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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향교는 고려, 조선시대에 걸쳐 계승된 지방 교육기관으로 이 향교의 창건은 1398년(태조7)으로, 임진왜란때 소실된 것을 1606년(선조39)에 중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성전(大成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기와집으로 중국의 5성위(聖位), 10철(哲), 송조6현(宋朝6賢), 우리나라 2현(賢)을, 동묘와 서묘에 각각 8현씩 16현을 배향하고 있다.
중국15성현
◎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 650경 - 740경) 설총은 신라경덕왕 때 활동하던 유학자로서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의 아들이기도 하다. 강수(强首),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신라의 3대 문장가로 꼽힌다. 처음에는 불교에 입문하였으나 후에는 유학에 전염하여 통일신라 이후에는 귀족의 자제를 중심으로 가르치는 국학을 세워 유교의 발전을 꾀하였다. 유학정신에 입각한 도덕정치의 실현을 추구한 정치가로서, 그리고 유교의 대중화에 기여한 학자로서 신라시대 유교발전에 큰 공헌을 한 설총은 고려 顯宗(현종) 13년 (1022년)에 홍유후의 시호를 받고 문묘에 모셔졌다
◎ 문창후(文昌候) 최치원(崔致遠, 1243 - 1306) 자는 고운(孤雲)이며 경주 최씨의 시조이기도 하다.12세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이름을 떨치기도 한 그는 시대를 대표하는 유교인 가운데 한 삶으로서 인간의 주체적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문장에도 뛰어났는데 당나라에서 황소(黃巢)의 난(亂)이 일어났을 때 이들 반란군에 대한 토벌을 격려하기 위하여 지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은 유명하다. 고려조에 들어와 문창후에 봉해졌으며,현종 11년(1020년)에 문묘에 모셔졌다.『고운집(孤雲集)』『계원필경(桂苑筆耕)』등의 저서가 전해진다.
◎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 1243 - 1306) 고려말에 활동했던 유학자로서 우리나라 최초로 송대의 주자학을 소개 하였다. 그는 주자학 가운데서도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실천도덕과 관련된 내용을 강조하였으며, 공자의 학문은 주자의 학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평가하였다. 선생이 죽은 뒤 고려 충숙왕의 命(명)에 의하여 그의 초상화가 그려졌는데 이 초상화는 현재 紹修書院(소수서원)에 보관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초상화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32년 (1306년)에 문성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처음 소개한 공로로 고려 충숙왕(忠肅王) 6년 (1319년)에 문묘에 모셔졌다.
◎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 1337 - 1392)
◎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 1454 - 1504) 조선 성종, 연산군 때에 활동했던 유학자로서 호는 한훤당(寒喧堂)이다. 김종직의 제자로서 유교의 생활화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戊午士禍(무오사화)때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귀향살이를 하였으며, 1504년 甲子士禍(갑자사화)때 모함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 유교의 입문서라 볼 수 잇는 『小學(소학)』을 중요하게 여긴 그는 평생토록 이 책을 곁에 지니며, 『小學(소학)』에 제시된 생활규범을 하나하나 실천하기를 힘썼다. 선조 7년에 문경공이라는 시호가 내려 졌으며, 1610년 (광해2년)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 문헌공(文獻公) 정여창(鄭汝昌,1459 -1504) 조선 연산군 때에 활동했던 유학자로서 호는 '일두' 이다.젊은 시절 관직에 마음을 두지 않고 유교에 몰두하였으며 41세가 되어서야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무오사화로 인하여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되었으며 갑자사화로 인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꺼내어 처형하는 극형)의 형벌을 당했다. 이같은 불행한 삶을 살았으나 학문적으로는 정몽주,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유교의 정통을 전수받아 성리학의 대가로서 학문의 목적을 성인이 되는 것에 둔 정통파 유학자였다. 선조 8년에 이르러 문헌공의 시호가 내려졌고 광해 2년(1610년)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 1482 - 1519) 조선 중종 때의 유학자이자 진보적인 정치가이기도 했던 선생의 호는 정암(靜庵)이다. 과거에 급제한 후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국가 발전을 위하여 인재의 등용이 필수적이라 보고 현량과를 설치하여 새로운 인재를 발굴 등용하였다. 유교의 지치주의(至治主義)에 기반을 둔 개혁정치를 주장하였으며 당시 부당한 특권을 누리고 있던 훈구대신(勳舊大臣)의 특혜를 깎아내리고 부패한 관리를 제거하는 등의 과감한 개혁조치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보수세력에 부딪혀 끝내 그 뜻을 펴지 못하고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아 죽음을 당하였다. 유교이념에 바탕을 둔 선생의 개혁정치는 반대파의 모함으로 완성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선조 1년에 문정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광해 2년(1610년)에 스승 김굉필과 더불어 문묘에 배향되었다.
◎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 1491 - 1553) 호는 회재(晦齋)로서 조선 중종시기에 활동하던 성리학자였다. 24세에 관직에 나간 이후 국사(國事)를 돌보다가 당시 부당한 권세를 누리고 있던 김안로(金安老)에게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이유로 1531년에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뒤 유교의 학문 발전에만 전념하였다. 유교의 민본사상(民本思想)에 근거하여 도덕정치 구현을 주장하였는데 김안로가 죽은 뒤 이조판서와 지금의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부 판윤(判尹)등을 지냈다. 그 후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귀향생활 속에 비극적으로 생을 마쳤지만 훗날 그 당시 여러 갈래로 나뉘어 발전해 온 성리학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 준 공로로 선조 38년에 문헌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광해군 2년 (1610년)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1501 - 1570) 호는 퇴계(退溪)이며 조선 중종 때에 활동하던 유학자이다. 관직보다는 유교발전에 뜻을 두고 있던 선생은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유교 경전 저술활동과 제자교육에 힘썼다. 한국 유교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고매한 인격자로 알려진 그는 60세 되던 해에 도산서당(陶山書當)을 짓고 후진 양성에 주력하여 유성룡(柳成龍)을 비롯한 수많은 유학자를 배출하였다. 그는 유교의 실생활과 관련된 윤리도덕을 우리나라의 토양에 정착 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공로로 선조 9년에 문순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광해군 2년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 문정공(文正公) 김인후(金麟厚, 1510 - 1560) 호는 하서(河西)이며 성균관에 입학하여 이황 등과 함께 공부하며 당시의 유교학자들과 깊은 교류를 가졌다. 그는 『中庸(중용)』사상을 기본으로 하여 유교의 근본원리를 알리는데 공헌을 하였으며, 인간의 순수한 본연의 모습인 ‘본연지성(本然之性)’을 보존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황 등과 함께 조선에서 주자학의 이념을 확립해 나가는데 많은 공헌을 인정받아 현종 10년에 문정공의 시호를 받게 되었으며, 1796년 (정조 20년)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 1536 - 1584) 조선 명종(明宗)과 선조(宣祖)시기에 걸쳐 활동하였으며 호는 율곡(栗谷)이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이름났으며 과거에 9번 장원급제한, 조선왕조 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어머니 신사임당 申(신)씨가 돌아가시자 더욱 학문에 몰두하여 조선 유교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이상과 현실을 잘 조화하여 시행해야 한다는 주장 아래 왜란에 대비한 10만 양병설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황과 더불어 조선시대 쌍벽을 이루는 유학자인 그에게는 인조 2년에 문성공 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이어 숙종 8년(1694년)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 1535 - 1598) 조선 선조 때의 성리학자로 호가 우계(牛溪)이다. 당시의 저명한 유교학자들과 교류하며 유교적 지식을 쌓았고 불혹의 나이인 40세에 이르러서야 관직에 나아가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을 모시고 피난을 갔었는데 난이 평정된 뒤 일본과 화의할 것을 조정에 건의하였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특히 유학자로서 도덕적 행위와 그 근거인 “인심도심(人心道心)”을 놓고 벌인 이이와의 토론은 조선조 유학사상 손꼽을만한 중요한 업적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인조 11년에 문간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숙종 7년(1681년)에는 문묘에 배향되었다.
◎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 1584 - 1631) 호는 사계(沙溪)로서 율곡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바 있으며 유교발전을 위하여 큰 공헌을 하였다. 특히 禮學(예학)에 조예가 깊어 국가적 의전이나 주요행사가 있으면 그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그는 당시 어지러운 난세를 극복하고 유교적 질서를 회복하기 위하여 『가례(家禮)』를 부분적으로 고치고 널리 보급하는 일에도 공헌을 하였다. 이같은 노력으로 그의 禮論(예론)은 우리나라에서 행해지는 모든 의례의 규범이 되었고, 이같은 공로로 효종으로부터 문원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숙종 43년 (1717년)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 문열공(文烈公) 조헌(趙憲, 1544 - 1592) 조선 선조때의 유학자이자 의병장인 조헌의 호는 중봉(重峰)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그를 따르는 1,6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왜적에 맞서 싸웠다. 그는 의병활동을 통하여 국가를 위해서는 초개같은 몸을 버린다는 유교의 의리정신을 실천하였고,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금산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7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최후를 마쳤다. 이러한 애국애민(愛國愛民) 정신을 기려 인조 27년에 문열공의 시호를 받았으며, 고종 20년(1883년)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 1574 - 1656) 호는 신독재(愼獨齋)이고 유교 예학(禮學)의 선구자로 알려진 김장생의 아들이기도 하다. 호 신독재(愼獨齋)는 『대학』의 “군자는 반드시 홀로 있을 때를 삼가하여 조심한다(君子必愼其獨世)” 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으로 이는 개인의 내면적 도덕 정신을 한 순간이라도 잊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유교적 예를 실천할 것을 주장하였다. 부친과 함께 한국 유교의 독창성을 빛내준 예학의 기본적 틀을 갖추어 놓았기 때문에 효종 10년에 문경공의 시호를 받았으며 고종 20년(1883년)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 1607 - 1689) 호는 우암(尤庵)이고 조선 인조(仁祖), 효종(孝宗)년간에 활동하던 유학자이다. 병자호란 후 효종을 도와 청나라와의 화의를 거절하고 북벌을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화의파들에 의해 고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파란만장한 정치가로서뿐만 아니라 율곡 이이의 학설을 이어받은 유학자로서의 삶을 살았으며 전란 속에서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숙종 21년에 문정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정조 32년(1756년)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 1606 - 1672) 호는 동춘당(同春當)이며 조선조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과 김집에게 성리학과 예학을 전수받았다. 송시열과 함께 효종을 도와 북벌을 시도하다가 좌절되자 물러나 낙향하는 절개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예학에 정통하였던 그는 유교의 생활예절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문장에도 뛰어나 『충렬사비문』을 비롯하여 명륜당의 현판의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숙종 7년에 이르러 문정공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영조 32년(1756년)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 1631 - 1695) 조선 숙종(肅宗)때의 유학자로 호는 남계(南溪)이며 송시열 등과 교류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그릇됨을 지적하고 당쟁의 중재에 진력하였으며, 당쟁의 근절을 위하여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신라에서 시작하여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여러 유교학자들의 사제(師弟)관계와 교류상황등을 기록한『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을 저술하여 학술적으로 공헌을 하기도 하였다. 숙종24년 문순공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이어 영조 40년(1764년)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천안향교
천안의 향교는 대부분 가족과 함께 산이나 하천, 문화유산들도 더불어 즐기며 들를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고 아울러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자녀들에게 간단한 설명을 곁들여 주며 돌아볼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손색이 없을 듯 해서다. 향교는 잘 알려져 있듯 옛날의 관립 교육기관이다. 천안향교에 들어서면 입구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하마비’.
동재는 양반자제들이 숙식하며 독서하던 곳이고 서재는 서류(庶流)라 하여 양반 이하의 자제들이 묵던 곳이라 한다.
명륜당에서는 지금도 가끔 유생들이 모여 강론을 하기도 하고, 소풍 나온 학생들의 강의실로 사용되기도 한다. 명륜당의 상량문(上樑文)에는 1656년(효종 7년)에 상량(기둥에 보를 얹고 위에 마룻대를 올림)했다는 기록이 있어 다시 지은 연대를 알 수 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고쳐지어 졌다 한다. 간단히 내부를 돌아보고 뒤에 있는 중삼문(中三門)옆 출입문을 지나 대성전(大成殿)앞에 이르렀다.
대성전에는 제일 가운데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공자를 비롯해 안자, 증자, 자사, 맹자의 오성(五聖)이 자리잡고 있다. 그 좌·우측으로는 민손, 재여, 중유 등의 공문십철(孔門十哲·공자 문하 열 명의 철인)과 주돈이, 소옹, 주희를 포함한 송조육현(宋朝六賢·송나라시대 여섯 현자), 설총과 최치원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공자를 가운데 두고 좌우로 가지런히 정돈돼 있는 22개의 위패들이 자못 엄격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대성전 뒤로는 천안의 유림들이 3년 전에 심은 잔디와 은행나무들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윤동노 전교는 “수도시설도 하고 잘 정비해서 유치원 학생들이 소풍도 오고 쉬다 갈 수 있게 할 예정”이라며 “4월1일부터 10월말까지는 유림회관에서 한 명씩 당직 근무를 나와 찾아온 이들에게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해설도 해 줄 예정이니 부담 없이 찾아와 향교의 향기를 느껴 볼 것”을 당부했다.
문의 : 천안향교·천안유림회관 ☎ 041-573-8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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