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를 꼭꼭 씹어 삼키며
“우~웅~.”
바지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울린다. 떨리는 살에 파고드는 진동음이 쌉쌀하다. 휴대폰을 꺼내보니 문자메시지가 뜬다.
“OO문예 공모처입니다. 좋은 소식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부디 건필 하시길 빕니다.”
“으~음.”
문예 대상 공모전 낙선 소식! 결국, 발표했구나. 떨어진 모든 이에게 일률적으로 보내는 메시지를 받고 말았다. 개인적인 소식이 아니다. 땅바닥에 우수수 떨어진 나뭇잎처럼 나둥그러지고 있다. 비명도 아니고 한탄도 아니다. 그저 ‘으~음’ 맥없이 삼키는 체념음이다.
순간, 꽉 다물어진 입술과 딱 굳어진 턱밑 근육이 화석처럼 경직되고 만다. 한 가닥 기대도 휩쓸려 날리는 낙엽으로 날아간다. 비 오는 날씨에 스산한 기운까지 겹치니 세상 풍경이 무겁고 우중충하다. 차창 밖으로 바라다 보이는 바깥세상도 다 젖어 들고 있다. 도무지 시선을 제대로 둘 곳이 없다. 모두 상관없이 따로 제 각각이다. 세상에 이쪽 편이 없다. 외로운 섬에 서 있는 앙상한 벌거숭이 나무 한 그루다.
봄이 아직 인가? 뜰 앞에 화사하게 피었던 자 목련 꽃 이파리들이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내가 괜스레 민망해지고 만다. 햇볕 따뜻한 날씨에 한껏 춘정을 내뿜다가 앞다투어 꽃봉오리를 터뜨렸던 요 며칠. 그때만 해도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과 시선들이 그리도 반가웠는데 지금은 아예 무덤덤하다. 찬바람이 쌩쌩 불고 잎이 다 떨어지자, 꽃샘추위라고 발길마저 총총걸음이다.
뭐, 글 좀 쓰는가 싶었다. 신바람이 들려 제법 열중했다. 얼마나 다듬고 또 다듬었는가? 얼추 됐나 싶었을 때 세상에 내보낸 건데 여지없이 떨어졌다.
무작정 핸들 꺾이는 대로 몸을 맡기니 전에 한번 들렀던 새로운 카페로 향해진다. 아직껏 잎사귀 돋지 않은 맨몸뚱이 나무가 내다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는다. 뽀얀 우유 거품 머금은 라 떼 커피 한 잔을 두 손으로 감싸자 손안이 따뜻하다. 한 모금 넘기려니 입천장이 벗겨질 듯 뜨겁다. 맛까지 생나물처럼 쓰다. 문예공모전에 보낸 글맛이 이랬을까? 깊은 맛이 없고 아직 날 것 그대로다.
커피 잔을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좀 쌉쌀한 맛으로 마시려다 날 설탕 한 스푼을 집어넣고 휘젓는다. 젓고 또 젓는다. 또 한 숟갈 집어넣는다. 마구 젓는다. 내 속이 휘둘린다. 잠재우고 진정시켜야지. 반쯤 비워진 유리 커피 잔 바깥 면에 멍하니 앉아있는 얼굴이 어린다. 낯선 얼굴이다. 문장 구성과 문체가 좋아도 절실한 공감이 없으면? 유연한 글 흐름이라도 클라이맥스가 없는 글이라면?
마음과 몸이 헛헛하기에 매운맛 짬뽕이라도 채워 넣으려고 중화요리 집으로 발길을 옮긴다. 그 음식점이 눈앞에 가까워지자, 코끝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도록 얼큰하고 매운 짬뽕이 눈에 선하다. ‘한 그릇 비우고, 뱃속에 채우고 나면 좀 괜찮지 않겠어?’
‘그럼, 그렇게라도 해야지.’ 속으로 주고받고 달랜다. ‘이 참에 누가 내 속 타는 것을 알까?’ ‘매운 짬뽕이나 얼큰한 육개장 한 그릇 먹고 싶다고 언제까지 기다릴 수도 없잖아.’ ‘그냥 내가 내게 사주는 거야. 그리고 달래야지.’ 생각이 제멋대로 돌고 돈다.
음식점과 좀 떨어진 곳이지만 주차하기 편한 곳에 차를 세우고 패잔병처럼 터벅터벅 걷는다. 육중한 건물을 돌아 음식점 앞에 서자 “Closed”라고 쓰인 아크릴판이 유리문안에 딱 하니 걸려있다. 음식점마저도 나를 비켜간다. 무슨 날이 이런 감?
좀 더 걸어서 근처 다른 음식점으로 자리를 바꾼다. 한식 음식점이다. 맵고 얼큰한 순두부찌개를 시킨다. 잠시 뒤에 눈앞에 보글보글 순두부찌개가 끓고 있다. 한 숟갈 떠서 맛을 보니 속이 뜨겁고 확 깬다. 후루룩 불어가며 속을 채우니 콧등에 이슬 같은 땀방울이 맺힌다.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따뜻한 흰 밥 한 그릇을 들고서 보니 밥알 한 알 한 알이 글자로 보인다. 꼭꼭 씹어서 천천히 삼킨다. 살이 되고 피가 된다고? 왈칵 뜨거운 기운이 눈썹 밑을 치밀고 올라온다. 코끝이 아리고 싸해지면서 목 울대마저 깊이 잠긴다. 한 문장, 한 단락, 한 페이지, 통째로 다 삼킨다. 이제 좀 빈속이 채워지고 속이 뜨겁다.
음식점을 나오자 가벼운 비바람이 아직도 날리고 있다. 저 멀리 구름 사이로 한줄기 가는 햇살이 고개를 빼꼼히 내민다. 비바람, 구름 너머에 언뜻 엷은 무지개가 얼굴을 붉히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