욱더 감각이 무디어지고 있다. (99) [부분 대상은 구조의 생산자이지 구조의 복속이 아니다. 이 부분을 구조화하는 일부로 보려는 측면은 클라인(라깡의 제자는 아니지만)도 오해가 있다고 들뢰즈는 보았다.]
- 라깡과 그 후속세대에 대한 비판:
[후속세대들의 전제군주 기표, 즉] 결여하는 항은 스스로 결여하면서 욕망의 계열 속에 결여를 다시 끌어들여, 이 계열에다가 배타택일적 사용을 강요하는 것이다. 외디푸스는 신화라 하여 고발하면서도 거세의 콤플렉스는 신화가 아니라 반대로 실재의 어떤 것이라고 유지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것은 어떻든 멈춰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외침을 되풀이하는 것. 즉 프로이트가 말하는 운명(Ananke, ἀνάγκη), 즉 저 바위(Roc)를 들먹이는 것이 아닌가?) (99-100) [분석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바위(roc), p. 77] j
(40QKE 이전) (42MKD) (옮, 5:21, 56VKA) (8:14, 56VL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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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4. 인명록
1818 맑스(Karl Marx, 1818-1883), 독일 철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혁명가.
[1818 알베르-데지르 바르(Désiré-Albert Barre, 1818-1878), 화가, (우표와 메달의) 소묘가.
- 작품: Mouse Mat of Albert Désiré Barre, Inscription (reverse), 1860.
1856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오스트리아 신경과 의사, 정신분석가. Freud, Cinq psychanalyses, tr. fr. [1935], PUF, p. 297.
1866 롤랑(Romain Rolland, 1866-1944) 프랑스 작가, 노벨상(1915)
1872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 영국 수학자, 철학자, 유형이론(théorie des types de Russell)
1883 제이예(Aimable Jayet, 1883-1953) 프랑스 날것 그대로의 예술 창안자. - Jean Oury, Essai sur la création esthétique : L’imaginaire esthétique comme facteur d’intégration biopsychologique, Paris, Hermann, 2008
1890 니진스키(Vaslav Nijinsky 1890-1950) 폴란드 출신 러시아 남자 무용수. 1918년 광기 속으로 1919년 스위스 정신과의사 블뢰러(Eugen Bleuler)의 치료를 받다. 일기(Journal)(1953, fr. 1988) - 남성이면서도 셰헤라자드(Shéhérazade, chorégraphie de Fokine, 1910)를 맡았다.
1901 미드(Margaret Mead, 1901–1978) 미국 인류학자. 베이트슨 부인(de 1936 à 1950).
1901 라깡(Jacques Lacan, 1901-1981) 프랑스 정신과 의사, 정신분석학자.
1904 베이트슨(Gregory Bateson 1904-1980) 아메리카 민속학자. 이중구속... 부인 미드(M. Mead, 1901–1978)가 한 작업처럼, 이중구속은 1950년대 제시한 개념으로 정신분석학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 (참조 프로이트) : (AO 94)
1905 클로소프스키(Pierre Klossowski, 1905-2001), Nietzsche et le cercle vicieux, Mercure de France, 1969. - [악순환을 벗어난 니체겠지.] 밥호메(Baphomet, 1965)
1906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 1952)의 성공으로 일약 그 이름이 알려졌으며, 앙티 테아트르(Anti-Theatre: 反演劇)의 선구자가 되었다. 3부작의 소설 몰로이 Molloy, 1951, 말론은 죽다 Malone meurt, 1951), 이름 붙일 수 없는 것(L‘Innommable, 1953)은 누보 로망(nouveau roman)의 선구적 작품이며,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은 움직일 수 없는 인간이며, 마후드(Mahood)와 보름스(Worm)가 등장한다.
1908 미체를리히(Alexander Mitscherlich, 1908–1982), 독일 심리학자, 정신분석학자. Auf dem Weg zur vaterlosen Gesellschaft. Ideen zur Sozialpsychologie. 1963(Society Without the Father: A Contribution to Social Psychology): (fr. tr. Vers la société sans pères : essai de psychologie sociale, 1969)
1917 오르티그(Edmond Ortigues, 1917–2005), 렌 대학교수, 철학자, 신학자. Le Discours et le symbole, 1962
1924 르끌레르(Serge Leclaire, 1924-1994) 프랑스 정신과의사, 정신분석학자. "La Réalité du désir", in Sexualité humaine, Aubier, 1970. On tue un enfant, 1975
1924 우리(Jean Oury, 1924-2014) 프랑스 정신과의사, 정신분석가. 제도적 정신치료의 주장자.
1925 분스(Marie Claire Boons/Boons-Grafé, 1925-2019) 벨기에 출신 정신분석가. 브뤽셀 대학 심리학 박사, 파리 정신 분석학회 회원.
1926 뽀이에(Jacques Pohier, 1926-2007) 프랑스 신학자, 도미니끄파(1989년까지), 1979년 수도원 탈퇴후 카톨릭 교회로부터 단죄, 안락사 주장으로 존엄사 협회 회장이었다(1992 à 1995).
1930 망델(Gérard Mendel, 1930-2004) 프랑스 정신과 의사, 사회 정신분석학자, 인류학자. Pour décoloniser l’enfant (1971), La société n’est pas une famille (1992),
[les Drs Stéphane, 찾을 수 없네 ...]
1932 브장송(Alain Besançon, 1932-2023) 프랑스 역사가, 소비에트 전공, 도덕 정치과학 아카 데미 회원, 젊은 시절 공산당원이었으나 1956년부터 공산주의와 단절하고 카톨릭으로 되돌아 갔다.
1934 페디다(Pierre Fédida, 1934-2002) 대학 교수, 정신분석가, 수필가. 들뢰즈의 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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