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감 향기 풍겨 오는 가고 싶은 내 고향 칠백 리 바다 건너 서귀포를 아시나요.” 노랫말처럼 서귀포는 가고 싶은 마음의 고향이다. 서귀포에 빛과 바람이 더해지면 꽃은 여러 색깔로 변하며 계절을 맞는다. 아름다운 계절은 따로 없고 특색 있게 제몫을 다 할뿐이다. 그림 같은 풍경은 자연의 치밀한 계산의 결과다. 서귀포의 계절은 다양한 풍경으로 무한하게 만들고 그곳으로의 여행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관계 맺기를 한다. 이토록 나를 열정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건 무엇인지 가끔 되물어도 답은 이미 알고 있다. 아무리 훌륭한 관광지라도 모두가 함께하지 않으면 일부만이 누리는 특권이 된다는 걸.
제주로 길을 나섰다. 제주를 찾는 이유는 다양하다. 날이 좋아서, 바람 맞고 싶어서, 바다가 보고 싶어서, 꽃의 계절이어서 여러 가지 핑계를 만들어 자꾸 제주를 열망한다. 제주라는 명칭도 왜그리 아름답고 정겹게 느껴지는지. 꼭두새벽에 집을 나서 김포공항에 도착해도 이른 시간이 아니다. 전동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에게 비행기 탑승 과정을 묻는 사람이 많다. 전동휠체어를 타는 여행객은 한 시간 반 넘게 일찍 도착해도 거쳐야 할 절차가 많다. 예약한 티켓 팅을 하면서 휠체어를 화물로 실으려고 배터리 사양을 확인하고, 무게와 폭, 길이 높이도 꼼꼼히 체크한다. 일련의 과정을 마치면 휠체어에 태그를 붙인다. 그리고는 패스트트랙을 이용해 교통약자 보안검색대에서 모든 짐을 꺼내 엑스레이 통과 절차를 진행한다.
이때부터 가방 속 물건은 모조리 꺼내 엑스레이에 통과하고 나면 다시 가방에 넣는 절차와 가방을 휠체어에 묶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을 치른다. 힘겨운 과정을 거치고 나면 벌써 지쳐버리고 만다. 휠체어에 탄 사람은 엑스레이가 좁아 통과 할 수 없어 검색요원이 손으로 몸을 훑어가며 꼼꼼히 체크한다. 검색대를 통과하면 비행기 탑승 게이트로 간다. 그곳에서 기내용 수동휠체어로 옮겨 앉고 전동휠체어는 화물로 싣기 위해 가져간다. 이때 핸들링은 항공사 직원이 한다. 국내를 오가는 여러 항공사 중 핸들링 서비스는 D 항공사가 가장 나아 계속 이용하게 된다. 휠체어 탄 승객은 가장 먼저 탑승하고 가장 늦게 내려야 비장애인 손님과 부딪치지 않고 수월하게 탑승할 수 있다. 기내용 휠체어에 옮겨 앉으면 휠체어를 스스로 핸들링할 수 없는 구조이어서 완전 수동적인 장애인이 된다. 한 시간 남짓 하늘을 날아 제주공항에 도착하면 내리는 과정도 항공사 직원의 핸들링을 똑같이 반복한다. 다만 짐은 다시 검색하지 않는다.
제주 공항에 도착하면 화장실 먼저 이용하고 나서 장애인 콜택시(장콜)를 부른다. 제주는 다인승 장콜도 운행하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여행객이 이용하기엔 난해하다. 일인승 장콜을 부르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 목적한 곳으로 겨우 이동은 했다. 천지연 폭포에 도착하니 점심때가 한참 지난 시간. 새벽부터 움직인 탓에 배 속은 텅 빈 상태고 당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배고파 뵈는 게 없을 지경이지만 다행히 천지연 폭포 근처 식당가에 경사로 설치한 곳이 다수여서 골라 먹을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제주에 왔으니 갈치조림은 먹어줘야지. 하도 배가 고파 허겁지겁 먹고 나니 뭘 먹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그렇게 주린 배를 채우고 천지연 폭포로 고고씽~
여행은 짜릿한 해방감을 준다. 낯선 곳으로의 일탈은 나를 내려놓게 하고 익숙한 관계에서 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게 한다. 천지연 폭포처럼 열린 관광지로 조성된 곳은 접근성 걱정이 덜 돼서인지 더 그렇다. 천지연은 하늘과 땅이 만나 이루어진 연못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폭포 주변은 희귀종이 분포해 있어 천연기념물의 보고이다. 낮과 밤의 풍경도 확연히 달라 몇 번을 와도 새롭다. 폭포로 진입하는 길은 평지이고 장벽이 없어 여유롭다. 쏟아진 물결은 바다로 강물 되어 흐르며 햇살에 반짝인다. 천지연 폭포와 인증샷만 남기고 새섬으로 향했다.
바닷가 근처라서인지 바람이 몹시 불고 바람에 따귀를 실컷 두들겨 맞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역시 제주는 바람의 섬이다. 새섬은 서귀포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이다. 새섬으로 가려면 새연교를 건너야 한다. 새연교는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가는 다리라고 한다. 새섬공원은 바다와 숲을 동시에 즐길 수 있고 야경 명소로도 한몫한다. 새연교를 건너 공원으로 들어서면 가요 ‘감수광’, ‘서귀포를 아시나요’ 감상에 잠시 젖는다.
좋은 인연을 아름답게 맺어주는 새섬에 휠체어 탄 여행객은 진입할 수 없다. 새섬으로 가는 길이 계단이어서다. 바다를 건너는 거대한 새연교도 만들었는데 새섬으로 가는 짧은 길에 계단이라니 휠체어 탄 장애인에겐 명확한 차별이다. 이와 관련해 인권위원회에 차별 진정했지만 역시나 기각당했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다는 인권위 기각은 기관 존재의 고유성을 잃어가는 것 같아 씁쓸하다. 휠체어 탄 관광객만 계단에 막혀 새섬으로 가질 못하는데 이런 상황이 차별이 아니면 뭐가 차별일까.
발길을 돌려 이중섭 거리로 갔다. 이중섭 거리로 가는 길은 작가의 산책길 구간과 겹친 곳도 있다. 작가의 산책길은 서귀포를 샅샅이 둘러보기 좋은 코스로 연결돼 있다. 이중섭은 한국의 피카소라는 별칭으로 불린 추상적인 그림을 그린 화가다. 이중섭이 서귀포로 오게 되면서 볕 잘 드는 언덕 초가집에서 일 년 정도 살았다. 이후 서귀포는 이중섭 화가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됐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을 거처 서귀포로 온 이중섭은 따듯한 남쪽 나라로 ‘길 떠나는 가족’이라는 명작을 남겼다. 소달구지에 가족을 싣고 길 떠나는 그림 속 장면이 조각으로 만들어져 이중섭 거리의 인생 사진 명소로 사랑받고 있다. 보도블록과 맨홀 뚜껑에도 그의 작품으로 가득해 거리의 품격을 높인다.
이중섭 생가는 당시의 초가집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일 년여간 가족과 함께 살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한 평 남짓한 부엌과 네 식구가 겨우 누울 수 있는 작은 방 하나가 전부지만 전쟁 통에 가족이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던 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은 그림 속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다. 소달구지 위에 여인과 두 아이가 꽃을 뿌리고 비둘기를 날리며 소를 모는 남정네는 감격에 겨워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향하고 있다. 하늘에는 한 가닥 구름이 가족을 지켜보고 있다. 이중섭의 그림은 추상적이지만 그림 속 인물이 행복하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이중섭 생가에서는 서귀포 앞바다가 훤히 보인다. 그림 같은 풍경은 이중섭의 화폭에 담기고 훗날 서귀포가 이중섭 화가의 본거지처럼 여겨질 정도다. 서귀포는 이중섭에게 지상낙원의 의미를 지닌 곳이다.
생가 위에는 이중섭 미술관이 있다. 미술관에는 그의 일생과 작품이 전시돼 있다. 제주는 작가들의 작품이 한층 깊어지게 만드는 마법 같은 곳이다. 화가 이중섭도 그렇고 사진작가 김영갑도 그렇다. 두 사람 다 예술가로서 깊이 있는 작품을 제주에서 남겼다. 이중섭 미술관에는 장애인 화장실이 있어 근심을 덜고 갈 수 있다. 이중섭 거리는 작은 공방과 예쁜 카페도 많다. 트멍 공방은 오래된 곳이지만 이중섭 거리에 터줏대감 노릇을 한다. 공방을 뒤로하고 올레시장으로 갔다.
서귀포 매일 올레 시장은 올레6코스 구간이어서 제주올레 여행자 센터도 시장 끝에 자리하고 있다. 착한가격에 고품질의 물건이 가득하고 제주만의 전통 먹을거리가 여행객을 불러들인다.
올레시장은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배부르고 신난다. 시장 가운데로 의자가 있어 여러 가지 음식을 조금씩 사서 뷔페처럼 펼쳐놓고 먹기 딱 좋다. 요즘 재래시장은 편의시설을 갖춘 곳이 늘고 있다. 장애인 화장실은 물론이고 식당에 문턱을 낮춰 맛깔 나는 시장표 음식을 골라먹을 수 있다. 올레시장에도 정은 통한다. 맛있는 음식이 자꾸 코를 찔러 도저히 참을 수 없다. 먹을 것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 먹거리와 물건을 사면 덤과 함께 정까지 듬뿍 얹어준다. 물건에는 가격이 있지만 정에는 값을 매길 수 없다. 출출한 배를 시장표 간식으로 채우고 ‘칠십리 시’ 공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칠십리 시 공원은 제주올레 6코스 구간 해안 올레길을 연결하는 공원이다. 시 공원을 둘러보면 시와 노래 가사가 새겨진 돌을 볼 수 있다. 그냥 걸어도 좋고 시를 읽으며 여유롭게 산책하면 치유되는 공간이 된다. 보석같이 반짝이는 지금 마음속 깊은 곳에 잠자던 서정이 꿈틀댄다. 칠십리 시 공원에서 지적 사치를 채우고 서복전시관으로 이동했다.
서복전시관은 진시황이 보낸 서복과의 인연을 기념하기 위한 전시관이다. 진시황은 서복을 한라산으로 보내 불로초인 영지버섯과 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을 구해 오라고 했다. 서복은 불로초를 구한 후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 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고 글자를 새겼다. 서귀포는 서복이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지면서 서귀포의 지명이 됐다고 전해진다. 전시물은 당시의 서복이 불로초를 구하러 오가는 여정을 사실적 묘사로 전시한다. 서복 기념관은 야외 전시 공간도 풍경이 끝내준다. 전시관을 나와 정방폭포로 발길을 이어간다.
정방폭포는 전시관 바로 옆에 있다. 절벽 아래로 세차게 쏟아지는 물소리만 들릴 뿐 폭포로 가는 길은 급경사 계단이어서 접근할 수 없다. 다만 주차장 옆에 장애인 화장실이 널찍해 배 속을 비우는 데 걸림이 없다. 여행하다 보면 장벽을 만날 때가 있다. 장벽을 허물어 무장애 여행 영토를 넓히려 하지만 정방폭포처럼 절벽으로 된 천혜의 자연을 접근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는 한계가 있다.
그럴 때마다 갈 수 없는 여행지의 아쉬움보다는 갈 수 있는 주변을 둘러보며 즐긴다. 그렇게 생각하면 휠체어 타고 여행하는 시간도 썩 괜찮다. 다만 여행지 곳곳에 정당한 편의제공으로 장애인 등 관광 취약계층 여행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 전제 조건은 여전히 유효하고 진행형이다. 어딘가에 다다르려면 거처야 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여행도 같다. 목적 지향적이던, 과정 지향적이던 결국 그곳으로 가기 위한 여정은 여행의 다양한 방법일 뿐이다. 섬의 동쪽 끝단에 경이로운 자연 지형을 품은 곳 서귀포 바다에 해가 지면서 황금빛 가루를 흩뿌려져 숨 막히는 풍광이 펼쳐진다.
무장애 여행 팁
#교통약자 #제주도 #제주도여행 #서귀포 #서북전시관 #이중섭 #이중섭미술관 #전동휠체어 #전윤선 #전윤선의무장애여행 #천지연폭포 #장애인 #휠체어 #휠체어여행 #열린관광지 #천지연폭포 #무장애여행 #올레시장 #장애인화장실 #더인디고 #더인디고장애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