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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소설 |
여자 돈키호테
“아, 얼굴 뜨거워.”
퇴임을 몇 달 앞둔 영숙은 커피잔을 들다 말고 혼자 웃었다. 사십 년 가까이 법복을 입고 살았으면서도, 어떤 기억은 판결문보다 선명했다. 젊은 날의 객기, 무모함,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창피했던 순간들. 그중에서도 스물아홉 여름의 며칠은 유난히 또렷했다. 사법연수원 시절을 끝내고, 수개월 후 첫 발령을 받았다. 출근 전 일주일 정도의 휴식 기간이 있었다. 남들은 인맥을 챙길 때, 영숙은 고향 집 방바닥에 엎드려 세계문학 전집을 읽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던 순간이었다. 좁은 방 안에 누워 있던 그녀 위로 러시아 평원의 바람이 지나간 것 같았다. 전쟁과 사랑, 몰락과 귀족, 눈보라와 말발굽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영숙은 벌떡 일어났다.
“나도 나가야겠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물었다.
“어딜?”
“세상 구경.”
어머니는 잔소리했다.
“일주일 뒤면 근무일 텐데. 준비 좀 하지? 서울 고모 걱정하겠다.”
영숙은 초등학교 졸업한 후에 서울 고모 집에서 학교에 다녔다. 책으로 간접경험만을 실컷 했기에 사회 경험을 직접 하고 싶었다. 엄마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영숙은 중간 크기의 등 가방 하나와 작은 손가방 하나만 들고 집을 나섰다.
“구상은 무슨 구상. 여자 돈키호테, 오늘부터 나는 여자 돈키호테다, 푸하하하.”
무계획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여행이 세상에 득이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방향은 상관없이 걸었다. 한 시간쯤 걸었을 때 집에서 많이 벗어나 어디가 어디인지 구별이 안 됐다. 햇빛은 강했다. 영숙은 어느 마을 어귀에 풍성한 느티나무 아래 그늘에 앉아 쉬었다. 오토바이를 탄 중년남성이 저만치 마을 입구에 나타났다. 무작정 손을 들어 세웠다.
“아저씨 지금 차를 타려는데, 저 좀 가시는 길에 아무 정류장에서 내려 주실래요?”
“타 슈.”
영숙은 뒷자리에 앉아 불편했다. 생전 처음 오토바이를 탔다. 빨리 달리고 있어서 남자의 허리를 꽉 붙잡아야 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오십 살 정도의 중년 남자는 무표정하게 달리기만 하다가 퉁명스럽게 한마디 던졌다.
“어디가 집인데, 어디로 가시오?”
“제가요, 여주 골짜기 마을에 살아 지리를 잘 몰라요. 충주 탄금대에 가려고 해요.”
검게 탄 남자는 가만히 들었다. 그러더니 오던 길 반대 방향으로 오토바이를 휙 틀어 달렸다. 놀란 영숙이 물었다.
“왜, 방향을 바꾸시나요?”
“여하간 시외터미널만 가서 세워주면 될 거 아니요?”
삼십여 분 정도를 달린 남자가 어느 정류소에 영숙을 내려줬다. 그때 낯선 정류장에서 영숙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버스 요금표였다. 가게 점방의 때 묻은 창문 위쪽에 먹물로 쓴 지역과 요금표. 영숙은 피식 웃음이 났다. 글씨가 비뚤배뚤했다. 작은 마을에 정류장이 있는 것도 신기했다. 그녀가 안을 들여다보니, 안경 낀 칠십 대쯤 돼 보이는 노인이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 저 요금표 글씨 누가 쓴 건가요? 매우 비뚤게 썼네요.”
“우리 중학교 손주가 썼는데 그리 흉하나?”
“할아버지, 제가 글씨 좀 씁니다. 두꺼운 사인펜만 있으면 멋들어지게 한 장 써드리죠.”
점방 노인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이상한 여름 복장을 한 여자가 글씨를 써준다고 나선 상황이었다. 노인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한 5분 동안 입맛을 다셨다. 결국 굵은 사인펜과 하얀 습자지 큰 것을 옆 툇마루로 가지고 나왔다. 영숙은 먼지 앉은 툇마루를 빗자루로 대충 쓸고 앉았다. 그녀는 요금표를 보고 순식간에 일필휘지로 써 내려갔다. 영숙이가 자랑할 건 부모에게 물려받은 붓글씨와 펜글씨 솜씨였다. 유복자인 그녀는 글씨를 쓸 때마다 아버지 향기를 맡았다.
“아이고, 아가씨, 명필 중 명필이고만. 몰라봐 죄송하구먼.”
영숙은 그 말에 살짝 웃음을 지었다. 자그마한 정류장이어도 오랜 세월 사람 손에 의하여 주름이 새겨진 역사가 존재했다. 그곳은 시골의 향기를 듬뿍 내뿜는 묘한 힘을 가졌다. 영숙이 탄금대 차를 기다리는 중 맞은쪽에서 한 젊은 여자가 영숙이를 째려보았다. 영숙은 멋들어지게 외국인이 하듯이 어깨를 들썩하며 왜 날 쳐다보냐는 제스처를 했다. 그 여자가 뚜벅뚜벅 걸어 왔다.
“이봐요, 아가씨, 여자 망신시키지 말고 바지 옆 자크나 잘 올려요. 팬티색은 빨간색이고.”
똥배짱을 가진 영숙이라도 그것에 대한 수치심으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녀는 재빨리 가방으로 바지를 가리고 시골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그곳 냄새는 시골 가정 변소란 곳에서 익숙하게 맡아온 지독한 냄새였다. 계속 맡을 수는 없고, 얼마간 시간이 지나니 코 기능이 정지될 지경이었다. 고시 공부하던 것만큼이나 힘들어진 그녀는 별수 없이 밖으로 나왔다. 정류장 안에 있는 사람들이 미처 다 빠져나가기도 전에 영숙은 한 시간도 안 돼서 탄금대 가는 버스에 빨리 올라탔다. 이십여 분 지나자 기사 아저씨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탄금대 다 왔어유, 종점이니 내리세유.”
‘아휴 창피해, 무슨 망신. 자크 내려온 것도 모르고. 하지만 죄는 아냐, 실수지.’라며 영숙이 속으로 독백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탄금대 정거장에서 갈 방향을 찾았다. 순간 이리저리 방향을 살피려 할 때 남자 다섯 명이 영숙을 향해 뛰어왔다. 영숙은 깜짝 놀랐다.
“아니 누구신지요?”
그들이 호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냈다. 얼핏 보니 형사였다. 영숙은 무엇을 잘못했길래 체포하러 온 건지 의아했다. 잘못이 없어도 가슴은 쿵쾅거렸다.
“두 명에게서 신고가 들어왔어요.”
영숙은 기가 막혔다. 형사가 말했다.
“여자 한 사람이 여주를 거쳐 충주시를 향해가고 있다. 다니는 곳이 군사요충지다. 이 여자가 간첩임이 틀림없다.”
"신분증을 좀 보여주세요.”
영숙은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조사하더니 금방 신원이 나왔다. 형사들은 큰 무전기를 들고 웅성웅성하더니 몇 분 후 조회가 끝나고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신고자가 엉뚱한 분을 신고했군요. 시골 사람들이 촌사람만 보니 사람을 몰라봤군요.”
영숙이 깜짝 놀랐던 것은 사복경찰도 아니고 간첩으로 오해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건 빠른 신원조회였다. 수십 년 전인 데도 간첩 신고망은 매우 빨랐다. 영숙이 물었다.
“누가 신고했나요? 하도 궁금해서 물어봐요.”
“오토바이 탄 남성과 시골 정류장 할아버지가 신고했습니다.”
형사들의 사과로 일이 일단락되었다. 그날 영숙은 이상하리만치 어이없는 일이 이어져 마치 가는 날이 장날인 양 느껴졌다.
저만치 탄금대 가는 사람들을 따라 그들 속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습관대로 수첩까지 꺼내서 무엇인가 열심히 적고, 사진까지 찍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이 선글라스 여인은 다른 사람들과는 분명 달랐다. 영숙은 타인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없었다. 그날 하루해가 무언가를 더 기대하는 듯 산 위로 길게 넘어갔다.
영숙은 충주 시내로 나오는 마지막 버스를 타고 시장 골목에 무작정 내렸다. 식당 거리에 들어서자, 충청도의 구수한 말씨로 인해 음식 냄새가 더 그녀의 위장을 자극했다. 주위에서 가장 허름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아줌마 이곳에서 젤 자신 있는 요리는 무엇이에요?”
“자신 있는 요리라, 누나 순두부찌개 아닌가요?”
영화배우라 해도 낯설지 않은 외모의 남자가 나타났다.
그가 히죽 웃으며 영숙의 옆 테이블에 앉았다.
“그럼, 순두부찌개 하나 주세요. 아줌마 솜씨 한번 볼까요?”
주인장 아주머니는 선풍기를 여기저기 틀어놨지만, 아줌마 피부에는 샘이 숨겨진 듯 끝없이 땀이 흘렀다. 보다 못한 영숙이 부엌으로 갔다. 파, 마늘이 부엌의 도마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힘들어 보여서 제가 좀 거들어 드릴게요.”
파, 마늘이 도마 위에서 영숙의 손에 의해 순식간에 춤을 췄다. 영숙은 끓고 있는 찌개에 재빨리 넣었다.
“아니 젊은 사람이 어찌 그리 칼을 잘 쓰시오?”
“저요? 이 정도는 껌이죠.”
영숙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영숙은 그날 낮의 소동 때문에 얼떨결에 점심을 먹을 기회를 놓쳤었다. 영숙은 재빨리 쟁반에 음식을 차려서 먹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 그릇 뚝딱 해치웠다.
“아줌마 밥이 꿀맛입니다. 한 그릇 더 주셔.”
두 그릇 먹고도 성에 안 찼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까 그 남자가 식사하면서 반주로 막걸리를 마셨다.
“아줌마, 나도 한 잔 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푸하하”
“아따, 막걸리도 드실랑가? 여자분이 식성 엄청 좋소.”
옆 테이블에 있던 남자가 마시고 있던 막걸리 통을 들어 흔들었다. 영숙은 큰 국 사발에 넘겨준 막걸리를 순식간에 들이켰다. 그녀는 취기가 올라 기분이 알딸딸하니 좋았다. 벽에 걸린 시계는 밤 아홉 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아이고 문 닫아야지. 아니면 손님들 밤새 문 두드려. 휴, 힘들다”
남자가 서둘러 가 버리고 방 옆에 딸린 보조 주방으로 영숙은 자리를 옮겼다.
“아줌마, 나도 가볼게요.”
그러자 아줌마가 막아섰다.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하루 지내셔유. 도와준 게 얼마인데 하룻밤 못 재워 주겠슈?”
결국 그 집에서 하루 자기로 했다. 아줌마는 주방 한옆으로 난 방문을 열었다.
“와 아줌마, 내 생각과는 다르게 방을 아방궁처럼 잘 꾸미셨네요.”
“제기랄, 나도 이제 꾸며놓고 살겨. 자식들을 평생 뒷바라지해야 끝도 없어. 작년에 선포했어, 엄마는 엄마 인생 살란다 하고.”
“시원해요?”
“아니, 시원할 줄 알았는데, 돈 안 가져가는 것은 좋은데 자식들이 안 보이니 걱정이 되고 마음이 짠햐. 안부가 궁금햐 죽겠쓔. 도대체 인생이 뭔지, 자식이 뭔지. 이래도 탈 저래도 탈.”
그 밤 아줌마의 넋두리가 자장가가 되어 잠이 들었고, 영숙은 그날 밤 꿈에서는 가보지 않은 미지의 장소에서 길을 찾아 한없이 헤맸다.
영숙은 공부만 하다 보니 세상 물정을 몰랐다. 판사란 직책을 수행하기 전에 세상 구경을 한번 해보자고 길을 떠난 참이었다. 영숙이 정한 자기만의 약속으로 목적지는 동전을 던져 정하기로 했다. 그날 아침 동전을 던진 결과는 집에서‘멀리 달아나라.’였다.
충주시 터미널에서, 작은 손가방에는 생리대를, 나머지는 등 가방에 모든 짐을 넣어 좌석 위 선반에 올려놓았다. 대전행 버스는 만원이었다. 영숙은 작은 손가방만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앉은 채 꾸벅꾸벅 졸았다. 장시간의 거리라 중간 정거장에서 화장실을 가려고 무릎을 보니, 작은 손가방이 없어졌다.
“으라차차, 내 가방 어디 갔지?”
“좀 전에 어떤 여자애가 언니라고 부르면서 작은 가방이 자기 것이라면서 가져가던데.”
바로 옆에 앉은 아줌마가 알려줬다.
“네? 요즘은 소매치기도 점점 머리를 쓰나 보네요. 나 원, 기막혀서”
영숙은 화장실로 부리나케 가니. 가방은 그대로 있었다. 대신 여자가 쓴 메모지가 남아있었다.
“Fuck you! 생리대라도 가져간다. 나도 지금 생리 중. 구찌 가져가 봐야, 장물죄로 몰려서 나만 시끄러워. 내게 필요한 것은 아픈 엄마의 빵 한 조각!”
이 쪽지를 읽는 순간 머리를 탁하고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영숙은‘내게 필요한 것은 아픈 엄마의 빵 한 조각!’이란 메모만 남기고 가방은 버려두고 떠난 아가씨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차라리 지폐 한 장이라도 넣을걸. 그러면 그 학생인지, 아가씨인지 그 가정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요?”
영숙의 삐삐로 연락이 왔다. 보니까 ‘여기는 J 경찰서 연락 바람.’이라는 메시지였다.
“어머머, 어째요, 지금 J 경찰서에서 내게 연락이 왔어요. 기사님. 거기가 먼가요?”
버스 안의 승객들은 놀랍게도 기사에게 잠시 들러도 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시골 인심은 정말로 후했다. 경찰서 앞으로 가서 차가 섰다. 영숙이 뛰어서 경찰서 앞으로 갔다. 기다리고 있던 경찰들이 깜짝 놀라 영숙을 보고 인사를 했다.
“저 말입니다. 혹시 아침에 생리대 잃어버렸나요?”
“아니 다짜고짜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안쪽에서 다른 형사가 바로 그 생리대를 가져간 소녀를 데리고 나왔다. 그러자 버스를 탔던 몇몇 승객은 현장을 궁금히 여겨 지켜보았다.
“말씀드리죠. 이 학생이 시외터미널 또 다른 차에서 다른 손님의 돈을 훔치다 걸렸어요. 그 피해자가 신고했어요. 추궁하다 보니, 생리대도 훔쳤다고 하길래 생리대를 조사하는 중 그 안에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 한 장이 끼어있었어요. 그래서 그 번호로 연락을 해본 겁니다.”
“잘됐어요. 안 그래도 이 학생을 다시 만나고 싶었어요. 이 학생이 훔쳤다는 돈은 내가 변상하겠습니다. 이 학생 사정이 엄마가 사경을 헤매고 식구들은 굶고 있어 할 수 없이 나와서 그런 짓을 한듯해요. 내가 책임질 테니 그 학생을 집으로 보내주세요.”
영숙은 마침 경찰서 안에 있던 두 번째 피해자에게 읍소를 하고 피해보상을 했다. 학생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사람들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영숙은 그 학생에게 얼마간의 돈을 쥐여 주며 말했다.
“학생, 엄마가 아프시니까 약 사다 드리고, 밥도 지어드리고, 너도 학교가. 여기 내 연락처야. 필요하면 다시 전화해. 아무리 힘들어도 네 갈 길을 가렴.”
소녀가 더욱 크게 흐느껴 울며 준 돈을 다시 주려고 영숙을 붙잡았다. 영숙은 그 학생의 손에 다시 꼭 쥐여 주고는 같이 눈물을 흘렸다.
운전기사가 출발하면서 크게 말했다.
“아가씨, 가방에 돈을 넣지 못해 한탄하더니, 하늘도 감동했나, 결국 학생을 구해줬네요. 아가씨는 웃기는 것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마음도 곱네.”
버스 그림자가 거대한 말처럼 대전을 향해 달렸다. 영숙은 달리는 버스에서‘빵 한 조각’의 교훈을 가슴속에 새겼다. 유리창 밖으로 펼쳐지는 경치는 방금 전의 훈훈한 일과 더불어 산과 들의 생기를 차 안 손님들에게 주었다. 영숙은 잠을 자려다 창밖의 아름다운 경치에 눈이 팔려 오랫동안 바라다보았다. 그날따라 길가의 전봇대는 마치 전쟁터에 나갈 창처럼 보였다. 내릴 때 기사 아저씨가 영숙을 보고 활짝 웃었다.
영숙은 대전시에서 내려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 뒤로 가 줄을 섰다. 택시가 오자 가까운 호텔로 가자고 말했다. 짐을 대강 정리하고, 찌뿌둥한 몸을 풀려고 물을 받고 샤워를 하니, 날아갈 듯 산뜻했다.
대전시를 구경하려고 영숙은 길을 무작정 걸었다. 영숙은 배가 고팠다. 영숙은 얼떨결에 점심을 건너뛰었음을 깨달았다. 음악은 꽝꽝거리고, 트로트가 거리를 점령한 유성 거리가 영숙에겐 낯설었다. 걷다 보니 호텔을 한참 벗어나 오후 세 시에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점심 겸 저녁으로 밥을 허겁지겁 먹는 중에 어디서 본 듯한 얼굴 아니 눈이 아주 닮은 자가 저쪽 편에 있었다.
“어디서 봤더라?”
골똘히 생각하던 중 사법연수원 시절 범죄 사례집의 팸플릿에서 본 이름이 떠올랐다. 성형을 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구레나룻, 콧날, 날카로운 눈에 곱슬머리. 아무리 변장에 변장을 수없이 해도 감출 수 없는 눈동자와 눈, 특히 눈매만은 바뀌지 않았다. 아무리 잘생긴 외모래도 눈 속에 감추어진 포악한 잔상, 영숙은 그것을 귀신같이 알아챘다. 그 팸플릿의 그 얼굴이었다. 영숙이 쳐다보자, 그 사람이 영숙에게 윙크했다. 모르는 척해야 했지만, 영숙은 목례하며 빙긋이 미소를 지어 주었다. 윙크라고? 팸플릿에서 이 남자의 특징 윙크라고 소개된 것을 봤다. 거기서 밥 먹고 커피까지 시켜 먹고 시간을 끈 것이 실수였다. 남자가 보고 있다가 어슬렁어슬렁 영숙에게 다가왔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네?? 네네.”
“통성명이나 할까요?”
목소리는 굵은 저음이었다. 영숙은 이미 그놈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목귀남. 어려운 이름이지만 영숙은 특이한 이름을 잘 외워서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날 미끼로 삼아 보려고 드디어 이 인간이 작업에 돌입한 건가.
“저는 영옥이에요.”
가족만 부르던 아명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거짓말을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본능적으로 영숙이라는 이름을 감추고 싶었다. 남자는 잠시 뜸을 들였다.
“목귀남이오.”
영숙은 목귀남이 자신의 본명을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 순간 영숙은 확신했다. 덫에 걸린 것은 자신이 아니라, 저 남자라고.
“어디 사쇼, 난 대전이 고향이요.”
“네 전 경기…….”
말도 끝나기 전에 영숙의 말을 가로챘다.
“아이고 내 팔자야, 경기도 가시나 라고?”
“이봐요, 뭐라고요? 가시나 라고요? 사람을 뭐로 알고.”
그때 말끔히 차려입은 양복쟁이가 걸어서 목귀남 옆으로 다가섰다. 겉으로 보기엔 모범생 유형의 이 남자는 목귀남에게 예의가 발랐다. 영숙은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 무리려니 하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빨리 빠져나가기 위해서 일어섰다.
“나는 화장실 일 좀 보고 갈 거니 여기 앉으세요.”
자리를 내주며, 영숙이 일어나서 손에 작은 지갑을 거머쥐었다. 양복쟁이 남자가 말을 던졌다.
“시내에서 현금 든 지갑만 달랑 들고 다님 여기 소매치기 배들이 노려요. 조심하쇼.”
영숙은 들은 척 만척하고 화장실 들어가 볼일 보고, 옷매무새를 바로 만졌다. 그녀는 바지 속 삐삐를 확인했다. 어디서 온 소식 없는지 보고는 숫자로 누구에게인가 몇 번 메시지를 보냈다. 값을 치르고 나가려고 카운터로 갔다.
“벌써 냈심더, 사장님이.”
“머라 사장이라고? 누가요? 목귀남 씨가요?”
속으로 읊조리다가 다 들리게 큰 소리로 말했다.
“난요 밥값 남에게 신세 지는 것 딱 질색이에요.”
영숙은 굳이 본인이 내겠다고 실랑이하다 오 분을 더 끌고, 돈을 내고 나가려고 했다. 양복쟁이 신사와 대화를 마친 목귀남이 재빨리 영숙에게 다가와 손을 낚아채려 하자, 영숙이 잽싸게 피했다.
“어쭈 제법이야. 나 힘 좀 오늘 써 볼까. 여자 상대로 이게 뭐 하는 짓 인공.”
목귀남이 몇 번의 동작에 영숙의 손이 잡혔다.
“순순히 내 발로 갈 테니 손이나 놔요.”
영숙은 서서히 걸어서 앉았던 자리로 뒤돌아갔다. 한 덩치 하는 목귀남이 빠르게 다가오더니 음흉스럽게 웃었다. 목귀남은 미남이지만 징그러운 남성미를 풍겼다.
“내가 서울, 경기 여우 같은 사람들 싫어하는데 옥이 씨는 눈동자가 까맣고 순수해 보여 뒤통수 칠 사람 같지는 않고. 와, 옥이 씨 여자가 웬 힘이 그리 세? 참 맘에 쏙 드네.”
잘생긴 외모지만 웃음이 징그러워 영숙은 오싹했다. ‘여기를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까? 저녁이 돼가고 있으니 늦으면 늦을수록 저들의 먹잇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골똘히 길을 찾았으나 어린아이 숲속에서 길을 잃어 어찌할 바 몰라 두려워하듯 손끝에는 진땀이 났다.
“영옥 씨, 대전에 어찌 온 거요?”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떠돌다 이곳까지 온 방랑자요. 인생은 뜬구름 아닌가요?”
그런 말 듣자마자 목귀남은 일어서더니 영숙 옆자리로 다가가 앉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우리 잘 해볼까? 같은 처지네. 떠도는 별처럼 만났으니, 이것도 인연인데 오늘 우리 만리장성 한번 쌓아볼래요?”
어깨를 기대려는 순간 ‘딱’ 소리가 났다. 영숙이 일어서서 목귀남의 뺨을 쳤다. 수작을 걸려던 엉큼한 목귀남은 정신이 확 들었다. 여자의 동그란 검은 눈을 보자 한풀 꺾인 소리로 말했다.
“미안하오. 내가 무례했소. 그렇다고 이렇게 따귀까지야.”
옮겼던 자리에서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영숙은 생각에 잠겼다. 밖은 이미 햇빛이 기울고 있었다. 영숙은 겁이 났고 주머니 속 삐삐가 긴장 속에 젖었다. 이번에는 방법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무엇인가 시간이 지나면 최후에 순간이 기다리고 있는 두려움이 영숙을 휘감았다. 목귀남은 영숙을 오늘 밤 파트너로 놓칠 생각이 절대 없었다. 영숙은 고시 공부 같은 어려운 공부도 했는데 왜 아이디어가 안 떠오르는지 속으로 푸념했다. 일단 화장실부터 가보고 생각 좀 다시 해보자고 일어섰다.
“어딜 가시려고. 그대는 나의 태양이요.”
목귀남이 능글거리며 한쪽 눈을 찡끗했다.
“화장실 가요. 화장실도 못 가나요?”
“아 그래요. 갔다 오시오.”
영숙이 방금 얼마 전 보냈던 암호에 답신이 와 있었다. < 20 >
영숙은 속으로 숨을 골랐다. ‘그깟 20, 어떡하든 시간을 못 끌겠나!’라고 하면서도 극도로 예민해져 주위 사람들의 숨 쉬는 소리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영숙은 긴장하면 예민해졌다. 좀 전보다 더 밝아진 모습으로 일부러 즐거워하며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누가 볼지 안볼지 주위를 흘끔 보았다. 영숙은 바로 앞에 있는 공중전화로 누군가에게 짧게 말했다. 식당으로 나오니 저녁 7시도 안 됐는데 그곳은 정리되고 손님은 없었다.
“어찌 된 거지?“
놀라서 영숙이 어리둥절하면서 말하자 목귀남이 대꾸했다.
“오늘 식당 일찍 닫았어. 다 내보내고 그대와 나 둘만 남았소. 오붓하게 술이나 마십시다.”
“뭐라고요?”
조금 더 긴장되었다. 머리를 어떻게 짜야 하나 궁리에 궁리만을 한 채 목귀남을 똑바로 응시했다. 앞으로 십분 이상은 견뎌야 했다. 가까이 다가온 목귀남은 다짜고짜 영숙을 잡고 입술에 강제 키스를 하려 했다. 목귀남의 뜨거운 입김이 영숙에게까지 품어져 나왔다. 두 손으로 있는 힘을 다해 밀어냈다.
“귀남 씨 내가 마음에 들어요? 그럼 이리 급하게 여자를 덮치려 하면 어째요. 술을 주든지 과자를 주든 분위기를 만들어야지요.”
“그럼, 그렇고말고.”
목귀남이 윙크하며 싱긋 웃는다. 한창 열이 붙은 목귀남은 그래도 영숙의 말을 잘도 듣고 있었다. 아직도 더 기다려야 했다. 시간이 너무 길게 흘러갔다. 망망대해의 바다에 노인이 맨손과 작살로 상어와 사투를 벌이는 듯한 환상이 짧은 시간이 머리를 스쳤다. 까딱 잘못하면 일이 어그러져 생명까지 위태로울 수 있었다. 담력이 큰 영숙도 긴장으로 인해 손끝이 조금 흔들렸다. 목귀남이 비싼 양주를 미리 잔에 채워왔다. 그것은 아는 사람만 아는 방법이다. 저 잔을 마심 절대 안 되는 거였다. 저들의 수법은 거의 비슷했다. 최음제 아니면, 마약이라도 탔을 것이다.
“나 술을 못 마셔요. 막걸리만 오케이. 경기도 촌사람이 돼서 비싼 양주 못 마셔요.”
“오늘 한번 처음으로 한번 마셔봐.”
“저 죽어요. 못 먹는 술 지난번에 먹었다가 숨을 못 쉬어 병원 실려 간 적 있어요.”
영숙이 좀 큰소리로 화를 냈다.
“뭘 어째요? 옆에 마트 있던데 금방 뛰어가 사서 오면 같이 마시죠.”
하지만 목귀남이 가져온 양주를 조금만이라도 마시기 강요를 해 아주 다급해졌다. 목귀남이 잔을 들어 올릴 때마다 잔 속의 갈색 액체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술이 아니라 자기 얼굴이 술잔 안에서 떨리는 것을 보았다. 시간을 조금만 더 끌기 위해, 영숙이는 할 수 있는 많은 질문을 먼저 던졌다. 그녀의 주먹 쥔 손안에는 땀이 흥건했다.
“목귀남 씨, 막걸리는 안 좋아해요?”
“왜 좋지. 그런데 어른이 돼서는 난 비싼 양주가 좋아. 빨리 취하고 색까지 곱잖아. 흐흐흐”
이제 목귀남의 인내가 한계에 도달하자 일어나서 영숙 옆으로 옮겨 앉으려고 했다. 급한 상황에 영숙의 행동이 재빨리 나왔다. 영숙이 일어나서 약간 몸을 굽혀 목귀남의 머리털을 만지면서 머리가 멋있다고 칭찬했다. 목귀남이 착한 아이처럼 눈을 감고 조용히 머리를 맡겼다. 영숙은 얼른 옆 편의점에 가서 막걸리 사 오라고 말했다. 마침내 출입문을 목귀남이 열었다.
“목귀남!! 드디어 니놈이 잡히다니. 속이 다 후련하군. 니놈 때문에 내가, 내가......”
경찰이 수갑 채우고 두 번 세 번 확인하고 있었다. 그전에 목귀남을 잡았다가 놓친 이유로 고향 후배란 경찰이 좌천되었다. 경찰 후배는 그날 검찰 선배랑 같이 왔다. 체포 당시 왁자할 때 영숙은 그곳을 빨리 빠져나가 옆 건물 뒤에 숨었다. 수갑이 채워지는 순간 목귀남은 고개를 휙 돌려 식당 안의 영숙을 찾았다.
“내가 순순히 갈 터이니 안에 들어가 확인해야 할 사람이 있으니 좀 보게 해주시오.”
“알았다. 대신 딴생각 마라.”
수갑이 채워진 상태로 모두 실내로 들어가 술자리를 본 순간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수갑이 채워진 손이 문밖으로 사라진 뒤에도 식탁 위 양주잔은 그대로였다. 잔 가장자리에는 목귀남의 입술 자국이 남아있었다. 그들이 가고 난 뒤 영숙은 목귀남의 술자리로 갔다. 단 한마디 메모를 남겼다. ‘목귀남 입건’이라고. 그 테이블엔 술잔과 입건이란 메모가 안 어울리게 나란히 한자리에 공존했다. 사실 첫 화장실 갔을 때 청주에 있던 선배 검사에게 연락했는데, 그 선배로부터 20분이라고 삐삐로 응답이 왔었다. 그래서 진땀 나는 연극을 해서 범인을 검거하게 되었다. 영숙은 판사의 삶이 인간의 운명이 엇갈리는 희비의 쌍곡선을 숙명적으로 본다고 생각하자 우울해졌다.
그날 영숙은 선배를 만났다. 선배 검찰과 청주의 후배 경찰은 수갑 채워진 목귀남 얘기를 즐거운 듯 신나게 얘기했다. 영숙은 결론적으로는 사기범을 잡아 기뻤지만, 인간적으로는 슬픈 느낌이었다. 목귀남이 영숙을 보았을 때 잡힐 수도 있는데 본명을 말했다. 더구나 목귀남의 십 년 공소시효가 얼마 안 남았었다. 사람이 죄인이어도 진심일 때가 있겠지. 영숙은 ‘죄가 밉지! 사람이 미운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그날 밤 12시 가 넘어서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초승달이 몸을 살라 주위를 어슴푸레 밝히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새벽 무렵 호텔 창밖을 다시 보았다. 검은 어두움이 남아서 버티고 있던 초승달의 희미한 빛마저 삼켜버렸다. 밤은 그렇게 갔다. 그녀는 범죄를 떠나 한 인간의 꿈과 자유를 짓밟아버린 것 같은 마음의 짐이 목에 걸렸다. 하지만 잘못에 대한 벌은 받아야 했다. 영숙은 그날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면 법도 칼이 되어 갱생의 기회를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이 영숙에겐 ‘빵 한 조각’만큼이나 귀하게 교훈으로 남았다.
그 후 35년의 세월이 흘렀다. 퇴임의 모래시계가 영숙이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젊은 여판사 한 명과 카페에서 우연히 커피타임을 가졌다. 이 후배 판사가 로스쿨 이후 법 인사체계가 바뀌어서 검사와의 충돌이 많아서인지 표정이 밝지 못했다. 후배 판사에게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하려고 영숙은 젊은 날 자신의 돈키호테 시절 얘기를 했다. 후배 판사가 듣고 웃었다. 판사라는 직업이 버거워서, 세상 구경을 며칠 했더니 혹독한 체험이 예방주사가 되어 영숙의 첫 발령 시절이 오히려 순탄히 넘어갔다. 영숙은 지나간 세월의 끝을 잡아당겨 엉뚱했던 돈키호테 시절을 떠올리곤 크게 웃었다.
영숙은 창밖에 철 이르게 물든 단풍잎 하나가 다가올 가을을 기다리며 바람 속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첫댓글 집 나가면 고생이죠.
그래도 돈키호테 기질이 있어 슬기롭게 대처했군요.
읽어주시어서 감사 ㅡ소설이니까 그냥 상상이죠 ㅡ네 잘대처했지요?
감상 잘 했습니다.
필력과 서사 능력에 감탄합니다~^^
임한호샘이 훨 잘하시죠, Thank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