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문학
김석
문학의 징검다리
나의 고향은 경북 포항시 북구 연일읍 중명동이다. 하지만 나의 기억 속 고향은 울릉도에서 시작하여 죽변을 거쳐 동해안의 해안선을 따라 구룡포까지 이어져 있다. 울릉도 우산 초등학교를 입학하여 고령 운수초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동해안을 따라 열 번 이상 전학을 다녔다. 해안초소 경비 근무를 하셨던 아버지의 잦은 발령으로 동해안을 따라 학교를 옮겨 다녔다. 내 이력에는 아버지의 흔적들이 징검다리처럼 놓여있다. 바다를 벗 삼아 보냈던 유년시절은 훗날 문학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가 되었다.
징검다리를 건너본다 손잡고 건너던 아버지 보이지 않고 드문드문 돌에 새겨진 흔적만이 물결무늬로 남아 기억 선명하다
시간속의 징검다리를 본다 울릉도 우산초등학교를 시작으로 동해안 굽이굽이 열세 곳의 해안선을 돌아 고령 운수초등학교를 졸업한 유년의 시간들이 또 그렇게 흘러......
내 이력서에는 아버지의 흔적들이 징검다리처럼 놓여있다
- 「징검다리」 전문
선문답
문학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가 완성되기까지는 더디 걸렸다. 고교 시절 문학인으로 꿈꾸기도 했지만 좋은 대학 가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당시 부모님들의 바램이었다. 그 때는 법, 상대가 취업의 지름길이었다. 영남대학교 상대를 졸업하고 대기업 입사를 준비했다. 그토록 바라던 삼성에 입사를 하고 1996년에는 피츠버그대학 경영대학원에서 전략마케팅 과정을 회사의 경비로 수료하는 등 소위 잘 나가는 삼성맨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책만큼은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다. 손 때 묻은 책만 천 권이 훌쩍 넘는다. 어떤 책을 어떤 마음으로 봤는지, 일일이 메모하고 줄을 그어둔 덕분에 책을 펼치면 당시가 떠오른다. 나에게 독서는 화를 다스리는 방법이 되기도 했다. 업무상 스트레스를 받거나 집에서 화가 날 때나 독서로 마음을 다스렸다. 문학의 징검다리에 디딤돌을 놓아준 사람은 내가 안동에 근무할 때였다. 삼성생명 경북지역단장으로 근무할 당시 70사단 최탁환 사단장과의 만남은 문학으로 향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첫 만남에서 그가 내민 명함은 장군 명함이 아닌 ‘시인 최탁환’이란 명함이었다.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그의 추천으로 나는 〈시인정신〉으로 등단을 하였고, 첫 시집 『거꾸로 사는 삶』을 냈다. 등단작 「선문답」도 최탁환 장군의 전역식에서 있었던 일이 모티브가 되었다.
눈이 매우매우 많이 내려
길도 끊긴 추운 겨울 어느 날
위병소에서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시인정신사에서 왔는데
어디에 있는 절입니까?
고은사, 봉정사, 부석사는 들어봤는데
시인정신사는 처음 듣는 절인데요
너, 서정주는 아니
눈만 껌벅거리며 하는 말
어디에서 나는 술입니까?
안동소주, 청송불로주, 봉화머루주는 들어봤는데
서정주는 처음 듣는 술인데요
어느 장군의 전역식이 있던 그날
하늘에선 별이 떨어지고
땅에선 시인의 한숨소리 비가 되어
봉정사 골기와 타닥타닥 두드리며 묻고
또 묻는다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선문답」 전문
시인의 삶은 현실을 언어로 풀어내는 사람이다. 시의 모티브가 반드시 은유나 상징으로 포장되어야 하는가? 오히려 가벼운 것, 하잖은 것, 평범한 소시민의 가벼운 일상 등이 시의 옷을 입고 나올 수는 없는 것일까? 시인은 가벼운 일상을 무겁고 깊은 사유를 통해 진솔한 목소리로 들려줄 수는 없는 것일까? ‘시는 어렵다’, ‘요즘 시는 시인도 이해하기 힘들다’라는 말을 듣는다. 어려운 시만 좋은 시가 되는 것일까? 시를 쓰면서 이런 것들이 화두가 되었다. 나의 삶과 나의 시가 ‘혼자’가 아닌 ‘우리’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
친구야
차 한 잔 하고 가게
그런 말 하지 말게나
차 한 잔에 며칠 날밤을 샐 수도 있는데
가는 날 미리 정하고 오라 말게나
오는 날 정해서 왔지만
가는 날 기약 없지 않은가
물론 순서도 없고
죽고 사는 것
끽다거(喫茶去)과 끽다래(喫茶來)처럼
글자 한 자 차이네, 이 사람아
친구야
차 한 잔 하러 오게나
- 「끽다래(喫茶來)」 전문
인생사 하루를 살다가는 하루살이에게는 하루가 일생이 되고 한 철 피었다 지는 꽃에게는 한 계절이 일생이라면 사람도 길고 짧음의 문제일 뿐 오고가는 보편적인 순리를 벗어날 수는 없다. 왔다가 가는 게 인생이라면 간다는 ‘별리’보다는 온다는 ‘만남’이 더 소중한 인연은 아닐까? ‘나’보다는 ‘우리’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 때가 되면 ‘우리’는 없고 ‘나’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것을.
침묵이라는 말을 갖고 싶다
사람(人)의 말(言)은 믿을 신(信)이다. 그런데 요즈음의 말은 너무 가볍다. 말이 날아다니는 세상이다. 국경도 남녀도 노소도 없이 먼지처럼 가득하다. 우리가 말로써 짓는 죄를 구업이라 한다. 말 한마디에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고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있다. 스님들이 수행을 할 때는 구업을 짓지 않기 위해 묵언정진을 한다. 천수경의 첫 진언도 ‘정구업 진언 수리수리마하수리수수리 사바하’다.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나 믿음을 주지 못할 말이라면 오히려 침묵이라는 말을 갖고 싶다.
깨진 유리조각을 본다
깨진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다는 것
상처의 날들 뾰족하고 날카롭다
칼날처럼 뾰족한
가장자리에는 여백이 없다
칼등은 무디고
칼날은 날카롭다는 것을
등은 누워있고
날은 서있다는 것을
날이 선 한마디의 말도
상처가 된다는 것을
상처받은 것들이 상처를 되돌려주는
칼날이 된다는 것을
수많은 칼날은 감추고, 등만
내보이며 무디게 살아온
유리창에 비친 반짝이는
먼지들의 침묵
묵묵하고 투명하다
- 「침묵이라는 말을 갖고 싶다」 전문
괜찮다는 말, 참 슬프다
인생은 놀이인지도 모른다, 사방치기 (마당에 놀이판을 그려놓고 돌을 던진 후, 그림의 첫 칸부터 마지막 칸까지 다녀오는 놀이)같은. 사람 죽지 않는 집 없다. 매일 죽는다. 그런데도 ‘괜찮다’고 한다. 모르는 사람이니까, 나이가 많으니까, 알아도 친한 사람이 아니니까, 내 가족이 아니니까. 놀이니까, 다시 하면 되니까, ‘괜찮다’라는 말 참 슬프다. 죽어도 ‘괜찮다’라는 그 말 참 슬프다.
아이가 죽었다
깨금발로 뛰다가 죽었다
금 밟고 죽었다
죽은 아이가 울고 있다
너 왜 울고 있니?
죽었으니까요
죽은 아이가 울고 있고
죽은 아이를 보며 산 아이들이 웃고 있다
넌 왜 웃고 있니?
살아 있으니까요
‘괜찮다’고 한다 울면서 ‘괜찮다’고 한다
죽어도 ‘괜찮다’고 한다
죽은 아이를 보고 웃어도 ‘괜찮다’고 한다
죽어서 다시 죽지 않기 때문에 ‘괜찮다’고 한다
‘괜찮다’라는 말, 참
슬프다
-「사방치기」전문
수변공원 산책길에 수국을 샀다
거품처럼 하얀 수국 앞에 당신은 환했다
큰 꽃은 큰애를
작은 꽃은 작은애를 닮았다지만
하얀 수국 나에겐 당신이었다
환하던 날짜 이윽고 지고
꽃 사라진 빈 화분엔
수국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지워지고
애들 떠난 빈 자리에
다시 핀 수국
당신의 손전화기에 뿌리를 내렸다
화면에서 솟아나는 물방울 문자들
수국, 자잘한 꽃잎은
활짝 피어오른 당신의 웃음
어느 해 팔월 그 어느 날
수국은 거품처럼 사라지고
수국보다 더 환하던 당신의 웃음도
지
고
- 「지다」 전문
언어의 경제학
시를 쓰는 일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보는 일이다. 내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것들과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다. 관심이 가는 곳에 눈이 가고 생각이 머문다. ‘아프다’에 한참 머물렀다. 아픔은 상처로 남았고 상처는 지울 수 없었다. 눈을 돌리려 공부에 몰입했다. ‘지금, 여기’가 내가 서있는 자리라는 것을 알았다. 상처도 아프지만 삶의 일부라는 것을 알았다. 시가 말을 줄임으로써 의미를 생산하는 것이라면 시조는 시보다 더 경제적인 방식이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 한다’는 말처럼 자유시와는 달리 형식도 중요하다. 먼 길 돌아와 여기 서있다. 시조에도 눈을 돌려 본다. 시조로 등단의 기회를 준 〈문학청춘〉에 감사한다. 말이 줄었다. 말수를 줄이려는 나의 삶의 방식처럼 그렇게 시를 쓰고 싶다. 최소의 언어로 최대의 감동을 줄 수 있는 그런 시 한 편이라도 쓰고 싶다.
깊이가 있는 것은 그만큼의 슬픔 있다
소란 한번 피지 않고 고요히 흐르는 물
강물은 하류쯤에서 제 발치를 핥는다
- 「수심(水深」 전문
요양원 침대 위 엄마 눈 맞추며
내 누군지 알겠나
큰 아들 이름 머꼬?
엄마는 어디 있능교, 당신 엄마 잘 있능교?
예 예 예 자알 있고, 말고요
내 눈 앞에
삼시세끼 때 맞춰 잘 먹고 말 잘하는
‘석’이다, 우리 아 이름. 그것도 모를까 바
- 「잘 있고, 말고요」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