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몸이 날마다 수전절이 되어야 한다 요10;22-29, 고전3:16-17
코로나가 팬데믹한지도 벌써 7개월이 되었는데 코로나의 불꽃은 점점더 불타오르고 있다. 코로나 통계사이트 월드오미터에 의하면 전 세계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 현황 집계에 따르면, 11월 6일 하루 동안 신규 확진자 60만4689명이 확인돼 총 누적 확진자는 4901만1024명이 됐다.
세계 코로나 사망자 현황은 하루동안에도 8717명 늘어 누적으로는 123만8825명이 됐다. 국가별 누적 사망자수는 미국이 24만953명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다. 또 브라질 16만1779명, 인도 12만5029명 등의 순이다. 우리나라 정부는 7일부터 새롭게 개편된 ‘사회적 거리두기’ 체계를 적용하기로 함에 따라 한국교회도 정부의 단계별 방역 조치에 맞춘 대응이 필요해졌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6일 발표한 브리핑에 따르면 7일부터 전국에 적용될 거리두기 단계는 1단계다.보건복지부가 종교활동을 대상으로 정한 단계별 방역 조치 1단계는 ‘생활방역’ 단계다. 생활방역 단계에서는 교회 예배당에 들어가 앉을 때는 좌석을 한 칸씩 띄워 앉아야 한다. 교회 내 소모임과 식사는 자제가 권고되며, 숙박행사는 금지된다. 교회의 정규예배참여 가능 인원은 예배당 좌석 수 30% 이내로 제한된다. 교회 내 소모임과 식사는 금지된다.
한국교회총연합은 7일부터 새롭게 적용되는 거리두기 단계 시행을 앞두고 한국교회에 정부의 단계별 방역 수칙 준수를 요청했다.한교총은 6일 발표한 ‘방역 단계 조정에 대한 논평’에서 “정부의 이번 지침은 그동안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코로나시대에 맞게 K방역의 원칙을 마련한 것으로써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서 “방역의 기반 위에서 한국교회가 ‘자존감 있는 예배’를 계속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이어 “이번 조치의 핵심은 단계조정과 예측 가능한 대응원칙이 마련되었다는 점”이라며 “특히, 교회를 포함한 모든 종교시설에서 공히 같은 원칙이 적용된 점은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크리라 본다”고 말했다.또 영적 예배와 기도에 힘쓰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회 주변의 상인들과 이웃들을 돌아봐달라고도 했다.방역 단계 조정에 대한 한교총 논평전 세계적으로 코로나의 대유행이 계속되고 있으며, 국내적으로 산발적 집단감염이 이어지는 가운데 정부가 세분화된 대응지침을 통해 종교시설의 단계적 방역행동을 발표하였다. 정부의 이번 지침은 그동안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K방역의 원칙을 마련한 것으로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정부가 방역의 기반 위에서 경제활동을 보장하려는 것과 같이 대한민국 모든 교회는 방역의 기반 위에서 예배와 활동을 보장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한국교회가 ‘자존감 있는 예배’를 계속할 수 있기를 바란다.이번 조치로 인해 1단계의 경우 대략 50% 수준에서 모든 종교시설에서 공히 종교활동이 가능하며, 회의 등의 모임과 식사를 자제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1.5단계에서는 30%, 2단계에서는 20% 정도가 회집할 수 있다. 이번 조치의 핵심은 단계조정과 예측 가능한 대응원칙이 마련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교회를 포함한 모든 종교시설에서 공히 같은 룰이 적용되는 점은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크리라 본다. 고 있는 교회 주변의 상인들과 이웃들을 돌아보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신령(성령)과 진정 (진리)으로 예배해야 하나님과 만나고자 하는 이는 만나 주실 것이다.
구약은 몽학(유법아래 맏겨진)선생이요. 그림자이다. 첫계명 율법안에서는 우리를 온전케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빛되신 성령이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스스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 성령으로 거듭난 자.) 하나님을 만나고자할 때 연결고리는 성령(처소)과 진리 만으로 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로만 통하여 자기백성을 만나 주신다.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께 간접 예배를 드리는 성전을 없애 버리시고 자기 이름으로 모이는 자들의 모임인 이 땅의 (주님 의 핏값으로 사신 주님의 몸된)교회로 삼았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희생 제물(하나님의 성전 되신 실체 - 그리스도)로 십자가에 드리면서 죽으실 때,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을 찢어버리면서 성전(성소와 지성 소 사이의 구분)을 헐어 비로소 제사장과 재물이 필요없 게 되어버렸다. 이로써 성자 하나님 본인이 하나님께 드리는 직접 예배를 완벽하게 완성시키셨다. 즉 반석이신 자신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님과 우리를 예수님을 통하여 직접 만날 수 있게 하셨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나라로 승천하시기 전까지(구약시대) 예배는 제사장이 대신 드리는 간접예배였으나, 오늘날은 예수이름으로 하나님께 직접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셨다.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믿음이 선물)이다.
이에 따라 예수님은 간접 예배를 드리는 성전을 없애 버리고, 자기 이름으로 모이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통하여 직접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셨다. 즉 반석이신 자신 위에 교회를 세우시면서 하나님과 우리 성도들을 예수 자신을 통하여 직접 만날 수 있게 하셨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예배,제사,제사장은 예배란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을 말하며, 그 예배를 완성시키신 예수님, 우리 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으로 표현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완전한 예배인데, 예수님이 완벽한 제사를 위해 자신을 온전한 제물로 죽임까지 당하신 예수님은 피조물의 죽음에서 승리하시고 부활하시어 40일 후 승천하셨다.
요한복음4장21절에 보면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는 말씀은 성전에서 드리는 간접 예배가 아닌 너희가 하나님께 직접 예배할 때가 오나니라는 뜻이다. 지금도 우리들의 행위로 간접 제사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성령이 계시는 성도) 만으로 드리는 직접 예배를 받으신다.
따라서 직접 예배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요 성도가 예수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주님 오시기 전에는 성전예배 즉 성전에서 제사장을 통해 간접적인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다.
성서학자들은 유대교의 중심이되는 예루살렘 성전을 기준으로 유대 역사를 크게 두 시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솔로몬의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제1성전시대이고, 다른 하나는 바빌론 포로 귀환이후 다시 재건되었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제2성전시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땅에 다시 오시기 전에 세워질 제3성전시대가 오게 될 것입니다.
1. 성전시대
(1) 최초의 광야의 성막 B.C. 1446-967
최초의 성막인 성전의 역사는 모세부터 시작이 됩니다. BC15 중반 출애굽하여 하나님의 명령대로 시내산에서 장막이 만들어지고 가나안땅으로 들어간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성막을 매우 소중하게 다루었습니다. 영어에서는 종종 텐트(Tent)로 번역한다. 성막은 다른 용어로 회막, 장막, 증거막, 증거의 장막, 성소로 불린다. 이곳에는 십계명 돌판이 들어 있는 언약궤가 있다. 성막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오헬은 원래 동물의 가죽이나 짐승의 털로 된 유목민들의 이동식 거주지인 천막을 말한다. 약 500년이 지나서 다윗은 이 성막을 예루살렘으로 옮겼고 하나님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으로 하여금 성전을 만들게 하여 성막을 대체하게 하였고 BC959년 솔로몬 성전이 완공됩니다.
(2) 최초의 성전인 솔로몬 성전 B.C.966-B.C.586
다윗 자신은 화려한 궁전에 살지만 하나님의 법궤는 초라한 장막 안에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안쓰러웠다. 성전 지을 생각을 하지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막으신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을 알고 큰 복을 주신다. 소위 다윗 언약으로 불리는 언약인데, 장차 다윗의 후손들이 영원히 통치할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것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완성된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성전의 건축을 허락하지는 않았으나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완성하신다. 다윗은 비록 자신이 성전을 짓지 못하지만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한다. 다윗의 뒤를 이은 솔로몬은 최대한 화려하게 성전을 짓는다. 제1성전시대는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했던 BC 966년에서 유대왕국이 바빌론 누브갓네살 왕에 의해 유대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BC 586년까지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사무엘상하, 열왕기상 하, 역대상하 그리고 이사야, 예레미아 등이 이 시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최초의 솔로몬 성전은 바벨론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 이어진다.
(3) 제2성전 스룹바벨 성전 B.C.516-A.D.70
바벨론의 70년 포로가 끝나고 바사(페르샤)왕 고레스는 유대인들에게 귀향을 허락하고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명했다. 자원하는 자들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유다백성들도 고향으로 돌아와 처음 한 일은 성전을 짓는 일이다. 고레스왕의 칙령으로 고국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스룹바벨의 인도로 BC 520년부터 시작해서, 비록 이 성전이 에스라와 스룹바벨의 주도하에 성전이 터가 놓이고 중간에 주변의 방해로 13년 정도 정지 되지만 마침내 완성되었는데 이때 성경은 노인들이 성전을 보고 울었다고 기록합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화려한 솔로몬 성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초라하고 볼품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둘째는 70년 동안 성전에서 예배하지 못하다가 예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룹바벨 성전도 BC63년 로마의 폼페이장군에게 파괴되어지고 맙니다. 이후에 헤롯이 BC20년에 파괴된 스룹바벨 성전을 재건축하여 AD64년에 완공한 이 성전을 헤롯성전이라고 하며 불과 6년 후에 로마의 베스파니안과 그의 아들 티투스 장군에 의하여 철저하게 파괴가 됩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성전이 이 지구상에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제2성전시대는 세계사적으로 페르샤제국과 헬라 제국 그리고 마지막 로마제국이 각각 유대를 지배했던 6세기 기간을 말합니다.
제3성전에 대하여는 메시아가 오기 전에 적그리스도를 위하여 예루살렘에 세워질 것이며, 유대교 원리주의자와 보수 유대교에서는 제3성전을 기다리고 있다. 이미 정통유대인들의 유대교에서는 성전준비위원회인 랍비들과 산헤드린의 리더들이 구성되어 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또 다른 '적그리스도' 라는 다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종교통합과 NWO의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제3성전이 갖는 의미는 종교통합의 상징적인 장소로 또한 적그리스도가 활동하는 중심무대 라는 점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제3성전이 지을 위치는 유대인이나 팔레스타인이나 어디에서 신을 섬기느냐가 핵심문제입니다. 이슬람교나 유대교나 모두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모리아산에서 제사를 드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솔로몬 성전이 있었던 곳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그리고 성경을 통해 연구한 결과는 현재 성전산에 있는 이슬람교의 황금바위사원이 솔로몬 성전이 있었다는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솔로몬 성전은 다윗의 도시로 다시말해 시온산에 기혼샘물이 있는 그곳이 솔로몬성전이 있었다는 것이라고 학설들이 발표되었습니다. 만약 유대교 성전건축위원회나 랍비들이 이런 학설을 수용한다면 제3성전 건축은 어느날 갑자기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배도하는 일이나 다윗의 도시 즉 시온산이 과거 성전이 있었던 자리라는 연구발표는 제3성전이 곧 착공되리라는 신호라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마지막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가장 확실한 종말의 징조는 제3성전의 건립이라는 것입니다. 제3성전이 건립되면 자연스럽게 적그리스도가 당당하게 전세계인 앞에 등장할 것입니다. 적그리스도는 본인이 성전안에서 내가 하나님이라고 말해야 알 수 있으므로 아직은 모르지만 제3성전의 건축이 시작된다면 그가 누구인지 곧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말세에 일어나기로 성경에 예언된 사건들이 우리 눈앞에서 펼쳐진다면 우리는 지혜로운 다섯처녀처럼 기름준비하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여야 하겠습니다.
2. 성전봉헌절 유래
제2성전을 좀더 자세히 설명을 한다면 역사적으로 유대왕국을 정복했던 바빌론 왕국은 페르샤 제국에게 무너지고, 페르샤 제국은 BC 332년에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당합니다. 그런데 알렉산더 대왕은 일찍 죽으면서 그리스 대제국은 알렉산더 왕의 장군들이 쪼개어 갖게 됩니다. 그래서 BC 323년부터 알렉산더 대왕의 휘하 장군이었던 프톨레미우스가 이집트 지역에 세웠던 프톨레미우스 왕국(Ptolemies)이 유대를 지배하게 되다가 BC 198년에는 역시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인 셀레쿠스스가 세웠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셀레쿠스 왕조( Seleucid Empire)가 유다를 지배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서 유대인들의 불만은 최고조로 달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들과 싸우거나 봉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폭정을 할 때 의로운 한 사람이 나타났으니 유다 마카비는 셀레쿠스 왕 안티오쿠스 4세인 에피파네스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킨 유대인 유격대 지도자이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유대인들에게 그리스 종교를 강요하자 이에 반항하여 산으로 올라갔던 제사장 마타티아스의 아들인 유다는 아버지가 죽은 뒤 반란군을 이끌면서 전쟁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순식간에 셀레우코스의 4개 군단을 격퇴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되찾았으며 유대인들에게 헬레니즘을 강요하는 것을 막고 유대인들의 종교를 보존했다. 마카비는 승승장구하여 싸움에 승리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카비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헬라파 유대인을 처형하고 예루살렘성안에 설치한 모든 이방신들의 제단과 제우스 신상들을 제거하였습니다. 그리고 BC165년 12월25일 새롭게 설치한 제단에서 하나님께 율법에 규정된 예물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곤란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대제사장이 성전에서 밤낮으로 불을 밝힌 등잔에 거룩하고 맑은 특별한 기름이 단 하루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비하게도 이 기름을 만드는데 필요한 기간인 8일 동안 기름이 모자라지 않고 등잔불 빛이 계속 타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8일 동안 하누카(빛의 절기)라고 하여 축제를 벌이며 기뻐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수전절 하누카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유대인들은 빛의 축제인 하누카가 되면 그때의 일을 기린다. 그러다가 다시 BC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유다를 정복하면서 로마의 지배아래 놓이게 됩니다. 바로 이 로마 제국통치 시기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게 됩니다. AD 70년 유대와 로마 전쟁이 일어나면서 로마 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면서 재건된 성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제2성전시대가 끝이 나게 됩니다. 로마제국에 의해 파괴되었던 AD 70년까지를 말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헤롯 성전(B.C.19-A.D.70)은 엄밀하게 새로운 성전이 아님에도 헤롯 성전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 이전의 성전과는 차원이 다른 화려함과 웅장함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이두매인이었던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스룹바벨 성전을 개증축하여 솔로몬 성전보다 더 크게 짓는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성전을 가리키며 자랑할 만큼 거대하고 화려했다고 한다. 이 화려한 헤롯성전 파괴는 AD70년 티투스에 의해 시작되었고, 135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사실상 완료되었다. 132-136년의 제2차 유다 항쟁은 로마 제국에 의해 진압되었는데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어 그곳에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었다.
오늘 요한복음에 나오는 修殿節(수전절) 또는 성전봉헌절이란 주전 164년경 수리아의 왕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가 예루살렘 성전을 점령하여 성전 안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돼지피를 뿌리어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는데 유다 마카비가 군대를 이르켜 성전을 탈환하고 성전을 청소하여 봉헌한 것을 기념한 절기라고 위에서 설명하였다.
수전절은 유대력 9월로 보통 겨울인 12월에 7일간으로 지키는 절기이다. 수전절은 신약 성경 중에서 단 한번 구약의 절기가 나오는데 요 10:22에만 기록되어 있고 다른 곳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에 관한 더 많은 정보를 얻고자 한다면 성경에서는 얻을 수 없지만 로마 카톨릭이 사용하는 외경 마카비서에는 수전절에 관한 기사가 나오며 또 유대역사가인 요세푸스가 기록한 유대전쟁사와 유대고대사에서도 수전절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성경을 유대인의 마음으로 좀더 정확히 알고자 한다면 그들의 명절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이런 절기들이 이스라엘의 역사와 정신을 이해하는데 소중한 자료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열린 마음을 가지고 기독교의 전승이나 유대역사서나 유대전쟁사도 참고하기도 하고 또 카톨릭에서 사용하는 이런 외경도 참고하는 것도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10장 22절은 예수님이 수전절을 맞이하여서 유대인들과 논쟁을 하신 것이 기록되었다.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다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이는데 논쟁의 주제는 당신이 메시야인가 아닌가 이다. 예수님이 이 때 일어난 일이 태어날 때부터 눈먼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을 만나면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저가 누구의 죄 때문에 소경이 되었느냐고 묻는다. 자신의 죄인가요? 아니면 부모의 죄인가요 물었을 때 주님은 누구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나기 위하여 소경이 되었다고 하시면서 그 눈먼 사람의 눈에 진흙을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했을 때 그가 눈이 뜨여져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이때 모인 군중들을 향해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외치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이 눈이 멀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겠지만 본다고 하니 죄가 있다고 하시면서 영적인 눈이 뜨여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다신 말씀하시기를 자신은 양의 문이므로 누구든지 자신을 통하여 들어오고 나가야 꼴을 먹을 수 있다고 하셨고 또 자신은 선한목자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삯군이라고 하였더니 이런 일로 인하여 유대인들과의 논쟁이 벌어졌는데 예수님이 그리스도이냐 아니냐에 관한 논쟁이 일어났던 날이 수전절이었다. 주님은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말해도 유대인들이 믿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분명한 증거라고 하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자기 이름으로 일을 하는 것이 참이 아니라면 천벌을 내리든 그 일을 그르치든 하나님의 이름이 도용되는 것을 막으실 것인데,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계속 일을 하고 있으니 그게 바로 증거가 아니겠느냐고 하십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많은 일을 행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자유롭게 하고 병자를 치유하고 죄인의 죄를 깨우쳐주고 죽은 이들을 살리기도 하셨습니다(눅 4:18∼19). 한 마디로 그것은 사람과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일입니다.
수전절(修殿)은 글자 대로 해석을 한다면 성전을 깨끗하고 정결하게 수리하였다는 의미입니다
헬라어로 수전절인 엔카이니아는 엔과 카이노스가 결합한 것으로서 엔이라는 안에서와 카이노스라는 새로운 이라는 뜻이므로 이 합성어를 해석한다면 더럽혀진 성전을 새롭고 깨끗하게 한 것을 의미합니다. 영어로 the festival of the Dedication(헌납 봉헌) 이라 하여 성전봉헌 축제 라하며 이날은 즐겁고 기쁘게 축제를 벌이는 날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쯤 되면 수전절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성전이 매우 더럽게 되었다가 회복되어 기뻐서 축하하는 기념일 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수전절이란 성경에는 그 유래와 의미가 나오지는 앉지만 2200년이 지난 오늘날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전절 즉 히브리어로 하누카를 기념하고 지킵니다. 왜 유대인들은 이 수전절 하누카를 지킬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반드시 지키라고 명령하신 구약의 3대 절기는 유월절(무교절) 초막절(장막절 수장절) 칠칠절( 오순절 초실절 맥추절)도 아닌데도 이 수전절은 유대인이 사용하는 구약성경에도 나오지 않는 절기임에도 유대인들은 이 날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인 사실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수전절이 무엇인가 하면 헬라문화를 숭배하는 시리아에게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고 이방인의 각종 신과 우상으로 가득차고 더렵혀진 성전을 깨끗하게 정화한 날입니다. 수전절이 되면 첫째로 성전에서는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인 시편 120-135편을 부르면서 즐거워하였습니다. 둘째 각 가정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가정에서도 수전절을 지키는 것이 허용되었으므로 가지가 여덟 개인 촛대에 하루에 한 등씩 불을 밝혀서 8일째는 촛대의 불을 모두 밝혔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하누카라고 하며 지금도 이 날을 불의 축제라고 하면서 즐거워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것과 같이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성전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성전에 계시고 그 곳에서 자신들을 만나주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신앙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수전절이 있었던 BC 164년 경에는 회당도 성전도 함께 있어서 회당에서 예배도 하고 공동체 모임도 교육도 하였지만 여전히 성전은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종교와 삶의 한 구심점이요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건물이었습니다. 그 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였고 대화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성전에서 함부로 제사하다가 또는 성전 물건을 잘못 만지다가 죽은 경우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1) 다른 불을 드리다가 죽은 나답과 아비후(레10:1-2)
1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다른 향로를 가져다가 주께서 명명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주 앞에 분향하였더니 2 불이 주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죽은지라.
2) 벳세메스 사람들이 법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70명이 죽음(삼상6:19)
3)떨어지는 법궤를 손으로 잡았다가 죽은 웃사
(삼하6:6-7) 6 그들이 다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7 주의 분노가 웃사를 향해 타올라 하나님께서 그이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궤 곁에서 죽은지라
4) 왕이 교만하여 분향하다가 문둥병을 앓은 웃시야왕(대하 26:16-21)이 있으며 그 외에 대제사장들이 일년에 한번 대속죄일인 7월 10일에 지성소에서 제사를 들릴 때 방울을 바지에 달았습니다. 그러다가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끌어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매우 거룩한 것과 동시에 두려움의 상징이며 한편 자신들을 돌보아 주고 지켜주는 주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믿고 있었기에 매우 소중하게 관리하고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성전신앙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성전이요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우리에게 성전신앙이 없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수전절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인 그리스도인과 무슨 관련이 있고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3. 수전절의 교훈
(1) 신앙을 탄압하는 어떤 정치적 세력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한기총의 정치성을 지향하는 DNA가 내재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기총을 주로 구성하는 교단인 장로교가 한기총을 핵심축을 이루고 있는 세력이다. 그러나 장로교는 일제강점기 때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 즉, 신사에 참배한 오점을 안고 있다.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지난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에 찬성하는 긴급 동의안을 가결했다. 여기에는 ‘신사참배를 솔선하여 열심히 행하고 나아가 국민정신동원에 참가하여 황국신민으로서 열과 성을 다하기로 결의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신앙의 정절을 지키지 못한 장로교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지도 않고 옹호하지도 않으며 반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온 우주의 왕이시며 통치자이기 때문에 주님의 영역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주님의 통치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군사 스포츠 등 모든 영역을 관할하고 영향력이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인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데 우리의 역량과 책임과 의무를 행사하여야 합니다
여기에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누가 어떤 정치를 하던 국가와 국민의 존재를 위협하고 기본권과 인권을 유린하는 정부와 또 기독교의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예배를 방해하는 정부에 대하여는 대항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과 교회를 위협하고 무너뜨렸던 36년간 일본제국의 식민지 통치에 협조하고 동조하였던 많은 목회자들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개신교를 믿는 네델란드 우리에게는 히딩크의 고향으로 알려진 네델란드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를 삼백년이상 식민지배했습니다. 시내마다 좋은 부지에는 모두 교회를 세웠습니다. 개혁주의에 기초한 기독교 국가이기에 복음전파에도 열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가 독립이 되고 나서 몇 년 지나지 않아서 그 교회건물들은 모두 폐쇄가 되었고 지금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무슬림이 있는 이슬람국가가 되었습니다. 말레이시아도 사정은 비슷하게 기독교는 미미한 존재이고 강력한 이슬람국가입니다. 이것을 무엇을 말합니까? 종교가 정치의 뒤에 숨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에 와 있던 대부분의 선교사들도 대부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들도 복음만 전달하고 교회만 세우고 예배를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였습니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학교도 세우고 병원도 세우며 한국인들을 문명으로 이끌며 남녀평등과 사회신분 격파등 사회의 거의 모든 부분에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잃은 백성들의 정치적인 아픔을 이해하는 선교사는 많지 않았습니다.
(2) 우리도 율법의 정신을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도 수전절을 지켰습니다. 예수님은 수전절뿐 아니라 유월절
초막절 같은 명절도 모두 준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파괴하려 오신 분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인 사랑과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하려 오신 분입니다. 주님은 율법의 정신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종교지도들에게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시고 적용하였습니다. 그분은 율법을 파괴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고 이루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구약을 말씀을 이루려 함이란 말이 많이 등장하면서 구약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남긴 말이 다 이루었다 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지금은 복음의 시대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특히 모세5경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율법폐기론자 율법무용론자 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율법을 주신 본질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율법은 교훈이나 이정표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할지 알려주는 이정표요 나침판이 바로 토라요 교훈입니다. 율법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을 사랑하고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코 율법은 무섭거나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이제 구약의 모든 율법적인 규정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지킬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라나 율법의 기본적인 정신은 살아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살아 움직여야 하고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곧 아직도 사회적인 혜택이 미치지 못하는 계층이나 조직 또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희생과 사랑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3) 우리의 몸인 성전을 정결하고 깨끗하게 하여야 합니다
물리적인 건물로서 성전은 이미 AD70년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장군에 의하여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이후 지구상에서 단 한번도 성전을 예루살렘에 건축하고자 하는 일도 없었고 성전이 존재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국에만 대형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 셰계 어느 곳도 단 한 개의 성전이 없습니다. 왜그럴까요 예수님이 자신이 바로 성전이라 하셨고 사도 바울도 우리들 몸이 바로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하나님이 계시고 역사한다는 잘못된 신학으로 수백억 아니 수천억을 들여 성전 교회당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메가처치 교회는 결국 자녀에게 세습하고 주위의 조그마한 교회들을 질식하게 하고 고사시키는 심각한 사태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며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교회당에만 계시거나 역사하시는 편협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며 우리와 대화하시며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켜주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삼위하나님은 불신자나 죄인이나 악인까지도 죽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4) 우리의 몸이 성전일진대 우리 몸을 함부로 다루거나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전 3:16-17)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시리니 하나님은 성전은 거룩하며 너희가 곧 그 성전이니라 내 몸과 당신의 몸이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6시간 동안 모진 고난을 당하시고 나와 당신의 죄 값을 지불하고 죽으신 다음 다시 사신 이후에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하신 성전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분 안에서 발견되고 그 분은 우리 안에서 찾았습니다. 나의 몸이 당신의 죽으신 몸으로 거룩하게 되었으니 거룩하게 지키세요. 그리스도와 우리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떼려야 뗄 수없는 운명입니다. 내 몸이 하나님의 성전인 것이 낯설고 내가 거룩하게 된 성령의 전인 것이 어색하더라도 말씀을 그대로 받으세요. 인정하고 시인하세요. 그러면 성전의 기능이 발동합니다. 아버지께 예배가 되고 기도가 되고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거기에 우리가 바라던 그 무엇들이 다 간직되어 있습니다.
우리 육체는 성령 하나님 계시는 성전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령하나님은 우리가 잘못된 말과 행동을 할 때 그리고 죄를 질때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몸에 해롭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담배나 술 기타 마약이나 도박같은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여 주신 이유는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 세상에서 거룩하고 구별된 민족이 되어 복을 받고 이방나라 들도 하나님을 믿도록 알려주기 위하여 먼저 택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된 우월의식을 가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빛이라고(요9:5) 하신 것처럼 우리도 산위의 동네가 되어야 하고 등잔위의 등잔 빛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조그마한 불빛도 어두운 밤에는 내 자신과 이웃 몇 사람에게 환하게 비춰줄 수 있는 불빛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두운 곳일수록 더욱 더 그 작은 불의 진가는 드러나는 법입니다. 사회가 썩으면 썩을수록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불빛은 영롱하게 비칠 것입니다.
수전절에 성전에 있는 모든 우상을 제거하고 깨끗하게 청소한 것 같이 우리도 우리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는 어떤 정치적인 칼라에도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여야 하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건설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나라가 어렵고 힘이 들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악한 세력과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비폭력적이고 신사적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며 기쁨과 감사로 율법을 의무적이 아닌 자발적으로 그 정신을 배우고 깨달아서 실천하고 적용하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